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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세자빈을 대신합니다
밤마다 세자빈을 대신합니다
Author: 유월

프롤로그. 세자 저하의 얼굴을 보지 마십시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6 10:20:57

“딱 일곱 밤입니다.”

채연우는 제 앞에 놓인 돈주머니를 바라보았다.

낡은 탁자 위에 놓인 비단 주머니는 이 초라한 방과 어울리지 않았다. 매듭부터 달랐다. 짙은 남색 비단 위로 금실이 촘촘하게 얽혀 있었고, 매듭 끝에는 작은 옥구슬까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연우의 시선을 붙든 것은 비단도 옥도 아니었다.

돈이었다.

주머니 입구가 조금 벌어지면서 안에 든 금빛이 보였다.

“……이걸 전부 주신다고요?”

“절반입니다.”

연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조금 전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사십을 넘겼을까.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고, 평범한 옷을 입었지만 말투와 자세에서는 숨길 수 없는 궁인의 기품이 묻어났다.

“나머지 절반은 일이 끝난 뒤 드립니다.”

연우는 다시 돈주머니를 내려다봤다.

저 돈이면 밀린 약값을 갚을 수 있었다.

전당포에 넘어간 아버지의 자수틀도 되찾을 수 있고, 겨울이 오기 전에 지붕도 고칠 수 있었다. 운이 좋다면 남동생 연준을 다시 서당에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이유 없는 돈은 없었다.

특히 이렇게 큰돈에는 반드시 그만큼 큰 대가가 붙었다.

연우가 돈주머니에서 손을 떼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면 못 합니다.”

여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런 일은 아닙니다.”

“훔치는 것도요.”

“아닙니다.”

“그럼 뭘 하면 됩니까?”

잠깐의 침묵.

여인이 말했다.

“사람 하나를 대신해 주시면 됩니다.”

“누구를요?”

“세자빈 마마를.”

연우의 손이 멈췄다.

밖에서 장사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골목을 뛰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낮이었다.

그런데 이 좁은 방 안에서만 시간이 멎은 것 같았다.

연우가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세자빈 마마를 제가 어떻게 대신합니까?”

“낮에는 하실 일이 없습니다.”

여인은 담담했다.

“해가 진 뒤 궁으로 들어가 세자빈 마마의 옷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동궁전에서 밤을 보내시면 됩니다. 동이 트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실 겁니다.”

연우는 웃지 못했다.

농담이라고 하기에는 여인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그게…… 전부입니까?”

“전부입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제가 세자빈 마마와 닮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대신하죠?”

“얼굴은 가릴 겁니다.”

연우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요?”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연우는 확신했다.

이 일에는 무언가 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무언가가.

연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여인이 말했다.

“동생분의 약값이 석 달 밀렸더군요.”

움직임이 멎었다.

“……제 뒷조사를 하셨습니까?”

“필요했습니다.”

“그렇다고 제 가족까지—”

“동생분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말을 제가 어떻게 믿죠?”

처음으로 여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믿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녀는 돈주머니를 연우 쪽으로 밀었다.

“하지만 채 낭자께는 이 돈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비겁한 말이었다.

그리고 정확했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왜 저입니까?”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여인은 연우의 손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연우의 손가락 사이에 박힌 작은 바늘 자국들을.

“바느질을 잘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바느질 잘하는 여자는 도성에 수백 명입니다.”

“사람의 옷을 한 번 보면 치수까지 짐작한다고요.”

“그것도 저뿐만은 아닐 겁니다.”

여인의 시선이 더 내려갔다.

연우의 허리춤.

그곳에는 작은 바늘집이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낡은 은바늘이 들어 있는 물건이었다.

여인의 얼굴이 아주 잠깐 굳었다.

연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연우가 바늘집을 손으로 가렸다.

“이것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연우는 사람의 표정보다 손을 보는 버릇이 있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입술보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 여인의 오른손 엄지가 검지 끝을 꾹 누르고 있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세자빈 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그건 아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대신해야 하는데요.”

“그래서 더 모르셔야 합니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해가 지면 사람이 데리러 올 겁니다.”

“제가 한다고 하지 않았는데요.”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인은 문을 열기 전 돌아봤다.

“다만 이 일은 오늘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채 낭자께도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일 겁니다.”

문이 닫혔다.

연우는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돈주머니를 열었다.

금전이 쏟아졌다.

손끝이 떨렸다.

그때 안쪽 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누나…….”

연우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해가 질 무렵.

연우는 궁으로 향하는 가마에 올라탔다.

궁에 도착하고서야 연우는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을 받아들였는지 깨달았다.

눈을 가린 채 들어왔기 때문에 길은 알 수 없었다.

몇 번이나 문을 통과했는지도 몰랐다.

다만 가마가 멈춘 뒤 눈가리개를 풀었을 때, 연우 앞에는 붉은 기둥과 높은 담장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으로 데려갔다.

“옷을 벗으십시오.”

“……예?”

“시간이 없습니다.”

연우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목욕을 하고 머리를 빗고 얼굴에 분을 발랐다.

마지막으로 붉은 옷이 들어왔다.

연우의 숨이 멎었다.

세자빈의 예복이었다.

붉은 비단 위로 금실 봉황이 수놓아져 있었다. 살아 움직일 듯 정교했다.

그 옷을 입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남의 인생을 훔쳐 입는 것 같았다.

궁인이 허리의 띠를 조였다.

연우가 숨을 들이마셨다.

“조금…… 꽉 조이는 것 같습니다.”

“마마의 치수에 맞춘 옷입니다.”

“저는 마마가 아닙니다.”

순간 방 안이 조용해졌다.

궁인이 연우를 바라봤다.

“오늘 밤만큼은 그 말씀을 잊으셔야 합니다.”

그녀가 붉은 면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연우의 얼굴을 가렸다.

세상이 붉어졌다.

“지금부터 네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궁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첫째. 절대로 세자 저하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연우가 눈을 깜빡였다.

“왜요?”

“묻지 마십시오.”

“…….”

“둘째. 저하께 진짜 이름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저하께서 물으시면요?”

“대답하지 마십시오.”

연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세자 저하께서 물으시는데 제가 대답을 안 해도 된다고요?”

“그것이 사는 방법입니다.”

웃음이 사라졌다.

궁인은 계속했다.

“셋째. 자정이 지나면 저하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또 왜…….”

“마지막.”

이번에는 궁인이 연우의 두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저하께서 잠드시더라도 절대로 함께 잠들지 마십시오.”

연우의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잠들면 어떻게 됩니까?”

궁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연우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깨어 계십시오.”

연우가 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제야 궁인이 손을 놓았다.

다른 궁인들이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연우는 무심코 치맛자락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이었다.

금실 사이에 이상한 실밥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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