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ICIAR SESIÓN하세욱에게 시집갈 바엔, 차라리 서왕의 측비로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물론 그저 속으로 저울질을 해본 것일 뿐, 그녀는 당장 누구와도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뭐가 그리 급한가."태자비가 강유영의 팔을 붙잡고는 미소 지으며 해명했다."언짢게 생각하지 말게. 오늘 마침 외출했다가 동생과 마주쳐 우연히 자리를 마련한 것뿐이니. 만약 그대와 내 동생의 마음이 맞는다면, 당연히 정식으로 매파를 보내 예법대로 격식을 갖출 것이네. 결코 자네의 체면을 깎아내릴 의도는 없었어.""마마의 호의는 깊이 새기겠사옵니다. 허나 소녀는 일개 양녀에 불과하여 하 공자와는 신분이 맞지 않습니다……."강유영은 완곡하게 거절의 뜻을 비쳤다.하지만 하세욱은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인지 대뜸 그녀의 말을 잘랐다."소저의 출신이 미천한 것은 사실이나, 난 옹졸하게 그런 걸 따지는 사람이 아니오. 우리 가문으로 시집오기만 한다면 소저의 신분도 자연스레 귀해질 텐데 무슨 걱정이오."강유영은 기가 차서 대꾸할 말조차 잃고 태자비만 바라보았다.하세욱이란 자는 참으로 무능하면서도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보아하니 강 소저가 내 동생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눈치로군."태자비는 가볍게 웃으며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아우야, 넌 그만 돌아가 보거라.""참 나, 이게 무슨 상황이람. 진짜 출신도 모르는 것이 분수도 모르고 감히 나를 걷어차? 내가 눈길 한 번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년이, 재수 없게……."하세욱은 단박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욕설을 내뱉고는 옷소매를 떨치며 방을 나갔다.강유영은 그의 천박한 폭언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저급한 사내와는 실랑이를 벌일 가치조차 없었다.그녀는 태자비의 손에 이끌려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태자비는 그녀를 순순히 보내줄 기색이 아니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걸까?"이 요리들은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일품요리라네."태자비가 웃으며 강유영을 살폈다."어찌 젓가락을 들지 않는가.""소녀는 배가
"이쪽은 내 사촌 동생인 하세욱이네."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소개했다."아우야, 이쪽이 바로 진국공부의 양녀란다."하세욱은 강유영을 살피더니, 제법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강 소저, 말씀은 많이 들었소."그는 먼저 강유영에게 다가와 알은체를 했다.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향냄새가 너무 진했다.몸에서 풍기는 향이 어찌나 독한지,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냄새에 취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이목구비는 꽤나 반듯하여 모난 데는 없었으나, 수려하다고 보기는 어려웠다.예전에 서유가 한가할 때 태자비의 사촌동생에 대해 일러준 적이 있었다.그는 외출할 때면 늘 진한 향을 피우고 요란하게 치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태자를 뒷배 삼아 태복시에 은자를 주고 작은 벼슬자리를 꿰찼다고 한다. 동료 관리들은 뒤에서 그를 공작새라 부르며 조롱했다.사촌 누이가 태자비라고 그 위세를 믿고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는 자였다. 나이가 제법 찼음에도, 눈높이에 맞는 규수를 찾지 못해 스물다섯이 되도록 혼인도 하지 못했다.강유영은 입술을 꾹 깨문 채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태자비가 불쑥 하세욱을 부른 것은 선을 보게 할 작정인 듯했다. 강유영이 하세욱에게 시집가겠다고 고개만 끄덕이면, 서왕의 측비 자리에 들어갈 일은 영영 사라진다. 태자비의 목적이 바로 그런 것일까?하지만 혼사를 논하려면 으레 매파를 먼저 보내 집안 어른들끼리 상의를 거치는 게 순서였다.명문가 출신인 태자비가 이런 예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다짜고짜 하세욱을 불러들여 안면부터 트게 만들었다.이는 태자비가 속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있으며, 제멋대로 주물러도 되는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었다."자, 앉아서 얘기 나누자고."태자비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강유영에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앞에 놓인 음식을 젓가락으로 뒤적이며, 이 자리에서 빠져나갈 구실만 생각했다.하
태자비는 그제야 흡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동궁의 마차는 경성에서 가장 큰 비단 점포 앞에 멈춰 섰다."내려서 쓸 만한 옷감이 들어왔는지 한번 보자고."태자비가 마차에서 내리며 강유영을 불렀다.강유영도 서유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린 뒤, 태자비의 뒤를 따라 점포 안으로 들어섰다."이리 와보게, 이 옷감은 어떤가?"태자비는 다정하게 강유영의 손을 잡고는 비단 하나를 가리켰다."소주에서 올라온 비단인데, 소저에게 아주 잘 어울리겠어.""색상이 너무 화사하옵니다."강유영은 고개를 저었다.당장이라도 손을 빼고 싶었다. 태자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온몸에 거부감이 일었다.하지만 대놓고 뿌리칠 수도 없으니 꾹 참았다."젊은 처자는 응당 화사하게 입어야지. 이 색이 그대의 얼굴을 잘 살려주는군. 저기 금실로 짠 옷감도 저고리로 만들면 무척 고울 것이야."태자비가 비단을 집어 들고 강유영의 몸에 대보았다.강유영은 그 틈을 타 슬그머니 손을 뺐다."이걸로 하지. 주인장, 포장해 주게."태자비가 짤막하게 지시했다.곁에서 대기하던 점포 주인은 지체 없이 달려와 비단을 건네받았다.강유영은 사양하려다 입을 다물었다.굳이 사준다고 한 것도 아닌데 섣불리 나섰다간 오히려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저 앞에 장신구 점포가 있는데, 새로 들어온 물건이 많다 하더군. 가보지."태자비는 다시 강유영의 손을 덥석 잡고 점포를 나섰다.반나절 내내, 강유영은 태자비에게 이끌려 여러 거리를 돌아다녔다.태어나서 이토록 많은 점포를 쉬지 않고 돌아본 것은 처음이었다.태자비는 계속해서 그녀의 손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마마, 날이 많이 저물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녁을 준비해 두셨을 터이니, 마마께서도 국공부로 함께 가시어……."강유영은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넌지시 운을 띄웠다.사실 그녀의 시선은 노을이 아닌 저편의 사내들을 향해 있었다.평상복 차림의 사내들은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살피면 체구가 건장하고 몸놀림이 날랬다.게다가
태자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강유영의 의중을 묻고 있었으나,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소녀는... 출신이 미천하고 언변도 없어 마마를 제대로 모시지 못할까 우려됩니다.....”강유영은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더듬으며 완곡하게 거절했다.문득 조원철이 떠나기 전 남긴 말이 떠올랐다.그는 경성 외곽의 군영에서 살인 사건이 났는데 누군가 사건을 덮으려 한 정황이 발견되었다고 했다.태자비가 찾아온 것이 조원철이 조사하려는 일과 관련이 있는 걸까?하지만 그렇다기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그녀와 조원철의 관계는 두 사람만이 알고 있고, 어렴풋이 눈치챈 사람은 서왕 정도가 있었다.이치대로라면 태자와 태자비는 이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러니 그녀를 인질 삼아 조원철을 협박할 이유는 없었다.지금 태자비의 행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상관없네. 소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친근함이 느껴져서 그러는 것이니. 이 또한 인연이지.”태자비가 웃으며 그녀를 이끌었다.“마차는 이미 준비해 두었네.”“아버지....”강유영은 고개를 돌려 진국공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마마께서 네가 마음에 드신다고 하니 어서 다녀오거라.”진국공은 손을 휘휘 저으며 덧붙였다.“장방에 가서 은자를 넉넉히 챙겨 가거라.”그는 속으로 불만을 터뜨렸다.‘겁만 많고 어리석은 것!’은자를 들려 보내도 태자비가 물건을 고를 때 선뜻 나서서 계산을 치르지도 못할 것 같았다.물론 그도 태자비가 불쑥 찾아온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아마도 서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어쩌면 강유영과 서왕의 혼사를 방해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어찌 되었든 태자비가 이미 명을 내렸으니, 대놓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지금으로서는 그저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조원철이 저택을 비운 것이 못내 아쉬웠다.아들이 있었다면 의논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것이다.“예, 아버지.”강유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자비를 따라 대청을 나섰다.앞서 걷는 태자비의 뒷모습을 볼수록 의구심만 깊어졌
태자비는 온화한 얼굴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조금의 오만함도 없이 그저 평범한 명문가 규수처럼 친근한 모습이었다."강 소저는 과연 듣던 대로 청아하고 뛰어난 미모를 가졌군. 서왕의 눈에 든 것도 무리가 아니야.""마마, 과찬이십니다. 소녀는 그저 보잘것없는 여식일 뿐, 그런 과분한 칭찬은 당치 않사옵니다."강유영은 시선을 내리깔고 황송한 기색을 지어 보였다. 태자비를 뵙게 되어 어쩔 줄 모르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린 처자처럼 행동했다.그녀 같은 일개 양녀가 지체 높은 태자비를 마주했을 땐 당연히 이런 반응을 보여야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태자비는 그녀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 불쑥 찾아와 꼭 집어 그녀에게 과분한 칭찬을 늘어놓을 이유가 없었다.태자비는 겉보기와 다르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분명했다.게다가 방금 서왕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설마 서왕이 태자비를 앞세워 그녀를 측비로 들이려는 속셈일까?아니 그럴 리 없었다.태자와 서왕은 일찍이 사활을 걸고 암투를 벌이는 앙숙이었다. 태자가 태자비를 앞세워 서왕의 혼사를 도와줄 리 만무했다."강 소저, 그리 긴장할 것 없네."태자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유영의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긴장한 것은... 아... 아닙니다...."강유영은 빳빳하게 굳은 채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입으로는 아니라 하면서도 온몸으로 긴장감을 전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국공이 답답한 듯 참견했다."유영아, 태자비 마마께서는 늘 아랫사람을 자애롭게 대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겁먹지 말고 마마의 말씀에 차분히 대답하거라."그는 최근 한씨에게서 강유영이 꽤나 영악하게 변해서 자신을 옭아매려 한다는 불평을 몇 번 들은 적 있었다.하지만 태자비 앞에서 이토록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예전의 겁 많고 주눅 들어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영악해지기는커녕 여전히 무능하고 겁쟁이였다."예, 아버지."강유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입술
조원철은 다정한 어투로 그녀에게 당부했다."알겠습니다."강유영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누가 기다린다고.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차라리 돌아와서 그녀의 처소에 걸음하지 않기를 바랐다.물론 이런 말은 속으로만 삭일 뿐,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조원철이 떠난 후, 강유영은 요월원 정원에 앉아 오후 시간을 보냈다.그녀는 반나절 내내 손목의 벽옥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퉁퉁 부은 진 부인의 눈과 그녀가 한 말들을 곱씹었다."아씨, 진지 드십시오."단비가 찬합을 들고 오며 그녀를 불렀다."그래."강유영은 짧게 대답하고는 방으로 향했다.그때 누군가 와서 처소의 대문을 두드렸다."누구십니까."서유가 강유영의 눈치를 살피며 바깥을 향해 물었다."국공 어르신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렸다.강유영은 걸음을 멈추고 서유에게 문을 열라 눈짓했다."무슨 일이지?"서유가 문을 열며 물었다."국공 나으리께서 대청에 계십니다. 유영 아씨를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국공 나으리께서?"서유는 당황하며 강유영을 돌아보았다."아버지께서 갑자기 날 왜 찾으신다더냐. 대청에 다른 분도 계시느냐."강유영 역시 의아해하며 물었다.진국공의 눈에 그녀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청으로 부르다니, 필시 어떤 손님을 만나는 자리일 것이다.'설마 서왕이 또?'"소인은 잘 모릅니다."시녀가 고개를 저었다."가보아야겠다."강유영이 말했다."너희 먼저 밥을 먹거라.""소인도 같이 가겠습니다."서유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를 뒤따랐다."아버지."강유영은 대청에 들어서며 진국공에게 인사를 올렸다.상석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난초가 수놓인 옥색 비단치마에 꽃무늬가 은은한 흰색 덧옷을 걸친 차림이었다. 풍성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는 순금 비녀가 꽂혀 있었고, 온화한 이목구비에서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동궁의 태자비였다.예전 궁중 연회에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네 오라비는?”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