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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or: 눈빛 속의 약속
“유영아? 얘네가 다 어디로 갔지?”

한씨가 병풍 쪽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오지 마세요. 제가 부주의로 우유차를 옷에 쏟아서 닦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강유영은 아무 핑계나 둘러댔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

한씨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네 오라비는?”

강유영은 고개를 돌리고 애원에 찬 눈길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당황하고 조급한 나머지 맑은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조원철은 그날 밤 그만하자고 애원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긴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겨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큰손으로 아프다던 그녀의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오라버니께선… 조회에 나가셨습니다.”

강유영은 그가 시킨 대로 대답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움츠린 목은 수치심에 빨갛게 물들었다.

‘너무 가까워….’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닿을 듯 말 듯 , 뜨거운 숨결이 스쳤다. 긴장한 탓인지, 머릿속은 텅 비어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몸은 이미 반쯤 마비된 상태였다.

“녀석, 간다고 말은 하고 가지.”

한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이어 말했다.

“네 오라비 혼사가 잘 마무리되면 다음 차례는 너인데, 혹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느냐?”

강유영은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애원에 찬 눈으로 조원철을 바라보았다.

아랫배를 어루만지던 손길은 멈추었지만 조원철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강유영은 조급한 마음에 뭐라도 대답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움찔거렸다. 한씨가 대답이 늦어 갑갑하다며 병풍 뒤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이때, 피식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런, 수줍음 많은 아이에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평소 외출도 거의 안 하는 너인데, 마음에 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혼사는 나와 네 아버지가 알아서 하마.”

어차피 한씨도 지나가는 소리로 물어봤을 뿐이다. 강유영의 혼처는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진국공부가 그동안 공짜로 길러줬으니 이제는 그 쓸모를 할 때가 온 것이다.

강유영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대답하려던 찰나, 귓가에 조원철의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기저기 챙기실 일도 많으시니, 우선 바쁜 일부터 보세요, 어머니. 제 일은 급하지 않으니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강유영은 이미 머리가 혼미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을 뿐이었다.

“그러자꾸나.”

한씨는 고분고분한 그녀의 태도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이따가 나랑 창고에 가보자꾸나. 마음에 드는 가구가 있으면 사람을 시켜 부용원으로 옮겨주마.”

장남의 혼례가 잘 끝나면 강유영을 시집보낼 것이다. 몇 달 머물 날이 없을 테니, 굳이 인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로 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이유도 없었다.

“어머니, 부용원으로 옮길 필요는….”

강유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손이 뻗어 나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감송향이 은은하게 촉촉한 입술에 닿았다. 입술에 맞닿은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강유영은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손을 밀쳐내려 바둥거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말캉한 촉감에 조원철도 흠칫하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네 오라비 성격 잘 알지 않니. 네가 안 옮긴다고 하면 내가 널 박대하는 줄 알아. 게다가 앞으로 부용원에서 시집을 가면 시댁에서도 널 만만히 보지 않을 게야.”

한씨는 한번 결정한 일을 번복하는 경우가 없었다.

“수락하거라.”

조원철은 강유영을 바짝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강유영은 한씨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기 전에 얼른 이곳을 뜨고 싶은 생각뿐이라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뜻에 따를게요.”

그녀는 재빨리 대답하고는 자신의 아랫배를 살짝 누르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따스한 열기가 옷감 사이로 전해져서 욱신거리던 통증이 조금은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따스함이 아니었기에 굳이 의미를 둘 마음은 없었다. 허리춤을 잡고 있던 손이 스르륵 물러나자, 서늘함이 몸을 감쌌다.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허전한 감정을 재빨리 수습하고 치맛자락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후에야 애써 태연한 척, 병풍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이제 창고로 가자꾸나.”

한씨가 그녀를 불렀다.

강유영은 조용히 한씨를 따라 방을 나섰다.

강유영의 짐은 많지 않았다.

한씨는 시녀 몇 명을 보내 당일로 강유영의 거처를 부용원으로 옮겼다. 덤으로 복장점에서 기성품 의복 몇 벌을 사 오게 하고 패물도 몇 가지 골라 보내주었다.

강유영은 외출하기 불편하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았기에 단비를 시켜 약방에 보내 오늘은 쉬고 내일 일하러 나간다고 전하도록 했다.

어제 잠을 너무 많이 잔 탓인지, 오늘은 쉽사리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조원철이 내일 맞선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그녀는 조원철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이며, 그날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결국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른 아침,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누군가가 밀쳐서 깨웠다.

“아씨, 일어나세요.”

강유영은 몽롱한 눈을 뜨고 단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니?”

단비가 침상 옆으로 다가오더니 작은 소리로 아뢰었다.

“세자의 측근인 청운님이 오셨어요. 밖에서 아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사람이 무슨 일이지?”

강유영은 조원철 얘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들어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청운은 조원철의 심복으로 평소 그의 곁을 떠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늘은 왕 태사의 셋째 따님과 맞선을 볼 사람이 왜 청운을 이리로 보낸 걸까?

“그건 말씀을 안 해주셨어요.”

단비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소인이 옷단장을 도와드릴까요?”

강유영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청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뛰어난 무장인 청운은 성격도 좋은 편이었다. 매번 그녀를 보면 공손하게 인사했고 무례하거나 까다롭게 굴지도 않았다.

단지 더 이상 조원철과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무시하면 또 무슨 일을 할지 모르기에 불안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조원철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정직하고 올곧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침상을 내려 단비가 옷을 입혀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돌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강유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햇살을 만끽했다. 확실히 부용원은 소은원보다 정원도 넓고 화려했다.

“아씨.”

밖에서 기다리던 청운이 그녀를 보고 예를 행했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강유영은 처마 밑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세자께서 아씨께 탕약을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청운이 손짓하자 뒤에 있던 시녀가 탕약 그릇이 담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릇 안에는 적갈색의 탕약이 들어 있었다.

“여기 놓아두거라.”

강유영은 거절하려다가 조원철의 싸늘한 얼굴을 상상하고는 말을 돌렸다.

겉으로 보이는 올곧고 정직한 인상은 거짓이다. 만약 그의 말을 거역한다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맞선을 본다면서 왜 굳이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것인지, 강유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자께선 아씨께서 마시는 모습을 꼭 확인하고 돌아오라 하셨습니다.”

청운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강유영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그에게는 충분히 선을 그었고 그 역시 곧 약혼녀가 생길 것이다.

다 정리된 일인데 왜 청운을 시켜 탕약을 보내온 걸까?

“만약 아씨께서 안 드신다면, 이따가 직접 약을 들고 찾아오신다고도 하셨습니다. 유영 아씨, 소인을 봐서라도….”

청운이 애원하듯 말끝을 흐렸다.

강유영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그릇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쓴 탕약이 혀끝에 닿았다. 맛으로 대충 어떤 약재가 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인삼, 백술, 부령 등 기혈 보충에 좋은 보약이었다.

그녀는 쓴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릇을 내려놓았다.

“세자께서 이것도 같이 보내셨습니다.”

청운이 앞으로 다가와 손바닥 크기의 사탕 상자를 강유영에게 건넸다.

“그럼 소인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강유영은 사탕 상자를 단비에게 건네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약방으로 가겠다.”

“아씨, 밤새 잠을 잘 못 주무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단비는 별로 좋지 않은 그녀의 안색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하루 더 쉬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 없어. 넌 남아서 어멈을 잘 보살피거라.”

말을 마친 강유영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약방에 나가지 않으면 당장 다음 달 어멈의 치료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장 의원 혼자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약방에 도착하니 약상자를 메고 외출 준비를 하는 장 의원이 보였다.

“유영이 왔니? 마침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꾸나.”

백발의 노인은 강유영을 보자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장 의원은 경성에서도 의술로 손꼽히는 분이었다. 태의원의 초대도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거절했다고 한다.

강유영은 약상자를 받아들고 장 의원의 뒤를 따라갔다. 오늘의 환자는 화려한 화방(畫舫: 고대의 유람선)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불편한 증상을 호소했다고 했다.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장 의원을 맞아주었다.

강유영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곳은 처음이었다. 과연 듣던 대로 호화롭고 부티가 났다.

“이렇게 와줘서 감사하네, 장 의원.”

한씨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강유영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보니, 상석에 앉아 장 의원에게 인사를 건네는 한씨가 보였다.

강유영은 당장 자리를 뜨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유영이? 네가 여긴 어쩐 일이니?”

그녀를 먼저 발견한 한씨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물었다.

“저… 우연히 약방을 지나가다가 어머니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되어 따라왔습니다.”

강유영은 다급한 마음에 대충 둘러댔다.

그 와중에 병풍 뒤에 가려져 안 보이던 조원철의 준수하면서도 근엄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공이 요동치고 가슴이 멎을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는 한씨가 이곳에서 조원철과 함께 왕 태사의 셋째 딸과 맞선을 보는 중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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Último capítulo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7화

    "그것이 네가 말하는 해결책이냐."조원철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방우겸을 응시했다."주 대감 댁 혼사를 허락해 주면 화재민들의 집도 고쳐줄 것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잦아들 것입니다. 흉흉한 소문도 저절로 가라앉을 터이니, 이보다 완벽한 해결책이 어디 있겠습니까."방우겸은 조원철이 웃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앞에서는 원칙을 운운하며 깐깐하게 굴었지만, 결국 이 자도 관원들 사회가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아는 듯했다.오랜 세월 관직에 몸담은 자가 홀로 고고한 척 유난을 떨 리 없었다. 강직하다는 소문은 그저 그럴싸한 허울에 불과한 것이다."이건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란 소리 아니냐."강유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그건 지나친 비약입니다. 어찌 사리사욕을 채운다 하십니까."방우겸은 여유롭게 고개를 저었다."조 대인께서는 대의를 위해 병주 백성들을 굽어살피려는 것입니다. 민심을 수습하는 일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조원철이 타협했다고 굳게 믿은 방우겸은 한결 편안해진 태도로 평소 즐겨 쓰던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주 대감이 사유 재산을 털어 백성들의 집을 고쳐주겠다고 했다는 뜻이냐?"조원철은 시선을 돌려 주유재를 바라보았다.방우겸 역시 주유재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그렇습니다."주유재의 입가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제 손으로 불태운 집을 제 돈으로 다시 짓게 생겼으니 생돈을 날리는 격이었다.하지만 방우겸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방우겸은 앞으로 몇 년은 더 병주 지부 자리에 앉아 있을 자였다.일단 장단을 맞춰준 후에, 손해본 돈은 훗날 백성들을 쥐어짜 메우면 될 일이었다."이번 화재는 주 대감과 연관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거금을 내놓으려는 것이냐."조원철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주유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스스로 거금을 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켕기는 구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격이었다."대인께서 아직 이 지역 사정을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 대감은 평소 어려운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6화

    조원철은 그의 말을 다시 자르며 인상을 썼다.차가운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다."아닙니다, 잘못된 일이지요. 어찌 되었든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방우겸은 재빨리 태도를 바꿨다."대인께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병주의 영혼 혼례를 막으러 오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소관 역시 평소 이 악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습니다. 이런 미신은 진작에 뿌리 뽑았어야 마땅합니다."그는 뚜렷한 소신이 없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처럼, 힘 있는 자의 편에 설 뿐이었다.강유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입장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방우겸의 솜씨는 과연 미꾸라지 같다는 소문에 걸맞았다."그래서, 이 일은 어찌 해결할 생각이냐."조원철이 방우겸에게 물었다.방우겸은 눈동자를 굴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대인, 지금 밖에서는 두 분이 영혼 혼례를 막은 탓에 불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는 대인께 불리한 상황입니다. 물론 소관은 이번 화재가 그저 사고일 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뜬소문에 쉽게 휩쓸립니다. 이들을 억지로 누르려 했다가는 자칫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리되면 애먼 자들이 다칠 텐데, 백성을 헤아리시는 대인께서 어찌 그런 참상을 원하시겠습니까."조원철은 아무 말 없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소관에게 한 가지 방도가 있는데, 대인의 뜻은 어떠신지요."방우겸은 잠시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그는 조원철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영혼 혼례를 강제로 막으려다 민란이라도 일어난다면 조원철 역시 경성으로 돌아가 문책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 계산했다."말해보아라."조원철이 담담하게 물었다.방우겸은 조원철에게 몇 걸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불이 난 것은 하늘의 뜻이나, 집을 잃은 백성들은 가엾습니다. 하여 관아에서 돈을 조금 내어 백성들의 집을 다시 지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관아에서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냐."조원철이 되물었다."관아의 힘만으로는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5화

    주유재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방우겸을 따라 무릎을 꿇으려던 백성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맞소! 당장 우리 집을 물어내시오!""고위 관원은 무슨, 재앙을 부르는 재앙신이야!""우린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소. 관원이든 뭐든 책임부터 지시오!"백성들은 순식간에 흥분하여 여기저기서 고함을 질러댔다."모두 입 다물지 못할까!"방우겸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방 대인……."주유재가 입을 열려 했다."주유재! 죽고 싶으면 계속 사람들을 선동하거라!"방우겸은 매섭게 쏘아붙였다.방우겸은 두루두루 잘 지내며 살아온 자였다. 평생 이토록 분노를 드러낸 적이 드물었다. 주유재 저 미련한 놈은 필시 진국공부 세자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저 예전에 병주에 파견되었던 만만한 관원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었다.여기서 한 발짝이라도 삐끗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판이었다.주유재는 방우겸의 호통에 기가 죽어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당장 무릎 꿇지 못할까!"주회안도 거들며 주유재에게 몰래 눈치를 주었다.그제야 주유재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방우겸 일행이 여전히 제 편임을 깨달은 그는 지체 없이 옷자락을 걷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주유재가 무릎을 꿇자 기세등등하던 백성들도 더는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엎드렸다."조 대인, 필시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관아로 자리를 옮기시면 소관이 상세히 말씀 올리겠습니다."방우겸은 조원철을 향해 굽실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는 기대와 공손함이 묻어났다."필요 없다. 백성들 앞에서 못할 얘기라도 있느냐? 여기서 다 말해 보아라."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단칼에 거절했다."그게……."방우겸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속내를 털어놓기는 곤란했다."주 대감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밖으로 나가 대기하시오."주회안이 즉각 지시를 내렸다.주유재도 손을 저으며 거들었다."다들 밖에서 기다리시오. 저들이 뭐라 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4화

    방우겸도 시선을 돌렸다. 나란히 밖으로 나오는 두 남녀를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청류와 임소아도 뒤따라 나와 두 사람 뒤에 섰다."대인, 저자들입니다. 임씨 집안 계집애를 붙잡아 두고 주 대감 댁 영혼 혼례를 막았습니다. 관아의 뜻이라며 앞으로 병주에서 영혼 혼례를 올리지 못하게 될 거라 떠벌렸습니다. 저들이 원귀를 노하게 해 우리 집을 태워버린 것입니다!""지부 대인께서 부디 저들을 엄벌해 주십시오.""병주의 풍습에 저들이 무슨 자격으로 참견한단 말입니까!"백성들은 앞다투어 강유영과 조원철을 가리키며 고자질했다.방우겸은 강유영과 조원철을 유심히 살피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얼마 전 관아로 그를 찾아온 자는 청류였다.그때도 분위기가 범상치 않아 경성에서 파견된 관원이 신분을 위장한 것은 아닐까 의심했다.그런데 지금 그 청류는 젊은 사내의 뒤에 서 있었다. 사내는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아무리 봐도 청류는 사내의 수하로 보였다.앞에 선 젊은 남녀는 귀티가 흐르고 기품이 남달랐다. 예사로운 신분이 아닐 것이다.방우겸은 처세에 밝은 자였다. 이리저리 비위를 맞추며 병주 지부 자리까지 꿰찬 그였다. 마음속에 의구심이 생긴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그는 강유영과 조원철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상대의 정체를 확실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섣불리 적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대인, 저들은 경성에서 왔다고 합니다. 혹 누군지 아십니까?"주유재가 다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방우겸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는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먼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감히 여쭙건대……."그는 조원철의 허리춤에 매달린 금인을 발견했다. 어떤 글자가 새겨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하지만 심상치 않은 신분임은 확신했다. 어찌 됐든 예를 갖추는 편이 나았다."방우겸, 네 죄를 아느냐."조원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꾸짖었다.방우겸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동자를 굴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누구신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3화

    문가에 있던 임소아가 청류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청류는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고 두 사람에게 예를 갖췄다."주군, 아씨.""무슨 일이냐."조원철이 물었다."간밤에 병주성 동남쪽에서 큰불이 나 민가 대여섯 채가 잿더미로 변했답니다. 주유재는 주군과 아씨께서 영혼 혼례를 막아 원혼들이 노한 탓이라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집을 잃은 백성들이 죗값을 치르라며 몰려와 난동을 부리는 중입니다."청류는 고개를 숙인 채 차분히 보고했다."넌 어찌 생각하느냐."조원철은 강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어처구니없는 소리네요."강유영은 콧방귀를 뀌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녀는 맑은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올려다보았다."주유재가 지어낸 헛소리입니다. 전혀 믿을 수가 없어요. 저 불도 주유재의 자작극일 겁니다. 어쩜 그리 시기가 딱 맞아떨어질 수 있겠어요?"마침 주유재가 두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구실이 필요했던 차에 화재가 났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미심쩍었다.주유재가 고의로 불을 지른 것이 분명했다.그는 몹시도 흉악한 자였다. 아들에게 영혼 혼례를 치러주고, 앞으로도 그 악습으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그 많은 사람의 집을 불태운 것이다."음."조원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마침, 간밤에 밖을 살피던 청란 일행이 쓸만한 자를 하나 데려왔습니다."청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어떤 자인데?"강유영이 물었다.청류는 두 사람에게 다가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전했다.잔뜩 구겼던 강유영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조원철을 보았다."그럼 당장 관아에 알려서 지부를 이리로 부르는 건 어때요?"주유재의 악행은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방우겸을 이 자리에 불러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힐 때였다."주유재가 이미 부관을 관아로 보냈다고 합니다."청류가 대답했다."참으로 뻔뻔하군요."강유영은 차갑게 비웃었다."그럼 우린 지부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가면 되겠네요."조원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162화

    강유영이 입을 열려는 찰나, 바깥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곧바로 창밖을 내다보았다.명적이었다.아마 청류가 쏘아올린 듯했다..몰려온 인파가 너무 많아 혼자 감당하기 벅차 수하들을 소환한 모양이었다.마당은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하늘을 쳐다보았다."놈이 원군을 불렀다! 그자들이 오기 전에 당장 들어가서 그 남녀를 끌어내라!"사태를 파악한 주유재가 다급히 소리쳤다.그는 강유영 일행이 고작 넷뿐이라 만만하게 생각했지 숨겨둔 수하들이 더 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주평, 넌 당장 관아로 달려가서 사람을 물러 오너라."주유재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주평에게 지시했다.오늘 일은 지난번과 달리 명분이 뚜렷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있으니 관아의 힘을 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일만 잘 풀리면 백성들을 구원한 의인이라는 칭송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예."주평은 대답과 함께 재빠르게 자리를 떴다."멈춰라."청류는 평소의 장난기를 거두고 검을 빼 든 채 대문 앞을 막아섰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리를 쏘아보며 살기를 뿜었다.몰려온 자들은 그저 평범한 백성이었다. 그들은 주유재의 선동에 속아 사람 수가 많으니 믿는 구석이 있어 날뛰었을 뿐이다.청류의 살기 어린 눈빛과 서늘한 검광을 마주하자, 백성들은 금세 기가 꺾였다.자칫 잘못했다간 단칼에 목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겁에 질린 사람들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무엇이 두려운 게야! 우리 집을 태운 원흉이 저 방 안에 있다. 어서 쳐들어가!"주유재는 무리 뒤에 숨어 사람들을 부추겼다."저놈은 혼자다. 제아무리 간이 커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진 못할 것이다."그의 선동에 사람들은 다시 동요했다.하지만 누구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분노 어린 눈으로 청류를 노려볼 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했다."나와! 당장 나오지 못할까!"누군가 바닥에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차마 청류를 맞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1화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7화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6화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

  • 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   제4화

    한씨가 고개를 돌려 강유영을 바라봤다.곁눈질로 보니, 조원철도 고개를 들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했다.강유영은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떡을 다시 집어 조심스럽게 입안에 넣었다.마치 돌을 씹는 것처럼 입안이 쓰고 껄끄러웠다.‘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뭘 알고 일부러 저러시는 걸까?’이유야 어찌 됐건 한씨가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해하고 있음은 분명해졌다.조원철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왜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한씨는 손을 뻗어 아들의 목에 난 자국을 어루만지더니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곱게 자란 처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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