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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작가: 레몬티
지설은 달력을 세어 보았다. 이혼숙려기간이 아직 스무날 남짓 남아 있었다.

“아직 23일은 더 기다려야 해요. 선배님 말대로 전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않아요.”

은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전남편 쪽에서 괜히 붙잡고 늘어지는 건 아니지? 넌 학교 다닐 때도 유명했잖아. 그런 여자를 쉽게 놓아줄 남자가 몇이나 되겠어.”

지설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차라리 저랑 빨리 끝내고 싶어 할 거예요.”

‘부영민의 눈에는 이제 오직 주유연만 있잖아.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겠지.’

“그렇다면 다행이고.”

은화는 여전히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넸다.

“혹시라도 일이 꼬이면 두려워할 것 없어. 내가 아는 친구가 K시에 있는 대형 로펌에서 일하는데, 이혼 소송 전문이야. 그 친구만 있으면 네가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지설은 아마도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선배님.”

...

지설이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현관에는 낯선 하이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거실 소파 위에는 여자 옷과 가방이 흩어져 있었다.

지설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2층에서 들려오는 유연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주유연이 아예 이 집으로 들어왔지. 오늘 퇴원했구나.’

2층으로 올라가자 안방 쪽에서 웃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설의 마음이 단번에 무거워졌다.

‘아무리 곧 이혼할 사이라지만...’

‘안방은 아직 내 공간인데...’

‘제멋대로 들어와 씻고, 버젓이 눌러앉다니. 이건 선을 넘은 거야.’

그녀는 문을 열자, 수건만 걸친 채 침대에 앉아 있는 유연이 보였다.

그 옆에서는 영민이 무릎을 꿇고 앉아 여자의 발목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지설의 눈을 찌를 듯 불편했다.

그리고 속으로 들끓는 걸 억눌러,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유연이 서둘러 변명했다.

“언니, 아까 욕실에서 미끄러져서요. 오빠가 도와준 것뿐이에요. 언니가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지설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근데 왜 하필 제 방에서요?”

유연은 그 말투에 움찔하더니,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

“제 방 샤워기가 고장 나서요. 그래서 오빠 방 욕실을 잠깐 쓴 거예요. 언니가 싫으시다면 지금 당장 나갈게요.”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발목의 상처 탓에 유연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영민은 반사적으로 유연의 허리를 붙잡았다.

순간, 유연의 몸은 그대로 영민의 품에 안기며 두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별일 아니야. 이 사람도 이해할 거야.”

영민이 다정하게 유연을 달랬다.

그러고는 지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다.

“방금 말투 너무 심했어. 유연에게 사과해.”

지설은 헛웃음이 나왔다.

‘수건 하나 걸치고 내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를 감싸 안고 있는 내 합법적인 남편...’

‘내가 불편하다고 말했을 뿐인데, 사과까지 하라고?’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끼며 발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여보!”

영민이 불만 섞인 목소리로 지설을 불러 세웠다.

지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표정은 영민보다도 더 차가웠다.

“사과하지 않으면?”

영민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목소리에는 짙은 불쾌감이 섞였다.

“이건 명령이야. 협의가 아니라고.”

지난 3년 동안 영민은 늘 이런 식으로 지설을 대했다.

예전의 지설은 참아 넘겼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어차피 이혼할 건데, 더 이상 참고 살 필요가 있나? 두려울 것도 없지.’

지설은 고개를 들어 비웃듯 말했다.

“그래요. 사과할게요. 정말 미안하네요. 당신들 눈앞에서 애정행각을 들켜 버려서... 뭐, 제대로 된 아내라면 남편이 내연녀와 얽히는 꼴쯤은 못 본 척 넘어가야 하겠죠?”

“심지설!”

영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분노가 억누르지 못할 만큼 치밀어 오른 게 분명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설의 시선이 영민의 팔로 향했다.

“내가 틀렸어요? 지금 당신 손이 어디에 얹혀 있는지 보라고요!”

그제야 영민은 자신이 여전히 유연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연은 금세 울먹이며, 마치 큰 잘못을 뒤집어쓰듯 말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언니, 오빠 오해하지 말아요. 언니랑 오빠 싸우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오늘 밤 당장 집 비우면 되잖아요.”

그 말과 함께, 유연은 절뚝이며 방을 뛰쳐나갔다.

영민은 지설을 향해 다시 쏟아내려던 말들을 꾹 누른 채, 계단 쪽에서 터져 나온 비명에 고개를 홱 돌렸다.

유연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있었다.

영민은 지설을 거칠게 밀쳐내고 달려갔다.

지설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팔목의 상처에서 묵직한 통증이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다.

“유연! 괜찮아?”

영민의 다급한 목소리가 계단 아래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설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오늘 밤도 영민은 병원에서 유연을 지키겠지.’

그녀는 무심히 침대 시트를 벗겨내 쓰레기통에 던졌다.

유연이 몸을 대고 간 자국이 남은 것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정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씻던 중, 핸드폰에 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유연 방에 가서 옷 두 벌 챙겨와.]

지설은 화면을 한 번 확인하곤, 아무렇지 않게 무시해 버렸다.

바로 전원을 꺼버리고, 다시는 켜지 않았다.

이어서 세수를 마친 뒤, 새 시트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영민도, 유연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지설은 의외로 잠이 쉽게 찾아왔다.

...

다음 날 아침, 영민의 비서 오리정이 집에 찾아왔다.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주유연 씨 옷 두 벌 챙겨 달라고 하셨습니다.”

지설은 무심히 2층의 한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가 주유연 씨 방이에요.”

리정은 서둘러 들어가 옷가지를 챙겨 나왔다. 그러다 망설이듯 말을 꺼냈다.

“그리고... 대표님께서 사모님도 병원에 모시고 오라고... 주유연 씨를 돌봐 달라고 하셨습니다.”

말끝은 자신 없었고, 얼굴에는 난처함이 드러났다.

지설은 부드러운 오믈렛 치즈 토스트를 잘라 먹으며 대꾸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리정의 표정이 잠시 굳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과거 지설은 영민이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솔직히 대표님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사모님더러 내연녀를 돌보라 하실 수가 있어?’

리정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침 식사를 마친 지설은 노트북을 켜고 새로 이사 갈 집에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주문했다.

막 결제를 끝낸 순간, 핸드폰 화면에 영민의 보이스톡이 떴다.

받자마자 들려온 건 날 선 목소리였다.

[당신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유연이 다친 게 누구 때문인데! 지금이라도 당장 병원에 와서 사과하고, 돌봐야지!]

지설은 코웃음을 쳤다.

“그분은 스스로 넘어진 거예요. 나랑 무슨 상관이죠? 내가 안 가면?”

영민의 분노는 한층 더 짙어졌다.

그동안 뭐든 순순히 따르던 지설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심지설, 잊지 마. 누가 당신을 먹여 살리는지! 내가 하라면 하는 거야!]

지설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했는데...’

‘당신이 무너졌을 때 다시 일어서게 도운 것도 난데...’

‘이제 와서 이런 말로 날 모욕해?’

지설도 더 이상 영민과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보이스톡을 끊어 버리고, 카톡도 차단했다.

예전, 영민이 지설의 번호를 차단했을 때, 그녀는 며칠을 잠도 못 이루며 마음이 막혀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영민의 카톡을 차단하고 나니, 지설은 오히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듯했다.

잠시 후, 오리정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지설은 곧장 그 번호를 차단하고, 핸드폰 전원을 꺼 버렸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지설은 앞으로 학원에 나가려면 적당한 옷과 구두가 필요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래서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영민은 매달 생활비 600만 원과 용돈 100만 원을 지설에게 보냈다.

그리고 공식적인 자리에 지설도 동행해야 할 땐, 따로 영민에게 돈을 받아 옷을 마련해야 했다.

집에 있는 명품 가방과 보석들은 어디까지나 ‘사용 권리’만 있을 뿐, 소유권은 지설에게 없었다.

그래도 지설은 알뜰히 아껴 쓴 생활비와 남은 돈들을 모아, 3년 동안 모은 금액이 어느새 1억 원가량 됐다.

하지만 영민이 지설에게 쓴 돈은 늘 계산이 분명했다.

심지어 유연에게 건네는 가방 값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설은 매번 돈을 요구할 때마다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영민은 그런 지설의 감정을 단 한 번도 생각해 주지 않았다.

‘그래... 부영민의 그런 태도는 분명했어. 바로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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