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작가: 레몬티
지설은 백화점에서 단정하고 세련된 옷 네 벌과 편안한 구두 두 켤레를 샀다. 계산서를 받아 들었을 때, 총액은 오백만 원을 훌쩍 넘었다.

쇼핑백을 든 손이 무거웠지만, 지설의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지설은 더 이상 값비싼 옷을 살 수 없었다.

영민과 함께 연회에 나설 때 입던 고급 드레스는 모두 남편의 명의로 된 것들이었고, 그 어느 것도 지설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그녀가 입는 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옷들뿐.

영민은 그런 지설을 종종 농담처럼 ‘촌스럽다’고 놀리곤 했다.

정작 지설에게는 단 한 번도 옷을 사준 적이 없으면서, 유연에게는 매년 해외 명품 브랜드에서 맞춘 옷을 공수해 보냈다.

그 사실을 지설은 라희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차별하는데, 내가 아직도 사랑받는다고 착각했다면...’

‘그게 더 우스운 거지.’

백화점 입구를 나서던 순간, 지설은 라희와 마주쳤다.

선글라스를 벗은 라희의 시선이 곧장 지설의 쇼핑백으로 향했다.

“유연 언니가 새언니 때문에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는데, 새언니는 여기서 쇼핑이라니? 오빠 돈으로 먹고 쓰면서, 이제는 뻔뻔하기까지 해요?”

지설은 냉소를 흘리며 응수했다.

“그분이 왜 다쳤는지, 아가씨 오빠가 제일 잘 알겠죠. 제가 왜 내연녀 간병을 자처해야 해요? 그리고 참고로 말하지만, 지금 산 건 내 돈이에요.”

“언니의 돈?”

라희가 비웃었다.

“언니가 무슨 돈을 벌어요? 일도 안 하면서 무슨 자기 돈타령이에요?”

지설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순심 이모님 월급이 한 달에 550만 원이에요. 나는 아가씨 오빠의 합법적인 아내로, 남편의 밥 챙기고, 재활 도와주고, 생활 전반을 관리했어요. 남편이 생활비 주는 게 당연한 거죠. 내가 감사하며 빌어먹어야 할 돈이 아니에요.”

“새언니!”

라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순순히 고개를 숙였을 지설이, 지금은 단호하고 날카로웠다.

“오빠가 언니를 버릴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

라희는 비웃듯 말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설이 영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늘 외면당하면서도 매달리던 사람이 바로 지설이었다.

“지금이라도 나한테 사과해요. 아니면 오빠한테 다 말할 거예요. 오빠가 유연 언니 때문에 새언니한테 이미 실망한 거 몰라요?”

“내가 거기다 한마디만 보태면, 오빠는 정말 새언니를 버릴 걸...?”

지설은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요? 그럼 잘됐네요. 나도 이제 아가씨 오빠 필요 없어요. 우리 이혼 준비 중인 거 몰랐어요?”

‘아빠가 살아 계셨더라면, 내가 왜 이런 하찮은 아이의 비아냥을 견뎌야 했을까?’

‘그땐 나도 소중히 대접받던 집안의 딸이었는데...’

3년이라는 세월이 지설을 억눌렀지만, 이제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이혼이요?”

라희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후, 라희는 금세 다른 의심을 품었다.

“설마... 오빠랑 이혼하겠다고 협박해서 유연 언니랑 갈라놓으려는 거예요? 소용없어요!”

“오빠가 얼마나 유연 언니를 사랑하는데... 절대 안 통할 거예요! 이혼하면 새언니 같은 사람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설은 단호히 잘라냈다.

“걱정하지 마요. 나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주유연 씨를 그렇게 아끼고 싶다면, 아가씨 오빠 통째로 그분께 드릴게요.”

말을 끝낸 지설은 어깨를 곧게 펴고, 우아하게 등을 돌려 걸어갔다.

라희는 그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좋아, 심지설. 두고 봐. 당장 오빠에게 다 일러서 혼쭐을 내줄 테니까!”

...

병원.

영민은 병실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유 없는 초조함이 가슴을 긁어댔다.

‘심지설... 감히 날 차단해? 어떻게 감히?’

요즘 들어 지설의 태도는 영민의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무슨 말을 해도 묵묵히 따라오던 여자가 이제 점점 제멋대로였다.

그때, 복도 끝에서 라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는 영민을 보자마자 불만을 터뜨렸다.

“오빠, 새언니 좀 어떻게 해! 요즘 점점 버릇이 없어져. 오늘 백화점에서 마주쳤는데, 옷을 산더미처럼 사 들고 있더라니까?”

“나한테도 막말하고! 오빠가 밖에서 얼마나 고생하는데, 이렇게 펑펑 쓰면 말이 돼?”

“그 사람이... 백화점에 갔다고?”

영민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기억 속 지설은 늘 검소했다. 옷도 몇 벌 안 되는 걸 돌려 입었고, 화려함은커녕 늘 소박하기만 했다.

‘옷을 사?’

라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만을 이어갔다.

“당연히 오빠 카드 썼겠지! 빨리 카드 정지시켜. 새언니한테 더는 돈 쓰게 하지 마!”

영민은 순간 말이 막혔다. 자신은 지설에게 생활비 외에 따로 카드를 준 적이 없었다.

라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가족카드 안 줬어? 그럼 통장으로 돈을 꽂아준 거야? 매달 얼마씩 주는 거야? 은행에 말해서 계좌부터 묶어버려!”

영민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가슴 한쪽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목소리도 점점 작아졌다.

“매달 생활비 600만 원.”

“600만 원?”

이번에는 라희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오빠, 너무 쪼잔한 거 아냐? 600만 원이면 나 신발 하나도 못 사.”

라희는 순간, 아까 지설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떠올렸다. 로고를 다시 생각해 보니,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럼... 그 돈으로 생활비 아끼고, 옷 몇 벌 산 거였나?’

순간, 라희는 약간 동정심이 스쳤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빠, 새언니 엄마 병원비는 오빠가 다 대주잖아? 그거 한 달에 몇천만 원씩 나가는데?”

라희의 말에 영민도 머리를 치듯 기억해냈다.

지설의 어머니는 장기 요양 중이었다. 치료비와 시설비, 모든 걸 자신이 감당하고 있었다.

영민은 곧 차갑게 입을 열었다.

“오 비서.”

오리정이 다가오자 영민은 냉혹하게 지시했다.

“사모님 어머님 요양원 치료비, 전부 끊어. 그 사람, 무릎 꿇고 빌게 만들어.”

리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결국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리정이 병원에 전화를 걸고 와서 조심스레 보고했다.

“대표님, 병원에서 확인했는데요. 예연숙 여사님은 반년 전 이미 일반 병실로 옮기셨고, 지금은 사모님이 직접 비용을 내고 계십니다. 대표님 쪽에서 지불한 내역은 없다고 합니다.”

“뭐라고?”

영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신은 불과 며칠 전에도 자기 장모의 치료비 명세서라며 건네받은 파일에 사인을 하지 않았던가?

‘그럼 내가 본 건 뭐였지?’

‘장모님의 병원비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뭘 서명한 거지?’

영민의 심장이 괜히 거칠게 뛰었고, 답답함은 점점 분노로 변했다.

라희가 곁에서 그 말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새언니 말이 사실이었어? 정말 이혼하려는 거야?”

‘이혼.’

그 두 글자에 영민의 표정은 단숨에 얼어붙었다.

“누가 이혼한다고 했어?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고?”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직접 들었어. 그때 새언니 표정, 장난 같지 않았어. 정말 진심 같았어.”

곧바로 얼굴에 기쁨이 번졌다.

“그럼 잘됐잖아! 그렇게 붙잡아도 안 나가더니, 드디어 눈치챈 거지. 오빠, 이번 기회에 새언니랑 이혼하고, 유연 언니랑 결혼해!”

“누가 이혼한다고 했어!”

영민이 갑자기 라희를 향해 호통을 쳤다.

라희는 눈을 크게 뜨며 얼어붙었다.

“오빠... 유연 언니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 말에 영민의 가슴도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그래, 난 분명히 유연을 좋아하지.’

‘그런데... 왜 이혼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기분이 뒤틀리지?’

“이혼 같은 거 생각해 본 적 없어.”

라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유연 언니는? 오빠 좋아하는 거 다 아는데, 어떻게 할 건데?”

이번엔 영민도 말이 막혔다. 유연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설 역시 지난 3년 동안 곁을 지켜주며, 자신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준 여자였다.

‘지설에게 진 빚은... 결혼 말고는 갚을 방법이 없어.’

영민은 스스로 답을 내린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동시에, 유연을 소홀히 할 생각도 없었다.

‘지설은 아내로서 곁에 두고, 유연은 내가 아끼고 보듬으면 돼.’

‘지금 상태를 바꿀 필요는 없어.’

현실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영민은 자신이 선택한 균형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 책을 계속 무료로 읽어보세요.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100화

    말을 마친 은화는 장난스럽게 도진을 향해 윙크까지 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우란은 흥미로운 듯 이 장면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역시 우리 은화, 분위기 띄우는 데는 선수네.’‘기도환 대표님도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우리 대표님을 이렇게 끌어내다니.’예린은 촉촉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도진에게 물었다.“도진 오빠, 이분들은 오빠 친구들이야?”그 말과 함께, 예린의 시선은 자연스레 은화 옆에 앉아 있는 지설에게로 옮겨갔다. 위아래로 찬찬히 훑어보는 눈빛.아무리 봐도, 세 사람 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지설이었다. 단정하면서도 또렷한 이목구비, 은근한 고집이 묻어나는 기품 있는 분위기.‘위험해. 이런 여자는... 분명 도진 오빠 곁에 오래 남을지도 몰라.’예린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피어올랐다.하지만 도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설명은커녕, 관심조차 없는 듯한 무심한 태도.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역시... 형이 여기 오자고 고집부린 이유가 이거였군.’도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엔 당장이라도 목을 조를 듯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럼에도 도환은 태연했다. 동생의 서늘한 기색 따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오히려 환한 미소로 사람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이쪽은 구예린, 내 친구예요.”그러고는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예린아, 여긴 우란 씨. 도진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라고 할 수 있지.”우란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겸손하게 웃었다.“별말씀을요. 저는 그냥 작은 새우일 뿐이에요.”도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이 두 분은 심지설 씨랑 소은화 씨. 유명한 피아노 강사님들이지. 지금 창업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은화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도환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어머,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대표님을 알았더라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그럼 든든한 투자자 한 분 더 모실 수 있었을 텐데요?”그 말에 도환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9화

    도환은 동생의 신호 따위 전혀 못 알아챈 듯, 오히려 싱긋 웃으며 예린에게 말을 건넸다.“예린아,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네 눈엔 여전히 이 답답한 도진이만 보이니...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도대체 도진이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냐?”그 말에 예린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부끄럽다는 듯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곧바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도환 오빠!!”이내 마치 도진을 두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 재빨리 말을 보탰다.“도진 오빠는 전혀 답답한 사람 아니야!”그 목소리에는 도진을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도환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어차피 이렇게 만난 김에 도진이 한번 제대로 대접해야 하지 않겠어? 오늘 점심은 도진이 쏘는 거다.”예린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었다. 시선은 곧장 도진에게 향했다.하지만 정작 도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형이 예린을 정리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같이 밥 먹자고?’예상치 못한 전개에 도진의 마음은 불편해졌다.길을 걷는 동안, 도환이 슬쩍 예린에게 속삭였다.“우리 형제 사이라는 건, 아는 사람 거의 없어. 꼭 비밀로 해 줘.”예린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어!”무슨 사정인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도진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기꺼이 맞춰 주고 싶었다....잠시 후, 도환은 주도적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한 식당 앞에 멈췄다. 전통 있는 분위기에 손님들로 가득한, 소문난 맛집이었다.그러나 뒤따라온 도진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간판을 올려다봤다.‘또 이런 데야? 난 자극적인 음식은 별로인데...’입맛에 맞지 않는 메뉴를 떠올리며, 그는 이마에 잔주름을 만들었다.옆에 있던 예린이 서둘러 도환 곁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도환 오빠, 도진 오빠 매운 거 잘 못 먹잖아. 우리 그냥 다른 데로 가면 안 돼? 그래야 다 같이 기분 좋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말하면서도 예린의 시선은 계속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8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지설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대체 어떻게 해야 이 복잡한 상황을 풀 수 있을까...’그 순간, 우란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슬쩍 핸드폰을 집어 들더니, 지설의 옆모습을 조용히 찍어 버렸다. 한숨과 함께 떨어져 나온 쓸쓸하고도 애잔한 표정 그대로였다.우란은 곧바로 사진을 열어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볍게 터치했다. 곧 사진은 도환에게 전송되었다.요즘 들어 도환은 로펌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활달하고 유쾌한 성격 덕분에 변호사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그 과정에서 우란이 지설의 친구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고, 도환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기회다. 우리 도진, 이제라도 여자를 만나야지.’‘백년솔로’라는 별명이 따라붙는 법무법인 도진의 대표변호사 기도진. 괜찮은 남자임은 틀림없었고, 지설과 함께라면 참 잘 어울릴 거라는 확신이 도환에게 있었다. 우란도 그 말에 흔쾌히 동의하며 협조를 약속했다.잠시 후, 도환의 핸드폰에 사진이 도착했다. 화면 속 지설의 표정을 본 순간, 도환은 피식 웃으며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리고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주소는요?]거의 동시에 우란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우란은 지체 없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찍어 보냈다.그 시각, 도환은 이미 로펌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는 동생의 사무실로 향해 문을 열었다. 여전히 책상 앞에서 업무를 처리하던 도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도환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야, 그만 해. 밥 먹으러 가자.”도진은 고개를 들어 형을 바라보았다. 흥분한 듯 들뜬 표정이 역력한 도환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필요 없어. 이따가 배달시켜 먹을 거야.”도진의 단호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도환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밥 같이 안 먹겠다면... 오늘은 여기 눌러앉아 로펌 한번 제대로 뒤집어 놓을 거다. 네가 나가 달라 빌기 전까진 안 나간다.”그 말과 함께 도환은 두 팔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7화

    아침 일찍, 지설과 은화는 학원 내부 물건들을 정리하러 학원에 나왔다.마침 학원은 법무법인 도진이 있는 같은 빌딩에 있었다. 은화는 자연스럽게 우란에게 연락을 넣어 점심을 함께하자고 제안했고, 곧 우란이 약속 장소로 나타났다.세 사람은 근처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우란의 시선은 자꾸만 지설에게로 향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망설이다가,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지설 씨, 혹시 모르셨죠? 우리 대표님... 소꿉친구가 있다네요. 그것도 꽤 각별한 사이래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란은 핸드폰을 꺼내 빠르게 화면을 뒤적였다. 그리고 회사 단톡방에서 이미 화제가 된 사진 한 장을 지설 앞으로 내밀었다.지설은 핸드폰을 받아 들고 순간 숨이 막히듯 굳어 버렸다. 화면 속 여자애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눈빛은 맑고 반짝였으며, 그 자체로 싱그러움이 가득했다.‘왜 이렇게 답답하지? 숨이 잘 안 쉬어져.’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섞여 지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진과 자신은 공식적인 연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도진의 사적인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다.그런데도 지설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와, 정말 잘됐네요. 보니까 기 변호사님이랑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억지로 짜낸 미소였다.우란과 은화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본 뒤,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지설 씨, 정말 하나도 안 신경 쓰여요?”사실 지켜보는 이들 눈에도, 지설과 도진 사이에는 늘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그 미묘한 온도를, 가장 가까이 지켜보는 우란과 은화가 모를 리 없었다.게다가 은화와 지설의 학원이 입주해 있는 이 층의 임대 문제도, 사실상 도진이 직접 발로 뛰며 해결해 준 일이었다.늘 바쁘게 일하며 숨 돌릴 틈조차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사소한 일에까지 정성을 쏟을 수 있었을까?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분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6화

    도진은 차갑게 입술을 열었다.“나 지금 바빠. 중요한 일 아니면, 당장 나가.”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곧장 사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호하고 결연한 발걸음,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뚜렷했다.하지만 예린은 도진의 차가운 태도와 짜증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붙었다.예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눈이 예쁘게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구, 괜찮아! 난 그냥 오빠 일하는 거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점심도 같이 먹으면 되잖아?”도진은 조금도 감동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대체 왜 저렇게 집요하게 따라붙는 거지?’‘분명 여러 번 말했잖아. 난 너한테 그런 감정 없다고.’도진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하루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예린은 마치 거절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따라붙었다.시간은 흘러 두 시간이 지났다. 도진이 창밖을 바라보니, 예린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미친 거 아냐? 아직도 안 갔어?’도진의 표정은 점점 굳어지고, 마음속 불편함은 더 짙어졌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번호를 눌렀다.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 다정한 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무슨 일인데?]도진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구예린이 아직도 여기 있어. 두 시간이나 붙어 있다니까. 형, 어떻게 좀 해봐.”그 말과 함께 도진의 머릿속에는 어릴 적 기억이 스쳤다. 언제나 자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떨어질 줄 모르던 꼬마 예린.매번 그런 상황을 해결해 준 건 늘 도환이었다. 꾀 많고 눈치 빠른 형이 나서야만, 그는 간신히 숨통을 틀 수 있었다.이번에도 도진은 본능처럼 형에게 기대고 있었다.[예린, 결국 또 찾아왔지?]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도환의 목소리엔 묘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그는 이미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듯한 자신감이 가득했

  • 버림받은 아내, 재혼에 눈물 쏟는 전남편   제95화

    예린은 로펌 휴게실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한 손에 잡지까지 펼쳐 놓고, 마치 이곳이 자기 집인 양 편안한 모습이었다.그 앳된 얼굴에는 은근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지나가던 변호사들과 직원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꽂혔다.‘누구지?’‘처음 보는 사람인데...’‘...’속으로 웅성거렸지만, 정작 예린은 그런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우아하고 당당한 태도로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다.언뜻 보면, 예린이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을 드나들던 로펌의 안주인 같았다.잠시 후, 데스크 직원 유진이 다가와 뜨거운 커피를 건넸다.“손님, 커피 드시죠.”예린은 자연스레 커피를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곧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미소 지었다.“음... 커피가 조금 달네요. 저는 반만 당 넣은 게 좋아요. 그리고 얼음을 조금 넣어주면 더 산뜻하겠어요. 다음엔 그렇게 부탁드릴게요.”유진은 순간 멈칫했다. 이 여자분을 자신도 본 건 처음인데, 어쩐지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에 말문이 막힌 것이다.게다가 예린의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고가의 명품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흔한 사람이 아니었다.유진의 머릿속에 스친 건 단 한 사람.‘혹시... 우리 대표님 여자 친구?’‘근데 우리 모두 심지설 씨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착각한 건가?’유진은 마음속에 물음표를 잔뜩 품은 채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네, 알겠습니다. 불편하시지 않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유진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아침 9시 정각, 로펌 현관문이 열렸다.도진이 들어섰다.잘 재단된 수트가 그의 넓은 어깨와 곧은 허리를 따라 매끈하게 떨어졌다.고급 원단 특유의 은은한 광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흘러내렸고, 주변 공기마저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감이 뚜렷하게 풍겼다.도진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차분하게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예린과 눈이 마주쳤다.바로 그 순간, 예린의 눈길이 번개처럼 도진의 모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책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책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