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악...!"
주하는 돌바닥에 떨어져 화면이 산산조각 난 제 핸드폰을 쥐어 들었다. 골목길에 기둥과 천막만 세워진 포장마차라 바닥이 그야말로 길바닥 그 자체였다. 무방비한 핸드폰이 깨질 수밖에 없었다.
"아. 손 다치겠어요."
도혁은 깨진 주하의 핸드폰을 곧바로 뺏어 들었다. 날카로운 화면이 금방이라도 그녀의 손가락에 상처를 내버릴 것만 같았다. 그게 생각보다 조금 무서울 정도로 싫었다.
"어떡해. 내 핸드폰 바꾼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같은 걸로 바꿔줄게요." "뭐? 됐어." "연락 안 되면 나도 불안하잖아요. 아예 화면 나간 것 같은데."도혁은 핸드폰 옆 버튼을 꾹꾹 눌러 보이며 말했다. 주하는 '진짜야?'하고 소리를 지르듯이 묻고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잠시만 기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노트북 위로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고는 있었지만, 주하의 머릿속은 온통 전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 집에 다시 돌아온 건, 그런 비참한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도혁을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들 하니까. 물론 그 바닥에는 나름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지라도, 최소한 제 '몸'을 탐내고 있다는 것. 그걸 무기 삼아 어떻게든 그를 쥐고 흔들어보자고 다짐하며 들어온 길이었다.하지만 평소보다 더 납작하게 엎드려 고분고분 구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가 간절하게 원하는 건 '주하'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제게 명령을 내려주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아닐까 하는.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간식 좀.""아, 그럼... 잠깐 자리 비워도 괜찮아요?"별 걸 다 허락을 구한다 싶었다. 하지만 운동할 때 빼고 따라다니라고 한건 자기니까, 주하는 뭐라고 하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응.""아, 네...!"도혁은 거절당했을 때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후다닥 사라졌다. 뭘 저렇게까지 기뻐하면서 가는 건지, 주하는 알 수 없었다.도혁은 그저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안도했다. 적어도 옆에 있는 배경 취급을 하지는 않는 거니까.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다는 뜻 같아서. 그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게 아무리 하찮은 일이어도 좋았다. 그는 곧장 식당으로 뛰어가듯 걸어서, 직원들을 닦달했다."평소에 좋아하던 거 위주로 준비해. 제일 빨리 되는 게 뭐야?""아, 그게,
두 사람은 어느새 도혁의 방으로 옮겼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무릎을 꿇고 앉은 도혁을 보며 주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잠은 제대로 잔 건지, 밥은 제대로 먹은 건지, 그를 꼼꼼히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혁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눈 밑이 제법 거뭇했고, 눈 자체도 퀭하게 보였다. 그간 기찬이 보고해 준 것들이 다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원래 하루에 운동 몇 시간씩 했어?""네...? 아... 2시간 정도..."뜬금없는 질문에도 도혁은 성실히 대답했다. 주하가 그런 걸 왜 물어보는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물어보니까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아는 한 최대한 저자세로 임했다. 커다란 덩치를 구겨서 작아 보이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봤자 거구가 어딜 가는 것도 아닌데."매일 2시간씩 운동해. 그 외에는 무조건 나 따라다녀. 등 뒤에서.""네, 감, 감사합니다. 따라다닐게요...!"따라다니지 말라고 해도 감지덕지 감사하며 숨어서 얌전히 지낼 텐데, 따라다니라는 미션은 너무 쉬운 데다가 좋기만 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도 사실 알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지 같은 건. 그저 한 달, 그 정도의 유예를 가져보기로 했을 뿐이었다. 마음을 접든, 아니든."과제하러 갈 건데, 운동하러 갈래?"생각한 건 잠이라도 자라는 말이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그런 말 뿐이었다. 도혁은 '아니요, 따라갈게요...'하고 대답하며 그녀가 나가길 가만히 기다렸다. 주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루에 그녀가 기찬을 통해 전달했던 신발이 놓여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그 신발을 신었다. 도혁은 내리깐 눈으로 그것을 가만히 지켜
"주, 인님...!""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불러?"주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본가에 사는 사람은 도혁과 주하를 포함해서 총 55명. 기찬을 뺀 54명이 모두 모였다. 그러나 말하는 건 도혁과 주하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하도 도혁도,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도혁은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반말을 쓴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그날 어찌나 시리게 존댓말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이 공간에 다시 발을 디뎌주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그에게는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주하의 시선이 짧게 아래로 향하자, 도혁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따라 내려갔다. 얼마 전에 마당에 신발을 놓고 가버린 탓인지, 주하의 발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낡은 슬리퍼가 걸려 있었다.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주하를 저런 꼴로 돌아다니게 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찔러댔다."죄, 송합니다... 잘못했어요... 제가..."주하는 사과하는 도혁을 그제야 쳐다보았다. 기찬이 말한 대로 도혁은 제대로 밥도 먹지 않은 얼굴이었다. 몇 주 만에 살이 제법 빠져서 안 그래도 날렵한 턱선이 날카롭게 보였다. 그렇다고 볼품없어진 건 아니었고 조금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쩐지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늘 능글맞던 얼굴에 한치의 웃음기도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몰랐다."반성은 좀 했고?"주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태연한지 가늠해 보며 물었다. 도혁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주하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감히 단 한 걸음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네, 네... 많이, 많이 했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후회하고, 또, 주인... 아니, 그러니까..."도혁은 호칭을 고르지
"저..."기찬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잠시 우물쭈물했다. 주하가 말한 3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미리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은 말해야 했는데 생각처럼 입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돌아오겠다는 단순한 내용이 아니라, 집합을 시키라는 내용이니까."무슨 일인데."도혁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몇 주간 기찬은 단 한 번도 보고하러 오지 않았기에. 그건 주하에게 위험한 일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반대로, 보고를 하러 왔다는 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기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누님이, 집합...! 하시랍니다... 그... 전원..."살다살다 전원 집합하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전하게 될 줄 몰랐던 기찬은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했다. 아무리 주하가 전하는 말이라고 해도,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태연하게 말이 나가질 않았다. 도혁 또한 잠시 그 말을 이해하느라 멈춰있는 듯했다."...뭐?""오늘,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따, 모시러 가려고 하는데... 제가...""몇시에... 아니, 너는 가 봐 그럼."기찬이 겨우 눈치를 보며 하는 말에 도혁이 손을 저어 쫓아냈다. 그리곤 지금까지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짓으로 어디론가 떠났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모이라고 말할 생각인 듯했다. 기찬은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차고로 향했다.-주하는 왜 전부 다 부르라고 했을까. 기찬은 그걸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조용히 도혁과 대화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국 그녀가 시킨 일이었다. 할 수밖에 없는 일. 주하는 아무렇지도 않게 기찬이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 올라탔다. 손엔 나갈 때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차림새였지만
"말하지 마세요.""네?""내가 돌아갈 것 같다고, 보고하지 말라고요."돌아오시는 건가? 기찬은 가장 먼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너무 좋은 소식이라, 말을 안 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으면 도혁이 뭐라도 먹을 테니까. 하지만 기찬은 주하의 말을 절대 거역할 수 없을 터였다."아, 그러니까... 그게...""어떻게 될지, 아시죠?"기찬을 협박하는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경고였다. 입을 잘못 놀렸다간 도혁이 더 힘들어질 뿐이라는 그런 경고.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지배자의 명령이었다. 한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보스는 지금 시들어가고 있었다. 기찬은 그런 사람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알겠습니다...""방에서 아예 안 나와요?""아뇨, 새벽에 잠시 나와보시는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돌아오실까봐...""이 신발, 가지고 가세요."기찬은 주하가 내미는 쇼핑백을 얼른 받아서 들었다. 신발이라기에 들여다보니 그녀가 집에서 나올 때 신고 나온 신발인 것 같았다. 이걸 왜, 기찬은 그렇게 물어보기 전에 그녀를 한 번 바라보았다."본채 마루에 두고, 백도혁이 어떻게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세요."어쩌다 도혁이 아니라 주하에게 보고하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기찬은 얌전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잘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그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야, 주하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올 것 같았기에."근데, 내가 산 생일 선물은 어떻게 했어요?""아, 그거, 대표님이... 가지고 가셨습니다.""열어봤겠네요?""그건, 모르겠습니다."주하는 또 잠시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기찬도 며칠 전을 회상했다. 주하가 집을 나간 바로 다음 날은, 도혁의 생일이었다. 도혁의 생일에는 매년 조직원끼리 회식
언젠가는 주하가 오는 거라면, 그게 아무리 긴 시간이어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약이 없으니 며칠 내내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조직 생활을 하면서도 한 번도 손대본 적 없던 담배가 자꾸만 생각이 나는 걸 보니. 하지만 그마저 주하가 싫어할까 봐, 입에 물지는 못했다. 그는 깨어 있는 시간 내내 밖만 내다보았다. 아주 가끔은 사랑채에 가서 그녀의 흔적들을 보기도 했다.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주하가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심장이 조여왔다.지금까지 미처 몰랐는데, 그의 하루는 죄다 주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녀가 오늘은 뭘 할지 생각하고, 밥은 뭘 먹을지 궁금해하고,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그녀의 작업 공간에 들르고. 그러나 지금은 그런 그녀가 없었다. 중심이 사라지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의 자신이 무엇을 하면서 살았는지조차 다 잊어버렸다. 고작 몇 달의 시간이었는데도, 그랬다.며칠이 지나는 동안 기찬은 한 번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주하가 위험할 때만 보고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다행인 일이면서도 불행한 일이었다. 물론 그녀가 위험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무런 보고도 없는 게 차라리 나았다. 어디서 지내는지, 뭘 먹고 지내는지, 학교엔 잘 가는지, 아직도 많이 화났는지. 궁금한 건 많았지만 도혁은 끝내 기찬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종이었기에.-어두운 골목길이었다. 기찬은 오늘도 어김없이 주하의 뒤를 밟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찜질방, 모텔, 친구 집을 전전하며 지냈다. 부동산도 가보는 것 같았지만 계약까지 이어지지 않은 눈치였다. 그래도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화나거나 슬퍼 보이지 않았다. 그 긴 담벼락을 걸어서 떠날 때도 한순간도 씩씩거리지 않았던 사람
"금방이라도 쌀 것 같은데.""그럴 리가."괜히 한 번 도발해 본 거였는데 태연한 척 받아치는 목소리가 사실 조금 멋은 없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떨렸기 때문이었다. 긴장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그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도 같았다."그래요?"그 말이 마치 엄청난 도발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버틸지 보겠다는 듯이. 도혁은 조금 오기가 생겼지만, 술이 조금 들어간 몸은 그의 의지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간 성생활과는
"뭐, 근처에도 방은 많으니까요."이 근처엔 널린 게 모텔방이었다. 도혁은 주하의 말에 주변을 살짝 둘러보았다. 날 때부터 도련님이라 이런 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물론 갑자기 둘이 택시 타고 호텔을 찾아가는 건 좀 웃긴 것 같기도 했다."흠.""손으로만 해줄 테니까 가려면 가고요.""뭐?"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저보다 2배는 큰 남자를 보면서 하는 말이라고 하기에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가 싶다가도, 무슨 자신감인지 궁금하기도 했
주하는 개강 첫날부터 술을 거나하게 마셨다. 5학년 2학기. 이제 졸업 작품으로 전시회를 마치고, 졸업 논문만 쓰고 나면 길었던 학교생활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왜 그렇게나 술이 당기는지. 학교를 다니는 4년 반 동안 그렇게까지 술을 마셔본 적은 없었다. 건축학과는 제법 술을 많이 마시는 이미지가 있었는데도 주하는 술을 즐기지 않아서, 그렇게까지 마실 일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날 좀 보기 드물게 취해있었다. 길에서 커다란 남자와 부딪혔을 때, 별생각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사과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보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도혁은 짜증스럽게 말하며 차 문을 열었다. 언제 샀는지 상수는 본 적도 없는 빨간 스포츠카였다. 이런걸 타고 다녔었나? 다급한 와중에도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매일 검은색 세단만 타고 다니던, 심지어는 본인이 운전하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운전석을 여니까 수상했다. 그러나 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떠나려는 도혁을 다급하게 다시 불렀다."백 대표님!" "어, 간다." "아니, 어디 가시는데요! 형님! 아!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