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하. 주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망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봐도 언제부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얼굴에 홀렸다는 자각이야 있었지만, 마음까지는 절대 안 주리라 생각했었다. 그야, 자신 같은 대학생쯤은 유희일 것이 뻔한 남자니까. 그녀는 상처받는 건 자신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와 섹스하는 게 두려운 이유도,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인 것 같았다. 한 번 자고 나면 그 고분고분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 사이가 끝나버릴까 봐. 이미 좋아하게 되어버린 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주하는 책상에 머리를 쾅 박으며 엎드렸다. 일단은 이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다. 늘 가벼운 척 해대며(분명 첫 만남엔 안 그랬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 남자에게, 이런 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다. 분명히 저를 가지고 놀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의 섹스가 너무 하고 싶은 건 확실하니, 그걸 어떻게든 이용해 보는
그때, 주하의 핸드폰이 지잉하고 울렸다. 주하와 도혁의 시선이 동시에 핸드폰으로 꽂혔다. 저장이 되어있지 않은 번호.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한 번쯤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주하는 한참 내려다보다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았을 텐데, 기분이 묘해서."여보세요?"'오주하 씨? 저 건물주입니다.'건물주? 그런 사람이 왜 전화가 오지?주하는 저도 모르게 도혁을 올려다보았다. 도혁이 아무렇지 않게 그 시선을 마주 보았다. 왠지, 지금 이 남자가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주하는 짧게 눈짓했다. 도혁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나갔다."네, 무슨 일이시죠?"'엘리베이터에 공지 붙여놓은 거 보셨죠?'엘리베이터. 공지. 주하는 흰색 종이 한 장을 떠올렸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일 보는 종이지만 처음 읽은 이후로는 눈길도 안 줬던 탓에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났다. 무슨 공사를 한다고 했었던가. 건물 철거. 그런 내용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제법 중요한 내용인데도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공사 시작 시기가 1월로 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졸업은 못 했어도 이미 학기는 끝나있을 시점이니까. 그건 졸업반인 그녀에게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네, 봤는데요."'그게 좀 일정이 당겨져서, 나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그러시면..."아직 10월. 일주일에 한 번 뿐이라고는 해도 수업이 있고, 과제도 해야 했다. 학교 앞의 다른 원룸으로 가자니 2달만 더 지내면 되는데 1년 계약을 하기에도 애매했다. 다른 곳으로 가자니 어디로 취업할지도 모르는데 대뜸 계약하기도 그렇고. 이 보증금으로 학교 앞 말고 어딜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시원이라도 가야 하나. 주하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
"오셨어요?""아. 응."미치겠네.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는, 마음을 자각하고 나니 훨씬 더 잘생겨 보였다. 게다가 눈이 마주치면 항상 저렇게 웃어대니 심장이 주체를 못 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막 씻고 나와서 왠지 촉촉해 보이기까지 하니. 망할. 저 인간 때문에 내 눈만 높아져서, 앞으로 어떡하지? 주하는 참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훔쳐본 새ㄲ... 놈들은 다 쫓아낼게요.""놔둬. 궁금한가 보지."욕하지 말랬다고 말을 정정하는 것마저 기특해 보였다. 인생이 망하려면 이런 식으로도 망할 수 있다는 걸, 주하는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다."오늘은 어디 보시려고요?""사랑채로 가려고."주하는 자신이 평소와 똑같이 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남자이니 분명 이상하게 굴었다면 물어봤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엔 없는 것이었다."아. 자리 만들어놨어요.""응. 들었어."자랑 좀 신나게 하려고 했더니 박기찬 새끼가 선수를 쳐?도혁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주하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그저 싱긋 웃었다. 도혁은 주하에게 잘 보일 생각 밖에 없어서, 그녀가 평소와 다른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주하는 원래도 표정이 많은 편은 아니고 종종 '잘생기긴 했네.'같은 표정을 짓기도 했기에 이상한 것을 눈치채기란 제법 어려웠다."여기예요.""어... 고마워."회의실 한 구석도 아니고, 정중앙에 그녀의 자리라고 떡하니 만들어진 곳은, 인테리어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깔끔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책상 위에 지난번에 까먹고 안 들고 간 메모 몇 장이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노트, 펜, 스탠드 등이 줄 맞추어 놓여있었다.&nb
하. 주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망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해봐도 언제부터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얼굴에 홀렸다는 자각이야 있었지만, 마음까지는 절대 안 주리라 생각했었다. 그야, 자신 같은 대학생쯤은 유희일 것이 뻔한 남자니까. 그녀는 상처받는 건 자신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와 섹스하는 게 두려운 이유도,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인 것 같았다. 한 번 자고 나면 그 고분고분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까 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이 사이가 끝나버릴까 봐. 이미 좋아하게 되어버린 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건지. 주하는 책상에 머리를 쾅 박으며 엎드렸다. 일단은 이 마음을 들키지 않는 게 중요했다. 늘 가벼운 척 해대며(분명 첫 만남엔 안 그랬다.) 속내를 숨기고 있는 남자에게, 이런 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다. 분명히 저를 가지고 놀 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녀와의 섹스가 너무 하고 싶은 건 확실하니, 그걸 어떻게든 이용해 보는 게 나을까."......"주하는 눈을 감았다. 도망갈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꼬셔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들키지 말고 유지만 하자. 그게 주하의 결론이었다. 과제와 논문 때문에 그 집에 몇 번 더 가기로 했으니, 핑계는 괜찮았다. 사진도 아직 부족하고, 전체적인 구조도 다 파악 못한 데다가, 누마루도 아직 신경 쓰이니까. 심지어 지도교수님도 현장에 다시 다녀오라고 했다. 주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시계를 보았다. 기찬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나가기 전에 저도 모르게 거울을 한 번 확인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삐져나온 머리마저 조금 신경이 쓰였다. 미친 게 틀림없다니까. 주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모시러 왔습니다."기찬은 이미 주하의 집 앞이었다. 당연하게도 도혁이 데리러
"손님맞이를 그렇게 해놓고 무슨 상을 받아?"급조한 변명이었다.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는, 그런 변명. 오늘은 도저히 할 자신이 없었다. 이건 두 번째 도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주하는 도망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아, 니..."주하가 급조해 낸 변명인지 뭔지, 도혁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상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뿐이었으니까.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상이 되돌아오는지 그것만이 궁금했다."그건, 제가 잘못했는데요-..."너무 구질구질한가? 도혁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벌을 받았으니 상이랑은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그렇게 말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입이 열리질 않았다. 주하가 이미 결정한 일을 번복할 리가 없어 보여서.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얌전히 고분고분 굴어야 다음 기회가 올 것만 같아서."...알겠어요."도혁의 수긍에 주하는 몰래 숨을 골랐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섹스쯤이야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는데, 아무튼 오늘은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아까 문전박대당한 것도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기껏 잔뜩 긴장하고 왔다가 열받은 채로 되돌아가면서 섹스 생각을 잊어버렸으니까."......."잠시 방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도혁은 자신의 침대 위에 앉은 주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상을 줄 것도 아니면서, 왜 사람 설레게 여기까지 와선 아무렇지 않게 남의 침대에 앉은 건지. 주하의 뒤를 따라다니며 한껏 했던 상상들이 물거품이 되었으니, 억울한 마음이 한 번에 다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기다릴게요.""뭐?""다음에 상 주실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다고요."아예 주지 않겠
"보스보다도 무서워.""예?""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만식은 인간이 아니라고 덧붙일까 하다가 그건 참았다. 말이라는 게 어디서 어떻게 전해질지 모르는데 함부로 입을 털다가 잘못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미리 말하지 않은 조직원들도 이해가 되었다. 이 바닥에서 혓바닥 잘못 놀렸다가 어떻게 되는지는 뻔하니."아무튼 개기지 말고, 눈 마주치면 눈 깔고. 뭐 시키면 '네, 알겠습니다.' 그것만 해. 알겠어들?""놀리는 거구만.""아! 그런 겁니까?" 속을 뻔했잖습니까."만식은 답답했지만 그 이상 설득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자신이어도 당해보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으니까."다들 목숨이 소중하면 뼈에 새겨......""분명 박기찬이 뭘 알 텐데.""보스한테 여자 생긴 것 같다고 제일 먼저 말한 것도 그 놈이잖아."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댔던가, 그런 얘기를 수군거리고 있는 곳에 기찬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만식은 안 좋은 예감이 들어 털이 쭈뼛 섰다."보스가, 3분 안에, 허억, 집에서 다 꺼지랍니다... 흐억...!"만식은 기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지금의 도혁은 주하와 같이 있다. 즉, 기찬이 전달한 명령이 보스의 명령인지 주하의 명령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3분이라는 시간이, 보스에겐 그냥 '빨리'라는 상징적인 의미처럼 쓰일지 몰라도 주하가 쓴 거라면 절대로 지켜야만 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만식은 '최대한 빨리'가 아니라 '무조건 3분 안에' 이 집에서 나갈 생각이었다."으응...?"다
"아아. 뭐... 다음에 기회 되면 한 번 불러줘.""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전화 한 통이면 지금도 올 텐데."정말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당장 전화를 걸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정도였다.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 유혹적인 거라니, 지금까지는 미처 몰랐다. 주하는 얼른 노트로 눈을 돌렸다. 태연하게 굴어야만 했다."응."그렇게 학문에 깊은 관심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옥을 눈으로 보고, 취향에 꼭 맞는 인테리어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궁금한 게 생겼다. 졸업반이라서 더 눈이 가는 건진 모르겠지만."점심이라도 먹고 계속 보는 게 어때요?""아. 밥, 먹어야지. 나가서 먹어?""아뇨. 별채에 식당이 있어요."식당? 주하는 되묻지 않고 얌전히 도혁을 따라갔다. 가면서 왜 안채를 본채라고 부르는지, 언제쯤 한옥을 완성했는지 같이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순간이 없었고 그녀는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다. 건물들 사이사이가 워낙 넓어서 별채까지 가는 동안 한참 걸렸는데도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였다."여긴 또 뭐야?"족히 서른 명은 앉을 수 있는 식탁과 의자가 한 공간에 놓여 있었다. 여느 레스토랑 부럽지 않은 모습으로. 과 사람들을 데려와서 같이 토론이라도 해보고 싶을 정도로 눈이 돌아가는 공간들 뿐이었다."한식으로 준비했는데 괜찮아요?"식당엔 두어 명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역시 도혁과 같이 나타난 주하를 보고 인사도 못 한 채 자리를 떴다. 주하는 계속 먹어도 된다고 말할 틈도 없이 사라지는 남자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식당에 덩그러니 남겨진 식기들을 보고, 도혁을 다시 바라보았다. 도혁은 아무렇지
오주하. 만 23세. 생일은 11월 17일. 현재 한서대학교 건축학과 5학년 2학기 재학 중. 9학기 중의 6학기는 과에서 1등. 전액 장학금. 졸업 후에 취업 예정. 가족은 부모님, 그리고 고등학생인 여동생 한 명. 가족들은 지방 거주. 그래서 서울에 혼자 자취 중이고, 위치는 학교 앞 원룸. 부모님은 평범한 회사원.별다를 것 없는 정보의 나열이었는데 읽는 내내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감정이 끼어들 틈 같은 것은 없는 종이 한 장이었는데도, 심드렁하던 주하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성철아.""예, 형님."성철은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성철은 그저 씩씩하고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정리는 어떻게 되어가냐.""그... 게..."그러나 이어지는 질문에 성철은 당황해서 옆 사람을 보았다. 그는 무슨 정리냐고 묻지도 못하고, 무슨 대답이든 하긴 해야 해서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눈으로 SOS를 보냈다. 하지만 모인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정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성철은 어쩔
"어때? 가족 때문에 빚이 좀 있긴 한데, 학교 선생님이야. 괜찮아."도대체 뭐가 어떻냐는 건지. 도혁은 술병을 빼앗아 자신이 따르고, 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단숨에 한 잔을 다 마셨다. 술이 조금 들어가면 어제와 같은 상태가 될지도 몰랐다."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스타일로 준비를 해본 건데?"하지만 도혁의 옆에 앉은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여기서 소개팅하겠다는 건 아니었기에 그는 그저 술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숨을 골랐다. 하룻밤. 그
도혁은 뭐라고 저장해야 할지 몰라 저장도 못한 11자리의 핸드폰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취할 정도로 마신 건 아니라지만, 아침이 되니 정신이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실 무슨 생각으로 번호를 받아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대체 그 여자랑 뭘 하겠다고. 짧은 해프닝으로 끝내면 그만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어제를 기점으로 성욕이 돌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형님! 계십니까? 들어가도 됩니까?""왜."그는 곧장 씻으러 가려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