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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진한 블랙 체리 냄새와 섞여 어두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성은 구석으로 밀려난 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발버둥쳤다.
띠, 띠띠-띠.
갑자기 들려오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소연이 들어왔다. 또각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고, 적갈색 손가방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졌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한데, 소연은 마치 제 집인 양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우성을 찾아낸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아이 참, 또 왜 이러고 있어-”
소연의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화려한 눈화장과 생기 넘쳐 보이는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을 밝게 비췄다. 우성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살짝 숙이며 말했다.
“밥 또 안 먹었지? ...가만있어 봐, 내가 뭐 좀 해 줄게.”
“...왜 또 왔어?”우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부엌으로 향하는 소연에게 겨우 닿았지만 금세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소연은 일어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며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오늘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100일째더라. 시간 진짜 금방 가지?”
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녀의 물음에 우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소연이 새삼 얄미워졌다.
‘...100일.’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어 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이 말하면 좀 대꾸를 해 줘야지. 말하는 사람이 무안하잖아.”
“...그만하고 가. 어차피 안 먹어.”우성의 차가운 말투에 소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안 먹기는 왜 안 먹어. 굶어 죽게? 차려 놓고 갈 테니까 꼭 먹어.”
“...”우성은 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헤어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깐 지켜보던 소연은 정적 속에서 요리를 계속했다.
그녀가 우성이 좋아하던 음식을 다 만들었을 무렵, 핸드폰 진동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연은 가볍게 수건으로 손을 닦고 가방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응... 이제 나가... 응.”
그녀와 대화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와 우성의 신경을 건드렸다. 소연은 통화를 마치고 가방을 챙기며 우성을 향해 말했다.
“...식기 전에 꼭 먹어! 나 갈게.”
우성은 그녀의 얼굴을 외면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방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오지 마.”
짐짓 단호한 우성의 목소리에 소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다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또 올게.”
쿵-
띠리리-현관문이 닫히자 우성은 다시 어둠 속에 갇혔다.
---
거친 말발굽 소리가 북문을 지나 곧장 관아 쪽으로 이어졌다. 안쪽 문을 지키던 포졸들은 다급한 전령의 모습에 긴장한 표정으로 그가 말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흙먼지와 땀이 뒤섞여 얼굴과 옷에 묻은 모습은 그가 먼 길을 급하게 달려왔음을 짐작하게 했다.
“경중에서 급보요. 사또께 바로 올리시오.”
그가 숨을 헐떡이며 품 안에서 꺼낸 조금 젖은 봉문은 곧장 사령의 손에 들려 남원부사 성안의에게로 향했다. 부사는 급히 육방의 아전들과 관리들을 부른 후 봉문을 뜯기 시작했다.
大行大王 升遐
[대행대왕 승하]부사의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평소의 사또답지 않은 모습에 방 안의 숨들도 함께 멎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바로잡은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지금부터 국휼이니, 각 고을은 백성에게 효유하고 계령을 시행하라. 혼례와 음악, 잔치와 도살을 일절 금하고 모든 이가 상복을 갖추게 하라.”
이 무거운 소식은 곧장 기녀들의 분 냄새를 흩으며 교방으로 들어왔다. 동기(童妓)들을 가르치던 연서는 소식을 들은 즉시 얼굴의 화장기를 모두 없애고 소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이들도 불러들여 상복을 입히기 시작했다.
“스승님, 국휼이 뭐예요?”
한 아이가 묻자 너도나도 궁금하여 연서 곁으로 조금씩 몰려들었다. 연서는 그런 아이들이 귀여웠으나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라의 아버지이신 전하께서 돌아가셨단다. 매우 슬픈 일이니 너희는 웃음기를 보이지 말고, 배우던 악기도 잘 닦아서 넣어 놓거라.”
“예, 스승님-”아이들의 대답에 연서가 남몰래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흘린 옷가지들을 주우며 정돈을 시작했다. 그러다 대문 밖에서 사람을 찾는 소리가 나자 움직임을 멈췄다.
“안에 누구 있느냐! 아전 나리의 명이시다.”
그 소리를 들은 연서는 직접 나가서 아전이 보낸 사령을 만났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명을 받드는 연서의 소복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령은 연서의 얼굴을 아는 듯, 그녀에게 곧장 명을 전하며 말했다.
“부사 나리께서 너를 찾으시니, 동헌으로 즉시 오라는 명이시다. 속히 준비하여 오도록 하거라.”
“예, 알겠습니다.”그녀가 몸을 숙여 인사하자, 사령은 왔던 길로 돌아갔다.
---
지잉- 지잉-
핸드폰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서 울어대는 소리에 우성이 번쩍 눈을 떴다.
[엄마]
그는 폐인처럼 지내는 자기 모습을 엄마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부끄러웠다. 우성이 잠깐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잘 지내고 있니?]엄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차분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우성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뭐... 그냥 있어요. 무슨 일 있으세요?”
[으응,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어.] “아...”우성은 잠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놀라 말을 잇지 못하자 정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 갑자기 가셔서 우리도 마지막을 못 지켜드렸어... 놀랐지? 미안해. 경황이 없어서 이제야 연락한 거야. 일단은... 여기 근처 장례식장 잡았으니까, 준비해서 내려와.]
“네...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조심해서 와. 주소 찍어 줄게.] “네.”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침묵하던 우성이 마침내 결심한 듯 고요함을 흩으며 일어났다. 그는 가장 좋은 모습으로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깨끗이 씻고 면도하기 시작했다.
우성이 길어져 버린 앞머리를 뒤로 완전히 넘기자,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는 빗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부고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우성은 망설이던 끝에 핸드폰을 들어 잊고 있던 친구의 이름을 찾아냈다.
[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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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부사는 예방 아전과 함께 연서를 기다렸다. 그래도 처음 파발을 맞이했을 때보다 훨씬 나아진 부사의 얼굴을 보며 아전이 말했다.
“그래도 망곡례에 필요한 물품이 부족하지 않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이게 다 아전 덕이 아니겠소? 예방에서 이리 신속하게 처리를 하니 내 마음이 이리 든든하오.” “그것은 과찬이시옵니다, 나리. 전패와 향로는 이미 내려오던 것이 있사옵고, 백포 역시 춘향이가 계속 쌓아 두었으니, 저의 공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춘향의 공을 치하하심이 옳은 줄로 아룁니다.”아전이 손사래를 치며 공을 연서에게로 돌리자마자, 그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 부르신 교방의 춘향이 왔습니다.”
연서에게 명을 전하러 갔던 사령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연서는 툇마루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사또의 허락을 기다렸다.
“어서 들여보내라.”
안의의 허락에 연서는 집무실로 들어섰다.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에서 나는 끼익 소리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그녀의 방문을 환영했다. 연서는 그녀를 반기는 부사와 아전을 향해 인사를 올려 예를 갖추며 말했다.
“부르셨습니까, 나리.”
“예방에서 네 칭찬이 멈추질 않아 내가 직접 불러 치하하고자 하니,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예식이 끝나는 대로 들어주겠다.”연서는 더욱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나리의 말씀이 너무나 과분하시니, 소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연히 준비할 시간이 있었을 뿐이고, 아직 관아에는 포목이 부족하니 제게 공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성 부사는 그녀의 겸손한 대답에 흡족한 마음이 들어 아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방의 인물들이 이토록 의로우니, 마음껏 기뻐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다. 네 정녕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겠느냐?”
연서는 부사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시려거든 교방 사람들 모두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모두가 준비한 것이니, 저만 받는다면 분명 제게도, 그리고 나리들께도 원망이 일게 될 것입니다.”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에 아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정 그렇다니 내가 다른 방도로 교방에 하사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이만 물러가도 좋다.”
성 부사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연서의 마음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시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리고 방에서 되돌아 나왔다.
연서가 동헌을 나서자 저 멀리 관아 바깥문 근처에서 기생 몇 명과 말다툼하는 아이가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가르치는 동기 중 하나인가 싶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내 그 아이가 그녀의 동생 어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겉모습은 껍데기일 뿐, 내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니들께서는 알지 못하십니까?”
당찬 어진의 말이 연서의 귀에 들려왔다. 홍란이 비웃으며 대답했다.
“내실이 좋으면 겉으로도 드러나는 법이다. 자고로 세상에는 생김새로 쓰임새가 나뉘는 것이니, 약초나 캐는 것이 너희들과 어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 치졸함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너의 말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구나.”연서가 낮은 목소리로 홍란의 말에 반박하며 다가왔다. 홍란은 기다렸다는 듯 연서를 훑어보며 물었다.
“부사 나리께서 집이라도 하사하신답니까? 길쌈 좀 한다고 총애가 너무 심하시니, 기생들 사이에서 말이 자꾸 오가는 것입니다.”
홍란의 말에 그녀를 따르는 기생들이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기 어린 말에 연서는 대꾸하지 않고 어진의 손을 잡아 이끌며 걸어 나갔다. 기생 하나가 비웃으며 말했다.
“저리 못난 얼굴로 대체 어떻게 사또 나리와 아전 나리를 꼬셨을까요?”
그녀의 선을 넘는 말에 어진이 몸을 휙 돌렸지만, 이내 연서가 팔을 잡아 다시 당겨 데려갔다. 어진은 분한지 씩씩거리며 연서에게 말했다.
“언니는 분하지도 않아요? 어떻게 저런 모욕을 당하며 살아요?”
“...”연서는 자꾸만 발에 치이는 작은 돌들과 먼지를 유심히 보기만 할 뿐 어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어진은 속상함이 가시지 않는지 계속해서 울분을 토해냈다.
“저라면 이렇게는 못 살아요.”
그녀의 말에 연서가 가볍게 실소했다.
“못 살면 어쩌겠니? ...죽을 수도 없지 않니.”
“아니이... 그런 말이 아니라...”어진은 연서의 물음에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연서는 그런 어진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살다 보면 이런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라도 살아 있으니, 관아에서 식구들 몫까지 나오잖아.”
연서의 타이르는 말에 어진이 ‘누가 사기 아니랄까 봐 되게 진지하네’라며 구시렁거렸다. 연서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둘은 초봄의 따스한 햇빛을 미처 느끼지 못하고 계속 길을 걸어갔다.
우성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책을 보던 연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며 목덜미가 물기로 번들거리는 걸 보니 막 씻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이제는 하루에 두 번씩 씻기로 하신 거예요?”우성이 방문을 닫으며 대답했다.“아... 근데 오늘은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연서는 읽던 책을 뒤집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은 우성이 계속 말했다.“오늘 밭에다 거름 뿌렸거든요. 냄새가 와... 안 씻을 수가 없어요 진짜.”“아~ 그럼 꼭 씻어야죠. 아예 그 옷도 벗고 들어오시지... 흠흠, 냄새가 좀 나는 거 같은데...”연서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속옷만 입고 들어오려고 했으면 춘향 씨가 그 책 집어던졌을 거 같은데...”“...”이에 연서는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분명 그랬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점점 알아 가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웃옷을 벗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서는 그의 옷이 생각보다 많이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여러 생각을 하던 연서가 웃옷을 벗어 놓는 우성에게 말했다.“처음 하는 일들이라 많이 힘드셨죠?”우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음... 힘들기보다도 좀... 더러워서... 그리고 잘못하기도 했고요. 분이할멈이 어찌나 잔소리를 많이 하시던지...”그의 말을 듣자 연서는 웃음이 났다. 분이할멈의 평소 말투를 잘 아는 그녀였다. 연서가 혼자 웃는 걸 보며 우성이 계속 말했다.“제가 그 긴 바가지를... 뒷간에서 사용하고 나서 손에 들고 밭까지 걸어갔더니, 그걸 왜 들고 다니냐면서 역정을 막 내시더라고요. ‘그건 왜 흔들고 댕겨-!’”연서는 우성의 말에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걸 들고 다녔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하하하-”“아니, 미리 말을 해 주던가... 그리고 밭에 뿌리래서 막
우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뒷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국화밭에 뿌릴 거름을 퍼 오라는 금선의 말이 다시 생각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그는 문을 열기도 전부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냄새에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보다 어린 어진이도 하던 일이었다. 사내로서의 자존심과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의 몸을 조금씩 밀기 시작했다. 그는 지게와 분뇨통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더 이상 가까이 가기도 싫은지, 우성은 긴 자루바가지를 들어 나무판자를 툭툭 쳐서 옆으로 벌리고는 조금씩 분뇨를 뜨기 시작했다. 메스꺼워 헛구역질이 날 판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의 생활이 그리웠다.조심스레 바가지로 거름을 푸던 우성은 분뇨통이 어느 정도 차자, 자루바가지를 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바가지에 묻은 오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얼빠져 있던 우성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바가지를 문밖으로 빼냈다. 인근에 있는 풀밭에 응급처치를 하고는 눈을 감고 숨을 참으며 통을 들어 지게에 실었다.“하아... 하아...”그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폐활량을 탓하며 다시 지게를 졌다. 자신의 집에 있던 편리하고 깨끗했던 화장실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다른 불편함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고 감수할 만했지만, 화장실 문제만큼은 그를 몹시 힘들게 했다. 첫날이야 아무 데나 소변을 보면 됐지만, 둘째 날 뒷간을 처음 이용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어? 그래서 자꾸 변명할 때 뒷간이 생각나는 건가...”중얼거리던 우성은 분이할멈의 국화밭을 향해 걸어갔다.---차분히 책을 읽던 연서는 허리가 아픈지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찌뿌둥함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늘였다. 그러다 통증이 꽤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어 보았다. 여전히 아프기는 했지만, 처음 맞았을 때나 다음 날 약주를 부었을 때의 아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집 밖으로 볶은 결명자의 구수한 냄새가 넘쳐 흘렀다. 어진은 금선이 볶아 놓은 결명자를 약연으로 갈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금선이 부엌에서 또 다른 바구니를 가지고 나와 어진의 옆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진이 갈아 놓은 고운 가루를 종이에 담아 약첩으로 만들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일이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손발이 척척 맞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아래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누구 있소?”사령 하나가 집 앞에 서서 외쳤다. 어진이 약연을 옆으로 살짝 밀어 놓고 달려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연서가 근신 명령을 어기고 우성과 함께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이십니까?”“아전께서 명을 보내셨다.”어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묵묵히 약첩을 묶을 뿐,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어진은 지레 겁을 먹고 대답했다.“춘향은 지금 뒷간에 잠깐 갔는데...”그녀는 자신도 우성과 똑같은 변명을 해 버렸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하지만 사령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춘향이 아니라 어진이라는 아이에게 전하라 했다. 여기 있느냐?”어진은 깜짝 놀랐다. 일만 하던 금선마저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제, 제가 어진입니다. 말씀하십시오.”어진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령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전의 말을 전했다.“‘올해로 14세가 되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이달 20일에 있을 동기 지원에 응하라. 시험은 20일 오후에 관아의 예방에서 실시하니 교방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올해에 지원하지 않는다면 16세가 되는 해부터 관노비로 일하게 될 것이니 그리 알라.’라고 하셨다.”“예, 알겠습니다.”최후 통첩이었다. 연서가 임진년에 열 살이 되자마자 동기에 지원했던 걸 생각해 보면 꽤 늦은 나이였다. 일반적으로는 이른 나이에 동기가 될수록 더 뛰어난 기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동안 시험을 미루었던 것은 어진이 아니라 관아 쪽이었기에, 조금
마지막 인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연서를 업은 우성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무심코 마당으로 발길을 옮기다 대청에 앉아 있는 어진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돌아섰다. 업혀 있던 연서는 우성이 재빨리 방향을 바꾸자, 금방 상황을 눈치채고 숨을 죽였다.하지만 너무 급하게 몸을 튼 나머지, 몸이 흙벽에 스치며 중심이 흔들렸다. 흙벽이 부스러지며 퍼석 소리가 났다. 담장이 낮았기 때문에 연서를 업은 채로 몸을 완벽히 숨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우성과 연서는 눈을 마주친 채 긴장감을 나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간절함을 배신하며 어진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 앞에 다다른 어진은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아예 숨길 생각도 없네...”우성이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연서는 그에게 매달린 채 어진을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우성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 잠깐... 뒷간을 좀 다녀오고 싶다고 해서...”“...!?”그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연서가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열받은 그녀가 우성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산책보다 더 큰 문제예요...”“흠... 분명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여전히 아녀자와 뒷간 얘기하시는 걸 좋아하시네요.”어진이 비아냥거리듯 그에게 말했다. 두 여자의 협공에 우성은 억울한 기분이 들어 대답했다.“아니 왜 나한테만...”“저야 늘 언니 편이니까 견우님한테만 말씀드린 거고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언니도 곧 혼날 거예요.”그녀가 얄밉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연서도 곤란한 표정을 하며 우성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금선이 문을 벌컥 열며 방에서 나왔다.“그냥 아예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북이라도 치고 오지 그러냐? 그럼 이리 숨어 다닐 필요도 없을 텐데.”연서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우성이 그녀를 다시 고쳐 업으며 금선에게 대답했다.“계속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뎌지고 욕창이 생겨 다른
하루도 쉬지 않던 연서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점점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 일으키자니 팔꿈치와 어깨가 아팠고, 그렇다고 엎드리자니 허리와 목이 불편했다. 조금씩 옆으로 눕는 게 가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동 범위가 극히 좁아 답답했다.삼십 대를 굳이 맞아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지만, 이내 그녀의 자존심이 그 생각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한계를 느끼고 독서를 포기했다. 연서는 책을 바닥에 던지듯 툭 내려놓으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책이 바닥에 툭 쓰러지며 [詩經]이라고 쓰인 표지가 보였다.“흐아아-”연서가 책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이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자세로 이미 수없이 읽은 책을 또 읽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이 점차 고요해지는 듯싶었다.“아하하! 아이참, 다시 해 보세요. 왜 이렇게 못 하세요?”바깥에서 어진의 목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다. 우성과 무엇을 하는지 마당에서는 자박자박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곧 우성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이게 지금 무게 중심이 하나도 안 맞는 거 같아요.”“와 진짜 안 해 보셨나 보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사내가 되어서 이런 것도 안 해 보고 뭐 하셨어요?”연서는 너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호기심을 이겨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고, 조심조심 팔꿈치를 짚어 기듯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방문 앞에 도착한 연서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끼익-연서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우성과 어진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에엥? 언니! 왜 일어났어요?”“...뒷간 가시게요?”우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무례한 우성의 말에 연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하... 아녀자한테 그런 거 묻지 마세요... 나 참, 숨 쉬듯 무례하네.”“...”우성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진도 그런 우성을 타박하며 덧
경찰서 안쪽은 민원실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 간헐적으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여성청소년과로 예성을 안내한 경찰은 인계를 마치고 돌아갔다. 사십 전후로 보이는 경위가 그녀를 맞이했다. 예성은 남자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서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까 기본 내용은 들었습니다. 견우성 씨 동생분이라고 하셨죠?”“네.”그는 모니터를 보며 능숙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마지막으로 직접 본 시간하고 장소 말씀해 주시겠어요?”“음... 마지막으로 본 건 저희 본가 OO로 24-1이고요, 시간은... 이틀 전 저녁 7~8시쯤인 것 같아요.”“이틀 전이면... 11월 6일인가요?”경위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성은 그 말에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잠시만요... 네, 맞아요.”“11월 6일... 7시경... 그날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예성은 그날 우성과 차 안에서 다투듯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저랑 말다툼 비슷하게 좀 하긴 했는데... 그 정도는 평소에도 하던 거라 특별히 다르다고 하기엔 좀 그래요... 제일 이상한 건 차가 그대로 있고 사람만 없어졌다는 거예요.”“... 차는 있는데 사람이 없다... 실종자가 평소에 우울증이나 병을 앓고 있었나요?”그의 말에 예성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정확히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병이 있지는 않았어요.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우울 증세가 좀 심하게 오긴 했었는데...”“...우울 증세... 또 있을까요?”그제야 예성은 상태의 방문이 떠올랐다.“아...! 잠시만요.”그녀가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상태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오빠가 없어진 직후에 자칭 형사 한 분이 와서 이걸 주고 갔어요.”“형사요...?”경위가 예성이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시간관리국? 이런 부서는 없는데... 직접 받으신 거예요?”그가 명함을 뒤집어 이리저리 보며 물었다. 예성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