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4 서쪽으로 간 목동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 “춥겠다...” 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낯선 기계였다. 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 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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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3 베 짜는 여인아침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연서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밤새 식지 않은 아랫목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며 이불과 요를 차례로 개어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서는 빗을 들어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어질 때마다,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단정히 머리를 매만지고 소복을 챙겨 입었다. 흰 옷고름을 여미는 손길이 빠르고 능숙했다.바깥으로 나온 연서는 아직 희미한 어둠이 남은 마당을 한 번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아침 이슬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쌀을 헤아리고 물을 맞추어 솥에 안치기 시작했다. 작은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서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넣고 입김을 불어넣자, 이내 잔불이 빨갛게 타올랐다.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진이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연기 냄새를 맡자마자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서의 옆으로 다가왔다.“...벌써 일어났어요?”연서는 대꾸 대신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어진은 한 손으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크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와도 돼.”연서가 불길을 살피며 말했다. 어진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예? 왜요?”“응, 언제 끝날지 몰라서. 국휼 이후 첫 일과잖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해져서, 언제 마칠지도 몰라.”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손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그럼 저는 계속 어머니랑 일해야 돼요? 관아 가는 길이 유일한 쉬는 시간인데...”어진의 서운한 말투에 연서는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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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2 같은 향, 다른 시대향 냄새가 장례식장 안을 침울하게 메웠다. 부모 곁에서 조문객을 맞던 우성은 친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초겨울이 스며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천호가 그대로 멈추어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코트 차림의 예진도 토트백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서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짧은 침묵이 흐른 후, 천호가 조심스럽게 우성에게로 걸어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서둘러 채우려는 듯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았다. 우성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입을 열었다.“...와 줘서 고맙다.”초췌한 우성의 모습을 본 예진은 눈물이 났지만,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부터 꺼냈다.“연락하고 사는 게 어렵냐? 이럴 때만 부르고 있어...”“그러지 마. 이럴 때라도 부른 게 어디야. 난 얘 어떻게 된 줄 알았어.”천호와 예진의 타박에 우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가 손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천호와 예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꾸벅 목례하며 말했다.“많이 힘드시죠?”천호의 다정한 말에 정희가 대답했다.“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이니?”그녀가 우성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우성이 그녀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아, 여기는 제가 다니던 병원의 원장 옥천호, 그리고 여기는 그 앞에서 카페를 하는 도예진이에요. 둘 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예요.”“그렇군요, 늘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보네요.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얼른 저기 가서 식사부터 해요.”정희가 우성과 친구들을 살갑게 챙기며 말했다. 천호와 예진은 얼떨결에 정희의 손에 끌려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우성이 너도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어. 계속 서 있었잖아.”정희의 말에 우성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어쩐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천호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나누어 놓으며 우성에게 물었다.“그... 물어봐도 돼?”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천호에게 우성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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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1 시작은 끝으로부터째깍-째깍-시곗바늘이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진한 블랙 체리 냄새와 섞여 어두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성은 구석으로 밀려난 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발버둥쳤다.띠, 띠띠-띠.갑자기 들려오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소연이 들어왔다. 또각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고, 적갈색 손가방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졌다.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한데, 소연은 마치 제 집인 양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우성을 찾아낸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아이 참, 또 왜 이러고 있어-”소연의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화려한 눈화장과 생기 넘쳐 보이는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을 밝게 비췄다. 우성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살짝 숙이며 말했다.“밥 또 안 먹었지? ...가만있어 봐, 내가 뭐 좀 해 줄게.”“...왜 또 왔어?”우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부엌으로 향하는 소연에게 겨우 닿았지만 금세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소연은 일어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며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오늘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100일째더라. 시간 진짜 금방 가지?”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녀의 물음에 우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소연이 새삼 얄미워졌다.‘...100일.’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어 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이 말하면 좀 대꾸를 해 줘야지. 말하는 사람이 무안하잖아.”“...그만하고 가. 어차피 안 먹어.”우성의 차가운 말투에 소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안 먹기는 왜 안 먹어. 굶어 죽게? 차려 놓고 갈 테니까 꼭 먹어.”“...”우성은 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헤어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깐 지켜보던 소연은 정적 속에서 요리를 계속했다.그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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