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향 냄새가 장례식장 안을 침울하게 메웠다. 부모 곁에서 조문객을 맞던 우성은 친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초겨울이 스며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천호가 그대로 멈추어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코트 차림의 예진도 토트백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서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천호가 조심스럽게 우성에게로 걸어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서둘러 채우려는 듯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았다. 우성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입을 열었다.
“...와 줘서 고맙다.”
초췌한 우성의 모습을 본 예진은 눈물이 났지만,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부터 꺼냈다.
“연락하고 사는 게 어렵냐? 이럴 때만 부르고 있어...”
“그러지 마. 이럴 때라도 부른 게 어디야. 난 얘 어떻게 된 줄 알았어.”천호와 예진의 타박에 우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가 손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천호와 예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꾸벅 목례하며 말했다.
“많이 힘드시죠?”
천호의 다정한 말에 정희가 대답했다.
“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이니?”
그녀가 우성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우성이 그녀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
“아, 여기는 제가 다니던 병원의 원장 옥천호, 그리고 여기는 그 앞에서 카페를 하는 도예진이에요. 둘 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예요.”
“그렇군요, 늘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보네요.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얼른 저기 가서 식사부터 해요.”정희가 우성과 친구들을 살갑게 챙기며 말했다. 천호와 예진은 얼떨결에 정희의 손에 끌려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우성이 너도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어. 계속 서 있었잖아.”
정희의 말에 우성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어쩐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천호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나누어 놓으며 우성에게 물었다.
“그... 물어봐도 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천호에게 우성이 되물었다.
“뭘?”
“아니... 병원 다시 나오긴 할 거지? ...네 자리 아직 그대로 있어.”조심스러운 말투에도 우성은 천호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괜스레 젓가락을 들어 아무 반찬이나 입에 넣었다.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던 예진이 답답하다는 듯 우성에게 말했다.
“그냥 나와 이제 좀. 내가 소연이한테 카페에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할게.”
“그, 그래. 소연 씨랑 한 계약도 손해 좀 보고 파기하든지 할게.”갑작스레 나온 소연의 이름에 우성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천호가 예진을 팔꿈치로 툭툭 치며 눈치를 보냈지만 예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얘도 계속 수의사 구해 봤는데, 진짜 솔직하게 너만 한 사람이 없어. 지분도 없으면서 자꾸 공동 운영하는 거 아니냐고 돈 더 달라고 따지는 아저씨도 있었어.”
“...” “그리고 소연이 걔가 나쁜 년인 거 내가 인정할게. 걔가 아주 얼씬도 못 하게 할 테니까 제발 복귀해서 다시 좀 열심히 살아.”예진이 우성의 손목을 잡으며 그를 설득했다. 그 모습을 본 천호가 슬쩍 예진의 손을 치우고 자신의 손을 우성의 손 위에 올리며 말했다.
“그래, 제발. 내가 걔 잊으라고는 안 할게. 그래도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잖아.”
우성은 천호에게서 손을 슬쩍 빼며 대답했다.
“고마워... 생각해 볼게. 근데 지금은 정신이 좀 없네.”
“...”우성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예진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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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정신이 하나도 없네... 다녀왔어요!”
연서가 약초가 한가득 담긴 바구니를 반들반들한 툇마루에 올려놓았다. 어진은 곧장 마당을 지나 안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도 큰 소리로 금선을 향해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잠시 후, 안방 문이 끼익 열리며 금선이 얼굴을 내보였다. 그녀가 아직 평상복 차림인 것을 본 연서가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달여 놓은 약재 냄새가 방 안에서 옅게 풍겨 나왔다. 두 사람의 옷차림을 본 금선이 물었다.
“무슨 일이 난 게냐? ...아까 바깥에서 소리가 많이 나던데.”
“네, 큰일이 났지요. 전하께서 이틀 전에 승하하셔서, 오늘부터 국상이에요. 마땅한 상복이 있으세요?”이에 금선이 혀를 차며 대답했다.
“...그간 전쟁 나고 상복 벗을 날이 없었는데 그 무슨 우스운 질문이냐?”
그녀의 말에 연서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 걱정을 해 드려도 뭐라셔요? ...곧 저녁밥 지을 테니 상 놓을 자리 만들어 놓으세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연서의 뒤를 어진이 따라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방문이 닫히자, 금선은 상복을 꺼내기 위해 몸을 일으켜 낡은 농으로 다가갔다.
이리저리 옷을 찾던 그녀는 남자 옷을 발견하고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단정하게 개어져 조금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 그 옷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옆으로 치워 놓고 계속해서 자신의 상복을 찾았다.
한편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던 연서와 어진은 남겨 둔 고기를 지금 먹어도 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국휼에는 고기 금지라면서요. 지금 국에 넣으려는 이거, 이거 고기 아니에요?”
“거, 건들지 말어. 손모가지 날아간다?”연서가 진지한 표정으로 어진이 낚아챈 고깃덩이를 가리켰다. 어진이 짚으로 묶인 고기를 더욱 흔들어 대며 말했다.
“지금 이거를 국에다 넣어서 한 번에 처리하겠다, 이럴 작정이 아니냐고요.”
“사설이 길구나, 우리 어진이가. 국상에서 금지된 건 도축이지, 육식이 아니잖아.”이에 어진이 연서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말이 그 말이죠. 동기들한테도 고기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하아... 너 그럼 이걸 버리니? 아깝게. 왜란 때 굶어 죽을 뻔한 걸 다 잊어버렸어? 그리고 우리가 고기를 먹는지 안 먹는지 누가 안다고 갑자기 난리야?” “하늘이 알죠, 하늘이.”연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구수한 밥 냄새가 퍼지고 국 끓는 소리만 이어지며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연서가 포기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얇게 썰어서 소금으로 절이고 말려서 졸곡 이후에 먹자. 그건 괜찮지?”
“괜찮고 말고요. 그때 먹기로 하죠.” “에휴... 그 고기를 어떻게 구한 건데... 너는 아무래도 고생을 덜 한 거 같아, 내 생각에는.”연서의 비난에도 어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기를 꺼내 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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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담배도 안 피는 애가 여긴 왜 왔어?”
예진이 의외라는 듯 우성에게 물었다. 그 말에 우성이 주위를 슥 둘러보며 말했다.
“그냥... 맑은 공기 좀 마시고 싶어서.”
그의 엉뚱한 말에 예진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무슨 흡연장에 와서 맑은 공기 타령이야.”
“...”우성이 오돌토돌한 벽에 몸을 툭 기댔다. 그의 시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허공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익숙한 또각거림이 낯선 뚜벅거림과 함께 들려왔다. 우성과 예진은 본능적으로 발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울 코트에 딱 붙는 니트 원피스를 입은 소연이 정장 차림의 남자와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우성과 예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당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내 두 사람의 불쾌한 구두 굽 소리가 우성과 예진의 앞에서 멈추었다.
“...나는 왜 안 불렀어?”
그녀의 목소리에 우성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그녀를 마주하기 힘들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예진이 연기를 후- 길게 내뱉으며 소연이 하는 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소연은 예진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우성만을 바라보며 계속 말했다.
“나 할머님하고 아는 사이잖아. 이러면 내가 서운하지...”
“...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참다 못한 우성이 고개를 들며 따져 물었다.
“할머님 카톡 프로필에 부고장이 올라왔던데.”
어색한 바람이 그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제 괜찮다고.”
“...”소연이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예진은 돌아가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 두 사람을 계속 번갈아 쳐다보았다. 뭔가를 생각하던 소연이 옆의 남자의 팔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여기는 내 남자 친구. 여기까지 태워 준다길래 같이 왔는데, 괜찮지? 전 남친 조부모님 장례라고 했는데도 엄청 쿨하게 태워 줬어.”
“어휴... 미친년.”예진이 참다 못해 욕을 뱉었다. 이에 소연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데 욕이나 하고 너무하네. 그리고 너는 ‘내’ 친구잖아... 왜 오빠가 아니라 나한테 그래?”
“친구니까 하는 말이야, 이 정신 나간 년아. 대체 뭐 하는 건데, 이게?”예진이 화가 난 표정으로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소연도 기분이 나쁜지 웃음기가 사라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앞선 소연의 소개와는 다르게, 그녀의 ‘남자 친구’는 마냥 쿨하지는 않은지 우성을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우성은 이 불쾌한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서 소연에게 말했다.
“가.”
“...진짜 너무한다, 오빠. 여기 왕복 여섯 시간이란 말이야. 차 막히면 일곱 시간이고.”소연이 툴툴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진과 우성을 보며 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미소 지으며 우성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연락할게. 부의도 많이 했으니까 나중에 답례품도 줘야 돼, 알았지?”
소연의 말에 예진은 화가 나는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우성은 걸어가는 소연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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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를 널고 솥에 기름칠까지 한 연서는 마침내 길고 긴 하루 일과가 끝났음에 마음이 기뻤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곧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처마 밑의 약재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바스락거렸다. 맑은 밤공기가 연서의 마음도 한결 가볍게 했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오자, 따뜻한 종이 냄새가 흙 냄새와 뒤섞여 나고 있었다. 서둘러 아랫목에 요와 이불을 깐 그녀는 베개를 목 뒤에 받치고 누웠다. 연서가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하아...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국휼 선포로 일정에 여유가 생긴 연서는 은근히 설레었다. 국상이 정기적으로 생기면 좋겠다는 굉장히 불충한 생각마저 잠깐 했다.
수년 전에 있었던 의인왕후의 국상 때 그녀는 꽃다운 열여덟이었다. 기생으로서 정진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는 어느새 스물여섯의 어엿한 사기가 되어 있었다.
‘그땐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더 일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쉬는 게 더 좋아.’
점점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불충을 합리화하던 연서는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에 휩쓸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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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에 뒤척이던 우성은 몸을 일으켜 유족 휴게실 안을 둘러보았다. 기껏해야 네 명 남짓 누울 수 있는 공간이었지만 우성은 왠지 넓은 자신의 집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잠 못 드는 우성을 발견한 예성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안 자고 뭐해?”
“어? 아... 잠이 잘 안 오네.”우성이 멋쩍은 말투로 대답했다. 예성은 하품을 크게 하고는 우성에게 말했다.
“잠이 안 오면... 가서 지키고 서 있든가.”
“...”예성의 무심한 말에 우성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결국 우성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가만히 앉아 오래된 냉장고가 내는 소리를 듣던 우성은 본의 아니게 소연이 했던 이상한 행동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아니, 원래부터 이상했었는데 이제야 발견한 걸 지도.
여튼 이별 후에도 계속 찾아오는데다, 아무렇지 않게 새 남자 친구를 전 남친에게 데려오는 행동들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전 남친을 보러 가겠다는 여친을 따라오는 그녀의 ‘쿨한 남자 친구’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싶었던 마음에도 처음으로 균열이 일었다. 이번에는 정말 그녀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우성은 밤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는 채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만 듣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춥겠다...”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낯선 기계였다.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숫자들을 보았다
아침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연서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밤새 식지 않은 아랫목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며 이불과 요를 차례로 개어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서는 빗을 들어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어질 때마다,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단정히 머리를 매만지고 소복을 챙겨 입었다. 흰 옷고름을 여미는 손길이 빠르고 능숙했다.바깥으로 나온 연서는 아직 희미한 어둠이 남은 마당을 한 번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아침 이슬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쌀을 헤아리고 물을 맞추어 솥에 안치기 시작했다. 작은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서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넣고 입김을 불어넣자, 이내 잔불이 빨갛게 타올랐다.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진이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연기 냄새를 맡자마자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서의 옆으로 다가왔다.“...벌써 일어났어요?”연서는 대꾸 대신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어진은 한 손으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크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와도 돼.”연서가 불길을 살피며 말했다. 어진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예? 왜요?”“응, 언제 끝날지 몰라서. 국휼 이후 첫 일과잖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해져서, 언제 마칠지도 몰라.”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손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그럼 저는 계속 어머니랑 일해야 돼요? 관아 가는 길이 유일한 쉬는 시간인데...”어진의 서운한 말투에 연서는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
향 냄새가 장례식장 안을 침울하게 메웠다. 부모 곁에서 조문객을 맞던 우성은 친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초겨울이 스며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천호가 그대로 멈추어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코트 차림의 예진도 토트백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서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짧은 침묵이 흐른 후, 천호가 조심스럽게 우성에게로 걸어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서둘러 채우려는 듯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았다. 우성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입을 열었다.“...와 줘서 고맙다.”초췌한 우성의 모습을 본 예진은 눈물이 났지만,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부터 꺼냈다.“연락하고 사는 게 어렵냐? 이럴 때만 부르고 있어...”“그러지 마. 이럴 때라도 부른 게 어디야. 난 얘 어떻게 된 줄 알았어.”천호와 예진의 타박에 우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가 손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천호와 예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꾸벅 목례하며 말했다.“많이 힘드시죠?”천호의 다정한 말에 정희가 대답했다.“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이니?”그녀가 우성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우성이 그녀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아, 여기는 제가 다니던 병원의 원장 옥천호, 그리고 여기는 그 앞에서 카페를 하는 도예진이에요. 둘 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예요.”“그렇군요, 늘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보네요.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얼른 저기 가서 식사부터 해요.”정희가 우성과 친구들을 살갑게 챙기며 말했다. 천호와 예진은 얼떨결에 정희의 손에 끌려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우성이 너도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어. 계속 서 있었잖아.”정희의 말에 우성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어쩐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천호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나누어 놓으며 우성에게 물었다.“그... 물어봐도 돼?”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천호에게 우성이 되
째깍-째깍-시곗바늘이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진한 블랙 체리 냄새와 섞여 어두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성은 구석으로 밀려난 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발버둥쳤다.띠, 띠띠-띠.갑자기 들려오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소연이 들어왔다. 또각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고, 적갈색 손가방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졌다.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한데, 소연은 마치 제 집인 양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우성을 찾아낸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아이 참, 또 왜 이러고 있어-”소연의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화려한 눈화장과 생기 넘쳐 보이는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을 밝게 비췄다. 우성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살짝 숙이며 말했다.“밥 또 안 먹었지? ...가만있어 봐, 내가 뭐 좀 해 줄게.”“...왜 또 왔어?”우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부엌으로 향하는 소연에게 겨우 닿았지만 금세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소연은 일어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며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오늘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100일째더라. 시간 진짜 금방 가지?”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녀의 물음에 우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소연이 새삼 얄미워졌다.‘...100일.’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어 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이 말하면 좀 대꾸를 해 줘야지. 말하는 사람이 무안하잖아.”“...그만하고 가. 어차피 안 먹어.”우성의 차가운 말투에 소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안 먹기는 왜 안 먹어. 굶어 죽게? 차려 놓고 갈 테니까 꼭 먹어.”“...”우성은 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헤어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깐 지켜보던 소연은 정적 속에서 요리를 계속했다.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