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
“춥겠다...”
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낯선 기계였다.
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
‘...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
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숫자들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시계도 아니고, 날짜 같지도 않았다.
우성이 그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흰 고양이가 그의 옆을 날렵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볍게 뛰어오른 고양이는 표시된 숫자 아래에 있는 빨간 버튼을 툭 밟고 지나갔다.
지잉—
낮고 가느다란 소리가 기계 속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우성은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기계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나오며 빠르게 주변을 삼키기 시작했다. 구체 형태로 퍼지는 빛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맥동했다.
“어...?”
우성이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고양이가 언제 다리를 절었느냐는 듯 땅으로 내려와 사뿐사뿐 우성에게서 멀어졌다. 곧이어 기계에서 훨씬 큰 진동음이 터져 나왔다. 웅웅 울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고, 주변의 어둠이 마치 물결처럼 일그러졌다.
우성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밧줄로 묶인 듯 그의 몸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성의 몸은 그대로 빛 속에 삼켜졌다.
집 뒤편에는 다시 적막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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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는 교방 구석에 놓인 베틀 앞에 앉아 실타래를 하나씩 점검하고 있었다.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으나, 등 뒤로 꽂히는 시선까지 모를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홍란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웃음기를 띠고 있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연서는 못 본 척 실의 끝만 손끝으로 정리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홍란이 손에 들고 있던 천 조각을 툭 내려놓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예도 무릇 계속 익혀야 녹슬지 않는 법인데... 시라도 한 수씩 지어 보는 것이 어떠냐?”
그 말에 곁에 있던 기생 하나가 금세 맞장구를 쳤다.
“좋은 생각이네. 손만 놀리자니 심심하던 차인데.”
연서는 실을 감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은 나중에 하고, 하라는 바느질이나 먼저 해라.”
홍란은 그 말을 듣고도 꺾일 줄 모른 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고, 사기는 마음도 급하시지. 우린 그저 잠깐 머리라도 식혀볼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년들보다 먼저 스승님께 내 시 한 수 지어 드리고 싶으니 사양 마시지요.”
그러더니 홍란은 곁의 기생이 내민 붓과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금방 곁으로 모여들었다. 한동안 먹 가는 소리가 방 안을 서걱서걱 채우며 긴장감을 돋우었다. 홍란의 행태가 어처구니없던 연서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차며 그녀를 무시했다.
잠시 후, 먹을 다 갈았는지 홍란은 허공을 응시하는 척하다가 곧장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꽤나 철저히 준비한 듯 거침없이 글씨를 써 내려가더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완성된 시를 한 번 훑고 옆의 기생에게 턱짓했다.
“네가 읽어 보아라.”
종이를 받아 든 기생은 기다렸다는 듯 목을 가다듬고는, 종이 위에 적힌 글귀를 훑어본 뒤 뜻을 풀어 또렷한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妙手難遮貌不姝
雖能織錦色猶枯 堪憐絕技終何用 卻使旁人笑此軀“빼어난 손재주로도 곱지 않은 얼굴은 가릴 수 없고,
비단을 짤 줄 알아도 그 낯빛은 여전히 시들었구나. 가련하다, 그 뛰어난 재주가 끝내 무슨 소용인가. 도리어 보는 이들이 그 몸을 비웃게 할 뿐이로다.”낭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교방 안을 찔렀다. 몇몇 기생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홍란은 손끝으로 입가를 슬쩍 가리며 연서 쪽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홍란의 태도에 연서의 손끝이 멈췄다. 오늘도 화를 꾹 눌러 담으려던 연서의 머릿속에 어제 어진이 지었던 표정과 말이 스쳤다.
‘저라면 이렇게는 못 살아요.’
그 말이 마치 방금 전 들은 소리처럼 생생하게 귓속을 울렸다. 연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홍란의 시를 곱씹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낭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떴다.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인지 냉소인지 모를 희미한 기색이 걸려 있었다.
“정성스레 준비한 시에 화답을 아니할 수 없구나.”
그 한마디에 교방 안이 조용해졌다. 홍란의 추종자들조차 뜻밖이라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연서는 주저하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붓과 종이를 가져와라.”
홍란에게 지필묵을 건넸던 기생이 홍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 우물쭈물하는 꼴을 본 홍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가져다드려라. 사기께서 친히 화답하시겠다는데.”
지목당한 기생이 쭈뼛거리며 붓과 종이, 먹이 남아 있는 벼루를 연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연서는 아무 말 없이 종이를 제 앞으로 바르게 밀어 놓고 붓을 쥐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먹을 머금은 붓끝이 종이 위에 닿는 순간, 교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 손끝으로 쏠렸다.
슥, 슥.
붓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스쳤다. 처음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정말 즉석에서 짓는 것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흉내만 내는 것인지 가늠해 보려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처음부터 마음속에 완성된 글을 그대로 옮겨 적기라도 하듯, 연서의 손에는 멈춤이 없었고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몇몇 기생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홍란 역시 웃음기를 거둔 채 연서의 붓끝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연서가 마지막 획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종이를 가볍게 밀어 놓은 뒤 담담히 말했다.
“읽어 보거라.”
아까 홍란의 시를 읽었던 기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홍란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연서가 쓴 시를 우물쭈물 읽기 시작했다.
豔蕊嗤蠶貌不姝
春殘百卉色先枯 誰知素繭藏長縷 遂作華裳覆汝軀“화려한 꽃은 누에의 생김새가 곱지 않다고 비웃지만,
봄이 다하면 온갖 꽃의 빛깔부터 시들고 마는구나. 누가 알겠느냐, 흰 고치 속에 긴 실이 감춰져 마침내 고운 옷이 되어 네 몸을 덮는다는 것을.”낭독이 끝나자, 교방 안이 더 깊게 잠잠해졌다. 시를 낭독한 기생은 종이를 든 채 멍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홍란 곁에 붙어 있던 추종자들 역시 서로의 낯빛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홍란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입가에서도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연서를 노려보았으나, 연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베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시 짓기는 이만 하고, 얼른 침선에 집중해라.”
그렇게 말한 연서는 제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실가닥을 손끝으로 바로잡았다. 한동안 홍란을 비롯한 누구도 말이 없었다.
부들거리던 홍란의 손끝이 이내 가만히 멎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연서가 방금 쓴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정갈하게 반으로 접었다. 또 한 번 곱게 접은 뒤, 자신의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
삐--
낮고 짧은 경보음이 정적을 갈랐다.
[미허가 시계 작동 감지]
허공에 펼쳐진 감시창 아래로 숫자와 좌푯값이 빠르게 떠올랐다. 황상태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료하다는 듯 반쯤 풀려 있던 눈빛이 선명해졌다. 미허가라는 말에 성과를 올릴 만한 사건이라 여긴 상태가 반색하며 물었다.
“오... 뭐야? 좌표는?”
옆자리에 있던 요원이 곧바로 대답했다.
“전북 권역... 남서부 고정값 확인. 작동 시각 2023년 11월 6일.”
상태는 말없이 허공에 뜬 좌표를 바라보았다. 별도 조사도 없이 감지 시스템만으로 미허가 시계가 곧바로 잡히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동기화 작동자 조회합니다.”
또 다른 요원이 단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짧은 정적 뒤, 투명한 창 한쪽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알 수 없음]
상태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안 잡혀?”
“동기화값 누락이나 오류가 아닙니다. 아예 읽히질 않습니다.”
다른 요원이 빠르게 회로 분석창을 띄웠다.
“외부 회로 손상 혹은 불법 개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황상태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비틀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근무 시간 속에서 모처럼 도파민이 터지는 일이 굴러 들어온 것 같았다.
“심지어 불법 개조라...”
그는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평범한 사고로 보기엔 지나치게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이거 우리가 추적한다. 바로 시작해.”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팀원들의 손이 일제히 빨라졌다. 상태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케이, 진급은 이걸로 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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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서가 관아 바깥문을 나섰을 때는 이미 산 너머로 기운 해가 땅 위에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일과가 생각보다 일찍 끝난 탓에 저녁밥을 지을 때에 맞춰 오기로 한 어진과는 마주치지 못했다. 혼자 걷는 길은 괜히 더 길고 한산하게 느껴졌다.
발밑에서는 마른 흙과 풀잎이 사각사각 밟혔다. 연서는 소복 자락을 손끝으로 들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던 몸의 고단함보다도 마음의 복잡함이 연서의 걸음을 느리게 했다.
'빼어난 손재주로도 곱지 않은 얼굴은 가릴 수 없고.'
연서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조금 덜 고운 얼굴이라 여겼고, 기방에 들어와서는 남들보다 덜 사랑받는 얼굴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고을에서 사람들이 고운 여인이라 부르는 얼굴은 환한 달덩이처럼 둥글고 복스러워 한눈에 정이 가는 상이었다.
연서의 얼굴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얼굴은 갸름하고 턱은 뾰족했다. 두 겹의 눈꺼풀은 그녀의 큰 눈을 더욱 크고 진하게 만들었다. 콧날과 입매도 선이 또렷하여, 날카롭고 박복하게 생겼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녀가 고운 사람이었더라면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렇게까지 자꾸만 재주로 제 흠을 덮어야 하지는 않았을까. 연서는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녁으로 기우는 신선한 공기가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을 가까이 들어서자 익숙한 집들의 윤곽도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불빛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빛은 산 너머에서 보이는 달빛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차갑고도 푸른, 꼭 물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 뒷산 기슭 어딘가에서 순간적으로 터졌다가 사그라들었다.
퍼서서석-
그 빛과 동시에 낮고 거친 소리가 뒷산 쪽에서 들려왔다. 마른 통나무가 한꺼번에 쓸리듯, 또는 큰 돌덩이가 흙에 부딪히듯 무게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뭐지... 도깨비? 산신?’
그녀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연서는 저도 모르게 소복 자락을 그러쥐었다. 그러나 두려움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호기심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연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기슭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방금 전 빛이 났던 자리에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거대한 들짐승이 지나간 것처럼 흐트러진 풀숲이 눈에 띄었고, 그 너머로 검은 형체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사람...?’
연서가 다가간 곳에는 우성이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행색이 너무도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행색은 선비나 관아 사람들, 또는 그 흔한 장돌뱅이들의 차림과는 달랐다.
상의는 몸에 기이하게 딱 붙은 모양이었고, 목에는 검은 띠 같은 것이 둘러져 반듯하게 매어 있었다. 바느질 자국조차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옷은 너무나도 매끈하고 곱게 반짝거려, 마치 천상의 비단으로 짠 옷 같았다.
연서는 숨을 고르며 우성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놈이나 명국인이라기엔 복색이 너무도 해괴한 데다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연서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를 살폈다. 그러다 혹시 그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어떻게 안전하게 그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연서는 이내 그의 목에 둘러진 검은 띠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넥타이가 당겨지며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녀는 우성의 얼굴이 빠져나올 만큼의 공간이 생긴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서 뺐다. 올이 지나치게 고르고 매끈하여, 무슨 실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빼낸 타이를 이리저리 살피던 연서는 그의 두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조금은 세게 매듭을 조이고 나서야 그녀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 조금씩 새겨졌다.
산그늘이 빛을 드문드문 막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염이 없는 것을 보니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높은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 보였다. 특히 짧게 잘린 머리칼이 그가 죄인이나 도망자 신세일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우성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귀를 그의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산바람이 선선하게 흘러내리고 있어, 그것이 그의 숨인지 바람인지 좀처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연서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녀가 이번에는 귀를 그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낯선 옷감 위로 귀를 얹는 순간, 서늘하고도 매끈한 셔츠의 감촉이 먼저 닿았다. 마치 맨살에 귀를 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서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갔다.
...두근... 두근...
우성은 살아 있었다. 다행이라 여긴 연서가 한숨을 쉬던 찰나, 그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연서는 화들짝 놀라 우성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었다. 사내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아주 무겁게 들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은 시선은 밤하늘과 산그림자 사이를 헤매다, 마침내 제 위를 들여다보고 있는 연서의 얼굴에 닿았다.
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춥겠다...”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낯선 기계였다.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숫자들을 보았다
아침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연서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밤새 식지 않은 아랫목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며 이불과 요를 차례로 개어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서는 빗을 들어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어질 때마다,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단정히 머리를 매만지고 소복을 챙겨 입었다. 흰 옷고름을 여미는 손길이 빠르고 능숙했다.바깥으로 나온 연서는 아직 희미한 어둠이 남은 마당을 한 번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아침 이슬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쌀을 헤아리고 물을 맞추어 솥에 안치기 시작했다. 작은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서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넣고 입김을 불어넣자, 이내 잔불이 빨갛게 타올랐다.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진이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연기 냄새를 맡자마자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서의 옆으로 다가왔다.“...벌써 일어났어요?”연서는 대꾸 대신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어진은 한 손으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크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와도 돼.”연서가 불길을 살피며 말했다. 어진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예? 왜요?”“응, 언제 끝날지 몰라서. 국휼 이후 첫 일과잖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해져서, 언제 마칠지도 몰라.”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손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그럼 저는 계속 어머니랑 일해야 돼요? 관아 가는 길이 유일한 쉬는 시간인데...”어진의 서운한 말투에 연서는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
향 냄새가 장례식장 안을 침울하게 메웠다. 부모 곁에서 조문객을 맞던 우성은 친구들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초겨울이 스며든 검은 코트를 입고 나타난 천호가 그대로 멈추어 우성의 눈을 마주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코트 차림의 예진도 토트백을 두 손으로 가만히 쥐고서 그의 옆에 멈추어 섰다.짧은 침묵이 흐른 후, 천호가 조심스럽게 우성에게로 걸어갔다. 그동안의 공백을 서둘러 채우려는 듯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안았다. 우성은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삼키고 입을 열었다.“...와 줘서 고맙다.”초췌한 우성의 모습을 본 예진은 눈물이 났지만, 괜스레 퉁명스러운 말부터 꺼냈다.“연락하고 사는 게 어렵냐? 이럴 때만 부르고 있어...”“그러지 마. 이럴 때라도 부른 게 어디야. 난 얘 어떻게 된 줄 알았어.”천호와 예진의 타박에 우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희가 손님들과 대화를 끝내고 천호와 예진에게 다가왔다. 두 사람은 그녀에게 꾸벅 목례하며 말했다.“많이 힘드시죠?”천호의 다정한 말에 정희가 대답했다.“아니에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친구들이니?”그녀가 우성의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우성이 그녀에게 친구들을 소개했다.“아, 여기는 제가 다니던 병원의 원장 옥천호, 그리고 여기는 그 앞에서 카페를 하는 도예진이에요. 둘 다 대학교 때부터 친구예요.”“그렇군요, 늘 얘기만 듣다가 이제야 보네요. 먼 길 와 줘서 고마워요. 식사는 했어요? 얼른 저기 가서 식사부터 해요.”정희가 우성과 친구들을 살갑게 챙기며 말했다. 천호와 예진은 얼떨결에 정희의 손에 끌려가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우성이 너도 얼른 와서 같이 밥 먹어. 계속 서 있었잖아.”정희의 말에 우성도 그들 뒤를 따라갔다. 세 사람은 어쩐지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겉옷을 벗어 의자에 걸쳤다. 천호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나누어 놓으며 우성에게 물었다.“그... 물어봐도 돼?”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천호에게 우성이 되
째깍-째깍-시곗바늘이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진한 블랙 체리 냄새와 섞여 어두운 거실을 가득 채웠다. 우성은 구석으로 밀려난 채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허공 속에서 발버둥쳤다.띠, 띠띠-띠.갑자기 들려오는 도어록 소리와 함께 소연이 들어왔다. 또각거리던 그녀의 신발이 현관에 가지런히 놓이고, 적갈색 손가방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졌다.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법도 한데, 소연은 마치 제 집인 양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우성을 찾아낸 그녀의 얼굴에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아이 참, 또 왜 이러고 있어-”소연의 목소리에 우성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화려한 눈화장과 생기 넘쳐 보이는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가 어둠을 밝게 비췄다. 우성의 앞에 쪼그려 앉은 소연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살짝 숙이며 말했다.“밥 또 안 먹었지? ...가만있어 봐, 내가 뭐 좀 해 줄게.”“...왜 또 왔어?”우성의 갈라진 목소리가 부엌으로 향하는 소연에게 겨우 닿았지만 금세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소연은 일어나 냉장고를 이리저리 뒤지며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아 맞다, 오빠. 그거 알아? 오늘이 우리 헤어진 지 벌써 100일째더라. 시간 진짜 금방 가지?”아무렇지 않게 뱉는 그녀의 물음에 우성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그는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무심한 소연이 새삼 얄미워졌다.‘...100일.’시간이 그렇게나 흘렀나 싶어 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사람이 말하면 좀 대꾸를 해 줘야지. 말하는 사람이 무안하잖아.”“...그만하고 가. 어차피 안 먹어.”우성의 차가운 말투에 소연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안 먹기는 왜 안 먹어. 굶어 죽게? 차려 놓고 갈 테니까 꼭 먹어.”“...”우성은 소연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헤어지자고 했던 건 다름 아닌 소연이었다. 우성은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그런 그를 잠깐 지켜보던 소연은 정적 속에서 요리를 계속했다.그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