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집에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내린 예성이 말없이 집 안으로 휙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마당을 울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우성은 한숨을 짧게 내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차에서 내린 우성은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에서 볼 때보다 훨씬 많은 별이 검푸른 밤 위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선명한데도, 어쩐지 더 멀게 느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웬 흰 고양이 한 마리가 어느새 발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달빛을 받은 털은 밤공기 속에서 묘하게 푸른빛을 내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우성과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걸음으로 다가와 우성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그는 그대로 쪼그려 앉으며 조심스레 고양이의 얼굴에 손을 내밀었다. 우성의 손끝이 고양이의 정수리를 쓸어내렸다. 부드러운 온기가 차가운 우성의 손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고양이를 만지던 그가 중얼거렸다. “춥겠다...” 그의 손길을 받던 고양이는 이내 몸을 슥 빼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쪽 발이 아픈지 절뚝거리며 집 뒤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쯤 가다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꼭 따라오라는 것만 같았다. 우성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그 뒤를 따랐다. 집 뒤쪽은 가로등이 없어 훨씬 어두웠다. 쓰지 않는 농기구며 장작 더미, 오래된 광주리 같은 것들이 밤 그림자에 묻혀 희미한 윤곽만 남기고 있었다. 그 익숙한 어둠을 지나자, 약간 경사진 작은 언덕 위에 주변 풍경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낯선 기계였다. 사람의 앉은키를 조금 넘을 듯한 크기였고, 무광의 쇠로 된 표면은 묘한 패턴으로 뒤틀리듯 맞물려 있었다.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모양새였다.‘...아버지가 새로 산 정미기곈가?’ 우성은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희미한 빛의 정체는 기계에 표시된 디지털 숫자였다. 가까이 다가간 우성은 4와 46, 그리고 415.071800이라는 기묘한 숫자들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시계도 아니고, 날짜 같지도 않았다. 우성이 그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흰 고양이가 그의 옆을 날렵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볍게 뛰어오른 고양이는 표시된 숫자 아래에 있는 빨간 버튼을 툭 밟고 지나갔다.지잉— 낮고 가느다란 소리가 기계 속에서부터 울려 나왔다. 우성은 본능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기계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나오며 빠르게 주변을 삼키기 시작했다. 구체 형태로 퍼지는 빛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맥동했다. “어...?” 우성이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고양이가 언제 다리를 절었느냐는 듯 땅으로 내려와 사뿐사뿐 우성에게서 멀어졌다. 곧이어 기계에서 훨씬 큰 진동음이 터져 나왔다. 웅웅 울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흔들고, 주변의 어둠이 마치 물결처럼 일그러졌다. 우성은 얼굴을 찌푸리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공에 밧줄로 묶인 듯 그의 몸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성의 몸은 그대로 빛 속에 삼켜졌다. 집 뒤편에는 다시 적막만이 남았다. --- 연서는 교방 구석에 놓인 베틀 앞에 앉아 실타래를 하나씩 점검하고 있었다.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으나, 등 뒤로 꽂히는 시선까지 모를 만큼 둔한 사람은 아니었다. 조금 전부터 홍란과 그 추종자들이 자신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웃음기를 띠고 있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다만 연서는 못 본 척 실의 끝만 손끝으로 정리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던 홍란이 손에 들고 있던 천 조각을 툭 내려놓으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예도 무릇 계속 익혀야 녹슬지 않는 법인데... 시라도 한 수씩 지어 보는 것이 어떠냐?” 그 말에 곁에 있던 기생 하나가 금세 맞장구를 쳤다. “좋은 생각이네. 손만 놀리자니 심심하던 차인데.” 연서는 실을 감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은 나중에 하고, 하라는 바느질이나 먼저 해라.” 홍란은 그 말을 듣고도 꺾일 줄 모른 채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아이고, 사기는 마음도 급하시지. 우린 그저 잠깐 머리라도 식혀볼까 하는 것입니다. 다른 년들보다 먼저 스승님께 내 시 한 수 지어 드리고 싶으니 사양 마시지요.” 그러더니 홍란은 곁의 기생이 내민 붓과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금방 곁으로 모여들었다. 한동안 먹 가는 소리가 방 안을 서걱서걱 채우며 긴장감을 돋우었다. 홍란의 행태가 어처구니없던 연서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차며 그녀를 무시했다. 잠시 후, 먹을 다 갈았는지 홍란은 허공을 응시하는 척하다가 곧장 붓을 놀리기 시작했다. 꽤나 철저히 준비한 듯 거침없이 글씨를 써 내려가더니,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완성된 시를 한 번 훑고 옆의 기생에게 턱짓했다. “네가 읽어 보아라.” 종이를 받아 든 기생은 기다렸다는 듯 목을 가다듬고는, 종이 위에 적힌 글귀를 훑어본 뒤 뜻을 풀어 또렷한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妙手難遮貌不姝雖能織錦色猶枯堪憐絕技終何用卻使旁人笑此軀 “빼어난 손재주로도 곱지 않은 얼굴은 가릴 수 없고, 비단을 짤 줄 알아도 그 낯빛은 여전히 시들었구나. 가련하다, 그 뛰어난 재주가 끝내 무슨 소용인가. 도리어 보는 이들이 그 몸을 비웃게 할 뿐이로다.” 낭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교방 안을 찔렀다. 몇몇 기생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홍란은 손끝으로 입가를 슬쩍 가리며 연서 쪽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인 홍란의 태도에 연서의 손끝이 멈췄다. 오늘도 화를 꾹 눌러 담으려던 연서의 머릿속에 어제 어진이 지었던 표정과 말이 스쳤다.‘저라면 이렇게는 못 살아요.’ 그 말이 마치 방금 전 들은 소리처럼 생생하게 귓속을 울렸다. 연서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홍란의 시를 곱씹듯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낭송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떴다. 그녀의 입가에는 웃음인지 냉소인지 모를 희미한 기색이 걸려 있었다. “정성스레 준비한 시에 화답을 아니할 수 없구나.” 그 한마디에 교방 안이 조용해졌다. 홍란의 추종자들조차 뜻밖이라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연서는 주저하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붓과 종이를 가져와라.” 홍란에게 지필묵을 건넸던 기생이 홍란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다. 그 우물쭈물하는 꼴을 본 홍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느냐? 가져다드려라. 사기께서 친히 화답하시겠다는데.” 지목당한 기생이 쭈뼛거리며 붓과 종이, 먹이 남아 있는 벼루를 연서 앞에 가져다 놓았다. 연서는 아무 말 없이 종이를 제 앞으로 바르게 밀어 놓고 붓을 쥐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에는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먹을 머금은 붓끝이 종이 위에 닿는 순간, 교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그 손끝으로 쏠렸다.슥, 슥. 붓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한 방 안을 스쳤다. 처음엔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정말 즉석에서 짓는 것인지, 아니면 그럴듯한 흉내만 내는 것인지 가늠해 보려는 눈빛들이었다. 하지만 마치 처음부터 마음속에 완성된 글을 그대로 옮겨 적기라도 하듯, 연서의 손에는 멈춤이 없었고 눈빛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몇몇 기생들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홍란 역시 웃음기를 거둔 채 연서의 붓끝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연서가 마지막 획을 마치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종이를 가볍게 밀어 놓은 뒤 담담히 말했다. “읽어 보거라.” 아까 홍란의 시를 읽었던 기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녀는 홍란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 연서가 쓴 시를 우물쭈물 읽기 시작했다.豔蕊嗤蠶貌不姝春殘百卉色先枯誰知素繭藏長縷遂作華裳覆汝軀 “화려한 꽃은 누에의 생김새가 곱지 않다고 비웃지만, 봄이 다하면 온갖 꽃의 빛깔부터 시들고 마는구나. 누가 알겠느냐, 흰 고치 속에 긴 실이 감춰져 마침내 고운 옷이 되어 네 몸을 덮는다는 것을.” 낭독이 끝나자, 교방 안이 더 깊게 잠잠해졌다. 시를 낭독한 기생은 종이를 든 채 멍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홍란 곁에 붙어 있던 추종자들 역시 서로의 낯빛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홍란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여유롭던 입가에서도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연서를 노려보았으나, 연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베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시 짓기는 이만 하고, 얼른 침선에 집중해라.” 그렇게 말한 연서는 제자리에 앉아 흐트러진 실가닥을 손끝으로 바로잡았다. 한동안 홍란을 비롯한 누구도 말이 없었다. 부들거리던 홍란의 손끝이 이내 가만히 멎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연서가 방금 쓴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정갈하게 반으로 접었다. 또 한 번 곱게 접은 뒤, 자신의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 삐-- 낮고 짧은 경보음이 정적을 갈랐다.[미허가 시계 작동 감지] 허공에 펼쳐진 감시창 아래로 숫자와 좌푯값이 빠르게 떠올랐다. 황상태는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무료하다는 듯 반쯤 풀려 있던 눈빛이 선명해졌다. 미허가라는 말에 성과를 올릴 만한 사건이라 여긴 상태가 반색하며 물었다. “오... 뭐야? 좌표는?” 옆자리에 있던 요원이 곧바로 대답했다. “전북 권역... 남서부 고정값 확인. 작동 시각 2023년 11월 6일.” 상태는 말없이 허공에 뜬 좌표를 바라보았다. 별도 조사도 없이 감지 시스템만으로 미허가 시계가 곧바로 잡히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동기화 작동자 조회합니다.” 또 다른 요원이 단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짧은 정적 뒤, 투명한 창 한쪽에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알 수 없음] 상태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안 잡혀?” “동기화값 누락이나 오류가 아닙니다. 아예 읽히질 않습니다.” 다른 요원이 빠르게 회로 분석창을 띄웠다. “외부 회로 손상 혹은 불법 개조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황상태의 입가가 아주 희미하게 비틀렸다. 지루하게 흘러가던 근무 시간 속에서 모처럼 도파민이 터지는 일이 굴러 들어온 것 같았다. “심지어 불법 개조라...” 그는 손끝으로 턱을 쓸었다. 평범한 사고로 보기엔 지나치게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이거 우리가 추적한다. 바로 시작해.”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팀원들의 손이 일제히 빨라졌다. 상태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케이, 이번 진급은 이걸로 하면 되겠네.” --- 연서가 관아 바깥문을 나섰을 때는 이미 산 너머로 기운 해가 땅 위에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일과가 생각보다 일찍 끝난 탓에 저녁밥을 지을 때에 맞춰 오기로 한 어진과는 마주치지 못했다. 혼자 걷는 길은 괜히 더 길고 한산하게 느껴졌다. 발밑에서는 마른 흙과 풀잎이 사각사각 밟혔다. 연서는 소복 자락을 손끝으로 들고 익숙한 길을 걸었다. 낮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던 몸의 고단함보다도 마음의 복잡함이 연서의 걸음을 느리게 했다. '빼어난 손재주로도 곱지 않은 얼굴은 가릴 수 없고.' 연서는 무의식중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렸을 적에는 그저 조금 덜 고운 얼굴이라 여겼고, 기방에 들어와서는 남들보다 덜 사랑받는 얼굴 정도로만 여겼다. 하지만 적어도 이 고을에서 사람들이 고운 여인이라 부르는 얼굴은 환한 달덩이처럼 둥글고 복스러워 한눈에 정이 가는 상이었다. 연서의 얼굴은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얼굴은 갸름하고 턱은 뾰족했다. 두 겹의 눈꺼풀은 그녀의 큰 눈을 더욱 크고 진하게 만들었다. 콧날과 입매도 선이 또렷하여, 날카롭고 박복하게 생겼다고들 수군거렸다. 그녀가 고운 사람이었더라면 삶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적어도 이렇게까지 자꾸만 재주로 제 흠을 덮어야 하지는 않았을까. 연서는 괜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저녁으로 기우는 신선한 공기가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 마을 가까이 들어서자 익숙한 집들의 윤곽도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곧 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낯선 불빛 때문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빛은 산 너머에서 보이는 달빛과는 전혀 다른 빛이었다. 차갑고도 푸른, 꼭 물속에서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이 뒷산 기슭 어딘가에서 순간적으로 터졌다가 사그라들었다.퍼서서석- 그 빛과 동시에 낮고 거친 소리가 뒷산 쪽에서 들려왔다. 마른 통나무가 한꺼번에 쓸리듯, 또는 큰 돌덩이가 흙에 부딪히듯 무게가 느껴지는 소리였다.‘뭐지... 도깨비? 산신?’ 그녀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연서는 저도 모르게 소복 자락을 그러쥐었다. 그러나 두려움과는 별개로, 마음 한구석에서는 호기심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연서는 망설이다가 결국 발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산기슭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방금 전 빛이 났던 자리에 흙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거대한 들짐승이 지나간 것처럼 흐트러진 풀숲이 눈에 띄었고, 그 너머로 검은 형체 같은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사람...?’ 연서가 다가간 곳에는 우성이 대자로 뻗어 누워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행색이 너무도 이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행색은 선비나 관아 사람들, 또는 그 흔한 장돌뱅이들의 차림과는 달랐다. 상의는 몸에 기이하게 딱 붙은 모양이었고, 목에는 검은 띠 같은 것이 둘러져 반듯하게 매어 있었다. 바느질 자국조차 잘 보이지 않는 그의 옷은 너무나도 매끈하고 곱게 반짝거려, 마치 천상의 비단으로 짠 옷 같았다. 연서는 숨을 고르며 우성의 상태를 확인하려고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왜놈이나 명국인이라기엔 복색이 너무도 해괴한 데다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치 하늘에서 툭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연서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를 살폈다. 그러다 혹시 그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어, 어떻게 안전하게 그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연서는 이내 그의 목에 둘러진 검은 띠를 손가락으로 잡아당겼다. 넥타이가 당겨지며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녀는 우성의 얼굴이 빠져나올 만큼의 공간이 생긴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그의 목에서 뺐다. 올이 지나치게 고르고 매끈하여, 무슨 실로 짠 것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빼낸 타이를 이리저리 살피던 연서는 그의 두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조금은 세게 매듭을 조이고 나서야 그녀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숨을 내쉬었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 조금씩 새겨졌다. 산그늘이 빛을 드문드문 막아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염이 없는 것을 보니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진 않았다. 짙은 눈썹과 긴 속눈썹, 높은 콧대와 날카로운 턱선이 어쩐지 자신과 닮아 보였다. 특히 짧게 잘린 머리칼이 그가 죄인이나 도망자 신세일지도 모른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우성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귀를 그의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산바람이 선선하게 흘러내리고 있어, 그것이 그의 숨인지 바람인지 좀처럼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연서가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그녀가 이번에는 귀를 그의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낯선 옷감 위로 귀를 얹는 순간, 서늘하고도 매끈한 셔츠의 감촉이 먼저 닿았다. 마치 맨살에 귀를 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연서의 얼굴이 빨갛게 변해 갔다....두근... 두근... 우성은 살아 있었다. 다행이라 여긴 연서가 한숨을 쉬던 찰나, 그의 몸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연서는 화들짝 놀라 우성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었다. 사내의 눈꺼풀이 떨리더니 아주 무겁게 들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은 시선은 밤하늘과 산그림자 사이를 헤매다, 마침내 제 위를 들여다보고 있는 연서의 얼굴에 닿았다.두 사람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우성이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방 안으로 들어오자, 책을 보던 연서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이며 목덜미가 물기로 번들거리는 걸 보니 막 씻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이제는 하루에 두 번씩 씻기로 하신 거예요?”우성이 방문을 닫으며 대답했다.“아... 근데 오늘은 진짜 어쩔 수 없었어요.”“...?”연서는 읽던 책을 뒤집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읽은 우성이 계속 말했다.“오늘 밭에다 거름 뿌렸거든요. 냄새가 와... 안 씻을 수가 없어요 진짜.”“아~ 그럼 꼭 씻어야죠. 아예 그 옷도 벗고 들어오시지... 흠흠, 냄새가 좀 나는 거 같은데...”연서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가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했다.“...속옷만 입고 들어오려고 했으면 춘향 씨가 그 책 집어던졌을 거 같은데...”“...”이에 연서는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분명 그랬을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을 점점 알아 가는 것이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웃옷을 벗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서는 그의 옷이 생각보다 많이 작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다. 여러 생각을 하던 연서가 웃옷을 벗어 놓는 우성에게 말했다.“처음 하는 일들이라 많이 힘드셨죠?”우성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음... 힘들기보다도 좀... 더러워서... 그리고 잘못하기도 했고요. 분이할멈이 어찌나 잔소리를 많이 하시던지...”그의 말을 듣자 연서는 웃음이 났다. 분이할멈의 평소 말투를 잘 아는 그녀였다. 연서가 혼자 웃는 걸 보며 우성이 계속 말했다.“제가 그 긴 바가지를... 뒷간에서 사용하고 나서 손에 들고 밭까지 걸어갔더니, 그걸 왜 들고 다니냐면서 역정을 막 내시더라고요. ‘그건 왜 흔들고 댕겨-!’”연서는 우성의 말에 더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더러운 걸 들고 다녔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하하하-”“아니, 미리 말을 해 주던가... 그리고 밭에 뿌리래서 막
우성은 난감한 표정으로 한참을 뒷간에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국화밭에 뿌릴 거름을 퍼 오라는 금선의 말이 다시 생각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런 일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그는 문을 열기도 전부터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냄새에 어지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보다 어린 어진이도 하던 일이었다. 사내로서의 자존심과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이 그의 몸을 조금씩 밀기 시작했다. 그는 지게와 분뇨통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더 이상 가까이 가기도 싫은지, 우성은 긴 자루바가지를 들어 나무판자를 툭툭 쳐서 옆으로 벌리고는 조금씩 분뇨를 뜨기 시작했다. 메스꺼워 헛구역질이 날 판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현대의 생활이 그리웠다.조심스레 바가지로 거름을 푸던 우성은 분뇨통이 어느 정도 차자, 자루바가지를 든 채로 생각에 잠겼다. 바가지에 묻은 오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얼빠져 있던 우성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바가지를 문밖으로 빼냈다. 인근에 있는 풀밭에 응급처치를 하고는 눈을 감고 숨을 참으며 통을 들어 지게에 실었다.“하아... 하아...”그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폐활량을 탓하며 다시 지게를 졌다. 자신의 집에 있던 편리하고 깨끗했던 화장실 생각이 많이 났다. 사실 다른 불편함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고 감수할 만했지만, 화장실 문제만큼은 그를 몹시 힘들게 했다. 첫날이야 아무 데나 소변을 보면 됐지만, 둘째 날 뒷간을 처음 이용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였다.“어? 그래서 자꾸 변명할 때 뒷간이 생각나는 건가...”중얼거리던 우성은 분이할멈의 국화밭을 향해 걸어갔다.---차분히 책을 읽던 연서는 허리가 아픈지 무릎을 대고 엎드렸다. 찌뿌둥함을 풀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늘였다. 그러다 통증이 꽤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신의 엉덩이를 더듬어 보았다. 여전히 아프기는 했지만, 처음 맞았을 때나 다음 날 약주를 부었을 때의 아픔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집 밖으로 볶은 결명자의 구수한 냄새가 넘쳐 흘렀다. 어진은 금선이 볶아 놓은 결명자를 약연으로 갈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금선이 부엌에서 또 다른 바구니를 가지고 나와 어진의 옆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어진이 갈아 놓은 고운 가루를 종이에 담아 약첩으로 만들었다. 꽤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일이어서 그런지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이 손발이 척척 맞았다. 하지만 그 평화는 아래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끝이 났다.“누구 있소?”사령 하나가 집 앞에 서서 외쳤다. 어진이 약연을 옆으로 살짝 밀어 놓고 달려 나왔다. 그녀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연서가 근신 명령을 어기고 우성과 함께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무슨 일이십니까?”“아전께서 명을 보내셨다.”어진이 곤란한 표정으로 금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묵묵히 약첩을 묶을 뿐,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어진은 지레 겁을 먹고 대답했다.“춘향은 지금 뒷간에 잠깐 갔는데...”그녀는 자신도 우성과 똑같은 변명을 해 버렸다는 사실에 자책했다. 하지만 사령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춘향이 아니라 어진이라는 아이에게 전하라 했다. 여기 있느냐?”어진은 깜짝 놀랐다. 일만 하던 금선마저 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제, 제가 어진입니다. 말씀하십시오.”어진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사령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전의 말을 전했다.“‘올해로 14세가 되어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이달 20일에 있을 동기 지원에 응하라. 시험은 20일 오후에 관아의 예방에서 실시하니 교방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만일 올해에 지원하지 않는다면 16세가 되는 해부터 관노비로 일하게 될 것이니 그리 알라.’라고 하셨다.”“예, 알겠습니다.”최후 통첩이었다. 연서가 임진년에 열 살이 되자마자 동기에 지원했던 걸 생각해 보면 꽤 늦은 나이였다. 일반적으로는 이른 나이에 동기가 될수록 더 뛰어난 기생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동안 시험을 미루었던 것은 어진이 아니라 관아 쪽이었기에, 조금
마지막 인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무섭게, 연서를 업은 우성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는 무심코 마당으로 발길을 옮기다 대청에 앉아 있는 어진을 보고 기겁하며 뒤로 돌아섰다. 업혀 있던 연서는 우성이 재빨리 방향을 바꾸자, 금방 상황을 눈치채고 숨을 죽였다.하지만 너무 급하게 몸을 튼 나머지, 몸이 흙벽에 스치며 중심이 흔들렸다. 흙벽이 부스러지며 퍼석 소리가 났다. 담장이 낮았기 때문에 연서를 업은 채로 몸을 완벽히 숨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우성과 연서는 눈을 마주친 채 긴장감을 나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간절함을 배신하며 어진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 앞에 다다른 어진은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젠 아예 숨길 생각도 없네...”우성이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연서는 그에게 매달린 채 어진을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했다. 우성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그... 잠깐... 뒷간을 좀 다녀오고 싶다고 해서...”“...!?”그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연서가 입을 벌린 채 그를 쳐다보았다. 열받은 그녀가 우성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게 산책보다 더 큰 문제예요...”“흠... 분명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여전히 아녀자와 뒷간 얘기하시는 걸 좋아하시네요.”어진이 비아냥거리듯 그에게 말했다. 두 여자의 협공에 우성은 억울한 기분이 들어 대답했다.“아니 왜 나한테만...”“저야 늘 언니 편이니까 견우님한테만 말씀드린 거고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 언니도 곧 혼날 거예요.”그녀가 얄밉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연서도 곤란한 표정을 하며 우성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금선이 문을 벌컥 열며 방에서 나왔다.“그냥 아예 동네 한 바퀴 돌면서 북이라도 치고 오지 그러냐? 그럼 이리 숨어 다닐 필요도 없을 텐데.”연서가 수치심에 고개를 숙였다. 우성이 그녀를 다시 고쳐 업으며 금선에게 대답했다.“계속 누워만 있으면 회복이 더뎌지고 욕창이 생겨 다른
하루도 쉬지 않던 연서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점점 힘겨워하기 시작했다. 몸을 조금 일으키자니 팔꿈치와 어깨가 아팠고, 그렇다고 엎드리자니 허리와 목이 불편했다. 조금씩 옆으로 눕는 게 가능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가동 범위가 극히 좁아 답답했다.삼십 대를 굳이 맞아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지만, 이내 그녀의 자존심이 그 생각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한계를 느끼고 독서를 포기했다. 연서는 책을 바닥에 던지듯 툭 내려놓으며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책이 바닥에 툭 쓰러지며 [詩經]이라고 쓰인 표지가 보였다.“흐아아-”연서가 책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이기는 했지만 바르지 않은 자세로 이미 수없이 읽은 책을 또 읽기란 쉽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이 점차 고요해지는 듯싶었다.“아하하! 아이참, 다시 해 보세요. 왜 이렇게 못 하세요?”바깥에서 어진의 목소리가 창호지를 뚫고 들어왔다. 우성과 무엇을 하는지 마당에서는 자박자박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곧 우성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이게 지금 무게 중심이 하나도 안 맞는 거 같아요.”“와 진짜 안 해 보셨나 보네.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사내가 되어서 이런 것도 안 해 보고 뭐 하셨어요?”연서는 너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호기심을 이겨 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리고, 조심조심 팔꿈치를 짚어 기듯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방문 앞에 도착한 연서는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끼익-연서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우성과 어진은 동시에 그녀를 바라보았다.“에엥? 언니! 왜 일어났어요?”“...뒷간 가시게요?”우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무례한 우성의 말에 연서가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하... 아녀자한테 그런 거 묻지 마세요... 나 참, 숨 쉬듯 무례하네.”“...”우성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진도 그런 우성을 타박하며 덧
경찰서 안쪽은 민원실보다 훨씬 더 조용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프린터가 돌아가는 소리, 간헐적으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여성청소년과로 예성을 안내한 경찰은 인계를 마치고 돌아갔다. 사십 전후로 보이는 경위가 그녀를 맞이했다. 예성은 남자가 가리킨 의자에 앉아서 긴장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까 기본 내용은 들었습니다. 견우성 씨 동생분이라고 하셨죠?”“네.”그는 모니터를 보며 능숙하게 타이핑을 시작했다.“마지막으로 직접 본 시간하고 장소 말씀해 주시겠어요?”“음... 마지막으로 본 건 저희 본가 OO로 24-1이고요, 시간은... 이틀 전 저녁 7~8시쯤인 것 같아요.”“이틀 전이면... 11월 6일인가요?”경위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예성은 그 말에 핸드폰을 꺼내 달력을 확인했다.“잠시만요... 네, 맞아요.”“11월 6일... 7시경... 그날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예성은 그날 우성과 차 안에서 다투듯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저랑 말다툼 비슷하게 좀 하긴 했는데... 그 정도는 평소에도 하던 거라 특별히 다르다고 하기엔 좀 그래요... 제일 이상한 건 차가 그대로 있고 사람만 없어졌다는 거예요.”“... 차는 있는데 사람이 없다... 실종자가 평소에 우울증이나 병을 앓고 있었나요?”그의 말에 예성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정확히 우울증 진단을 받거나 병이 있지는 않았어요. 여자 친구랑 헤어지고 우울 증세가 좀 심하게 오긴 했었는데...”“...우울 증세... 또 있을까요?”그제야 예성은 상태의 방문이 떠올랐다.“아...! 잠시만요.”그녀가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상태의 명함을 꺼내 들었다.“오빠가 없어진 직후에 자칭 형사 한 분이 와서 이걸 주고 갔어요.”“형사요...?”경위가 예성이 내민 명함을 받아들었다.“시간관리국? 이런 부서는 없는데... 직접 받으신 거예요?”그가 명함을 뒤집어 이리저리 보며 물었다. 예성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