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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베 짜는 여인

Author: 쭈의잔상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19 20:18:46

아침 해가 미처 뜨기도 전, 연서는 저도 모르게 눈이 떠져 몇 번 깜빡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밤새 식지 않은 아랫목의 온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누웠던 자리를 돌아보며 이불과 요를 차례로 개어 한쪽에 가지런히 밀어 두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방문 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연서는 빗을 들어 긴 머리를 쓸어내렸다. 빗살 사이로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빗어질 때마다, 엉켜 있던 생각들도 가지런히 정리되는 듯했다. 그녀는 늘 하던 대로 단정히 머리를 매만지고 소복을 챙겨 입었다. 흰 옷고름을 여미는 손길이 빠르고 능숙했다.

바깥으로 나온 연서는 아직 희미한 어둠이 남은 마당을 한 번 바라보며 기지개를 쭉 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상쾌한 아침 이슬 냄새가 가슴 깊이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부엌으로 가서 쌀을 헤아리고 물을 맞추어 솥에 안치기 시작했다. 작은 물소리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서가 불씨를 살려 아궁이에 넣고 입김을 불어넣자, 이내 잔불이 빨갛게 타올랐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진이 아직 눈도 다 뜨지 못한 얼굴로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품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는 연기 냄새를 맡자마자 말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연서의 옆으로 다가왔다.

“...벌써 일어났어요?”

연서는 대꾸 대신 물 한 바가지를 건네주었다. 어진은 한 손으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는 크하- 소리를 내며 숨을 내뱉었다.

“오늘은 나 데리러 안 와도 돼.”

연서가 불길을 살피며 말했다. 어진은 여전히 졸음이 묻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 왜요?”

“응, 언제 끝날지 몰라서. 국휼 이후 첫 일과잖아?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안 정해져서, 언제 마칠지도 몰라.”

어진은 못마땅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손끝으로 그릇 가장자리를 긁적이던 그녀가 이내 투덜대듯 말했다.

“그럼 저는 계속 어머니랑 일해야 돼요? 관아 가는 길이 유일한 쉬는 시간인데...”

어진의 서운한 말투에 연서는 그녀를 슬쩍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저녁밥 지을 때쯤 오든지. 그 안에 내가 먼저 오겠지만.”

연서가 솥뚜껑을 바로잡으며 무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말투에도 어진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럼 그때 갈게요!”

밖이 푸른색으로 밝아져 가고, 마당 끝에 맺힌 찬 기운도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연서는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넣었다. 들려오는 까치 울음소리에 연서는 점점 밝아지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

밤을 거의 새우다시피 한 우성의 얼굴이 전날보다 더 수척해져 있었다. 눈 밑은 퀭하고, 상복 깃 사이로 드러난 목선마저 한층 야위어 보였다.

정희는 그런 아들을 곁눈질로 몇 번이나 살폈다.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아들의 목소리 끝이 자꾸만 마르고 갈라지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다. 마침 조문객의 발길이 뜸해지자 그녀는 우성의 팔꿈치 가까이를 조심스레 붙잡았다.

“우성아.”

“네?”

정희는 상복 소매 너머로 우성의 구겨진 어깨를 한 번 쓸어내리듯 만졌다.

“이따가 예성이 데리고 본가에 가서 좀 쉬다가 와.”

“...”

우성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정희의 눈에 그 미소는 감정보다는 버릇에 가까워 보였다. 그녀는 착잡한 마음으로 아들 곁을 떠나 조문객들 사이로 다시 들어갔다.

우성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눈에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들어왔다. 사진 속 할머니는 생전처럼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릴 적 잠든 줄 아는 손자의 이불 끝을 한 번 더 여며 주던 손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 이제 사진 속에만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멍하니 영정 사진만 바라보았다.

---

기녀들의 분 냄새가 희미해진 교방 안은 어쩐지 평소보다 처량해 보였다. 언제나 넘치던 거문고 줄 고르는 소리와 장단에 맞춰 발을 익히는 부산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교방 안은 너무나도 조용했다.

기생들은 저마다 소복 차림으로 줄을 맞추어 서서 점고를 기다렸다. 연서 역시 새하얀 소복들 사이에 섞여 섰다.

잠시 후,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호방 아전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생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아전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사람 수를 헤아리듯 시선을 움직였다. 이내 소매를 한 번 바로잡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에... 어제부터 국휼 중이니 교방의 악기와 춤은 당분간 모두 금한다.”

모두 알고 있던 일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선언되자 몇몇 기생들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아전은 그런 낯빛들을 못 본 척 다시 말을 이었다.

“허나 손을 놀릴 수는 없는 일이다. 국상 기간 동안 교방의 손은 베 짜는 일과 기물 수선, 의복 마련에 돌리겠다. 기물 수선은 호방에서 요청이 있을 때마다 손을 보태고, 의복과 베 짜는 일은 늘 그렇듯 사기에게 일임할 것이니, 사기의 지시를 잘 따르고 각자 맡을 일이 정해지면 그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라.”

기생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마지못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힘없는 대답이었다. 노래도 춤도 금한 마당에 베틀과 바느질만 하라니, 누구 하나 반기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연서의 얼굴에도 그늘이 스쳤다. 그녀는 괜스레 뒤통수가 따가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전은 다시 한 번 기생들을 둘러보더니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이만 물러들 가거라.”

기생들이 저마다 흩어지려 몸을 움직이던 찰나였다.

“춘향은 잠시 남아라.”

순간 연서의 발끝이 멈추었다. 주변의 움직임도 함께 멎고, 모두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기생들은 곧 다시 걸음을 옮겼으나, 시선만큼은 연서의 등에 고정되어 있었다.

뒤편에 서 있던 홍란도 돌아서는 척하며 눈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연서를 흘겨보았다. 그 곁의 기생들 역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내 기생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교방 안이 한결 비자, 아전은 비로소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로 남긴 것은 네게 맡길 일이 있어서다.”

연서가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침선방 관비들이 너를 직녀에 빗대더구나. 허나 이번 일은 네 손 하나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전은 교방 안에 놓인 베틀들을 한 번 둘러보고 다시 말했다.

“오늘 안으로 기생들의 솜씨를 살펴 베틀을 맡을 자와 바느질을 맡을 자를 나누어라. 남은 실과 베도 헤아리고, 모자라는 물목이나 일손이 있으면 함께 적어 올리거라.”

연서가 고개를 들었다.

“저의 판단대로 일을 맡기면 되겠습니까?”

“그래. 방금 모두에게도 일렀듯이, 그리하면 된다.”

연서의 손끝이 소복 자락을 조금 단단히 붙들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생기면 차질 없도록 바로 이르거라. 이제 가 보거라.”

연서는 다시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전은 더 붙잡지 않고 손만 가볍게 내저었다. 연서가 몸을 돌려 교방 밖으로 나오자, 조금 전 먼저 나갔던 기생들의 기척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반대로 고개를 돌렸고, 누군가는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연서는 그 시선들이 제 등을 따라붙는 것을 느꼈지만,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소복 자락을 고쳐 잡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

손님이 뜸해지자 세훈이 우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은 또렷했다. 세훈은 말없이 우성의 얼굴을 훑어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진짜 그러네.”

“...?”

우성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얼굴이 더 안 좋아. 네 엄마 말대로 너 얼른 집에 가야겠다. 예성이 데리고 가서 하룻밤 자고 와. 아침 발인 전까지만 오면 되니까.”

“아, 괜찮아요.”

“뭐가 자꾸 괜찮아.”

세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우성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계속 이 얼굴로 서 있다가는 또 상 치르게 생겼다. 그리고 너 임마, 네가 여기서 그렇게까지 꼭 필요한 사람이 아니야. 네가 없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구는 거 자체가 그 뭐냐... 자의식 과잉이야. 고집 그만 부리고 얼른 가.”

우성은 습관처럼 또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성이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 우성은 그녀를 한 번 돌아보더니 별말 없이 장례식장을 나섰다. 예성이 그런 우성을 뒤따라가며 식장 밖의 차가운 공기를 마주했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자 우성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말없이 운전석에 오른 우성을 따라 예성도 조수석에 탔다. 둘은 아무런 대화도 없이, 그렇게 할머니를 뒤에 두고 떠났다.

남원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한동안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저녁노을이 다 번진 뒤의 흐린 하늘과 물기 어린 도로만 창밖을 계속 스쳐 지나갔다.

핸들을 부여잡고 앞만 보는 우성을 보며 예성은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괜찮냐고 묻기엔 누가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힐끔거리기만 하던 그녀가 끝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빠.”

“어?”

우성이 몸을 살짝 예성 쪽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나 진짜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기분 나쁘게 듣지 마?”

“...”

“병원이라도 한 번 가 보는 게 어때?”

우성의 눈썹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핸들을 쥔 손가락에도 아주 잠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무슨 병원? 정신병원?”

예성은 그의 반응에 잠깐 망설였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아 겨우 말을 이었다.

“...요즘은 힘들 때 정신과에서 도움을 받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차 안 공기가 더욱 차갑게 식었다. 우성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엔진 소리만 더 또렷하게 들렸다. 예성은 괜히 손가락으로 옷자락 끝을 비비적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나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어제 오빠 보고 진짜 깜짝 놀랐어. 나 솔직히 좀 무서워.”

우성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 아니야.”

“아니. 그 정도야. 심각해.”

예성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조금 높아졌다. 그녀는 곧 다시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한 번 터진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차창으로 스쳐가는 비 온 뒤의 저녁 풍경은 꽤 무심했다. 예성은 그런 그의 옆얼굴을 보다 말고, 결국 우성의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 그 여자 때문이잖아. 나 어제 장례식장까지 찾아온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

우성의 표정이 순간 더 싸늘하게 굳었다.

“하지 마.”

“맞잖아. 나 다 들었어. 그 여자가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만하라고.”

이번에는 말끝이 더 단단했다. 우성은 짧게 숨을 들이켠 뒤 이를 악문 사람처럼 덧붙였다.

“그렇게까지 말하지 마. 네 새 언니 될 뻔한 사람이고,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어.”

예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까지는 답답해서 어떻게든 오빠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는데,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맥이 탁 풀렸다.

아직도 저 이름 앞에서는 저렇게 반응하는구나. 아직도 저 사람을 저렇게 막아서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무슨 말을 더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람에 말라가는 유리창 너머로 수확 후의 공허한 들판이 지나가고 있었다. 차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조금 전보다 더 무겁고, 더 답답한 침묵이었다.

우성은 알고 있었다. 예성의 말이 맞다는 것을. 그런데도 정신과에 가 보라는 말도, 소연을 욕하는 말도 이상하게 견디기 힘들었다. 마치 지금껏 자신이 힘겹게 붙들던 것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하는 말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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