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씨 가문의 잔치엔 손님들로 붐비었다. 제씨 가주가 지금의 이부상서이기도 하고 셋째 집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황후의 아버지인 제씨 어르신은 진성의 권력자들 중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초대했다. 그중엔 장군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군부가 비록 권세가에서 밀려나기 일보직전이긴 하지만 조상 중에 대장군을 배출한 건 사실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장군부는 지금 없어졌을 것이다. 제상서는 조정의 요원이자 국장이니 대외적으로 당연히 공평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 씨 가문 또한 당연히 초대를 받았다. 방시원이 돌아온지 사흘 만에 척사 탐정단의 모든 사람에게 황령이 내려왔다. 방시원은 3품 참장으로, 제방은 4품 장군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선평후부의 장문수는 정원백으로 책봉을 받았고 그의 부인인 이석은 3품 숙인으로 책봉받았다. 전례를 깨트린 봉작은 장문수가 척사단의 주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체포된 후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한 사람도 말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냈다. 숙청제는 이러한 정신으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한쪽 다리를 다쳐서 앞으로 전쟁터에 나갈 수 없게 되었기에 백작의 자리를 주고 아내를 숙인으로 책봉하여 남은 생을 편히 보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숙청제는 척사단의 방시원과 제방, 노홍, 그리고 진 씨 가문의 두 아들을 특히나 쓸 계획이었다. 그저 병사인 왕두와 왕오, 그리고 장태 등인도 각자 품계를 올려 황명이 파견되기만을 기다렸다. 방시원은 진성으로 돌아온 후 처음으로 잔치에 참석한 것이었고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봐 놀랐다. 방 씨 저택에도 방시원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열 계획이었지만 그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육씨 부인도 그가 정신이 없을 때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일단 미뤄두었다.방시원의 정신 또한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진성으로 돌아온 후부터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그는 여전히 척사 탐정단의 사람이었는데 한 번 깨어나면
“아가씨.” 최 씨의 시녀인 금숙이 왕청여를 불르자 왕청여는 시선을 돌리고 창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이제 3품 참장이라니.” “아가씨,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남의 일을 의논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금숙은 최 씨를 오랫동안 따라다녔고 최 씨 곁에서 가장 유능한 시녀라 왕청여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바로 알아채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나 왕청여는 금숙의 귀띔을 전혀 듣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오빠는 남강으로 떠나기 직전에야 황제폐하께서 참장으로 책봉했었지. 참장은 한 곳을 지키는 주장이라는 뜻인데 그는 어디로 파견되는 것일까?” 그러자 금숙은 정색하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신경 쓰셔야 하는 사람은 전 도련님입니다. 전 도련님도 오늘 여기에 오셨다고 합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책봉한 것이지?” 왕청여는 금숙의 말을 못 들은 듯 씁쓸하게 말했다. “이석의 부군은 작위까지 받고 그는 3품 참장을 책봉받다니. 대체 얼마나 큰 공을 세웠기에 이러는 것일까? 그저 정보를 주고받은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까지 하다니 전장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전사들이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금숙은 왕청여의 팔을 힘껏 잡고 말했다. “아가씨, 여긴 제씨 가문입니다. 말 조심하십시오.” 팔에서 전해오는 아픔이 왕청여를 정신 들게 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부끄러움과 분노가 교차하여 언짢은 말투로 말했다. “누가 너보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느냐?” 그러자 금숙이 담담하게 말했다. “부인께서 아가씨가 길을 잃을까 봐 저보고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왕청여는 차갑게 말했다. “정말로 내가 길을 잃을까 봐 널 보낸 것이냐? 내가 분수도 모르고 망신을 당해 평서백부의 명성을 손상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건 아니고?” “아가씨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부인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택 안에 사람이 많아 시끄러우신 것이면 저와 함께 정원에 가서 산책을 좀 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 머리를 식히기 좋을 것입니다.
이튿날 왕청여는 한껏 치장을 하고 귀밑머리에 작약 한 송이까지 꽂으며 홍이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어디론가 향했는데, 그곳에 방시원이 있기만을 바랬다. 그곳에 있다면 방시원이 자신을 아직도 사랑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만금산 아래에는 계곡이 있었는데, 계곡의 시냇물이 만금산에서 비탈을 타고 내려와 작은 폭포를 형성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무슨 일이 생겨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면 이곳에 와서 검술을 연습했지.’ 방시원은 이전에 왕청여를 데리고 이곳에 왔었다. 홍이는 그녀를 부축하여 산에 올랐는데, 인적이 드물어 서서히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부인, 우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아직 날씨가 더운데 더 걸을 수 있겠습니까?” “거의 다 왔다.” 왕청여는 몇 년 동안 산길을 걸어본 적이 없어 당연히 힘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차가운 눈빛으로 홍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든지 아무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자 홍이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직은 규칙을 잘 모르지만 부인께서 이 산에 오는 것은 부적절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여기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위험에 처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홍이는 왕청여가 비밀스럽게 누구를 만나러 가는지 몰라 갑자기 어젯밤에 금숙 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왕청여가 산중턱에 도착했을 때 폭포소리를 듣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가 여기에 있을까?’ 그녀는 순간 발걸음이 무거워져 앞으로 걸어가기가 너무 두려웠다. ‘그가 없다면 밤새 잠도 못 이루고 그를 생각했던 나만 우스워지는 것 아닌가?’ 왕청여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산길을 따라 걸어갔다. 오랫동안 오지 않은 탓에 이곳에이렇게 작은 길이 생긴 줄도 몰랐다. ‘누군가가 이곳의 경치를 발견했나 보군. 예전에 그와 함께 왔을 땐 그가 내 손을 잡고 반 키 높이의 풀을 뛰어넘는 순간 정말 짜릿하고 신선했는데.’ 산길을 굽이돌자 갑자기
왕청여는 울먹이며 말했다. “난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명예가 남아있겠습니까? 장군부의 일을 당신도 들었겠지만 늑대 소굴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모두 당신 때문입니다. 죽지 않았다면 왜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습니까? 시댁에서는 날 처가로 보냈지만 난 처가에서 계속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지금의 묵 승상 부인이 나와 전북망을 위해 중매를 서지 않았다면 난 지금까지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친정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형수님은 내가 눈에 거슬려서 하루빨리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묵 승상 부인이 와서 혼담을 꺼내자 난 거절할 여지조차 없었습니다.” 방시원은 그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 것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가족 모두가 그의 “희생”때문에 슬퍼하고 괴로워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특히나 어머니는 전까지도 병석에 누워 있다가 최근에야 조금 나아진 상태였다. 충성과 효도는 비록 양립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족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해 보상하고 싶었지만 예전처럼 생활하기 어려웠다. 집에서까지도 자기도 모르게 긴장한 상태를 유지했었다. 그 와중에 황제폐하께서 중임을 맡겼으니 그는 자신의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황제폐하의 기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할지 몰랐다. 그렇게 그는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음이 답답해서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오늘 검술을 연마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왕청여의 말에 그는 실망시킨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청여에게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밖에 없었다. “내가 미안하오.” 왕청여가 눈물을 흘리며 냉소했다. “당신이 내게 뭐가 미안하단 말입니까? 당신은 내가 이석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석은 선평후부의 둘째 공자를 몇 년이나 기다렸고 진 씨 가문의 두 사람도 그렇고...” 그러자 방시원이 고개를 저었다.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소. 그리고 당
방시원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니까 장군부에서 당신을 학대하고 전북방도 당신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 데다 자객까지 집에 쳐들어와 목숨을 위협해서 이혼을 하려는 것이지, 내가 돌아왔기 때문은 아니란 말이오?” 왕청여가 갑자기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그를 껴안자 방시원은 놀라서 황급히 그녀를 밀쳐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왕청여는 그의 반응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바로 마음이 아파져 눈물을 흘렸다. “당신은 정말 날 혐오하는군요.” 방시원은 이 말을 무시하고 본론만 꺼냈다. “장군부의 일은 내가 조사하겠소.”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당신이 조사할 필요 없습니다. 정녕 날 못 믿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나는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을 뿐입니다. 당신은 내가 혐오스럽습니까? 내가 이혼하면 저를 받아들일 것인지부터 대답해 주십시오.” 방시원은 그녀의 물음에 심호흡을 몇번이나 했지만 결국 대답은 하지 못했다. 그는 이미마음이 혼란스러워진 상태라 일이 분명해지기 전에는 섣불리 대답하기 싫었다. 그는 왕청여에 대한 죄책감 또한 있어 한참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혐오스럽지 않소. 그리고 그럴 자격도 없소.” 눈물을 머금은 왕청여의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당신의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됩니다. 내가 해결할 테니 기다려주십시오.” 말을 마친 왕청여는 몸을 돌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시원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자객이 장군부에 쳐들어간 일이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월과 유월이 죽었으니 왕청여도 죽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아무런 선택지가 없었다. 그가 왕청여를 저버린 것이니 그녀가 정말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면 이혼을 해도 뭐라고 나무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왕청여가 다시 자신에게 시집을 온다고 해도 거절할 이유가 없고 그녀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최 씨는 머리가 아파 눈을 감고 머리를 문질렀다. 금숙은 계속 설득했다. “부인, 만약 이 일을 방시원에게 알려서 그가 소란을 피우면 우리 평서백부는 더 이상 명성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부인의 입에서 나간 말이라는 걸 백작께서 아시면 크게 화를 내실 겁니다.” 남강에 있는 자신의 부군을 생각하자 최 씨는 더욱 골치가 아팠다. 예전에 왕표가 진성에 있을 때는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듣고 충고를 하면 실수하지 않았었다. 그들 부부사이에는 의견이 안 맞는 게 많았는데 그녀가 참을성 있게 잘 분석해서 그를 설득해야 말을 들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듣는 척해도 마음속엔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다. 자신보다 시야가 넓은 아내를 받아들이기엔 그의 배짱이 부족했다. ‘사람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 수는 없었다. 이석도 지금은 고생 끝에 낙이 온 것이지만 그 전의 몇 년을 어떻게 살았는가? 그녀의 고통을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북명왕비도 지금은 왕야와 사랑이 깊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그녀가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의 아픔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고난을 줬지만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삶과 미래를 바꿀 수가 있었다. 왕청여처럼 좋은 것만 보고 달려들다가 잘못되면 바로 다른 품으로 돌아서는 사람은 도덕은커녕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것이였다.’ “금숙아, 나는 평서백부인이니 평서백부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장군부와 이혼을 하는 건 반대를 하지 않겠지만 그녀가 방시원에게 들러붙어 목숨으로 바꿔온 부귀를 누리겠다는 것이라면 난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그녀는 그것을 누릴 자격이 없고 나도 양심이 찔려 그렇게 둘 수 없다. 방시원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알고 있지. 이 일은 방 씨 가문의 체면과도 상관있는 일이니 그는 알아도 소란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은 어머님과 부군, 그리고 왕청여의 원망이겠지.” 그녀
그렇게 다음날, 최 씨는 왕청여를 청하러 사람을 보냈지만 왕청여는 몸이 좋지 않다며 나중에 돌아온다고 전했다. 그녀는 전북망과 이혼하려는 일을 친정에게까지 알리기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전북망은 요즘 야근이라 낮에 잠을 자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멀쩡한데 갑자기 이혼하자고 할 순 없으니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청여는 그날 만금산으로 간 후부터 줄곧 피곤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두 번은 낮잠을 자기 시작해서 전북망이 야근을 갈 때까지 깨어나지 못했는데 홍이가 저녁식사를 하라고 깨워서 겨우 일어났었다.피곤하고 졸리고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그녀는 달거리 시간이 며칠이나 미뤄져 임신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날짜를 계산해 보면 그동안 전북망이 매일 문희거에 머물렀을 때가 나왔는데, 그땐 그들이 결혼한 후 가장 사이가 좋았던 기간이었다. 왕청여는 마음이 심란해서 제발 임신하지 말아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녀는 감히 의사를 청하지 못하고 모자를 쓰고 홍이와 의관에 가서 맥을 짚었다. 복안당의 백발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왕청여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쏠리는 것 같았다. 비록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진을 받으니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녀는 자신의 팔자가 참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만약 방시원이 돌아오기 전에 임신했다면 그녀는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미 방시원에게 털어놓아 다시는 자신의 야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3품 참장의 부인이 되면 이번 생에 영광스럽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모든 것을 망치려고 했다. 그녀는 넋이 나간 채 친정으로 돌아가 노부인의 방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노부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몇 년 전처럼 고개를 들어 온몸을 떨며 말했다. “어머니,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뱃속의 아이를 남겨둘 수 없습니다.” 노부인
출가 전에 머물던 방으로 돌아온 왕청여는 최 씨가 방씨 가문으로 갔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그저 어머니와 함께 그녀를 어떻게 도울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왕청여는 어머니께서 불같이 화를 내셔도 장군부에서 계속 지내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장군부는 그야말로 지옥이었고 유월과 오월이 죽어가던 곳이기도 했으니 말이다.게다가 방시원을 금쪽같이 생각했던 어머니기에 왕청여와 다시 만난다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왕청여는 그곳에 잠시 머물다 어머니의 상태가 괜찮아졌다는 말에 급히 장군부로 돌아갔다. 아니면 형수에게 혼날 게 뻔했다.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설교하는 최 씨가 너무 짜증이 났다.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표정을 하는지, 오라버니 작위 덕분에 백부 부인이 된 것인데 뻔뻔하게 굴었다. 게다가, 왕청여가 친정에 머무르려면 명분이 필요했었다. 부의가 그녀의 체질을 잘 알고 있기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친정에서 지내며 몸을 돌보겠다고 하면 장군부에서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신중을 기하기 위해 왕청여는 홍이와 함께 약당으로 향했다. 홍이에게 진맥을 받게 하고 약을 짓고 돌아가서 몸이 안 좋다고 말할 생각이였다.그 약들은 당연히 홍이에게 먹일 것이다.약당은 진성에서 가장 큰 의원으로 진료하는 의사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기에 약당에서 받아온 약이라면 충분히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사실 홍이는 건강했지만, 8월 초의 맹호 같은 더위로 내열이 쌓여 있었기에 의사는 진맥 후 더위를 풀고 열을 내려주는 차를 몇 첩 지어 주었다.약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중, 왕청여는 약당을 찾은 송석석과 시만자와 마주치고 말았다. 기분이 잡친 왕청여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진성이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재빨리 고개를 돌린 왕청여는 그만 너무나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 말았다!그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 “윙”하는 소리와 함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떠올렸다. 그 실루엣은 바로 노세진이었다. 하필이면 노세진이
소씨 가문의 반응을 보니, 진성의 다른 가문들이 평소에 그들과 친밀하지 않아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시만자는 소 부인이 놀란 틈을 타 말을 이었다.“우리 부군이 가장 아끼는 조카가 바로 지아인데, 큰 억울함을 당해서 태후마마께 아뢰려던 걸 내가 간신히 말렸소. 지아를 때린 자가 스스로 나서서 벌을 받으면 그만인 것을!”왕이장은 진성에서 여러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시만자의 부군, 만종문의 제자, 병부 효고사, 그리고 진성 내 만종문 산업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와 왕씨 가문의 관계는 일부러 밝히지 않았지만, 이럴 때 활용해도 괜찮을 만큼 중요했다. 태후마마가 만종문의 임 사부를 존경하는 점을 생각하면, 이 관계를 의심하는 이는 없을 터였다.시만자는 말을 마치고 혼자 의자에 앉았는데, 그 표정은 송석석과 다를 바 없었다. 이때 소씨 가문은 비로소 섭정왕비가 직접 소 세자를 데려온 것도 왕지아를 위한 조치임을 깨달았다. 소 부인은 왕지아에게 이토록 강력한 배경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아이고, 제가 소인의 말만 믿고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네요…”소 부인이 급히 사죄했다.“반드시 뒤에서 함부로 지껄이던 자들을 찾아내 왕씨 아가씨에게 사과하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데리고 가서…”그러자 시만자가 차분히 말을 끊었다.“처벌할 마음이 있는데, 왕지아의 눈을 더럽힐 필요까지 있겠소? 백작부에서 처벌하지 못한다면, 마침 섭정왕비께서 사람을 데리고 오셨으니 소 세자를 처벌할 때 함께 처리하면 되겠소.”소 백작은 급히 수긍하며 하녀와 종들을 불러내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넘겼다. 송석석이 무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소 세자가 덕행에 흠이 있는 탓에 작위 수여는 불가능할 것이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경위부에 고소한 이상 내가 방관할 수도 없소. 대충 몇 대 맞고 넘어가려 한다면 법이 왜 있겠소?”시만자는 속으로 생각했다.‘화풀이하러 온 게 아니었나? 소씨 가문 때문에 지아와 소민이를 갈라놓을 순 없는데…’소 부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시만자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소씨 가문이라는 작은 백작부가 감히 이렇게 날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평생동안 막돼먹은 여자를 많이 보았지만, 귀족 가문의 막돼먹은 여자는 처음이었다.왕지아가 끌려 나가 뺨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는 말을 듣자, 시만자는 소씨 가문의 대문을 박차고 사람들을 끌어내고는 한바탕 때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화가 나더라도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왕지아와 왕청여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 그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그렇게 시만자가 급히 왕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왕지아가 손목을 그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또 왕청여가 하녀들을 모두 내보냈다는 말을 듣고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곧장 그의 방으로 달려갔다. 왕청여가 목을 매려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 또한 화가 나서 그의 뺨을 때렸다.최근 몇 년간 자신의 성격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왕청여의 극단적인 선택을 보자 공방에서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 참을 수 없었다.왕청여를 때린 후, 시만자는 즉시 소씨 저택으로 향했다. 소씨 저택에 도착하자 석석이 현갑군을 데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의심이 앞섰다.‘석석이는 관직이라 복수 같은 걸 할 수 없는데…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송석석은 관복을 입고 정좌에 단정히 앉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필명이 그의 곁을 따르고 있었고, 몇 명의 현갑군이 소민의 형인 소 세자를 붙잡고 있었다.백작부의 모든 어르신과 도련님들이 모여 있었고, 가문을 책임지고 있는 주모인 소 부인도 나와 있었다. 상황을 보니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만자는 옆에 서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리 말이라도 해줄 것이지. 이러니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백작과 소 부인이 송석석에게 굽실거리며 사정하는 모습을 보자 시만자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알고 보니 소 세자가 부유한 상인의 양첩과 결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걸렸고, 자신의
왕청여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게 한 것은 방시원이 돌아올 때도, 전북망과 이혼했을 때도, 왕씨 가문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아니었다. 그가 진정으로 후회한 것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였다.왕씨 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왕청여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니 자신에게 잘못이 많음을 깨닫고 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완전히 깨닫지는 못했고, 고생한 자신을 비난할 자격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형수님이 자신의 오만한 성격 때문에 고생했음을 알면서도, 과거를 들추며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다가 왕지아가 혼담을 나눌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왕지아는 안백작부의 도련님 소민과 정이 들었다. 비록 평서백 작위는 없어졌지만, 형수가 선제의 찬사를 받아 고명을 얻었고 가업 경영에도 능숙했으며, 셋째 동생이 시씨 가문의 딸 시만자와 결혼해 왕씨 가문은 여전히 병부에서 중용되고 있었다. 두 가문의 위상은 비슷했다.그러나 소민이 어머니에게 왕지아와의 혼인을 청하자, 소 부인은 강하게 반대했고, 심지어 만나는 것조차 금지했다. 비록 소민은 세상에 없는 효자이지만 왕지아에 대한 애정이 깊어 그녀 외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허락하지 않으면 출가하겠다고까지 하며 반항했다. 이에 소 부인은 그를 감금해버린 것이다.왕청여는 아마 소 부인이 방문하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소 부인은 하인들을 대동하고 왕씨 저택에 난입해 최씨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아들을 넘보다니! 윗사람이 바르지 못하니 아랫사람도 바르지 못한 건가? 당신 시누이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뻔뻔하게 굴더니, 이제는 딸까지 그 꼴이로군! 어린 나이에 남자를 유혹하고, 우리 아들에게 부모를 협박하는 법까지 가르치다니! 이 가문에는 악랄한 자들밖에 없는 것이냐?!”말을 마치자 하인들에게 저택을 부수게 했고, 왕지아를 끌어내 사람들 앞에서 뺨을 때리며 머리와 얼굴에 침을 뱉었다. 왕청여와 최씨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