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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مؤلف: 정대천
이도현은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고상하고 기품 있는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 생각에 이도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에 나섰다.

"지금 몸으로 날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상에 걸터앉았다.

순간 신수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 경솔과 무례가 깃들어서가 아닌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참으로 무례하십니다."

그러나 신수빈은 애써 태연한 척 그를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이도현은 재밌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을 낚아챘다.

몸에 걸쳐진 얇은 비단옷은 그의 손길을 견디기에 만무했다.

놀란 신수빈이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음탕한 기운과 악의로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더 무례한 짓도 당했으면서 이깟 말에 발끈하는 것이냐?"

이도현은 더 이상 무례한 말로만 이 상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신수빈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이 곧 그녀가 서 있는 절벽임을.

그가 원한다면 그녀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던 신수빈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했다.

"달거리(생리의 옛말) 중이라... 안됩니다."

여인의 달거리는 사내에게 있어 불길의 징조였다. 특히 그와 같은 전장의 장군에게는 더더욱 그랬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살펴보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내 직접 확인해 보지."

'이런 뻔뻔한 자를 봤나!'

신수빈은 그가 이토록 파렴치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신수빈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짧은 찰나 그녀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달거리가 오지 않은 걸 들키면 분명 달려들 터인데 이자의 힘으로는 아이가 위험해져. 그렇다고 무슨 수로 말리지?'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까?'

'황가의 자손이라 여겨 왕부로 데려갈까?'

'하나, 이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인데 그를 따라 왕부의 첩실로 들여졌다 한들 누가 우리 모자를 지키고 우리 가문을 지키지?'

수많은 생각 끝에 신수빈이 내린 결정은 절대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수빈이 내적 갈등을 하는 사이 이도현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리더니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깊은 곳을 향해 뻗고 있었다.

"지금 날 애태우는 것이냐?"

악의적으로 움직이는 이도현의 손길에 신수빈은 낮은 신음을 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멈추지 않을 걸 알기에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신수빈은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물리쳤다. 더는 굴욕적으로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기 싫어서였다.

인정하는 신수빈의 말에 이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의 아이인 것이냐?"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음험하게 들렸다.

깊은숨을 들이킨 신수빈은 복부에 와닿는 그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며 체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제 서방님 아니겠습니까?"

이도현의 몸이 흠칫 떨리는 걸 느낀 신수빈은 더욱 확신에 찼다.

"설마 그날 밤 이후로 제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윤씨 가문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낳을 만큼 제가 어리석어 보이십니까? 이미 혼인까지 한 마당에 외간 사내의 아이를 품을 리가요."

그 말이 거슬렸던지 이도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지난번의 멍으로 별채에 보름을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저택의 살림을 맡은 상황에서 더는 숨어 있을 수 없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신수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와 같은 권력이 막강한 자에게 마냥 무턱대고 맞서서는 안 되었다.

이도현은 그녀의 목을 풀어주며 신수빈의 아랫배로 손을 옮겼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가느다란 허리는 여전히 한 손에 잡혔으나 유독 한 곳만 살짝 불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바닥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몇 달 되었느냐?"

"곧 석 달 되어갑니다."

신수빈은 긴장함에 목이 멘 상황에서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살짝 줬다.

'그날 밤은 넉 달 전 일이었으니 내 아이는 아니겠군.'

이도현은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한시름 놓인 신수빈이 겨우 숨을 돌리려던 그때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윤서원의 아이라면 약방에는 왜 몰래 다니는 것이냐?"

청하의 뒤를 이도현의 사람이 밟은 게 분명했다.

"전 상인가 여식입니다. 가문에 재산은 많지만 권력은 없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야의 침상에 보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주서화는 귀첩이지만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혼사이다 보니 그 콧대 또한 하늘을 찌릅니다. 아랫것들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자들이라 이 집안에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 정말 제 아이를 해치려 든다 하면 전 아이를 지킬 힘조차 없습니다. 해서 숨길 수밖에 없지요."

신수빈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생에 그녀는 확실히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으니...

이도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보자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순간, 이도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은은히 비치는 달빛 아래 그는 그녀의 눈 밑에 깃든 무력함을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이도현은 몸을 일으켜 신수빈을 돌아봤다.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다."

말을 마친 그가 문밖을 향해 걸어가다 문득 다시 몸을 돌려 섰다.

어느새 신수빈은 말없이 옷을 여민 후 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네 말을 믿겠다. 너도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 네가 내 아이를 낳을 자격 따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 하나 만에 하나 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섬뜩한 말을 끝으로 이도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야밤에 그가 찾아온 이유가 자신이 회임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닌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 찾아왔다는 사실에 신수빈은 몸을 떨었다.

윤서원의 아이라면 이도현이 봐줄지 몰라도 그의 아이라면 그는 절대 아이를 살려주지 않을 터였다. 평양 후부에서 태어나는 건 더더욱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신수빈은 이도현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무더운 하기의 밤인데도 신수빈은 냉고에 빠진듯했다.

'연우에게 저자 같은 아비는 필요없어!'

신수빈은 평생 이 사실을 이도현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이도현은 오직 태후만이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신수빈은 지금처럼 이토록 권세를 갈망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지고지상한 권력을 원했다.

그 어떤 뒷배도 자신이 쥐고 있는 권세만큼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진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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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7화

    말로는 성의가 없다고 타박했지만, 이도현은 결국 그녀를 놓아주었다.“본왕은 내려가지 않겠다. 훗날 정식으로 혼인을 청하게 되면, 그때 당당히 신 가의 문을 두드리지.”신수빈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스스로 지금 처지가 결코 떳떳하지 않다는 것쯤은 아는 모양이었다.그녀는 치맛자락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두 번이나 쉬지 않고 이어진 일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휘청일 뻔했지만, 다행히 곁에 있던 은보가 단단히 부축해 주었다.“오라버니, 형수님.”신수빈이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자신이 오후에 돌아온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이미 다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신병문은 그저 마차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도현 역시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했고, 그들 또한 굳이 앞으로 나가 인사를 청할 필요는 없었다.신병문은 몸을 돌리며 말했다.“밤공기가 차다. 어서 들어가거라.”신수빈은 오라버니와 형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제야 자신이 꽤 허기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 씨는 사람을 시켜 음식을 준비하게 한 뒤, 먼저 그녀를 데리고 신씨 부인의 처소로 향했다.신씨 부인은 오후 내내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돌아온 모습을 보자마자 못마땅한 얼굴로 눈을 흘겼다.“이제야 돌아올 생각이 들더냐!”신수빈은 어머니가 늘 엄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자신과 남매에게만큼은 누구보다 너그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신씨 부인 곁에 기대어 응석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어머니.”신씨 부인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한 대 치며 성을 냈다.“그자는 정말 비열하고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아이를 데려가 우리를 협박하다니, 생각만 해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본래 신씨 부인은 딸이 화이한 뒤로는 그 남자를 다시는 집안에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체면도 모른 채 억지로 데려가고 싶다면 어디 한 번 해보라지, 하는 마음이었다.그런데 그는 하필 아이를 데려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6화

    신수빈은 손끝 하나 움직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이도현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귓가에는 여전히 쉰 숨을 섞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고, 목덜미에는 뜨거운 숨결이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녀는 천장 위로 흔들리는 술 장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왜 정과 욕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하는지. 그의 손길과 움직임에 휩쓸리던 순간, 그녀는 거의 자기 자신조차 아니게 되어 버렸으니까.그는 마치 그녀를 부서뜨렸다가 다시 빚어내려는 사람 같았다.신수빈은 목덜미에 닿는 축축하고 간질이는 감각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다시 열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왕야, 이제 돌아가야 해요…”이도현은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직 급하지 않다.”“해시가 되면 통행이 금지된단 말이에요!”신수빈이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 하자, 이도현은 한 손으로 그녀의 두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러고는 입술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눈가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아직 이르다. 한 시진도 넘게 남았으니 충분하지.”시작하기 전에는 분명 단 한 번뿐이라고 약속해 놓고, 이제 와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신수빈은 화가 치밀어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오히려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왕야는 정말 약속을 안 지키… 읍…”입술이 막혀 버리자, 원망 섞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그렇게 등불이 성안을 밝히고 밤빛이 짙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이도현은 그녀가 내일 호국사로 떠나면 한동안 장안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들과 나눌 이야기도 있을 테니,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렀다.결국 해시가 되기 전, 그는 직접 신수빈을 신 가로 데려다 주었다.마차 안에서 신수빈은 꾸벅꾸벅 졸았다. 온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이도현은 품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5화

    술이 몸속에서 서서히 퍼지자, 그녀의 얼굴도 은근히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살짝 취기가 오른 채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귓가에 숨을 불어넣듯 속삭였다.“왕야께서는… 어떻게 먹여 드릴까요?”이도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취기에 젖은 그 눈빛은 평소와는 또 달랐다. 정이 어린 시선, 흐릿한 눈동자.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오래도록 눌러 두었던 열기와 욕망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낀 그는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그는 그녀를 그대로 안아 들고, 곧장 안쪽 온돌방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도 그녀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왕야, 배부르게 드시려면 힘도 있어야죠.”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더 빠르게 안으로 향했다.주인이 낮잠을 청할 것을 알고 있었던 정원 하인들은 이미 방을 데워 두었고, 침상도 정갈히 정리해 둔 상태였다.이도현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침상 위에 내려놓고, 신발과 버선을 벗겨 주었다.“힘이 있는지 없는지는… 곧 알게 될 거다.”그가 몸을 낮춰 다가오려는 순간, 신수빈은 몸을 굴려 안쪽으로 빠져들며 웃었다. 그리고 발을 들어 그의 가슴을 살짝 밀었다.“왕야, 오늘은 오라버니께도 신 가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렸고, 내일 아침엔 호국사로 가야 해요. 왕야께서 너무 거칠게 굴어서 또 며칠을 꼼짝 못 하게 되면… 일이 틀어지지 않겠어요?”이도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신혼 첫날밤을 떠올렸다.이성을 잃은 채, 거의 벌을 주듯 몰아붙였던 그날 이후로 그녀는 심한 상처를 입었다.이내 이도현은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그리고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이젠… 그러지 않겠다.”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왔다.이마에서 눈가로, 뺨에서 입술 위로. 애정 어린 온기가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지금은… 너를 입 안에 넣어 두고, 가슴 위에 올려 두고 싶을 정도니까…”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4화

    “왕야, 어떠셨어요?”이도현은 속옷 차림으로 서서, 그녀가 건넨 수건을 받아 들었다.그는 신수빈을 흘긋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감히 나를 이렇게까지 부려 먹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신수빈은 수건을 받아 들며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그게 어째서 부려 먹는 거예요. 다른 부부들도 다 이렇게 살잖아요. 왕야께서도 가끔은 땅에 발을 붙이고…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느껴 보셔야죠.”그녀는 그를 밀어 자리에 앉힌 뒤, 미리 준비해 둔 술을 가져오게 했다.“이 술 한번 드셔 보세요. 금릉의 명주예요. 금자에게 시켜 오라버니께 부탁해 가져온 거예요.”그제야 이도현은 그녀가 오후 내내 자리를 비운 이유를 알았다.예전에 남방의 난을 평정하러 내려갔을 때, 그는 어머니의 여동생을 찾기 위해 금릉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일이 워낙 바빠, 이렇게 한가롭게 술과 음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그런데 오늘은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차려 놓은 것이었다.“수고가 많았군.”신수빈은 술을 따라 두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그중 한 잔을 들어, 잔잔히 웃으며 그에게 내밀었다.“이 첫 잔은… 지난 한 해 동안 저를 아껴 주고 품어 주신 왕야께 드립니다.”말을 마친 그녀는 고개를 젖혀 단숨에 술을 비웠다. 곧이어 다시 한 잔을 따랐다.“이 두 번째 잔은… 저와 신 가를 위해 애써 주신 왕야께 드리는 잔이에요. 입으로는 감사하다는 말을 제대로 못 했지만, 마음으로는 늘 깊이 고마웠습니다.”그녀는 또다시 술을 비웠다.세 번째 잔을 들려는 순간, 이도현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린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됐다. 아직 약도 먹고 있잖느냐. 술은 더 마시지 않는 게 좋다.”신수빈은 본래 술에 약했다. 방금 두 잔을 연달아 비운 탓에, 이미 살짝 취기가 올라 있었다.“괜찮아요… 세 잔은 채워야 마음이 놓여요.”이도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동자에 서서히 번져 가는 몽롱한 기색과 붉게 물든 두 뺨이 그의 마음을 단숨에 흔들었다.그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3화

    신수빈은 웃음을 머금고 이도현을 한 번 흘겨보더니, 다정하게 그에게 마포옷을 걸쳐 주었다.“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밥 먹는 거랍니다.”신수빈은 이도현을 부엌 난로 앞에 앉히고, 직접 불을 지피게 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보와 금자, 정원을 지키는 관리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왕야가 마포옷을 두른 채 난로 앞에 앉아, 손발이 맞지 않아 허둥대는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도 우스꽝스러웠기 때문이다.하지만 신수빈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불 다루는 법을 모르는 그에게 하나하나 지시하기 시작했다.불꽃이 조복 위로 튀자, 이도현은 허둥지둥 장작을 더하고 불길을 조절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신수빈은 몇 번이고 웃음을 터뜨렸고, 손수건으로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직접 닦아 주기도 했다.잠시 후에는 새로 만든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대고, 간이 맞는지 묻기도 했다.싱겁다면 소금을 조금 더 넣으면 그만이었다.그 사이 두 사람 사이에는 평범한 부부 같은 온기가 흐르고, 일상의 소소한 정겨움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신수빈은 곁에서 격려하듯 말했다.“왕야는 정말 대단하세요. 어머니께서 처음 요리를 가르쳐 주실 때, 불 조절을 잘해야 요리가 맛있어진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때마다 실패했어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서 부엌에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죠.”대가 집안이나 부유한 가문에서는 딸에게 요리와 바느질을 가르치는 일이 흔했다. 결코 하녀나 자수꾼처럼 부리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부군을 위해 음식을 차리며 부부 사이의 정을 쌓게 하려는 뜻이었다.대부분의 일은 하인들이 맡았지만, 배워 두는 것만큼은 필요했다.이도현은 신수빈의 재치 있고 능청스러운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너, 정말 본왕을 잘 꼬시는구나.”신수빈은 앙큼하게 눈을 깜박이며 부정했다.“아니에요. 제가 직접 힘들게 요리하고 있잖아요. 전부 왕야를 즐겁게 해 드리려는 거예요.”수증기와 연기가 아른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72화

    그의 품 안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다른 생각에 잠기다니…“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신수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그녀는 두 팔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눈가에는 은은한 웃음이 어렸고, 봄빛을 머금은 얼굴에는 부드러운 기색이 번졌다.“왕야께서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주셨으니… 오늘 오후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 제대로 보답해 드릴까 생각하고 있었어요.”그 말에 이도현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이제 와서 이렇게 알아서 챙긴다고? 그것도 스스로 나서서 보답까지 해 주겠다고?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그는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일부러 태연한 얼굴을 유지한 채, 약간은 거만한 기색까지 얹어 물었다.“그래? 생각은 해 보았느냐?”“네, 다 생각해 봤어요.”신수빈은 발끝을 들어 그의 귀 가까이 다가갔다.숨결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히 사람을 끌어당기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오늘 오후… 왕야를 배부르게 해 드릴게요.”그 한마디에 순간, 이도현의 숨이 걸렸다.단 한 문장뿐이었는데도 뱃속에서부터 불꽃이 치솟듯 열기가 번져 나갔다.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달아오르는 듯했다. 호흡은 저도 모르게 무거워졌고, 목소리마저 낮게 잠겼다.“어떻게 배부르게 해 준다는 것이냐?”신수빈은 입술을 살짝 다문 채 웃고는, 그의 손을 잡은 채 정자에서 내려오며 말했다.“그건… 여 귀비 마마의 이 정원을 좀 빌려야겠네요.”이도현은 온돌방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그녀가 무언가 하녀들에게 지시하러 간 듯했는데, 생각보다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그의 몸은 이미 완전히 나아 있었다. 두 달이 넘었으니 더는 문제 될 것도 없었다.조금 더 기다려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그는 결국 직접 찾아 나섰다.정원을 지키는 관리에게 묻고서야 그녀가 뒤편 부엌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이도현은 의아한 마음으로 그쪽으로 향했다.그리고 그곳에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92화

    신병문은 지금 온 세상의 권세를 틀어쥔 섭정왕이 몹시 못마땅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누이가 이도현의 곁에서 애써 비위를 맞춰주며 지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 팔에 드러났던 얼룩진 멍 자국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 그가 뒤에서 누이를 얼마나 짓밟아 왔는지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부드럽게 말했다.“굳이 그에게까지 몸을 낮춰 부탁할 필요는 없다. 네가 보기에 그가 써 주는 것이 가장 좋다면 오라버니가 알아서 방법을 찾아 그에게 청하면 된다. 그러니 네가 나설 일이 아니야.”신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91화

    그날 오후 윤수혁은 무혁을 시켜 상자 하나를 보내 왔다.사람들은 모두 그 상자가 윤서원에게 주는 것이라 여겨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신수빈이 상자를 열었는데, 안에는 인피면구 세 장과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었다.편지를 펼쳐 보니 인피면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윤수혁이 적어 보낸 내용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몇 번이고 눈으로 훑어 본 뒤 청하를 불러 물을 떠 오게 하고, 편지에 적힌 대로 직접 시험해 보았다.인피면구는 놀라울 만큼 얇아, 얼굴에 밀착시킬 때 거울을 보며 가장자리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붙여야 했다. 다시 거울을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70화

    윤서원은 그저께부터 몸을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지금의 냄새는 말 그대로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신수빈은 코와 입을 감싸 쥐며 말했다.“도련님, 잠시만 참아주세요.”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라면 이 정도는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윤수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윤서원은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입가 한쪽이 돌아간 채로 그저 침만 흘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윤수혁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다시 나아질 수는 있는 것입니까?”신수빈은 코를 막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앞으로 정상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63화

    희롱과 농담이 뒤섞인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신수빈은 얼른 시선을 옆으로 돌려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방금 자신이 본 것과 그의 눈빛이 떠오르자 귀 끝이 은근히 뜨거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이도현은 줄곧 옅은 웃음을 띤 눈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는 신수빈 앞에 이르자 그녀의 턱을 들어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본왕이 윤서원보다 어떠냐?”또 시작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생긴 심통인지 꼭 윤서원과 한 번은 비교해야 직성이 풀렸다.그렇다고 해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검고 짙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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