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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Penulis: 정대천
이도현은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만큼 화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고상하고 기품 있는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그 생각에 이도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에 나섰다.

"지금 몸으로 날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상에 걸터앉았다.

순간 신수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에 경솔과 무례가 깃들어서가 아닌 그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참으로 무례하십니다."

그러나 신수빈은 애써 태연한 척 그를 꾸짖을 수밖에 없었다.

이도현은 재밌다는 듯 가까이 다가가 그녀가 덮고 있는 이불을 낚아챘다.

몸에 걸쳐진 얇은 비단옷은 그의 손길을 견디기에 만무했다.

놀란 신수빈이 먼저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음탕한 기운과 악의로 가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더 무례한 짓도 당했으면서 이깟 말에 발끈하는 것이냐?"

이도현은 더 이상 무례한 말로만 이 상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신수빈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이 곧 그녀가 서 있는 절벽임을.

그가 원한다면 그녀는 절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었던 신수빈은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했다.

"달거리(생리의 옛말) 중이라... 안됩니다."

여인의 달거리는 사내에게 있어 불길의 징조였다. 특히 그와 같은 전장의 장군에게는 더더욱 그랬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살펴보려는 듯 손을 뻗었다.

"내 직접 확인해 보지."

'이런 뻔뻔한 자를 봤나!'

신수빈은 그가 이토록 파렴치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의 손이 닿으려는 찰나 신수빈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짧은 찰나 그녀의 머릿속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달거리가 오지 않은 걸 들키면 분명 달려들 터인데 이자의 힘으로는 아이가 위험해져. 그렇다고 무슨 수로 말리지?'

'뱃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알면 과연 어떤 행동을 보일까?'

'황가의 자손이라 여겨 왕부로 데려갈까?'

'하나, 이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인데 그를 따라 왕부의 첩실로 들여졌다 한들 누가 우리 모자를 지키고 우리 가문을 지키지?'

수많은 생각 끝에 신수빈이 내린 결정은 절대 그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신수빈이 내적 갈등을 하는 사이 이도현의 손에 점점 힘이 실리더니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깊은 곳을 향해 뻗고 있었다.

"지금 날 애태우는 것이냐?"

악의적으로 움직이는 이도현의 손길에 신수빈은 낮은 신음을 냈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멈추지 않을 걸 알기에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신수빈은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물리쳤다. 더는 굴욕적으로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기 싫어서였다.

인정하는 신수빈의 말에 이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둠 속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의 차가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의 아이인 것이냐?"

어둠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더욱 음험하게 들렸다.

깊은숨을 들이킨 신수빈은 복부에 와닿는 그의 뜨거운 열기를 피하며 체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제 서방님 아니겠습니까?"

이도현의 몸이 흠칫 떨리는 걸 느낀 신수빈은 더욱 확신에 찼다.

"설마 그날 밤 이후로 제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윤씨 가문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낳을 만큼 제가 어리석어 보이십니까? 이미 혼인까지 한 마당에 외간 사내의 아이를 품을 리가요."

그 말이 거슬렸던지 이도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지난번의 멍으로 별채에 보름을 숨어 있었습니다. 지금 저택의 살림을 맡은 상황에서 더는 숨어 있을 수 없으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신수빈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와 같은 권력이 막강한 자에게 마냥 무턱대고 맞서서는 안 되었다.

이도현은 그녀의 목을 풀어주며 신수빈의 아랫배로 손을 옮겼다.

기억 속에 남아있던 가느다란 허리는 여전히 한 손에 잡혔으나 유독 한 곳만 살짝 불러 있었다. 그리고 그의 착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손바닥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몇 달 되었느냐?"

"곧 석 달 되어갑니다."

신수빈은 긴장함에 목이 멘 상황에서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배에 힘을 살짝 줬다.

'그날 밤은 넉 달 전 일이었으니 내 아이는 아니겠군.'

이도현은 그녀에게서 몸을 일으켜 바로 앉았다.

한시름 놓인 신수빈이 겨우 숨을 돌리려던 그때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윤서원의 아이라면 약방에는 왜 몰래 다니는 것이냐?"

청하의 뒤를 이도현의 사람이 밟은 게 분명했다.

"전 상인가 여식입니다. 가문에 재산은 많지만 권력은 없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왕야의 침상에 보내지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주서화는 귀첩이지만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혼사이다 보니 그 콧대 또한 하늘을 찌릅니다. 아랫것들은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 자들이라 이 집안에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누군가 정말 제 아이를 해치려 든다 하면 전 아이를 지킬 힘조차 없습니다. 해서 숨길 수밖에 없지요."

신수빈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전생에 그녀는 확실히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으니...

이도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보자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순간, 이도현은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은은히 비치는 달빛 아래 그는 그녀의 눈 밑에 깃든 무력함을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이도현은 몸을 일으켜 신수빈을 돌아봤다.

"그 말이 사실이어야 할 거다."

말을 마친 그가 문밖을 향해 걸어가다 문득 다시 몸을 돌려 섰다.

어느새 신수빈은 말없이 옷을 여민 후 손을 아랫배에 올리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네 말을 믿겠다. 너도 어리석은 자는 아니니, 네가 내 아이를 낳을 자격 따위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 하나 만에 하나 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그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섬뜩한 말을 끝으로 이도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야밤에 그가 찾아온 이유가 자신이 회임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닌 뱃속의 아이를 없애려 찾아왔다는 사실에 신수빈은 몸을 떨었다.

윤서원의 아이라면 이도현이 봐줄지 몰라도 그의 아이라면 그는 절대 아이를 살려주지 않을 터였다. 평양 후부에서 태어나는 건 더더욱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신수빈은 이도현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무더운 하기의 밤인데도 신수빈은 냉고에 빠진듯했다.

'연우에게 저자 같은 아비는 필요없어!'

신수빈은 평생 이 사실을 이도현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마 이도현은 오직 태후만이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신수빈은 지금처럼 이토록 권세를 갈망했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지고지상한 권력을 원했다.

그 어떤 뒷배도 자신이 쥐고 있는 권세만큼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진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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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10화

    장녕은 이도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왕야가 신수빈의 지난 일에 얼마나 깊은 응어리를 품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는 것도.잠시 침묵하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감히 분수에 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야께서 마님의 과거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해도, 결국 더 놓지 못하는 사람은 왕야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야께서 먼저 몇 걸음 더 다가가셔야 합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그날 밤처럼,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화가 난다고 입에 담으시면 마님의 마음만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만 주다 보면 결국 마님은 왕야에게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장녕의 시선이 차분히 이도현을 향했다.“왕야께서 바라시는 것은 마님의 앞으로의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일은 이제 놓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사실 장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신수빈이 이도현에게 품은 감정은 애정보다는 필요가 훨씬 컸다.지금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 상황에 떠밀린 결과였다.정말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녀가 기꺼이 왕야에게 시집오겠다고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진심은 너무 잔인했다.신수빈은 한번 마음이 식으면 쉽게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도현이 그녀를 끝내 포기할 수 없다면, 조급하게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감정만 앞세워 서로를 몰아세울수록,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이도현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장녕의 말을 모두 들을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마침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장녕은 왕야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장녕이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이도현의 무심한 목소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9화

    “넷째 오라버니? 여긴 웬일이세요? 오시기 전에 사람이라도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신태안은 짧게 한마디만 했다.“할 말이 있어서.”그의 시선은 곧장 소온별에게 향했다.수상정에 앉아 있는 신수빈과 서하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소 아가씨와 따로 이야기할 일이 있습니다.”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기세였다.“소 아가씨께서 직접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모셔가야겠습니까?”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례하다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소온별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신 장군.”신태안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소온별은 신수빈과 서하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뒤를 따라 수상정을 떠났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분위기가 흐트러진 탓에 서하랑도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수빈은 혹시라도 신태안이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금자에게 몰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방으로 돌아온 신수빈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딸랑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아이까지 못 만나게 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란 말인가.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 시각.이도현은 근정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남은 상소문을 모두 처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로 돌아갔다.왕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집사를 불렀다.“오늘 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온 적이 있었느냐?”“없었습니다, 왕야.”이도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좋아. 참 잘 버티는군.”'아들까지 데려왔는데도 꿈쩍도 안 한다는 건가.'그는 이를 악물더니 낮게 말했다.“장풍을 불러라.”곧 장풍이 들어오자 이도현은 곧바로 따져 물었다.“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사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8화

    한참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다 보니 서하랑은 그제야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걸 깨달았다.오늘 두 사람이 호국부를 찾은 이유는 경림연에서 있었던 일을 묻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서하랑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날 경림연에서 보니 왕야께서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요 며칠은 가는 곳마다 두 사람 이야기뿐이다. 왕야께서 그 뒤로 찾아오시진 않으셨느냐?”신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며칠 동안 몸이 좋지 않아 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았거든요.”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현은 정말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되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은 뭐라고들 하나요?”서하랑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왕야께서 너를 마음에 두셨다는 얘기지. 경림연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 뜻을 밝혔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더냐.”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떤 사람들은 왕야께서 순전히 미색에 마음을 빼앗긴 거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가 지금 장안 백성들 사이에서 워낙 명망이 높고,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간 유생들까지 입을 모아 칭송하면서 현명한 여인이라는 이름이 사방으로 퍼졌으니, 그 정도라면 왕비가 되어도 손색없다고들 하더라고.”그녀는 피식 웃었다.“심지어 저잣거리에서는 네가 왕야와 혼인할지, 한다면 언제쯤 하게 될지를 두고 돈까지 걸고 내기를 하고 있더구나.”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들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이런 소문이 퍼지는 만큼 시기와 질투가 섞인 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사람들이 내기까지 벌인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만 혀를 찼다.'다들 참 한가하기도 하지.'서하랑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느냐?”신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아이가 아직 그의 손에 있는데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혼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날 밤, 이도현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7화

    소온별은 옆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서하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그러게 내가 집 살 때부터 뭐라고 했어? 외성에 작은 집 하나 사서 시녀 둘에 허드렛일하는 하녀 둘 정도만 두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정말 부군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다면 차라리 마차 한 대 사 주고 마부를 두는 게 나았지.”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헌데 넌 집을 그렇게 크게 장만하고, 금지옥엽처럼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잖아. 시댁 식구들이 그걸 보고 욕심이 안 생기겠어? 일단 집 안에 발을 들인 이상 다 윗사람인데, 하나하나 모셔야 하고 떠받들어야 하지. 조금만 실수해도 불효했다는 소리부터 들을 테고.”말끝마다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안에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평소엔 그렇게 똑 부러지는 애가 왜 이런 데서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제 손으로 골칫덩이들을 집 안에 모셔 왔으니.”신수빈은 소온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랑이 왜 그녀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았고,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었다.서하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와서 어쩌겠어. 이미 다 와 버렸는걸. 어머님께서는 처음에 별말 없으셨는데, 형수님 내외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니까 명문가 흉내를 내며 시집 규율을 세우려 하셨어. 부군이 막아 줬으니 망정이지.”“집도 앞뒤로 나눠 시부모님과 친척들은 앞채에서 지내시고, 우리 부부는 뒤채에서 따로 살게 했어. 평소 문안도 부군이 늘 함께 갈 때만 드리니, 어머님께서도 함부로 날 난처하게 만들지는 못하시더라고.”신수빈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처음부터 한 몸처럼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없다는 것을. 결국 누구나 시댁과 친정, 체면과 예법, 수많은 현실 사이를 지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었다.소온별이 다시 물었다.“헌데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운 거야?”서하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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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5화

    집사는 신수빈의 안색을 슬쩍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왕야께서... 마님께서는 당분간 호국부에서 근신하시며 잘못을 반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고요.”뒤에 서 있던 금자와 은보는 하마터면 눈을 뒤집을 뻔했다.'와, 이건 또 무슨 수야.''정말 기가 막히네.'신수빈은 이를 악문 채 굳게 닫힌 왕부의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마차에 올랐다.'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설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집사가 안으로 돌아와 보고했을 때, 이도현은 앞채에 앉아 있었다.이준우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있었지만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작은 몸으로 이도현의 무릎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이도현이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하더냐.”“마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많이 화가 나신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시는 눈치였습니다.”이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서 있던 장풍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거 보십시오. 여인이라는 게 원래 사랑을 받으면 점점 더 제멋대로 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해 주시면 안 됩니다. 며칠만 그대로 두십시오. 그러면 부인께서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는 훨씬 더 다정하게 왕야를 모실 겁니다. 지금처럼 왕야께 맞서려 들지는 않을 테고요.”집사는 장풍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준우를 바라보았다.나이가 있는 그는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 본 사람이었다.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한 사람은 가르칠 줄 알고, 다른 한 사람은 또 그대로 배워 버리는구나.'조용히 물러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내일 우시위를 만나면 꼭 말해 줘야겠군. 좌시위를 좀 말려 보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마님께서 이 일을 따져 묻게 될 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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