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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정대천
시끌벅적한 소란 소리에 밖으로 나온 서씨 부인은 화가 난 나머지 가슴이 아팠다.

그 모습에 신수빈이 재빨리 서씨 부인을 부축해 안채로 들어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상댁이 들어와 아뢰었다.

"마님, 서화 부인께서 태기(胎氣)를 상해 도련님께서 서상원으로 모시고 가셨고 데려온 낭자는 머리를 다쳐 마당에 쓰러져 있습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서씨 부인은 속으로 주서화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정실부인이 첩을 들이는 걸 허락한 마당에 첩 주제에 소란을 피워 온 집안을 웃음거리로 만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서화는 태후의 사람인지라 그녀를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님, 진정하십시오. 서화는 무사할 것입니다. 제가 사람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화가 저 낭자를 이리도 싫어하니 저 아이도 이만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서씨 부인은 원래 상인가 출신인 신수빈을 못마땅히 여겼지만 오늘 주서화의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주서화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서화는 회임한 몸인지라 윤서원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 없었고 주서화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윤서원더러 마냥 참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다. 그 아이를 뒤편의 채향원에 머물게 하거라."

그러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듯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첩으로 들이는 일은 당분간 미뤄두고 우선 여기서 지내게 하자구나."

알겠다며 자리를 벗어난 신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터트렸다.

서씨 부인이 이런 결정을 내린 건 태후가 두려워서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뭐가 됐든 유이연을 이 집에 머물게 하면 그만이었다.

섭정왕 저택.

하인의 보고를 들으며 검을 닦고 있던 이도현의 손이 멈칫했다.

"신씨 가문에서 데려온 아이라 했느냐?"

"예, 그렇사옵니다. 그 여인은 신씨 가문의 큰 도련님께서 사 온 여인으로 일부러 윤서원의 곁에 머물게 한 것 같습니다."

이도현이 계속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평양 후부는 한바탕 떠들썩했고 서화 군주께서는 수시로 평양후 마님의 채로 찾아가 울분을 토한다 합니다. 다만 평양후 마님은 태후마마의 심기를 건드릴 까 두려워 아직 그 여인에게 명분은 주지 않았고 그저 앓아 누웠다합니다. 이 일로 평양후 마님은 서화 군주의 시기 어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저택 내 모든 살림을 윤서원의 부인에게 넘겨 지금 평양 후부는 그 댁 작은 마님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서화 군주께서 이번에 큰 소란을 피운 탓에 지금 군주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이도현은 보고의 주제가 주서화로 넘어가자 미간을 찌푸렸다.

"신씨에 대해서만 말하거라."

집사는 잠시 멈칫했다. 평양 후부 내의 동태를 살피라기에 그는 당연히 시집 간 주서화가 걱정돼서 지시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댁 작은 마님 때문이었다니...'

"그 댁 작은 마님은 이제 막 살림을 맡았고 어린 나이에 내세울 만한 친정도 아닌 데다 서화 군주가 첩실로 있어 다스리기 힘든 모양인지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다만..."

이도현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흘겨보자 집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 댁 작은 마님의 몸종이 요즘 따라 약재를 사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주변을 살피는 것이 아마 남몰래 구하는 듯합니다."

"어디에 쓰이는 약재더냐?"

"음양곽, 육종용, 파극천 같은 정기를 돕는 약재입니다."

여인이 그런 약을 구한다는 건 지아비에게 먹이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도현은 비굴하게 자신에게 관직을 구걸하는 윤서원의 모습을 생각하니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한심한 것."

비웃음이 가득 담긴 그의 눈동자만 봐도 집사는 그가 윤서원을 아니꼽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약재 외에도 몸종이 다른 약방에 들러 처방전을 구하길래 의원에게 여쭤보니 태를 지키는 처방이라 하더이다."

그 말에 이도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집사를 바라봤다. 검에 손이 베였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한 모습이었다.

"태라고 했느냐?"

높아진 언성에 집사는 흠칫 놀랐다.

"예. 소인도 그게 의문입니다. 윤서원의 몸이 좋지 않아 남몰래 정기에 좋은 약재를 구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태에 좋은 약은 도통 이해가 가질 않더이다. 윤서원의 자식이라면 저택의 의원에게 시키면 그만이거늘 왜 그리 은밀히 구하는 건지..."

"물러가라."

그의 명에 집사가 물러가자 이도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그날의 장면을 떠올렸다.

그날 밤 그는 여러 번 그녀를 탐했고 그가 자리를 뜰 때 신수빈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황이라 약을 먹으라는 당부를 하지 않았었다.

'윤서원이 설마 제 부인을 내게 보내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의 마음속 의심은 싹을 트기 시작했고 그는 이 일을 명확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평양 후부.

청하가 약을 탁자에 놓고 등불을 신수빈에게로 옮기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씨, 밤이 깊었으니 어서 약을 드시고 쉬시지요. 복중에 태를 생각해서라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신수빈은 알겠다며 장부를 덮어 내려놓았다.

"이제 이 장부들만 정리하면 되겠구나."

탕약을 받아 마신 신수빈은 청하의 시중을 받아 씻고 침상에 누웠으나 쉽사리 잠에 들지 못해 아랫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배가 살짝 불렀지만 옷을 입으면 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최대한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데 하루하루 불러올 배를 감추기엔 역부족이었고 감춘다 해도 최대 다섯 달까지였다.

'서둘러 움직여야겠어.'

이런 생각에 몸을 뒤척이던 그때, 순간 평소와 다른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해 왔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 그녀를 노리고 있던 야수가 언제든지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은 위협감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천천히 눈을 뜬 신수빈이 마주한 건 침상 머리맡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소리를 지르려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귀신같이 달려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고 신수빈은 본능적으로 베개 밑에 숨겨둔 비수를 꺼내 그에게 휘둘렀다.

이도현은 여인의 침상에 비수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탓에 미처 피할 수도 없어 그저 손으로 칼날을 잡아 그녀에게서 비수를 뺏을 수밖에 없었다.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비수는 손쉽게 신수빈의 손에서 벗어났다.

"나다."

사실, 그가 입을 막으러 다가온 순간 신수빈은 이도현임을 알아챘었다.

지난번 궐에서 그에게서 풍기는 냉목향을 맡았었으니.

그럼에도 한을 풀 생각으로 그에게 비수를 휘두른 것이다.

아쉽게도 더 큰 고통은 안겨주지 못했지만.

이토록 어두운 상황에서도 눈썰미가 좋은 이도현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빛을 보아냈다.

"소리 지르고 싶거든 난 상관없다. 네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야."

불청객이 이도현임을 안 상황에서 신수빈은 소리 지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회임한 뒤로 더위를 많이 탔기에 그녀는 얇은 비단옷만 걸치고 있었다. 심지어 그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지라 극도의 불안감을 느낄 뿐이었다.

다행히 이도현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고 그녀는 태연한 척 얇은 이불로 몸을 가렸다.

이도현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눈치챘지만 그저 못 본 척하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 면수가 되기로 마음 굳히신 겁니까?"

그러나 먼저 침묵을 깬 사람은 신수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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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인사가 하나도 없네 하나같이 가볍고 무례하며 천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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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10화

    장녕은 이도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왕야가 신수빈의 지난 일에 얼마나 깊은 응어리를 품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는 것도.잠시 침묵하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감히 분수에 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야께서 마님의 과거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해도, 결국 더 놓지 못하는 사람은 왕야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야께서 먼저 몇 걸음 더 다가가셔야 합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그날 밤처럼,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화가 난다고 입에 담으시면 마님의 마음만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만 주다 보면 결국 마님은 왕야에게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장녕의 시선이 차분히 이도현을 향했다.“왕야께서 바라시는 것은 마님의 앞으로의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일은 이제 놓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사실 장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신수빈이 이도현에게 품은 감정은 애정보다는 필요가 훨씬 컸다.지금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 상황에 떠밀린 결과였다.정말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녀가 기꺼이 왕야에게 시집오겠다고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진심은 너무 잔인했다.신수빈은 한번 마음이 식으면 쉽게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도현이 그녀를 끝내 포기할 수 없다면, 조급하게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감정만 앞세워 서로를 몰아세울수록,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이도현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장녕의 말을 모두 들을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마침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장녕은 왕야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장녕이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이도현의 무심한 목소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9화

    “넷째 오라버니? 여긴 웬일이세요? 오시기 전에 사람이라도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신태안은 짧게 한마디만 했다.“할 말이 있어서.”그의 시선은 곧장 소온별에게 향했다.수상정에 앉아 있는 신수빈과 서하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소 아가씨와 따로 이야기할 일이 있습니다.”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기세였다.“소 아가씨께서 직접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모셔가야겠습니까?”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례하다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소온별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신 장군.”신태안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소온별은 신수빈과 서하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뒤를 따라 수상정을 떠났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분위기가 흐트러진 탓에 서하랑도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수빈은 혹시라도 신태안이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금자에게 몰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방으로 돌아온 신수빈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딸랑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아이까지 못 만나게 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란 말인가.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 시각.이도현은 근정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남은 상소문을 모두 처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로 돌아갔다.왕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집사를 불렀다.“오늘 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온 적이 있었느냐?”“없었습니다, 왕야.”이도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좋아. 참 잘 버티는군.”'아들까지 데려왔는데도 꿈쩍도 안 한다는 건가.'그는 이를 악물더니 낮게 말했다.“장풍을 불러라.”곧 장풍이 들어오자 이도현은 곧바로 따져 물었다.“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사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8화

    한참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다 보니 서하랑은 그제야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걸 깨달았다.오늘 두 사람이 호국부를 찾은 이유는 경림연에서 있었던 일을 묻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서하랑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날 경림연에서 보니 왕야께서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요 며칠은 가는 곳마다 두 사람 이야기뿐이다. 왕야께서 그 뒤로 찾아오시진 않으셨느냐?”신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며칠 동안 몸이 좋지 않아 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았거든요.”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현은 정말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되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은 뭐라고들 하나요?”서하랑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왕야께서 너를 마음에 두셨다는 얘기지. 경림연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 뜻을 밝혔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더냐.”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떤 사람들은 왕야께서 순전히 미색에 마음을 빼앗긴 거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가 지금 장안 백성들 사이에서 워낙 명망이 높고,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간 유생들까지 입을 모아 칭송하면서 현명한 여인이라는 이름이 사방으로 퍼졌으니, 그 정도라면 왕비가 되어도 손색없다고들 하더라고.”그녀는 피식 웃었다.“심지어 저잣거리에서는 네가 왕야와 혼인할지, 한다면 언제쯤 하게 될지를 두고 돈까지 걸고 내기를 하고 있더구나.”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들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이런 소문이 퍼지는 만큼 시기와 질투가 섞인 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사람들이 내기까지 벌인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만 혀를 찼다.'다들 참 한가하기도 하지.'서하랑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느냐?”신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아이가 아직 그의 손에 있는데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혼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날 밤, 이도현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7화

    소온별은 옆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서하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그러게 내가 집 살 때부터 뭐라고 했어? 외성에 작은 집 하나 사서 시녀 둘에 허드렛일하는 하녀 둘 정도만 두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정말 부군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다면 차라리 마차 한 대 사 주고 마부를 두는 게 나았지.”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헌데 넌 집을 그렇게 크게 장만하고, 금지옥엽처럼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잖아. 시댁 식구들이 그걸 보고 욕심이 안 생기겠어? 일단 집 안에 발을 들인 이상 다 윗사람인데, 하나하나 모셔야 하고 떠받들어야 하지. 조금만 실수해도 불효했다는 소리부터 들을 테고.”말끝마다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안에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평소엔 그렇게 똑 부러지는 애가 왜 이런 데서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제 손으로 골칫덩이들을 집 안에 모셔 왔으니.”신수빈은 소온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랑이 왜 그녀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았고,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었다.서하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와서 어쩌겠어. 이미 다 와 버렸는걸. 어머님께서는 처음에 별말 없으셨는데, 형수님 내외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니까 명문가 흉내를 내며 시집 규율을 세우려 하셨어. 부군이 막아 줬으니 망정이지.”“집도 앞뒤로 나눠 시부모님과 친척들은 앞채에서 지내시고, 우리 부부는 뒤채에서 따로 살게 했어. 평소 문안도 부군이 늘 함께 갈 때만 드리니, 어머님께서도 함부로 날 난처하게 만들지는 못하시더라고.”신수빈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처음부터 한 몸처럼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없다는 것을. 결국 누구나 시댁과 친정, 체면과 예법, 수많은 현실 사이를 지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었다.소온별이 다시 물었다.“헌데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운 거야?”서하랑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6화

    경림연이 끝난 다음 날부터 그들은 호국부를 찾아오려 했다.하지만 그 무렵 호국부는 며칠째 굳게 문을 닫은 채 손님을 받지 않고 있었다. 밖에는 부인이 연회에서 병을 얻어 몸져누웠다는 말만 전해질 뿐이었다.그렇게 칠팔 일이 지난 뒤에야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사실 신수빈이 병이 난 것은 아니었다.그날 이도현과 크게 다투는 과정에서 그의 손아귀 힘이 지나쳐 목덜미 뒤로 선명한 멍이 남아 버렸다.봄이 깊어지면서 옷차림도 한결 가벼워진 때, 하필 그렇게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멍이 들어 있었으니 아무리 가려도 숨길 수가 없었다.결국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수밖에 없었다.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서하랑과 소온별을 수상정으로 안내했다.호국부를 하사받은 뒤에도 그녀는 한 번도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 손님을 맞은 적이 없었다.늘 조용하고 신중하게 지냈다.서하랑 역시 이곳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웅장한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정갈하게 배치된 정원과 굽이굽이 이어진 회랑, 물 위에 떠 있는 정자가 한눈에 들어왔다.눈길이 닿는 곳마다 세심하게 꾸며져 있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이곳은 본래 전 왕조의 한 친왕이 머물던 저택이었다.수도가 장안을 떠난 뒤 오랫동안 비어 있었는데, 이도현이 이토록 귀한 저택을 통째로 하사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서하랑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정원이 정말 아름답구나. 장안에서 강남 풍경을 가장 잘 살린 곳을 꼽으라면 이곳과 돌아가신 여비의 서란소축뿐일 것이다. 왕야께서 네가 강남 출신이라는 걸 아시고 일부러 이런 저택을 골라 주신 걸 보면 마음을 많이 쓰신 것 같구나.”하지만 신수빈은 요 며칠 그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속이 치밀어 올랐다.그 이름조차 듣기 싫었다.그녀는 화제를 자연스럽게 돌렸다.“송 대인께서 곧 명주로 부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명주는 강남이라 제 고향인 여항과도 가깝지요. 언니께서는 이번에 강남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5화

    집사는 신수빈의 안색을 슬쩍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왕야께서... 마님께서는 당분간 호국부에서 근신하시며 잘못을 반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고요.”뒤에 서 있던 금자와 은보는 하마터면 눈을 뒤집을 뻔했다.'와, 이건 또 무슨 수야.''정말 기가 막히네.'신수빈은 이를 악문 채 굳게 닫힌 왕부의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마차에 올랐다.'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설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집사가 안으로 돌아와 보고했을 때, 이도현은 앞채에 앉아 있었다.이준우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있었지만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작은 몸으로 이도현의 무릎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이도현이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하더냐.”“마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많이 화가 나신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시는 눈치였습니다.”이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서 있던 장풍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거 보십시오. 여인이라는 게 원래 사랑을 받으면 점점 더 제멋대로 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해 주시면 안 됩니다. 며칠만 그대로 두십시오. 그러면 부인께서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는 훨씬 더 다정하게 왕야를 모실 겁니다. 지금처럼 왕야께 맞서려 들지는 않을 테고요.”집사는 장풍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준우를 바라보았다.나이가 있는 그는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 본 사람이었다.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한 사람은 가르칠 줄 알고, 다른 한 사람은 또 그대로 배워 버리는구나.'조용히 물러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내일 우시위를 만나면 꼭 말해 줘야겠군. 좌시위를 좀 말려 보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마님께서 이 일을 따져 묻게 될 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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