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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作者: 정대천
태후의 위엄 앞에, 신수빈은 몸을 일으켜 사죄했다.

"태후마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소인은 태후마마께서 서화 낭자의 몸을 염려하신다 들었사옵니다. 그간 두 달 동안 낭자는 서방님을 따라 밖에서 지낸 탓에,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인이 시집올 때, 소인의 집안에서 수많은 귀중한 약재를 보내 주었고 그중 많은 것이 태아를 안정시키는 약이었습니다. 하여 돌아가서 약재를 낭자에게 보내 태후마마의 염려를 조금이나마 덜어드리려는 생각에 그만 실례를 범하였나이다. 부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신수빈의 말은 일 점 의혹 없이 치밀하여 옆에서 구경하던 귀부인들조차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전각 안에 앉은 부인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태후가 오늘 신수빈의 정실부인의 기세를 꺾어 주서화의 첩실 자리를 굳히려 한다는 것을.

그래서 다들 고개를 숙여 차를 마시거나 소매를 매만지며 태후의 반응을 은밀히 살폈다.

신수빈 역시 알고 있었지만 전각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내리뜨렸다.

냉엄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 호갑(护甲:손가락에 착용하는 장신구)을 쓰다듬는 태후에게서는 상위자의 압도적인 위엄이 풍기고 있었다.

"하면, 내 너를 오해했구나."

"아니옵니다. 소인의 잘못입니다."

태후는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꿇고 있는 신수빈을 한참 빤히 바라봤다. 흠을 잡고 싶었으나 마땅한 구석이 없었던 태후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신수빈은 소매 아래에 쥔 두 손을 더욱 굳게 쥐었다.

상좌에 앉은 이는 다름 아닌 이 나라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으로 모든 이의 생사를 쥐고 있는 권력자였다. 더군다나 지고지상한 권력 아래 그 어떤 도전도 허락되지 않는 법이었다.

신수빈은 어두운 눈빛을 거두고 오직 경의와 흠모만이 담긴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후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태후는 순간 멈칫했다.

윤서원이 맞이한 부인이 아름답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나 그녀가 자신과 닮아 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자신보다 미모가 더 빼어났다.

"참으로 빼어난 모습이로구나."

태후의 입가가 살짝 움찔거리다 이내 담담히 말했다.

"일어나거라."

"서화의 일로 자네 마음이 불편한 건 알겠으나 일부다처는 흔한 일이지 않느냐. 그러니 두 사람은 서로 돕고 힘을 합해, 지아비를 보필하여 대를 번성케 하는 것이야말로 가문의 근본이지 않겠느냐."

"소인, 태후마마의 가르침을 명심하겠나이다."

신수빈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공손한 태도였다.

주서화는 그런 신수빈이 딴사람이 된 듯 낯설기만 했다.

윤서원은 그녀에게 신수빈은 상인가의 여식으로서 제멋대로인 데다 대갓집 규수의 예절을 알지 못해 정실부인이 갖춰야 할 기품조차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어제 자신의 명예를 무심코 더럽히고 지금 태후 앞에서 당당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처신하는 신수빈의 모습은 윤서원의 말과는 전혀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임자는 먼저 돌아가거라. 난 서화와 잠시 할 얘기가 있으니."

태후는 신수빈에게만 물러가라는 명을 내렸다. 반면, 귀부인들은 여전히 고개 숙여 차를 마시며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이는 태후가 일부러 그녀만 홀로 내보내 난처하게 만들려는 뜻임을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정실부인이라지만 태후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세가 귀부인들의 무리에서 밀어낼 수 있었다.

주서화가 혼전에 정조를 잃어 음탕하다고 귀부인들이 아니꼽게 본다지만 상인가 여식인 그녀 역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터였다.

"그럼, 소인 물러가겠나이다."

신수빈은 예를 올리며 태후의 궁전을 나섰다.

영수궁을 나서자 인도를 맡은 어린 내시가 그녀를 이끌었다.

"부인, 이쪽으로 드시지요."

신수빈은 처음 입궐하는 것이라 길을 알지 못했지만 좀 전에 오던 길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의아함이 들어 물었다.

"출궁하는 길은 이쪽인 듯 한데."

"부인께서 가마를 타고 오실 때는 대로로 온 것이고 이쪽 샛길이 걷기에 더 가깝사옵니다."

신수빈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 내시를 보며 그를 믿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궁궐에서 길을 잃어 누군가와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벌을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내시를 따라 여러 샛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한 궁전 앞에 도착해 있었다.

순간 불길한 마음이 든 신수빈이 물었다.

"여긴 어디냐?"

"부인,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말을 마친 내시가 몸을 돌려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엄습해 오는 불안한 기운에 신수빈이 돌아서려 할 때 낮고 거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내가 너를 이곳으로 데려오게 한 것이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굳어졌다.

굳건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며 그가 자신에게로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신수빈은 이번 생에 이런 식으로 그를 만날 줄은 몰랐었다.

"몸을 돌리거라."

그의 숨결이 마치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잊지 못할 기억들이 순간 떠오르기 시작했다.

생애 처음으로 지아비의 품에 안겼다고 생각했던 그날, 흐릿한 정신이었지만 저를 매만지던 그의 손길과 정신을 잃기 직전에 그가 귓가에 속삭였던 말만큼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몸을 돌리거라."

그 후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지치지 않는 그와 달리 그녀는 힘이 빠져 기절을 해버렸으니.

하지만 신수빈은 그날 밤을 마음 깊이 새겼었다.

그녀와 윤서원 사이에도 한때 애틋함이 있었다는 생각 하나로 수많은 밤을 홀로 지켜왔었는데 그 모든 게 음모였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에서야 비로소 지난 생에 이도현이 사당에서 했던 말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의 앞에서 열녀인 듯 행세했으니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침상에서 노리개처럼 그에게 다뤄지고, 내려와서는 오직 윤서원만을 사모한다는 말을 한 꼴이라니.

신수빈은 그동안 배웠던 예법과 함께 발가벗겨진 채 이도현의 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다시 말하길 바라는 것이냐?"

노여움과 애틋함 그 사이의 감정이 깃든 목소리와 함께 숨결이 귓가를 간질거리자 신수빈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럼에도 애써 태연한 척 몸을 돌려 눈을 내리깐 채 우아한 자태로 예를 올렸다.

"소인, 섭정왕을 뵙사옵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의 허리에 두른 청옥 띠였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코끝에 그의 옷에서 전해지는 냉목향이 맡아졌다.

그 순간, 신수빈은 문득 깨달았다.

'난 지옥에서 걸어 나왔고 예전의 내가 아닌데 권세 높은 이자에게 밉보일 이유가 없지. 내 가족과 아이를 지키려면 이 자가 쥐고 있는 황권이 필요해.'

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목선을 바라봤다.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기에 그 감촉이 얼마나 고운지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햇빛 아래서 더욱 빛나 보였다.

신수빈이 고개를 들지 않고도 자신임을 알아채자 이도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기 묻은 목소리를 냈다.

"내 목소리를 아직 기억하다니."

그 말투 속에 깃든 경박한 농락은 너무나도 뚜렷해 신수빈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손수건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고 입가에 살짝 걸린 미소는 조롱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왕야께서는 소인이 기억하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잊길 바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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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6화

    신수빈은 내관이 건넨 망토와 손난로를 받아 들자마자, 서둘러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곁에 서 있던 여러 관가의 부인들과 명부들은 그 특별한 총애를 부러워했지만, 누구 하나 시샘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반달 넘게 이어진 포위전 동안 신 씨가 보여준 행적과, 성루 위에서 회임한 여인들을 구해내며 남긴 말이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호국부인이라는 칭호는 그야말로 그녀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신수빈은 이도현이 어린 황제를 데리고 번잡한 제천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태후를 위해 마련된 자리를 바라보았다.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태후는 여전히 이도현과 감정이 틀어진 상태였고, 일 년 중 가장 중대한 제천 제사마저 외면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오든 말든 신수빈에게는 별다른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계획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테니까.이도현이 무엇보다 황실의 위엄을 중히 여긴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선황이 세워놓은 이 강산을 그는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다. 그러니 제천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는 신수빈 또한 결코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아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사로운 정일 뿐, 만일 제사 대전을 망치게 된다면 그는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제천과 제사가 모두 끝나고, 명부들이 차례로 물러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신수빈은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걸음을 옮기던 셋째 마님을 보고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한쪽으로 이끌었다.“셋째 숙모, 무슨 일입니까?”그러나 셋째 마님은 뜨거운 것에라도 덴 듯 손을 홱 빼내더니, 마치 역병이라도 피하듯 신수빈에게서 멀찍이 물러섰다. 그리고 황급히 등을 돌려 떠나려던 순간, 궁성 담장 쪽을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를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어젯밤부터 이미 겁에 질려 있던 그녀는 줄곧 긴장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궁 안에서도 그 ‘귀신’이 여전히 자신을 따라붙고 있다는 생각에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그녀의 날카로운 비명에 주변 사람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5화

    겨울 달에 벌어졌던 그 포위전의 음산한 여운을 몰아내려는 듯, 자정을 넘긴 뒤부터 장안 거리에는 폭죽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신수빈은 혹여 아이가 한밤중에 놀라 깰까 염려해 일부러 유모에게서 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았다.아이를 가장 안쪽에 눕히고 품으로 감싸 안고 있자, 바깥쪽에 누워 있던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낮게 중얼거렸다.“저 녀석, 먹고 자는 것밖에 몰라서 하늘이 무너져도 안 깰 놈이다. 뭘 그렇게 쓸데없이 걱정하는 것이냐.”신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를 바라보았다. 두 주먹을 양옆에 놓고 입술을 쪽쪽 빠는 것이 마치 꿈속에서도 먹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이내 뒤에서 뜨겁게 감싸오는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동이 트기도 전에 이도현은 떠나야 했다. 신수빈은 아이를 단단히 싸매고,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그가 아이를 받아 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작디작은 아기는 그의 품 안에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다.정월에는 일이 유난히 많아질 터라, 매일같이 아이를 보러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생각에 마음이 떨어지지 않아, 신수빈은 앞으로 다가가 며칠 전 준비해 두었던 압세 평안 주머니를 아이의 포대기에 달아주고, 고개를 숙여 조용히 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얌전히 잘 자라서 통통해지거라. 이 어미가 시간 나면 꼭 보러 가마.”이도현은 그녀가 줄곧 고개를 숙인 채, 품에 안긴 아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며 불만스러운 눈빛을 드러냈다.“그럼 내 건?”신수빈은 잠시 멈칫했다.“뭐요?”이도현은 턱으로 방금 그녀가 들고 있던 평안 주머니를 가리켰다.“왕야, 이건 원래 아이들한테 주는 거예요.”신수빈이 난처한 듯 웃자, 이도현은 짧게 콧웃음을 흘렸다.예전에는 향낭이니 허리띠니 챙겨주던 것들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 기대할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었다.신수빈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어쩌겠는가, 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그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4화

    이도현은 말을 이어가다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살짝 치켜든 눈썹에는 노골적인 장난기와 짙은 농담기가 어른거렸다.그 말을 들은 신수빈은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한참이 지나서야 볼이 붉게 물들었다. 특히 ‘위에 올라타는 모습’이라는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부끄러웠다.신수빈은 그대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머리 위로 흘러내리는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괜히 더 얄미워져, 속옷 너머로 그의 가슴을 살짝 깨물었다.이도현은 그 정도의 통증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동안 많은 일에서… 내가 너를 제대로 대하지 못했다. 널 함부로 대하고, 가볍게 여긴 것도 사실이다. 헌데 앞으로 넌 내 부인이 될 사람이다. 나는 널 존중하고, 아끼고, 지키겠다. 예전처럼 함부로 억누르거나 모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신수빈은 그의 품에 안겨있어 지금 그가 표정인지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 마치 현악기의 울림처럼 귓가를 타고 스며들어 마음 깊숙이 파문을 남겼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마음속이 어지럽게 흔들렸다.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윤서원과 서호에서 처음 만났던 그날, 쏟아지는 비 속에서 그는 우산을 건네주고는 예를 지킨다며 함께 쓰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으며 돌아섰다. 그 뒤 그의 거처를 수소문해 우산을 돌려주러 갔을 때, 그는 그날 비를 맞아 앓아누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후, 그녀가 산속에서 맺힌 이슬로 끓인 용정차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밤에 산에 올라 새벽 이슬을 모았다. 그 과정에서 뱀에게 물렸으면서도, 그녀가 알까 봐 끝까지 숨겼다.그리고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기억 속에 묻혀 흐릿해졌지만, 단 하나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었다.신씨 가문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혼인을 허락해 달라며, 평생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겠다고 맹세하던 그의 모습.그 뒤로… 신혼 첫날 밤, 그녀는 선물처럼 다른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3화

    신수빈은 옅게 웃었다. 감정에 휩쓸려 나온 말이라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는 점만은 고마웠다.“닭 잡는 데 소 잡는 칼까지 쓸 필요는 없어요. 제가 하면 됩니다. 제가 안 되면 그때 왕야께 부탁드려도 늦지 않아요.”이도현은 그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필요하다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먼저 입을 열 사람이었다.“그래.”그는 대답하며 그녀의 차림을 훑어보았다. 신수빈은 하녀의 사선 여밈 저고리에 소박한 석류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몸에 꼭 맞지 않는 옷이었고 산후에 살이 조금 올라 앞섶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 보는 사람의 숨을 은근히 막히게 만들었다. 지금의 그녀는 소녀의 앳됨과 여인의 풍염이 뒤섞인 미묘한 경계에 서 있어, 설명하기 어려운 유혹을 풍기고 있었다.“그 차림, 제법 고운 계집종 같군.”신수빈은 이 남자가 어떤 순간에 어떤 눈빛을 보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아이를 해칠까 늘 조심했지만 이제는 그럴 걱정도 없었다. 계산해보면 출산한 지 사십 일을 조금 넘었고, 몸이 깨끗하면 그 무렵부터 합방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도 떠올랐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그토록 공을 들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이제 앞날을 정한 이상, 그를 더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신수빈은 자연스럽게 양팔을 그의 어깨에 얹고 부드럽게 몸을 기댔다.“그럼 제가 왕야를 모시고 잠자리에 들게 해드릴까요?”그녀의 모습은 갓 아이를 낳은 여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고혹적이었고, 마치 세상에 내려온 선녀처럼 아른거렸다. 이도현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작은 계집종이 감히 침상에 오르겠다는 것이냐?”신수빈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으며 눈빛을 흘렸다.“왕야께서 허락해 주시겠어요?”그녀는 그의 어깨를 짚고 양옆에 무릎을 세운 채 그를 눕히려 했다. 이렇게 먼저 다가온 적은 없었기에 이도현은 순간 놀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2화

    하지만 그는 자기 사람이라 여기는 이들만큼은 반드시 지켜내는 사람이었다.지금의 상황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윤연우는 황실 족보에 이름이 올라갔다.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감추어 멀리 달아나지 않는 이상, 이 아이는 평생 이도현의 아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이도현이라는 사람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하고, 또 의심이 많던가.지금 그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만약 그녀가 이 판에 뛰어든 덕분에 그가 그 죽을 운명을 피해간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역시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윤연우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의 능력이라면 반드시 아이를 지켜낼 것이다.하지만 그 죽을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면…그때쯤이면 자신은 이미 수년간 판을 짜고 대비를 마쳐 더 많은 카드와 기반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그녀 혼자서도 아이를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아이는 결국 참지 못했다.유모가 오기도 전에 젖을 먹지 못한 채 칭얼거리다가 이내 다른 건 다 잊은 듯 울음을 터뜨렸다.신수빈은 아이를 안아 올려 애틋하게 달래며 은보에게 말했다.“부엌에 가서 양젖이 있는지 좀 보고 오거라.”다행히 연회 음식을 준비하고 남은 양젖이 있었고 곧 조금 가져왔다.신수빈은 그것을 아이에게 조금 먹였다.그제야 윤연우의 울음이 멎었다.잠시 후, 아이의 엉덩이를 만져보니 축축했다.신수빈은 웃으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작은 엉덩이를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너는 왜 그러는 것이냐. 먹기만 하면 바로 싸고 또 싸고.”이도현은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원래는 조금 다정한 시간을 보내려 했건만 눈앞에는 오직 아이에게 매달린 그녀뿐이었다.한참을 보다가 이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혼인하면 애는 두 해쯤 뒤에 낳자.”하나만으로도 이 지경인데 둘 더 생기면 신수빈의 눈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남아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그때 유모가 도착해 황급히 아이를 안아갔다.신수빈은 따라가려 했지만 이도현이 붙잡았다.“어디 가려고.”그의 말투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41화

    신수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바라보다가, 그가 몸을 숙이는 틈을 타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생각했죠. 매일 밤마다.”아들을 본 순간, 그녀의 마음엔 기쁨밖에 남지 않았다.괜히 투덜대며 질투하는 이 남자에게도 듣기 좋은 말 두 마디쯤은 아끼지 않았다.섣달그믐 밤에 아들을 데리고 와 함께 설을 보내주겠다고 한 것은 그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래서인지 지금의 그는 유난히 더 보기 좋았다.“이 정도면 됐죠.”이도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뺨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그는 뒤로 둘렀던 대창을 벗어 옆의 옷걸이에 걸어두었다.“사람을 시켜 먹을 거 좀 가져오라 하거라. 궁연에선 술만 몇 잔 마시고 아무것도 못 먹었다.”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보를 불러 음식을 준비하라고 일렀다.설날 밤이라 재료는 이미 다 준비되어 있었기에 금세 음식이 차려졌다.이도현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침상 위에 앉은 신수빈은 아기와 놀고 있을 뿐, 이쪽으로 올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그는 문득 완전히 소외된 기분이 들었다.예전 같았으면 그가 오면 늘 곁에 앉아 식사를 챙겨주곤 했는데...한참을 놀다 보니 윤연우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고는 눈만 또르르 굴리고 있었다.곧 은은한 냄새가 퍼졌다.신수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이 표정, 너무 익숙했다.전생에도 그랬다.응가를 하고 싶을 때면 꼼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사고를 치곤 했다.다행히 그녀는 미리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두었기에 은보를 불러 물건을 가져오게 했다.화로에 따뜻하게 덥힌 뒤, 물로 씻겨주고 옷을 갈아입혔다.이도현은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이 작은 녀석은 태생부터 자신과 상극인 것만 같았다.아이가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이 직접 지어준 옷이라는 걸 보자, 신수빈의 가슴은 사랑으로 가득 차올랐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아이에게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향긋한 그 몸은 아무리 안아도 모자랐다.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48화

    은보가 막 들어오려 하자 이도현이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이도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내가 왕비를 모시는 건 어떠느냐?”신수빈은 그와 이렇게 가까워지는 것이 싫어 고개를 틀며 그의 은근한 접근을 피했다.“왕야께서는 하루 종일 소동을 피우셨습니다. 돌아가 쉬셔야지 왜 제 방에서 시간을 허비하시는 겁니까?”이도현은 그녀가 전처럼 온순하게 순응하지 않으며 몸을 빼는 모습에 곧장 그녀를 안아 들어 정실로 향하고자 했다. 이에 신수빈은 다급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47화

    태의가 떠난 뒤, 신수빈은 금자와 은보, 그리고 주서화의 두 시녀만 밖에 남게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주서화는 침대의 다른 쪽에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과다출혈로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분노에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였다.신수빈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윤서원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담담했다.“태의께서는 제때에 도착하셨고 원래는 서방님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침대에 마비된 상태로 누워 있을 필요는 없었단 말입니다.”윤서원은 그 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2화

    “왕야, 저는 지금도 여전히 윤서원의 부인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마당에 계속 이곳에 둘 수는 없지요. 우선 그를 데리고 함께 장안으로 돌아가려 합니다.”이도현은 원래 신수빈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곧 선황의 제향을 준비해야 했고 그녀를 돌볼 시간도 없었으며 호심도에서와 같은 일이 또 생길까 두려워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크게 놀랐으니 오늘은 편히 쉬거라. 내일 본왕이 사람을 보내 너를 데려가게 하겠다.”“왕야께서 정사에 바쁜데 굳이 마음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금자와 은보만 함께하면 됩니다.”이도현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53화

    잠에서 깨어난 윤서령은 온몸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 알몸으로 침상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는 애써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희미하게 떠오르는 건 이도현이 사람들을 시켜 자신에게 억지로 약을 들이부었던 순간뿐, 그 뒤의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하필 그곳에서 참기 힘든 통증이 밀려왔다. 윤서령의 뺨이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섭정왕께서 당시 꽤 화가 나 보였는데 결국은 나를 총애했단 말인가?’어제 입었던 옷은 이미 찢겨 입을 수 없게 되었고 곁에는 새 옷 한 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윤서령은 아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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