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태후는 마음이 아픈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이 일은 너와 오라버니께서 알아서 결정하거라. 나는 피곤하니 이만 돌아가겠다.”최 씨는 태후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알고 더는 머물지 않았다. 그녀는 예를 올린 뒤 서난각을 나섰다.요 며칠, 신수빈은 큰 오라버니에게서 전갈을 받았다. 형수가 얼마 전 딸을 낳았는데 신수빈을 쏙 빼 닮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름은 유진이라 지었고, 내년쯤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경성으로 데려와 보여 주겠다고 했다. 전생에서 신수빈은 그 작은 조카를 끝내 보지 못했고 집으로 온 편지로만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신수빈은 후한 예물을 마련했다. 그러나 신 가가 보지 못했을 물건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 결국 손수 아이의 작은 옷과 백복으로 감싼 포대기를 지어 예물과 함께 항주로 보냈다.그 소식을 듣고 신수빈은 며칠이나 마음이 들떠 있었다. 다만 윤 가의 분위기가 지금은 잿빛이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표정을 숨겨야 했다.윤서원은 지금 요양 중이었는데, 의원이 몇 차례나 바뀌었지만 여전히 차도는 없었다. 하나같이 모두 때를 놓쳤다고만 할 뿐이었다.그 탓에 윤 가 안팎에서는 주서화에 대한 원망이 더욱 짙어졌다. 특히 서 씨는 사정을 모두 알게 된 뒤로 날마다 주서화의 거처를 찾아가 고함치며 매질을 했다. 본래 서 씨는 금족을 당했으나 자식들로 인한 충격에 정신이 온전치 않아 더는 제지하는 이도 없었다.“불이야!”그날 밤, 신수빈이 잠자리에 들려던 찰나, 바깥에서 누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원의 노복들과 시녀들이 이내 우르르 밖으로 달려나갔다.신수빈도 창을 열어 확인해 보았는데, 동쪽 하늘에 검붉은 연기가 치솟더니, 불길이 번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그녀는 창틀을 꽉 움켜쥔 채, 하늘 한쪽이 붉게 타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곧 금자가 달려 들어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마님, 윤서령 아가씨의 마당에 불이 난 것 같습니다! 한데… 불길이 너무 세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
정양왕비 최 씨는 태후의 말을 듣는 순간, 그 뜻을 곧바로 알아차렸다.“신첩이 돌아가 왕야와 상의한 뒤, 문화를 향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태후는 짧게 응답했다. 그녀의 눈에는 이미 싸늘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정양왕비는 오늘 이곳에 온 본래의 목적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태후께서 요 며칠 크게 편찮으셔서 바깥 사정을 잘 모르실 듯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만, 섭정왕의 새 총애가 요즘 몹시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섭정왕께서 직접 그녀를 데리고 유람을 나가셨는데 수레와 말이 화려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고 합니다.”그 말에 태후는 잠시 굳어버렸다.“새 총애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전부터 행궁에 머물던 진 씨 성을 가진 여인이요. 이름은 하빈이라 하더군요. 섭정왕의 후원에 들자마자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그 일로 섭정왕께서 이틀이나 조회를 파하셨습니다.”태후는 익숙한 이름에 곧바로 기억해 냈다. 마구간에서 열린 마상 구경 자리에서 그 여인을 본 적이 있었다.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몸매 또한 수려했다.태후의 마음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신 씨 하나만 해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제는 또 다른 진 씨 여인이 생겨 이렇게 떳떳하게 그의 곁을 지키고 있으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욱씬거렸다.역시 세상 사내들은 다 한결같았다. 누구나 좌우에 여인을 거느리고 싶어 했다. 최 씨는 태후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울해 있는 것을 보고는 조심스레 위로의 말을 건넸다.“섭정왕께서는 지금 천하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고 계십니다. 조정의 관원 임면과 군정의 조율 모두 그 분의 손에 달려 있지요. 비록 지금은 충심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보이지만… 이처럼 지존의 권세를 쥐고 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만약 섭정왕의 곁에 우리 사람을 두어 때때로 말 한마디씩 건넬 수 있다면 섭정왕 또한 신하로서의 분수를 잊지 않을 것이며, 태후께서도 섭정왕의 정무 판단과 내택의 사정을 수시로 알 수 있으실 것입니
”지방 관원들과 하도 관아 역시 선을 지키고는 있습니다. 대규모로 범람해 큰 수해가 나지 않게 막으며, 극히 일부 백성들만 피해를 입히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문제로 번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신도연이라는 자가 굳이 단번에 근본부터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린 것이지요. 게다가 그는 섭정왕이 직접 지명한 인물이라 여기저기에 제약이 많습니다.”어쨌든 장 가가 가장 큰 몫을 챙긴 상황에서 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가는 불길이 제 몸을 태우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양왕비의 말을 들은 태후는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오라버니가 말하던 대로였다. 중원의 몇몇 큰 가문들의 두터운 기반이 어디에 있는지, 왕조가 몇 번이나 바뀌어도 그들의 뿌리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조정의 요직과 자원이 여전히 몇몇 명문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었다.이제 막 벼슬길에 발을 들인 최문화 같은 인물, 그리고 내택에 머무는 최 씨 같은 부인이 관직의 이치를 훤히 꿰뚫고 있으니 오라버니가 이 재가한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 선택이 참으로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신도연이라… 어떤 자냐?”태후는 조정에서 그런 이름을 가진 관리가 있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정양왕비는 태후가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고는 차분히 답했다.“항주 출신입니다. 항주의 거상, 신병호의 셋째 아들이지요.”거상의 아들이라는 말에 태후는 잠시 멈칫했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지듯 그 신도연이 바로 신 씨의 셋째 오라비라는 사실이 떠올랐다.다른 이들은 몰라도 신 씨와 이도현 사이의 은밀한 관계를 태후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이도현에 대해서 잘 안다고 여겼다. 그가 아무리 여인을 총애한다 해도 결코 그 여인들이 그의 결정을 좌우하게 두지는 않을 인물이었다.그런데 이 신 씨라는 여인은 달랐다. 관직 하나 없는 백정 신분에, 그것도 상인의 집안 출신인 신도연을 단숨에 하도 감찰사로 만들어 놓다니.
신수빈이 마음 편히 지내는 것과 달리 태후는 소영이 처형된 이후 크게 앓아누웠고 열흘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차도를 보였다.태후의 오라버니인 정양왕은 두 차례나 입궐해 문안을 드렸고 그녀가 기운 없이 축 처진 모습을 보자 부인에게 서난각에 자주 들러 태후의 곁을 지키라고 일렀다.오늘의 태후는 비교적 상태가 좋아, 화랑 앞에 앉아 두 마리 사자고양이가 공을 쫓으며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시 하나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린 태후는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혹시 섭정왕이더냐?”내시는 고개를 한껏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아뢰었다.“태후 마마, 정양왕비께서 오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태후의 눈빛이 곧바로 어두워졌다.태후는 문득, 조정의 중대한 일이 아니면 이곳에는 오지 않겠다고 했었던 이도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토록 오래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들라 하거라.”태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곁에 서 있던 여관 황상궁에게 다시 물었다.“내가 병석에 있던 동안 섭정왕이 사람을 보내 안부라도 물은 적이 있느냐?”비록 황상궁이 소영만큼 태후의 곁에서 중용되던 인물은 아니었으나 오래된 심복으로 태후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없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태후의 얼굴에 있는 쓸쓸함이 더욱 가려지지 않았다.이윽고 정양왕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태후의 안색이 한결 좋아 보이자 그녀 역시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지금의 천자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장 씨는 외척이었기에 일가의 모든 영광은 태후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태후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장 가의 가장 큰 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마친 뒤, 태후는 정양왕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재가하여 장 가로 들어온 몸이었지만 최 씨 가문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인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 장 가가 권세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뿌리가 얕은 만큼 최 씨와의 혼인은 그들에게
서 씨는 이때 몹시 수척해 보였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떠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고작 스무 날 남짓한 사이에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서 씨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하지만 딸 하나는 황명을 기다리며 남은 인생을 몇몇 환관들과 함께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유일한 아들 또한 중풍에 걸렸다.서 씨는 윤서원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녀들에게서 한마디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붉힌 채 신수빈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이 망조 든 년아! 집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윤 가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것이냐! 게다가 내 아들까지 병들게 하고, 서화의 뱃속 아이까지 잃게 만들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오늘 내가 너 같은 천한 년을 가만두지 않겠다!”서 씨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손을 치켜들어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금자와 은보가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서 씨는 두 사람을 향해 더욱 거칠게 악을 썼다.“이 천한 계집종들이 감히 나를 막아서는 것이냐?”그때 큰 마님이 지팡이를 바닥에 세차게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낮고 엄한 음성이 울렸다.“이제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집안이 이만하면 충분히 어지럽지 않으냐!”그제야 서 씨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윤서령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윤서원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큰 마님의 시선이 신수빈의 배로 옮겨 갔다.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와 옷차림 덕분에 배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회임한 기색은 분명히 보였다.“이 일은 본래 네 잘못이 아니니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 몸에 아이도 있으니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몸부터 잘 돌보거라.”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신수빈의 배로 쏠렸다. 과연 아랫배가 살짝 불룩해져 있었다.그때 호위들이 들것을 들고 와 마차에서 윤서원을 내려놓았다. 그가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아
이도현 역시 어딘가 멋쩍은 기색을 띠고 있었고, 더는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말도, 왕부에 들어와 첩이 되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신수빈의 말대로 그녀의 신분은 확실히 낮았다. 방금 전, 그 한마디 역시, 그 자신도 어찌하여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도현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그녀는 다른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은 이도현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귀족이든, 재물이 넉넉한 집안이든, 심지어는 장터의 평범한 백성조차 약간의 여유만 생기면 첩 한 명쯤은 두려 했다. 그들의 아내가 된 여인은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됐고 설령 불만을 드러내더라도 질투 많은 여인이라는 이유로 내쳐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디를 보아도 현숙한 여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니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조차 견디지 못하는 일을 여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신 씨, 본왕은…!”이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여인은 없다고,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기에 다른 세가의 자제들처럼 어린 나이에 통방 시녀를 둔 적도 없었다고, 이후 몇 차례 일을 겪고 나서는 정사에 마음을 둘 여유조차 없이 십수 년을 남과 북의 전장을 오갔다고… 올해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조금 잠잠해졌을 뿐이라고… 만약, 그날 밤, 암계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와 이런 인연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침상에서는 어떤 여인인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친왕들처럼 어느 명문가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 몇 명의 첩을 들이며 무난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의 첫 사내였고 그녀 또한 그의 첫 여인이었지만, 그는 이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세를 쥔 인물이 되었다. 스물일곱의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내들은 이미 모두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