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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作者: 정대천
이도현은 석 달 전 그날 밤, 신수빈이 원해서 그의 침상으로 올라왔는지 아니면 강제로 보내졌는지 여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고 그를 서방님이라 불렀으니.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할 뿐 아니라 눈가에 웃음기 어린 표정을 띤 채 침착한 태도로 그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신수빈은 그날 밤 자신과 함께 있던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이도현은 흥미를 잃었다.

이도현은 원래 그녀가 자의가 아닌 윤서원의 강요로 그에게 보내진 거라면 신씨 가문이 아닌 그녀가 자신의 첫날밤을 내준 것을 봐서라도 곁에 데려와 그녀를 지켜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윤서원은 그녀를 이용해 자신에게 아첨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다는 걸 신수빈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정조를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자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히 그를 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도현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고 말투도 한층 차가워졌다.

"조정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서원이 내게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달라고 하더군 배포도 참 크지."

이도현은 신수빈을 흘깃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날 밤 하루로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신수빈은 그의 눈동자 속 조롱과 경멸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전생에 그녀는 입궐한 적이 없었기에 이도현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를 만난 건 사당에서였고 그때 그는 왕부로 자신을 데려가려 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신수빈은 그저 그가 희롱한다고 여겨 단호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수빈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윤서원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럴 자격 없다고 봅니다."

신수빈이 옅은 웃음을 짓자 길고 가늘게 그려진 눈꼬리가 올라가며 달빛 같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왕야께서 절 이리 부르신 건 이 얘기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도현은 그런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흐릿한 눈빛으로 서방님이라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본디 그녀와 윤서원 같은 저열한 수법으로 아첨하는 자들을 싫어했고 신수빈이 신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수빈이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직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의 욕망을 들끓게 했으니.

이도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신수빈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그럼 나와 몇 밤을 더 보내야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토록 노골적인 암시는 바보가 아닌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말이었다.

신수빈은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사내와 마주한 적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권세로 천하를 휘어잡는 이도현이었다.

사람을 압박해 오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층층이 벗겨내 꿰뚫으려는 것 같았다.

순간 목이 메는 느낌에 신수빈은 무심코 입술을 한번 핥았다.

하필 그 동작이 이도현의 눈에 띄었고 그게 일종의 암시인 줄 알았던 그는 속으로 비웃으며 본능에 따라 몸을 숙였다.

뜨거운 그의 숨결이 신수빈의 숨결과 뒤섞여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전생의 일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윤서원과 주서화는 죽어 마땅했다. 그렇다면 권모술수를 부리는 섭정왕은 과연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태후의 대역으로 삼아 그녀의 순결을 짓밟았고 관직 하나로 윤서원을 매수했다. 그날 밤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아들 연우도 그런 비참한 운명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신수빈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의 뜨거운 숨결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게 됐다.

이도현은 멈칫했으나 그것조차 애매한 거절이라 여겨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밀려오는 통증에 신수빈이 낮은 신음을 흘리자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예복을 벗기려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궁궐의 외진 별전이긴 하나 대낮에 이런 노골적인 욕정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신수빈은 이도현에게 안겨 정원의 돌 탁자에 앉혀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앞섶을 벗기려 하자 신수빈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그의 욕망을 속절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몸과 얼굴이라는 걸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점을 노려 그와 거래할 심산이었다.

"그날 밤으로 관직을 바꾸기에 부족하시다 생각하시면 제게 은혜를 베푸시는 건 어떠시려는지요? 윤서원에게만 좋은 노릇하게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도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녀가 윤서원을 거쳐서가 아닌 직접적으로 거래를 청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신수빈은 옷이 흐트러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윽한 눈빛에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그야말로 절세의 요녀가 따로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왕야의 기개와 풍채가 제 마음속 깊이 남아 잊히질 않더이다. 하여 왕야를 다시 뵙는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윤서원은 상관하지 마시고 왕야께서 제 면수(面首:귀부인들이 노리개로 삼는 미남자)가 되어 저와 긴 세월을 함께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이도현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눈앞의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봤다.

"뭐라? 지금 나더러 무엇이 되라고 했느냐?"

신수빈이 손을 들어 이도현의 얼굴을 감싸며 황홀한 욕망이 어린 표정을 띠었다.

"면수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곧게 세워 이도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옷 한쪽이 흘러내렸음에도 그녀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에서부터 목젖을 지나, 가슴팍에 이른 후 그의 겉옷을 가볍게 젖혔다.

"왕야께서 면수가 체통에 맞지 않다 여기시면 제 외실이 되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시간이 나면 왕야를 뵈러 오겠습니다."

면수에 외실이라니!

신수빈이 거듭해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도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을 것이다. 천하에 감히 이런 말을 그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곧 그의 눈에 아른거리던 욕망은 분노로 바뀌었고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지분대는 신수빈의 손을 뿌리쳤다.

여인을 갖고 노는 것과 여인에게 놀아나는 건 본디 다른 일이었다.

이도현은 기개가 넘친다느니, 잊지 못했다느니 같은 천박한 말과 함께 그를 하찮은 면수 따위로 취급하는 신수빈에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신수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그녀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엄하다!"

그는 차가운 눈빛과 함께 호통을 쳤다.

"신씨 가문에 너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식이 있다니... 집안 망신이 따로 없구나!"

그 말에 신수빈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웃긴 말인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졌다.

"제 신혼 첫날 밤에, 제 순결을 짓밟아 시댁 사람들에게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한 건 누구고, 저를 이곳으로 유인해 희롱하고 모욕한 자는 또 누구입니까? 절 기생 취급하고 대낮에 제 옷을 벗긴 왕야께서 망신을 논하시다니. 진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녕 우스갯소리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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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60화

    “신첩은… 왕야께서 이토록 큰 예를 올릴만한 사람이 아닙니다.”이내 이도현의 눈꼬리에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와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낸 신수빈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부인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품행이 고결하고 덕과 용모를 모두 갖춘 이는 천하에 부인뿐이니, 본왕이 예를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신수빈은 속으로 외쳤다.‘그만 좀 하십시오! 눈에 웃음이 다 보이지 않습니까! 더 하다가는 정말 들키겠습니다!’다행히 이도현은 선을 넘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이곳에는 눈 밝은 조신들이 가득했다. 이 자리에서 신하의 부인을 탐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가는, 훗날 걷잡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이도현은 눈가에 어리던 웃음기를 말끔히 거두었다.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몇 걸음 천천히 걸었다. 얼굴에는 은근한 울적함이 어려 있었다.신수빈은 이 남자와 반년 가까이 얽혀 지냈다.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물었다.“왕야께서는 어찌하여 한숨을 쉬십니까?”이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난처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본왕에게 염치없는 청이 하나 있는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신수빈은 그가 또 무슨 곤란한 말을 꺼낼지 몰라 살짝 긴장했다.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왕야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신첩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겠습니다.”“본왕이 듣기로, 부인은 선항족 군이 성을 함락하던 날 큰 충격을 받아 조산했고, 끝내 아이를 잃었다고 하더군. 본왕은 그 소식을 듣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부인처럼 어진 사람이 그런 일을 겪다니,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지.”신수빈은 잠시 말을 잃었다.‘이 개자식… 그 아이가 어떻게 된 건지,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슬픈 기색을 지으며 낮게 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9화

    윤서원은 이도현의 이 한 수에 허를 찔린 듯,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상좌에 앉은 사내의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은 대전의 돌바닥처럼 서늘했다.“윤 경은 설마 내키지 않는 것인가? 폐하의 병세가 깊어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다는 뜻이냐.”오만하고도 거침없는 말투였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대전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가라앉았다.윤서원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수많은 조신들이 지켜보는 대전 위에서, 그것도 천자를 위한 기도를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가슴속에서는 원망과 증오가 들끓었지만, 그는 결국 그 사내의 권세 앞에 짓눌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폐하를 위해 기도 드리는 저희에게는 영광입니다. 신 또한 부인과 함께 가서 기도를 올리겠습니다.”부부는 한 몸이라 하지 않았던가.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부부를 억지로 갈라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신수빈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상좌의 사내가 가볍게 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손으로는 소매 끝을 스치듯 털어 내는데, 그 태도는 한없이 느긋하고 나른했다.“부인만 가면 된다. 윤 경, 너는 갈 필요 없다.”이도현은 눈꺼풀을 들어 대전 한가운데 무릎 꿇은 윤서원을 한 번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경은 덕이 모자라고 품성이 천하다. 네가 기도를 올리면, 도리어 신명께서 노하실 것이다.”윤서원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그 한마디는 그의 옷을 벗겨 거리 한복판에 내던진 것과 다름없었다. 온 조정의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도현은 그의 마지막 체면마저 발밑에 짓밟고 있었다. 윤서원은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조정 대신들 역시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체통을 잃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이도현과 눈이 마주치면 자칫 웃음이 새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8화

    청하는 신수빈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마님, 오늘은 왕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떠세요? 오늘 밤만이라도… 왕야 마음에 마님 생각이 깊이 남게 해 두시면, 훗날에도 쉽게 잊지는 못하실 테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청하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그분이 원하는 건 내 얼굴뿐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은 얼마든지 많아. 그분이 정말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이었다면, 이십여 년 동안 후원을 비워 두었을 리가 없지.”신수빈은 이도현이 훗날 다른 여인을 들인다 해도 크게 마음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청하에게 윤연우를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한 뒤,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출발하기로 한 날은 정월 스무 날이었다.그날은 유난히 눈이 거세게 쏟아졌지만, 윤서원은 끝내 길을 나서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하지만 막 관이 윤부를 나서려던 순간, 궁에서 내시가 칙명을 전하러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서원과 신수빈을 입궁시키라는 전갈이었다.윤서원의 안색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까 싶었던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내관, 아버지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가야 하니 시간을 늦출 수 없습니다.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내시는 그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되물었다.“네 아버지의 시간이 중하냐, 폐하의 명이 중하냐?”윤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결국 그는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칙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입궁한 두 사람은 곧장 조회가 열리는 전각으로 이끌려 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아, 백관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윤서원은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신수빈은 호국부인으로서 초품 고명에 오른 몸이었기에, 군주 앞에서도 절을 면하고 대전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백관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쏠린 가운데, 윤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신과 신의 부인을 이 자리에 부르신 연유를 여쭙고자 합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7화

    이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굳게 다문 입매에도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거라. 문주가 누구인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그리고… 부인 쪽에 무비랑 암위를 몇 명 더 붙이거라.”“예.”지시를 마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손에 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편지에는 윤서원이 집안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신수빈의 말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그의 긴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조용히 곱씹는 듯한 눈빛이었다.*이튿날 아침, 윤서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곧장 움직였다. 평양후의 세습 작위를 사양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고, 상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집안 사람들까지 모두 떠날 채비를 시켰다.이런 일은 조정이라 해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윤서원은 근정전 안에 서서, 상좌에 앉은 이도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렸다.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이도현이 권세를 앞세워 남의 부인을 빼앗으려 드는 것.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가 두 사람을 간통한 남녀로 몰아가고, 결국 그 소문이 그들을 짓누르는 것이었다.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서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도현과 눈이 마주쳤다.한참 뒤에야, 이도현이 입을 열었다.“허한다.”윤서원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신수빈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결국 그 정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아무리 아끼는 여자라 해도, 높은 권세 앞에서는 그저 버릴 수 있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신,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폐하께도 감사드립니다. 신은 부인과 돌아가는 길에도 밤낮으로 왕야와 폐하의 안녕을 빌겠습니다.”윤서원은 겉으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 사람’이 말한 대로였다.신수빈을 장안에서 데려가기만 하면, 이도현이 억지로 빼앗으려 들 경우 조정 안팎의 여론이 그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6화

    눈앞의 사내는 한 번 손을 쓴 것만으로도 금자와 은보를 밀어낼 수 있었다.윤 가에 저만한 실력을 지닌 호위는 없었다. 평양후에게 그런 힘이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 누가 윤서원을 살려 냈고, 저런 고수까지 붙여 그를 지키게 한 것일까.신수빈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이 자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그물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윤서원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그가 낮게 웃었다. 눈빛은 여전히 축축하고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네 머릿속으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니 나도 솔직히 말해 주지. 나는 너와 화이할 생각이 없다. 더더욱 너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도 없고. 윤 가를 떠나 그 사내와 함께 도망쳐 살 생각이라면, 애초에 접어라. 정 데려가고 싶거든, 그자를 불러와 우리 집에서 직접 너를 빼앗아 가라 해. 설마 내가 너희 둘을 곱게 이어 주기라도 바란 건 아니겠지? 그런 꿈은 깨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더욱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일이면 상소를 올려 평양후 세자의 작위를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너는 내 부인이니, 당연히 나를 따라야겠지. 어디 두고 보자. 저 높으신 섭정왕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붙잡을 수 있을지.”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번져 갔다.한참을 웃던 윤서원은 신수빈의 얼굴에 당황이나 혼란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그는 비틀린 냉소를 흘렸다.“부인, 고향에 돌아가면… 부군으로서 아주 잘 대해 주지. 앞으로 함께할 날이 길지 않겠나?”윤서원은 그대로 돌아섰다.그가 창란원을 완전히 떠난 뒤에도, 신수빈은 꽉 쥔 두 손을 풀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이윽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왕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5화

    요 며칠 사이 장안성은 평양후의 죽음으로 떠들썩했다.청루에서 여인들과 어울리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입방아에 오를 일이었는데, 반신불수로 누워 있던 세자 윤서원이 회복해 장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그 바람에 조문을 온 친지들과 옛 인연이 있던 이들까지 모두 윤서원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윤서원이 회복된 일은 신수빈에게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그 며칠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평양후의 빈소에 나가지 않았고, 윤서원 역시 그녀의 처소를 찾아오지 않았다.이도현은 이 일이 길어질수록 더 복잡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서 씨 때처럼 조칙을 내려, 신수빈을 윤 가와 갈라서게 하려 했다.훗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이도현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그 일은 반드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터였다.윤 가에서 잇달아 벌어진 사건, 가문의 몰락, 신수빈이 거듭 받은 봉작, 신 가에 더해진 영광까지 한데 엮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안에서 다른 뜻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예로부터 사람들의 상상력은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찻집과 주루의 이야기꾼들은 한가할 때마다 권세가의 기묘한 소문을 끌어와 입맛대로 살을 붙이곤 했다.이도현이 그런 식으로 일을 밀어붙인다면, 스스로 제 명성을 깎아내리는 꼴이 될 수 있었다.섭정왕이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빼앗았다는 말, 신 씨가 윤 가를 해쳤다는 말, 그 밖의 온갖 억측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질 것이 뻔했다.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내리는 명령 역시 예전만 한 힘을 갖기 어려웠다.신수빈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이도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오히려 누구보다 권세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술에 취해 있던 순간에는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술이 깨고 난 뒤에는 그 방법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4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신병문이 마차 밖을 향해 묻자 마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사유는 알 수 없으나 정오 무렵부터 갑자기 성문을 닫고 출입을 금했습니다.”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늘 무슨 큰일이 있을 리가 있나?신수빈은 자신의 마부를 보내 평양후의 명호를 밝히게 했다. 그러자 성루 위에서 귀찮다는 듯한 고함이 떨어졌다.“상부의 명령 없이는 출입 금지라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그때, 성문을 지키던 노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전에 사가에서 신 씨 가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자였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74화

    측근 내시는 명을 받고 물러났지만, 아직 마음속에서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왕야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평소 옷차림에 아무 관심도 없고, 조복 아니면 늘 단정한 평상복이나 갑옷뿐이던 사람이 언제부터 이런 걸 따지게 된 걸까 싶었다. 잠시 후, 여러 벌의 옷이 안으로 들여보내졌다.검은빛, 감청, 자줏빛 같은, 대개가 조정에 나갈 때 입는 색이었다. 평상복이라고 해도 눈에 띄는 색은 거의 없었다.이도현은 문득 모후가 살아있을 때 맞춰 준 한 벌의 비단 옷을 떠올렸다. 그때 그가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본 모후는 장안에서 가장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83화

    신수빈은 혹여 이도현이 분노한 나머지 아이에게까지 화를 옮길까 봐 두려웠다.장원 부인의 전례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했기에 결국 그녀는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소매를 붙잡은 채, 눈동자는 가을 물결처럼 잔잔히 흔들리며 맑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왕야께서 제게 베푸신 마음,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아이는 아직 너무 어립니다. 어린 나이에 어미 곁을 떠날 생각을 하니 그저 마음이 아플 뿐입니다. 왕야께서 저를 가엾이 여겨주신다면 이번 한 번만 더 허락해 주십시오. 아이가 서너 살이 될 때까지 곁에 두고 그 이후에는 모든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86화

    진하빈은 속이 끓어올랐지만 감히 내색하지 못했다.그렇게 문밖에서 반 시진을 꼬박 서 있어 다리가 저릴 대로 저려올 즈음, 최명주가 마침내 방 안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그녀는 진하빈을 흘끗 보며 은근히 내려다보는 기색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동생을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진하빈은 그녀의 심기를 거스를 수 없어 그저 공손한 웃음을 띠고 답했다.“아닙니다. 최 아가씨,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최명주는 진하빈의 한껏 낮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걸었고 진하빈은 조용히 한 걸음 뒤를 따랐다.윤부로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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