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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مؤلف: 정대천
이도현은 석 달 전 그날 밤, 신수빈이 원해서 그의 침상으로 올라왔는지 아니면 강제로 보내졌는지 여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고 그를 서방님이라 불렀으니.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할 뿐 아니라 눈가에 웃음기 어린 표정을 띤 채 침착한 태도로 그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신수빈은 그날 밤 자신과 함께 있던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이도현은 흥미를 잃었다.

이도현은 원래 그녀가 자의가 아닌 윤서원의 강요로 그에게 보내진 거라면 신씨 가문이 아닌 그녀가 자신의 첫날밤을 내준 것을 봐서라도 곁에 데려와 그녀를 지켜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윤서원은 그녀를 이용해 자신에게 아첨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다는 걸 신수빈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정조를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자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히 그를 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도현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고 말투도 한층 차가워졌다.

"조정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서원이 내게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달라고 하더군 배포도 참 크지."

이도현은 신수빈을 흘깃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날 밤 하루로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신수빈은 그의 눈동자 속 조롱과 경멸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전생에 그녀는 입궐한 적이 없었기에 이도현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를 만난 건 사당에서였고 그때 그는 왕부로 자신을 데려가려 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신수빈은 그저 그가 희롱한다고 여겨 단호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수빈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윤서원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럴 자격 없다고 봅니다."

신수빈이 옅은 웃음을 짓자 길고 가늘게 그려진 눈꼬리가 올라가며 달빛 같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왕야께서 절 이리 부르신 건 이 얘기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도현은 그런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흐릿한 눈빛으로 서방님이라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본디 그녀와 윤서원 같은 저열한 수법으로 아첨하는 자들을 싫어했고 신수빈이 신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수빈이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직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의 욕망을 들끓게 했으니.

이도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신수빈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그럼 나와 몇 밤을 더 보내야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토록 노골적인 암시는 바보가 아닌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말이었다.

신수빈은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사내와 마주한 적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권세로 천하를 휘어잡는 이도현이었다.

사람을 압박해 오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층층이 벗겨내 꿰뚫으려는 것 같았다.

순간 목이 메는 느낌에 신수빈은 무심코 입술을 한번 핥았다.

하필 그 동작이 이도현의 눈에 띄었고 그게 일종의 암시인 줄 알았던 그는 속으로 비웃으며 본능에 따라 몸을 숙였다.

뜨거운 그의 숨결이 신수빈의 숨결과 뒤섞여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전생의 일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윤서원과 주서화는 죽어 마땅했다. 그렇다면 권모술수를 부리는 섭정왕은 과연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태후의 대역으로 삼아 그녀의 순결을 짓밟았고 관직 하나로 윤서원을 매수했다. 그날 밤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아들 연우도 그런 비참한 운명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신수빈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의 뜨거운 숨결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게 됐다.

이도현은 멈칫했으나 그것조차 애매한 거절이라 여겨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밀려오는 통증에 신수빈이 낮은 신음을 흘리자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예복을 벗기려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궁궐의 외진 별전이긴 하나 대낮에 이런 노골적인 욕정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신수빈은 이도현에게 안겨 정원의 돌 탁자에 앉혀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앞섶을 벗기려 하자 신수빈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그의 욕망을 속절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몸과 얼굴이라는 걸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점을 노려 그와 거래할 심산이었다.

"그날 밤으로 관직을 바꾸기에 부족하시다 생각하시면 제게 은혜를 베푸시는 건 어떠시려는지요? 윤서원에게만 좋은 노릇하게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도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녀가 윤서원을 거쳐서가 아닌 직접적으로 거래를 청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신수빈은 옷이 흐트러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윽한 눈빛에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그야말로 절세의 요녀가 따로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왕야의 기개와 풍채가 제 마음속 깊이 남아 잊히질 않더이다. 하여 왕야를 다시 뵙는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윤서원은 상관하지 마시고 왕야께서 제 면수(面首:귀부인들이 노리개로 삼는 미남자)가 되어 저와 긴 세월을 함께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이도현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눈앞의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봤다.

"뭐라? 지금 나더러 무엇이 되라고 했느냐?"

신수빈이 손을 들어 이도현의 얼굴을 감싸며 황홀한 욕망이 어린 표정을 띠었다.

"면수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곧게 세워 이도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옷 한쪽이 흘러내렸음에도 그녀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에서부터 목젖을 지나, 가슴팍에 이른 후 그의 겉옷을 가볍게 젖혔다.

"왕야께서 면수가 체통에 맞지 않다 여기시면 제 외실이 되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시간이 나면 왕야를 뵈러 오겠습니다."

면수에 외실이라니!

신수빈이 거듭해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도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을 것이다. 천하에 감히 이런 말을 그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곧 그의 눈에 아른거리던 욕망은 분노로 바뀌었고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지분대는 신수빈의 손을 뿌리쳤다.

여인을 갖고 노는 것과 여인에게 놀아나는 건 본디 다른 일이었다.

이도현은 기개가 넘친다느니, 잊지 못했다느니 같은 천박한 말과 함께 그를 하찮은 면수 따위로 취급하는 신수빈에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신수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그녀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엄하다!"

그는 차가운 눈빛과 함께 호통을 쳤다.

"신씨 가문에 너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식이 있다니... 집안 망신이 따로 없구나!"

그 말에 신수빈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웃긴 말인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졌다.

"제 신혼 첫날 밤에, 제 순결을 짓밟아 시댁 사람들에게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한 건 누구고, 저를 이곳으로 유인해 희롱하고 모욕한 자는 또 누구입니까? 절 기생 취급하고 대낮에 제 옷을 벗긴 왕야께서 망신을 논하시다니. 진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녕 우스갯소리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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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8화

    청하는 신수빈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마님, 오늘은 왕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떠세요? 오늘 밤만이라도… 왕야 마음에 마님 생각이 깊이 남게 해 두시면, 훗날에도 쉽게 잊지는 못하실 테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청하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그분이 원하는 건 내 얼굴뿐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은 얼마든지 많아. 그분이 정말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이었다면, 이십여 년 동안 후원을 비워 두었을 리가 없지.”신수빈은 이도현이 훗날 다른 여인을 들인다 해도 크게 마음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청하에게 윤연우를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한 뒤,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출발하기로 한 날은 정월 스무 날이었다.그날은 유난히 눈이 거세게 쏟아졌지만, 윤서원은 끝내 길을 나서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하지만 막 관이 윤부를 나서려던 순간, 궁에서 내시가 칙명을 전하러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서원과 신수빈을 입궁시키라는 전갈이었다.윤서원의 안색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까 싶었던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내관, 아버지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가야 하니 시간을 늦출 수 없습니다.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내시는 그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되물었다.“네 아버지의 시간이 중하냐, 폐하의 명이 중하냐?”윤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결국 그는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칙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입궁한 두 사람은 곧장 조회가 열리는 전각으로 이끌려 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아, 백관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윤서원은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신수빈은 호국부인으로서 초품 고명에 오른 몸이었기에, 군주 앞에서도 절을 면하고 대전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백관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쏠린 가운데, 윤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신과 신의 부인을 이 자리에 부르신 연유를 여쭙고자 합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7화

    이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굳게 다문 입매에도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거라. 문주가 누구인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그리고… 부인 쪽에 무비랑 암위를 몇 명 더 붙이거라.”“예.”지시를 마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손에 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편지에는 윤서원이 집안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신수빈의 말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그의 긴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조용히 곱씹는 듯한 눈빛이었다.*이튿날 아침, 윤서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곧장 움직였다. 평양후의 세습 작위를 사양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고, 상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집안 사람들까지 모두 떠날 채비를 시켰다.이런 일은 조정이라 해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윤서원은 근정전 안에 서서, 상좌에 앉은 이도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렸다.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이도현이 권세를 앞세워 남의 부인을 빼앗으려 드는 것.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가 두 사람을 간통한 남녀로 몰아가고, 결국 그 소문이 그들을 짓누르는 것이었다.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서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도현과 눈이 마주쳤다.한참 뒤에야, 이도현이 입을 열었다.“허한다.”윤서원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신수빈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결국 그 정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아무리 아끼는 여자라 해도, 높은 권세 앞에서는 그저 버릴 수 있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신,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폐하께도 감사드립니다. 신은 부인과 돌아가는 길에도 밤낮으로 왕야와 폐하의 안녕을 빌겠습니다.”윤서원은 겉으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 사람’이 말한 대로였다.신수빈을 장안에서 데려가기만 하면, 이도현이 억지로 빼앗으려 들 경우 조정 안팎의 여론이 그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6화

    눈앞의 사내는 한 번 손을 쓴 것만으로도 금자와 은보를 밀어낼 수 있었다.윤 가에 저만한 실력을 지닌 호위는 없었다. 평양후에게 그런 힘이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었다.그렇다면 대체 누구일까. 누가 윤서원을 살려 냈고, 저런 고수까지 붙여 그를 지키게 한 것일까.신수빈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물이 자신을 중심으로 서서히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 그물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는 끝내 보이지 않았다.윤서원이 더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물러섰다.그가 낮게 웃었다. 눈빛은 여전히 축축하고 음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지금 네 머릿속으로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산하고 있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니 나도 솔직히 말해 주지. 나는 너와 화이할 생각이 없다. 더더욱 너를 순순히 놓아줄 생각도 없고. 윤 가를 떠나 그 사내와 함께 도망쳐 살 생각이라면, 애초에 접어라. 정 데려가고 싶거든, 그자를 불러와 우리 집에서 직접 너를 빼앗아 가라 해. 설마 내가 너희 둘을 곱게 이어 주기라도 바란 건 아니겠지? 그런 꿈은 깨는 게 좋을 거야.”말을 마친 그는 더욱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내일이면 상소를 올려 평양후 세자의 작위를 내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너는 내 부인이니, 당연히 나를 따라야겠지. 어디 두고 보자. 저 높으신 섭정왕이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붙잡을 수 있을지.”그의 웃음소리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번져 갔다.한참을 웃던 윤서원은 신수빈의 얼굴에 당황이나 혼란이 떠오르길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그런 기색을 찾아볼 수 없자, 그는 비틀린 냉소를 흘렸다.“부인, 고향에 돌아가면… 부군으로서 아주 잘 대해 주지. 앞으로 함께할 날이 길지 않겠나?”윤서원은 그대로 돌아섰다.그가 창란원을 완전히 떠난 뒤에도, 신수빈은 꽉 쥔 두 손을 풀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었다.이윽고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곧장 붓을 들어 편지를 썼다.“왕야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5화

    요 며칠 사이 장안성은 평양후의 죽음으로 떠들썩했다.청루에서 여인들과 어울리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문만으로도 충분히 입방아에 오를 일이었는데, 반신불수로 누워 있던 세자 윤서원이 회복해 장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까지 더해졌다.그 바람에 조문을 온 친지들과 옛 인연이 있던 이들까지 모두 윤서원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윤서원이 회복된 일은 신수빈에게도 전혀 예상 밖이었다.그 며칠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평양후의 빈소에 나가지 않았고, 윤서원 역시 그녀의 처소를 찾아오지 않았다.이도현은 이 일이 길어질수록 더 복잡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서 씨 때처럼 조칙을 내려, 신수빈을 윤 가와 갈라서게 하려 했다.훗날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간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이도현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졌다.그 일은 반드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터였다.윤 가에서 잇달아 벌어진 사건, 가문의 몰락, 신수빈이 거듭 받은 봉작, 신 가에 더해진 영광까지 한데 엮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안에서 다른 뜻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예로부터 사람들의 상상력은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찻집과 주루의 이야기꾼들은 한가할 때마다 권세가의 기묘한 소문을 끌어와 입맛대로 살을 붙이곤 했다.이도현이 그런 식으로 일을 밀어붙인다면, 스스로 제 명성을 깎아내리는 꼴이 될 수 있었다.섭정왕이 신하의 부인을 억지로 빼앗았다는 말, 신 씨가 윤 가를 해쳤다는 말, 그 밖의 온갖 억측과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질 것이 뻔했다.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숭배와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면, 그가 내리는 명령 역시 예전만 한 힘을 갖기 어려웠다.신수빈은 바로 그 점을 들어 그를 만류했다.이도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오히려 누구보다 권세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이 정도를 모를 리 없었다.술에 취해 있던 순간에는 미처 깊이 생각하지 못했을지라도, 술이 깨고 난 뒤에는 그 방법이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4화

    이도현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신수빈은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눈빛에는 억눌린 증오가 서늘하게 번뜩였다.잠시 입술을 굳게 다문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저께… 그 늙은 개가 윤서원이 깨어났다며 저를 불렀습니다. 제가 방심한 틈을 타 함정을 파 놓았더군요. 독한 미약을 써서 금자와 은보까지 모두 쓰러뜨리고… 저를 범해 윤 가의 아이를 낳게 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후작부의 대를 잇게 하려 한 것이지요. 다행히 그곳에 가기 전 미리 대비해 팔찌를 차고 있었고… 그자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독을 써서 죽였습니다.”그자가 그녀를 탐하려 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도현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졌다.방 안의 공기마저 한순간에 얼어붙은 듯 숨 막히게 가라앉았다.신수빈은 처음으로 그의 몸에서 이토록 서늘하고 노골적인 살의를 느꼈다.이도현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 했다.신수빈이 급히 그의 손을 붙잡았다.“왕야, 어디로 가십니까?”“본왕이 그자를 뼛가루도 남기지 않고 짓이겨 놓겠다!”신수빈은 낮게 웃으며, 아직 술기운이 남아 있는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이미 벌은 받았잖아요. 윤 가 사람들은 체면과 명예를 목숨처럼 여기고, 이익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 그런 꼴을 당하고, 그런 오명까지 뒤집어썼으니 저는 이미 충분히 속이 풀렸어요.”이도현은 돌아서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그의 눈빛에는 짙은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그런 일을 당하고도, 왜 본왕에게 알리지 않았느냐.”“왕야께서 바쁘시기도 했고… 이미 끝난 일이었으니까요.”이도현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깊게 가라앉아 있던 눈빛 끝에서, 결국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그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빈아… 이제는 내게 시집오너라. 더는 너를 이런 늑대굴에 혼자 둘 수 없다.”이 깊은 내택 안에서는 곁에 붙어 있는 시녀들조차 언제든 계략에 휘말릴 수 있었다.암위는 사내라 그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3화

    청루 같은 곳에서 하룻밤 새 수많은 여인을 끼고 놀다가 제 명을 재촉한 일은, 개국 이래 처음이었다.둘째 대감과 셋째 대감 역시 낯뜨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더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집안에서는 곧바로 빈소를 차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윤씨 큰 마님의 장례를 치른 터라, 준비해야 할 것들 중 상당수는 이미 갖춰져 있었다.신수빈은 방 안에서 금자가 전해 주는 바깥 소란을 들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때 바깥에서 시녀 하나가 들어와 아뢰었다.“마님, 큰 도련님을 보좌하는 무혁이 와서 내원 대패를 가져가겠다고 합니다. 마님께서는 병환 중이시니 이번 후작의 장례에는 참석하지 않으셔도 되고,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장례는 큰 도련님께서 모두 맡으신답니다.”신수빈은 본래도 그 늙은 개의 장례에 나갈 생각이 없었다.삼베옷을 걸치고 곡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그녀는 은보에게 대패를 무혁에게 넘기게 하고, 장례 일은 윤수혁에게 맡겨 두었다.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윤수혁이 평양후를 이런 방식으로 ‘죽게’ 만들었다는 것은, 그를 향한 원망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일이었다.하지만 이렇게 복수했다 한들, 앞으로 윤수혁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그는 분명 평양후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평판은 그의 앞날은 물론, 혼사와 출세에까지 영향을 미칠 터였다.그는 이미 적지 않은 나이였다.그동안 떠돌며 지내다가, 이제 겨우 조정에 발을 들여 관직도 얻었고, 총애 또한 받고 있어서 장래가 밝았다.그리고 이제는 혼사도 생각해야 할 텐데…윤 가의 이런 평판은 결코 그에게 이로울 것이 없었다.이도현이 윤 가의 일을 들은 것은 그다음 날이었다.요 며칠 동안 그는 이방 사신들을 접견하고, 각지의 관리들과 변경의 장수들을 맞이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섣달그믐 밤에 헤어진 뒤로는 아직 신수빈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그런데 이날 밤 연회 자리에서 뜻밖에도 윤 가의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66화

    지난달 보름날, 그는 그녀에게 이 패를 쥐여 주며 어디에 있든 이 패가 있는 한, 자신이 곁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했었다. 반드시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이도현은 감히 타버린 시신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보지 않으면 스스로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신수빈이 아닐 수도 있다고, 그녀는 아직도 평양 후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그가 떠나던 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그를 기다리겠다는 말 한마디였다. 그런데도 그는 한 달 내내 그녀를 공허한 기다림 속에 방치했고, 심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67화

    신수빈은 그의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띠었다. 윤수혁은 어린 시절부터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환경에서 자라 아주 작은 호의 하나도 오래도록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었다.그는 이미 그녀의 목숨을 구한 적도, 수차례 그녀를 도운적도 있었다. 정말 빚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수빈 쪽일 것이다.“아주버님께서는 이미 저를 몇 번이나 구해 주셨습니다. 은혜를 따지자면 제가 아주버님께 진 빚이 더 크지요.”윤수혁은 부드럽고 차분했다. 그의 눈빛은 따뜻한 햇살 같아 달빛의 쓸쓸한 냉기를 가볍게 덮어주는 듯했다.“제수씨와 저 사이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62화

    명양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 씨가 분명 더 할 말이 있으리라 짐작하고는, 말없이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오늘 장공주 마마를 모신 것은 염세 문제가 조정으로 번지게 된 배후가 바로 신 씨 가문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래의 계획은 예왕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지요. 염세는 누구도 손대지 않으려 하는 사안이기도 하고, 예왕은 친왕이지만 조정 내 기반과 인맥도 미약해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예왕에게 쏠릴 터였습니다만, 중간에 변수가 생겨 그 계획은 폐기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257화

    윤수혁 역시 후원 쪽 시종이 신수빈을 인도해 아각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았다.행화루는 장안에서 가장 큰 주루로 부지 면적만도 스무 묘가 넘었다. 앞뒤가 분리되어 있어 앞쪽 대청에서는 삼교구류가 뒤섞여 농담과 해학을 주고받으며 강호의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었고, 뒤쪽에는 여러 귀족과 고관대작들이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행화루의 주인이 조정의 실권자라는 소문이 도는 탓에 설령 부유함으로 천하에 이름난 신 가의 천일각이라 해도 한 수 물러설 수밖에 없다고 했다.윤수혁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는 순간, 그의 눈빛은 자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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