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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Penulis: 정대천
이도현은 석 달 전 그날 밤, 신수빈이 원해서 그의 침상으로 올라왔는지 아니면 강제로 보내졌는지 여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흐릿했고 그를 서방님이라 불렀으니.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목소리를 기억할 뿐 아니라 눈가에 웃음기 어린 표정을 띤 채 침착한 태도로 그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신수빈은 그날 밤 자신과 함께 있던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순간, 이도현은 흥미를 잃었다.

이도현은 원래 그녀가 자의가 아닌 윤서원의 강요로 그에게 보내진 거라면 신씨 가문이 아닌 그녀가 자신의 첫날밤을 내준 것을 봐서라도 곁에 데려와 그녀를 지켜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윤서원은 그녀를 이용해 자신에게 아첨하여 관직에 오르려 했다는 걸 신수빈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른 여인들처럼 정조를 잃은 것에 대해 분노하거나 자결하지 않았고 오히려 담담히 그를 대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이도현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고 말투도 한층 차가워졌다.

"조정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서원이 내게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달라고 하더군 배포도 참 크지."

이도현은 신수빈을 흘깃 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그날 밤 하루로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신수빈은 그의 눈동자 속 조롱과 경멸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전생에 그녀는 입궐한 적이 없었기에 이도현과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를 만난 건 사당에서였고 그때 그는 왕부로 자신을 데려가려 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던 신수빈은 그저 그가 희롱한다고 여겨 단호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든 신수빈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윤서원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럴 자격 없다고 봅니다."

신수빈이 옅은 웃음을 짓자 길고 가늘게 그려진 눈꼬리가 올라가며 달빛 같은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왕야께서 절 이리 부르신 건 이 얘기를 하시기 위함이었습니까?"

이도현은 그런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그날 밤 흐릿한 눈빛으로 서방님이라 부르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본디 그녀와 윤서원 같은 저열한 수법으로 아첨하는 자들을 싫어했고 신수빈이 신씨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수빈이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오직 눈빛 하나만으로도 그의 욕망을 들끓게 했으니.

이도현은 한 걸음 더 다가가 신수빈의 턱을 손끝으로 들어 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그럼 나와 몇 밤을 더 보내야 순찰영 지휘관 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토록 노골적인 암시는 바보가 아닌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말이었다.

신수빈은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사내와 마주한 적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권세로 천하를 휘어잡는 이도현이었다.

사람을 압박해 오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그녀를 층층이 벗겨내 꿰뚫으려는 것 같았다.

순간 목이 메는 느낌에 신수빈은 무심코 입술을 한번 핥았다.

하필 그 동작이 이도현의 눈에 띄었고 그게 일종의 암시인 줄 알았던 그는 속으로 비웃으며 본능에 따라 몸을 숙였다.

뜨거운 그의 숨결이 신수빈의 숨결과 뒤섞여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전생의 일들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윤서원과 주서화는 죽어 마땅했다. 그렇다면 권모술수를 부리는 섭정왕은 과연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을 태후의 대역으로 삼아 그녀의 순결을 짓밟았고 관직 하나로 윤서원을 매수했다. 그날 밤만 아니었다면 그녀의 아들 연우도 그런 비참한 운명은 맞이하지 않았을 텐데...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신수빈이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그의 뜨거운 숨결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게 됐다.

이도현은 멈칫했으나 그것조차 애매한 거절이라 여겨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밀려오는 통증에 신수빈이 낮은 신음을 흘리자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예복을 벗기려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궁궐의 외진 별전이긴 하나 대낮에 이런 노골적인 욕정을 드러내는 것은 그녀를 얼마나 가볍게 보고 있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신수빈은 이도현에게 안겨 정원의 돌 탁자에 앉혀졌다. 힘이 얼마나 센지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앞섶을 벗기려 하자 신수빈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의 눈에 이글거리는 불꽃은 그의 욕망을 속절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의 몸과 얼굴이라는 걸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점을 노려 그와 거래할 심산이었다.

"그날 밤으로 관직을 바꾸기에 부족하시다 생각하시면 제게 은혜를 베푸시는 건 어떠시려는지요? 윤서원에게만 좋은 노릇하게 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이도현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그녀가 윤서원을 거쳐서가 아닌 직접적으로 거래를 청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신수빈은 옷이 흐트러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윽한 눈빛에 목소리는 또 얼마나 달콤한지 그야말로 절세의 요녀가 따로 없었다.

"그날 밤 이후로, 왕야의 기개와 풍채가 제 마음속 깊이 남아 잊히질 않더이다. 하여 왕야를 다시 뵙는 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윤서원은 상관하지 마시고 왕야께서 제 면수(面首:귀부인들이 노리개로 삼는 미남자)가 되어 저와 긴 세월을 함께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이도현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한 얼굴로 눈앞의 아리따운 여인을 바라봤다.

"뭐라? 지금 나더러 무엇이 되라고 했느냐?"

신수빈이 손을 들어 이도현의 얼굴을 감싸며 황홀한 욕망이 어린 표정을 띠었다.

"면수라 하였습니다."

그녀는 몸을 곧게 세워 이도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옷 한쪽이 흘러내렸음에도 그녀는 손끝으로 그의 얼굴에서부터 목젖을 지나, 가슴팍에 이른 후 그의 겉옷을 가볍게 젖혔다.

"왕야께서 면수가 체통에 맞지 않다 여기시면 제 외실이 되어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 시간이 나면 왕야를 뵈러 오겠습니다."

면수에 외실이라니!

신수빈이 거듭해서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도현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을 것이다. 천하에 감히 이런 말을 그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

곧 그의 눈에 아른거리던 욕망은 분노로 바뀌었고 어두운 표정을 한 채 지분대는 신수빈의 손을 뿌리쳤다.

여인을 갖고 노는 것과 여인에게 놀아나는 건 본디 다른 일이었다.

이도현은 기개가 넘친다느니, 잊지 못했다느니 같은 천박한 말과 함께 그를 하찮은 면수 따위로 취급하는 신수빈에게 화가 났다.

무엇보다 신수빈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시선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그녀의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엄하다!"

그는 차가운 눈빛과 함께 호통을 쳤다.

"신씨 가문에 너 같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식이 있다니... 집안 망신이 따로 없구나!"

그 말에 신수빈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어찌나 웃긴 말인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졌다.

"제 신혼 첫날 밤에, 제 순결을 짓밟아 시댁 사람들에게 고개조차 들지 못하게 한 건 누구고, 저를 이곳으로 유인해 희롱하고 모욕한 자는 또 누구입니까? 절 기생 취급하고 대낮에 제 옷을 벗긴 왕야께서 망신을 논하시다니. 진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녕 우스갯소리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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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10화

    장녕은 이도현이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왕야가 신수빈의 지난 일에 얼마나 깊은 응어리를 품고 있는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 없다는 것도.잠시 침묵하던 장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감히 분수에 넘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왕야께서 마님의 과거를 마음에 두고 계신다 해도, 결국 더 놓지 못하는 사람은 왕야이십니다. 그렇다면 왕야께서 먼저 몇 걸음 더 다가가셔야 합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그날 밤처럼, 사실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일을 화가 난다고 입에 담으시면 마님의 마음만 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처만 주다 보면 결국 마님은 왕야에게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장녕의 시선이 차분히 이도현을 향했다.“왕야께서 바라시는 것은 마님의 앞으로의 삶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난 일은 이제 놓으셔야 합니다. 오늘부터 다시 시작하신다고 생각하십시오.”사실 장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신수빈이 이도현에게 품은 감정은 애정보다는 필요가 훨씬 컸다.지금도 그녀가 그의 곁에 있는 이유는 상당 부분 상황에 떠밀린 결과였다.정말 선택권이 있었다면, 그녀가 기꺼이 왕야에게 시집오겠다고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진심은 너무 잔인했다.신수빈은 한번 마음이 식으면 쉽게 돌이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도현이 그녀를 끝내 포기할 수 없다면, 조급하게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마음을 활짝 열고 조용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감정만 앞세워 서로를 몰아세울수록,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이도현은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장녕의 말을 모두 들을 뿐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마침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물러가라는 뜻이었다.장녕은 왕야가 자신의 말을 얼마나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장녕이 문턱을 막 넘어서려던 순간, 등 뒤에서 이도현의 무심한 목소리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9화

    “넷째 오라버니? 여긴 웬일이세요? 오시기 전에 사람이라도 보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신태안은 짧게 한마디만 했다.“할 말이 있어서.”그의 시선은 곧장 소온별에게 향했다.수상정에 앉아 있는 신수빈과 서하랑은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소 아가씨와 따로 이야기할 일이 있습니다.”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기세였다.“소 아가씨께서 직접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직접 모셔가야겠습니까?”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무례하다고 한마디 하려던 순간, 소온별이 먼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제가 따라가겠습니다, 신 장군.”신태안은 그녀의 대답을 듣자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소온별은 신수빈과 서하랑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그의 뒤를 따라 수상정을 떠났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수빈은 고개를 갸웃했다.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 같지는 않았다.분위기가 흐트러진 탓에 서하랑도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신수빈은 혹시라도 신태안이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금자에게 몰래 뒤를 따라가 보라고 일렀다.방으로 돌아온 신수빈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딸랑이를 바라보다가 다시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싸우는 건 싸우는 것이고, 아이까지 못 만나게 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란 말인가.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그 시각.이도현은 근정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다가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남은 상소문을 모두 처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왕부로 돌아갔다.왕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집사를 불렀다.“오늘 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온 적이 있었느냐?”“없었습니다, 왕야.”이도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좋아. 참 잘 버티는군.”'아들까지 데려왔는데도 꿈쩍도 안 한다는 건가.'그는 이를 악물더니 낮게 말했다.“장풍을 불러라.”곧 장풍이 들어오자 이도현은 곧바로 따져 물었다.“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사흘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8화

    한참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다 보니 서하랑은 그제야 화제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왔다는 걸 깨달았다.오늘 두 사람이 호국부를 찾은 이유는 경림연에서 있었던 일을 묻기 위해서였는데 말이다.서하랑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그날 경림연에서 보니 왕야께서는 너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던데. 요 며칠은 가는 곳마다 두 사람 이야기뿐이다. 왕야께서 그 뒤로 찾아오시진 않으셨느냐?”신수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며칠 동안 몸이 좋지 않아 문을 닫고 손님도 받지 않았거든요.”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도현은 정말 찾아오지 않았다.그녀는 되묻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은 뭐라고들 하나요?”서하랑이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왕야께서 너를 마음에 두셨다는 얘기지. 경림연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직접 뜻을 밝혔는데 네가 거절하지 않았더냐.”잠시 뜸을 들인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어떤 사람들은 왕야께서 순전히 미색에 마음을 빼앗긴 거라고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네가 지금 장안 백성들 사이에서 워낙 명망이 높고, 이번에 고향으로 돌아간 유생들까지 입을 모아 칭송하면서 현명한 여인이라는 이름이 사방으로 퍼졌으니, 그 정도라면 왕비가 되어도 손색없다고들 하더라고.”그녀는 피식 웃었다.“심지어 저잣거리에서는 네가 왕야와 혼인할지, 한다면 언제쯤 하게 될지를 두고 돈까지 걸고 내기를 하고 있더구나.”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험한 말들은 굳이 전하지 않았다.이런 소문이 퍼지는 만큼 시기와 질투가 섞인 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사람들이 내기까지 벌인다는 이야기에 어이가 없어 속으로만 혀를 찼다.'다들 참 한가하기도 하지.'서하랑이 조심스레 물었다.“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느냐?”신수빈은 씁쓸하게 웃었다.'아이가 아직 그의 손에 있는데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다고.'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혼인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그날 밤, 이도현은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7화

    소온별은 옆에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서하랑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을 흘겼다.“그러게 내가 집 살 때부터 뭐라고 했어? 외성에 작은 집 하나 사서 시녀 둘에 허드렛일하는 하녀 둘 정도만 두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정말 부군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다면 차라리 마차 한 대 사 주고 마부를 두는 게 나았지.”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찼다.“헌데 넌 집을 그렇게 크게 장만하고, 금지옥엽처럼 하인들을 거느리며 살았잖아. 시댁 식구들이 그걸 보고 욕심이 안 생기겠어? 일단 집 안에 발을 들인 이상 다 윗사람인데, 하나하나 모셔야 하고 떠받들어야 하지. 조금만 실수해도 불효했다는 소리부터 들을 테고.”말끝마다 핀잔이 이어졌지만, 그 안에는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평소엔 그렇게 똑 부러지는 애가 왜 이런 데서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 편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제 손으로 골칫덩이들을 집 안에 모셔 왔으니.”신수빈은 소온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하랑이 왜 그녀를 그토록 높이 평가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보는 눈이 맑았고, 중심이 단단한 사람이었다.서하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이제 와서 어쩌겠어. 이미 다 와 버렸는걸. 어머님께서는 처음에 별말 없으셨는데, 형수님 내외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하니까 명문가 흉내를 내며 시집 규율을 세우려 하셨어. 부군이 막아 줬으니 망정이지.”“집도 앞뒤로 나눠 시부모님과 친척들은 앞채에서 지내시고, 우리 부부는 뒤채에서 따로 살게 했어. 평소 문안도 부군이 늘 함께 갈 때만 드리니, 어머님께서도 함부로 날 난처하게 만들지는 못하시더라고.”신수빈은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세상에 처음부터 한 몸처럼 완벽하게 맞는 부부는 없다는 것을. 결국 누구나 시댁과 친정, 체면과 예법, 수많은 현실 사이를 지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것이었다.소온별이 다시 물었다.“헌데 오늘은 또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운 거야?”서하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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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605화

    집사는 신수빈의 안색을 슬쩍 살핀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리고 왕야께서... 마님께서는 당분간 호국부에서 근신하시며 잘못을 반성하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셨고요.”뒤에 서 있던 금자와 은보는 하마터면 눈을 뒤집을 뻔했다.'와, 이건 또 무슨 수야.''정말 기가 막히네.'신수빈은 이를 악문 채 굳게 닫힌 왕부의 대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마차에 올랐다.'그래도 친아버지인데 설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겠어.'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집사가 안으로 돌아와 보고했을 때, 이도현은 앞채에 앉아 있었다.이준우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있었지만 울지도 보채지도 않았다. 작은 몸으로 이도현의 무릎에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놀고 있었다.이도현이 고개를 들었다.“뭐라고 하더냐.”“마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집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많이 화가 나신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시는 눈치였습니다.”이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 서 있던 장풍이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거 보십시오. 여인이라는 게 원래 사랑을 받으면 점점 더 제멋대로 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너무 잘해 주시면 안 됩니다. 며칠만 그대로 두십시오. 그러면 부인께서도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앞으로는 훨씬 더 다정하게 왕야를 모실 겁니다. 지금처럼 왕야께 맞서려 들지는 않을 테고요.”집사는 장풍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이도현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이준우를 바라보았다.나이가 있는 그는 이런저런 풍파를 겪어 본 사람이었다.속으로 한숨이 절로 나왔다.'한 사람은 가르칠 줄 알고, 다른 한 사람은 또 그대로 배워 버리는구나.'조용히 물러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내일 우시위를 만나면 꼭 말해 줘야겠군. 좌시위를 좀 말려 보라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마님께서 이 일을 따져 묻게 될 때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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