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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Penulis: 정대천
신수빈은 혼인 첫날밤, 합근주를 마신 뒤로 머리가 어지러운 게 꿈속을 거닐고 있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선물처럼 지아비의 손에 의해 이도현의 침상으로 보내질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전생은 그녀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반면, 이도현에 대한 기억은 그의 권위가 높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주 왕조를 다스리고 태후와 폐하마저 그를 우러러봤으니.

신씨 가문과 그가 친분이 있다지만 그건 그냥 조부님과 아버지의 한에서였다. 권세 있는 사내와 마주쳤다 한들,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다 혼인 후 그와 몇 번 마주치긴 했으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그의 노골적인 무례함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선은 단지, 그의 침상으로 보내졌을 수많은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권력자가 노리개를 찾은 듯한 그 눈빛에 존중이 담겨 있을 리가.

그로부터 몇 해 지나서 가을 사냥에서 이도현이 낙마로 인해 명을 다하자, 윤씨 가문의 적자인 그녀의 아이가 모든 사람의 눈엣가시가 됐고, 상인가 여식의 그녀는 어미로서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다. 게다가 신씨 가문마저 태후에게 멸족당해, 이 땅에 더 이상 신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게 됐다.

신수빈이 고개를 들어 높디높은 저택의 담장을 바라봤다.

'이 담장 너머에 더 높은 황궁의 담이 있을 테고, 그보다 더 높은 건 지고지상인 왕권이겠지.'

그녀는 이번 생에 반드시 복중의 아이를 지키고 자신의 가문을 지키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궁으로부터 어명이 내려왔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윤서원이 이재민을 구제했다는 공에서 그의 부인과 첩을 삼품 고명으로 봉한다는 어명이었다.

윤서원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상관 내시가 전하는 명을 듣는 신수빈의 눈에는 차가운 한기가 어려 있었다.

고명은 본디 정실부인만이 하사받을 수 있는 칭호였다. 첩의 신분으로 고명을 받는 이는 아마 천하에 주서화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 이는 태후가 주서화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임을. 또한, 모든 사람에게 주서화가 비록 윤서원의 첩으로 시집갔지만 정실부인과 별반 다를 바 없고 그 누구도 감히 경시하지 말라는 태후의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어명이 전해지고 신수빈은 윤서원과 주서화와 함께 어명을 받들며 예를 올렸다.

그렇게 모든 절차를 끝낸 주서화가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선 내시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사람을 시켜 차를 준비해 뒀으니 상선께선 안으로 드시지요."

어명을 전하러 온 내시는 태후의 심복이었기에 주서화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안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작 안주인인 신수빈이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상선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한쪽에 서 있는 신수빈을 흘겨보다 이내 상냥한 말투로 주서화를 향해 몸을 굽히며 말을 건넸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 테니 두 분은 소인과 함께 입궁하여 폐하께 사은하러 가실 채비를 하십시오."

태후 곁을 모시는 내시가 주서화를 공손히 대하는 태도에, 눈치 빠른 후부의 아랫것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몇몇 하인들이 상선을 안으로 모셨고, 남은 이들은 궁으로 들 채비에 나섰다.

*

삼품 숙인의 예장으로 환복하는 신수빈을 돕던 몸종 청하가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든 채 울먹였다.

"나리도 참 너무하십니다. 혼인한 지 겨우 석 달이온데 이리도 아씨를 능멸하시니… 서화 군주에게는 태후마마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 앞으로 이 댁 사람들이 아씨를 함부로 대할까 겁이 납니다..."

신수빈은 자신을 대신해 억울해하는 청하의 모습에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다독였다.

전생의 신수빈 역시 지금의 청하처럼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주서화와 맞서 다투는 일이 꽤 많았었다. 그 탓에, 그녀를 '질투 많은 악처'라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전생의 오늘날 그녀는 응당 입궁해 황은에 감사를 올려야 했으나, 태후가 주서화에게도 삼품이라는 칭호를 내린 것에 불만을 품고 몸이 편치 않다는 핑계로 궁에 들지 않았었다. 이로써 태후의 하교로 꾸지람을 듣고 석 달간 금족령을 받는 수모를 겪었으며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이번 생에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야.'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청하야,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하나, 앞으로 그들을 만나거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예를 다해야 한다."

청하는 갑작스레 변한 제주인의 태도에 의아함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수빈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윤서원이 첩을 들인다는 소식에 주서화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었으니…

"예, 아씨..."

청하는 답답해 났지만 감히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

신수빈과 주서화는 같은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신수빈은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했고 주서화는 곁에 시녀에게 손목을 주물러달라고 했다.

"쓰읍, 살살 좀 하거라"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주서화의 호통에 신수빈이 눈을 떠보니,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와 손목을 돌리고 있는 주서화의 모습이 보였다.

주서화 역시 신수빈의 시선에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제가 언니의 단잠을 방해한 건 아니련지요... 송구합니다."

"괜찮다."

"그럼 다행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홑몸이 아니라 서방님을 모실 형편이 되질 않습니다. 하여 어젯밤에 언니에게 가는 게 어떻냐 권했더니, 서방님께서 글쎄 혼인 첫날밤이라며 기어코 제 방에 머무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어제 고생 좀 했습니다."

주서화는 일부러 손목을 문지르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냈다.

신수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혼인 전에 몸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지아비를 모시는 예법을 익힌 바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윤서원을 마음에 두는 여인이 아니었기에 주서화의 이런 잔꾀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청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당장이라도 주서화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고생이 많구나. 내게 좋은 연고가 있으니 저택에 돌아가거든 사람을 시켜 보내주마. 손목에 바른 후 문지르면 덜 아플 것이다. 다만, 혈액 순환에 좋은 약이다 보니 많이 바르지는 말거라. 무튼 홑몸이 아니지 않더냐."

주서화는 부처 같은 그 말에 그만 할 말 잃고 멈칫했다.

전에 주서화가 신수빈에 대해 알아본 바로는, 그녀가 상인가 여식이라지만 가문의 독녀라 오냐오냐 키워온 탓에 성격이 제멋대로라고 들었었다. 그래서 그녀가 태후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그녀의 성질을 돋운 것인데 이런 반응일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신수빈은 멈칫하는 주서화의 표정에 속으로 조소를 흘렸으나, 온화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서방님도 참... 회임한 여인은 늘 조심히 다뤄야 하는 법이거늘… 서방님께서는 아직 혈기 왕성하시고 너는 홑몸이 아니다 보니 아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숨 좀 돌리게 내 조만간 여인 두 명을 보내주마.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말에 주서화가 연신 손을 흔들었다.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인을, 그것도 두 명씩이나 집으로 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수빈은 그녀의 억지웃음을 보고도 모르는 체했다.

*

마차는 곧 궁궐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가마로 다시 갈아탄 후, 반 시진이 지나서야 태후의 침전에 들 수 있었다.

예를 올린 신수빈은 태후의 앉으라는 명에 자리에 앉았고 주서화는 태후의 손짓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평소처럼 애교 어린 소리를 냈다.

"태후마마…"

그러자 태후가 조용히 그녀에게 윤씨 저택에서의 근황을 물었다.

반면 신수빈은 조용히 주변을 살펴봤다. 태후의 침전에 모인 이들은 그들뿐만 아니라 중신가 규수들도 여럿 있었고 대부분이 전생에 익히 보았던 조정 중신가의 규수들이었다.

그러나 태후는 지난 생에 그저 먼 발치에서 한 번 본 게 다였다. 하지만 먼 발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태후는 위엄이 하늘을 찔렀고,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가 그녀에게서 풍겨 나왔었다.

태후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신수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내가 태후마마와 닮았다고 하는 데에 이유가 있었군.'

그녀조차도 닮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만 북방 출신의 태후 미간에는 단호함과 기백이 서려 있었고 강남에서 자란 신수빈은 오히려 여인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더해져 있었다.

태후는 올해 스물여섯에 불과했다.

선제가 붕어한 뒤, 군공이 뛰어나고 병권을 틀어쥔 이도현이 선제의 수많은 황자 중, 태후의 소생인 구황자를 제위에 올렸고, 그 뒤 수년간 그는 남북을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세간에는 섭정왕 이도현과 황후가 본디 어릴 적 소꿉친구였으나 선황의 구애로 둘은 결코 이어지지 못했고 이도현이 목숨을 걸고 천하를 안정시킨 것도 태후와 그녀의 아들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았었다.

전생에서 그가 낙마로 숨을 거둘 때까지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신수빈은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쯤이었지…'

혼례를 올린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사당에 향을 피우러 동자 스님의 안내에 따르다가, 이도현의 별채에 발을 들인 적 있었다.

그때의 신수빈은 혼인 첫날밤에 자신과 몸을 섞은 이가 바로 눈앞의 사내라는 사실을 몰랐던 탓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며 연신 사죄를 하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가 길을 막아섰었다.

"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한 신수빈은 혹시라도 누가 볼까 그저 두려웠다.

"왕야께서는 어인 일로 절 찾으시는지요? 소인의 시어머니께서 아직 대전에서 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디 길을 비켜주시길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지금의 신수빈은 그때 이도현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뒷짐을 진 채 문 앞에서 커다란 몸짓으로 그녀의 앞길을 막은 것만은 기억에 남았다.

"윤서원에게 왜 시집을 간 것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수빈은 그를 올려다봤었다.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짙은 안개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려 있어, 도무지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고 신수빈은 그의 강압적인 시선에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야 서방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자가 널 출셋길의 노리개로 여기고, 하루빨리 첩을 들이려 하는데도 그자를 사모하느냐?"

그때의 그녀는 윤서원에게 완전히 빠져있었기에, 그가 말하는 '노리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주서화와 관련된 일만 들어도 금세 성을 내는 그녀였기에 격분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왕야님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왕야께서는 천하를 걱정하시는 분이시거늘, 어찌 규방 부인들처럼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시는 겁니까?"

섭정왕을 상대로 다소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이었으나 신수빈에게 있어선 이미 그가 섭정왕이라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분을 억누른 표현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이도현은 다시 한번 길을 막아섰고, 옷깃 너머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윤씨 가문에서 생활이 편치 않다면 사람을 보내 내게 알리거라. 내 너를 데리고 나올 것이니."

이도현은 신수빈이 놀라 움찔하며 몸을 떨어서야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자네 조부님을 비롯해 부친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다. 해서, 왕부로 들어오면 천대받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수빈은 그저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무례한 말들이 그녀를 몹시 불편하고 난감하게 해서였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이도현의 숨결과 말투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날 사당에서 돌아온 뒤로 그가 잡고 있던 손목에 멍이 선명하게 남은 기억만은 또렷했다. 당시엔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그의 손길이 그리 거셌던 것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손목을 잡혔을 뿐인데도 그녀는 마치 온몸이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의 불편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까 겁이나 늘 그를 피해 다녔었다.

'지난 생에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은 역시 불순했어…'

신수빈은 과거 이도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태후가 정말 놀랍게도 닮은 탓이었다.

그때였다.

"혹여 내게 언짢은 일이라도 있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내 말에 응하지 않는 것이냐?"

냉담하고 불쾌 어린 목소리가 신수빈의 과거 회상을 깨트려서야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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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7화

    신병호는 장남의 말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하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낮게 물었다.“그럼... 빈이의 뱃속 아이가, 바로 섭정왕의 혈육이라는 말이냐?”“그렇습니다.”“그렇다면 우리 신 가가 받은 이 후작 작위도 그가 모자에게 준 보상인 셈인 것이냐?”신병호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켰다.“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로서도 섭정왕의 속내를 모두 알지는 못하니까요. 다만 그분은 아직도 빈이 뱃속에 있는 아이가 윤서원의 아이인 줄로 알고 계십니다. 빈이가 그분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모르고 계시지요. 다만 이 작위가 빈이 때문에 내려온 것만은 분명합니다.”“섭정왕이 그 사실을 모른다고? 그럼 왜 말하지 않았단 말이냐? 윤 가에서 그런 패륜한 짓을 저질렀다면 화이하고 나오는 게 옳았지 않느냐? 섭정왕과 이미 사사로운 관계가 있다면 화이 후 왕부로 들어가는 것이 오히려 떳떳한 일이다. 이렇게 몰래 관계를 이어 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신병문은 고개를 저었다.“빈이는 이미 계산을 마쳤습니다. 지금 윤서원은 병상에 누워 말조차 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으니, 빈이가 품은 아이는 후부에서 명백한 적장자, 장손가 될 겁니다. 게속 윤 가에 남는다면 당연히 후계자가 되겠지요. 이전에 아무리 왕부로 들어간다 해도 빈이는 첩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섭정왕이 신 가의 위상을 끌어올린 것을 보면 정식으로 혼인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듯합니다. 허나 빈이는 그에게 마음이 없는데다가, 섭정왕비라는 자리가 하늘에서 떨어진 복도 아니잖습니까. 섭정왕은 행보가 워낙 거칠어서 황실이든 조정이든 가리지 않고 원한을 산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의 곁에서 잠자리를 함께하는 여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이 따르는지 아버지께서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에게는 백일의 영화가 없고 꽃도 백일 붉지 않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섭정왕이 권세의 정점에 올라 개혁을 밀어붙이며 기세가 등등하지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6화

    문간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마땅한 곳이 아니었기에 신병문은 가족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신병호는 마차에서 내린 뒤로 줄곧 말이 없었다. 자식들이 기쁨에 들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마음은 한없이 무거워져 있었다.조금 전 성 밖에서, 장남이 은전을 써서 길을 열어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막내딸의 신분으로 평양 후부의 이름을 내세워도 소용이 없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는커녕, 수문장의 얼굴에서 미소 한 점조차 얻지 못했다.아이들은 아직 젊고 세상 물정을 다 알지 못하기에, 굳게 닫혀 있던 그 성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넘볼 수 없는 권력이었다. 그리고 이어 섭정왕이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길이 열렸다.그는 처음엔 섭정왕이 신 가의 체면을 봐서 통행을 허락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 장수가 막내딸의 마차 앞을 한 발자국도 떼지 않고 따라붙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섭정왕과 이전에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인물은 언제나 높고 멀었고 신 가는 그 발치에서 보호를 구하는 상인 집안에 불과했다. 은전과 군량을 바쳤고 난세에 신 가를 보전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그런데 어찌하여 저토록 빈이를 감싼단 말인가?더구나 이 후작 작위 또한 석연치 않았다. 부친은 마음이 맑은 사람이었다. 경성에는 분명 그들이 알지 못하는 변고가 있으리라 짐작했고 이 작위가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기에 그저 길을 재촉했을 뿐이다.그래서 일단 신병문의 세 명의 적자는 신 가의 큰 어르신과 함께 항주에 남겨 두었다. 그런데 막상 입경하자마자 신병호은 공기부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잠시 후, 그들은 저택에 들어갔다. 신수빈은 어머니와 큰형수와 함께 후택으로 가 짐을 정리했고 신병문은 따라가 도우려다 부친에게 붙잡혔다. 사람이 모두 물러난 뒤, 신병호은 어려서부터 함께 장사를 다니며 강하게 키운 장남을 향해 입을 열었다.“도대체 무슨 일이냐?”“아버지께서는 무엇을 물으시는지요?”“모든 것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5화

    “장군께 여쭙겠습니다. 성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부장은 공손하게 답했다.“말단 장수로서는 알지 못합니다.”이처럼 살벌한 기운이 도는 걸 보아 분명 작은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묻는 것도 무의미하리라.신수빈은 조용히 차렴을 내리고는 고개를 돌려 정 씨가 보내는 탐색 어린 시선과 마주했다.“윤 가와 섭정왕의 교분이 그리 깊은 것입니까? 그분의 부하가 수빈에게 저렇게까지 예를 갖추다니요.”신수빈은 순간 미묘하게 굳어졌다.신병문 역시 미간을 좁힌 채, 부인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정 씨는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시누이와 남편의 표정만 보고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음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곧 화제를 아이 쪽으로 돌렸다.“수빈아, 지금 몇 개월이 되었느냐?”“곧 여덟 달이에요.”그러자 정 씨는 후의 몸조리와 주의할 점들을 차근차근 일러주었다. 아이를 넷이나 낳은 사람답게 첫아이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신수빈은 미소를 지은 채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문득 정신이 멀어지며 다른 생각에 잠겼다.신병문은 본래 가족들을 천일각으로 모시려 했으나 며칠 전 섭정왕이 하사한 저택 하나가 있었고 공부에서 손을 대어 새로 단장까지 마친 터였다. 이미 신 씨 가문이 입경한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다면 굳이 그곳을 피하는 것도 도리어 모양이 좋지 않았다.신병문은 미리 호원과 하인들을 배치해 두었기에 항주에서 데려온 사람들까지 더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부모님이 마차에서 내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신수빈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로 인해 신병문과 정 씨는 한참동안 그녀를 달래주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그때, 누군가가 신수빈의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그녀는 흠칫 놀랐고 흐느끼던 숨도 멎었다.“네 눈에는 부모님이랑 큰형님만 보이고 넷째 오라버니는 전혀 안 보이나 보구나. 이렇게까지 마음에 없을 줄 몰랐네.” 신수빈은 그제야 돌아서서 신태안을 보았다. 전생의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그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4화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신병문이 마차 밖을 향해 묻자 마부가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사유는 알 수 없으나 정오 무렵부터 갑자기 성문을 닫고 출입을 금했습니다.”신수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오늘 무슨 큰일이 있을 리가 있나?신수빈은 자신의 마부를 보내 평양후의 명호를 밝히게 했다. 그러자 성루 위에서 귀찮다는 듯한 고함이 떨어졌다.“상부의 명령 없이는 출입 금지라 했다!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그때, 성문을 지키던 노병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예전에 사가에서 신 씨 가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자였다. 그는 신 씨 쪽에서 건넨 은전을 받아 쥐고는 목소리를 낮춰 귀띔했다.“사대부님, 오늘 성 안에서 사건 수사가 있어 오늘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당분간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해 지기 전이니 성 밖 별장에서 며칠 머무르시지요. 삼오일 안에는 성문이 다시 열릴 겁니다.”신병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신 씨 집안의 위상이 아직은 미미한 이상 성문을 지키는 장수가 사정을 봐줄 리 없었다. 성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관의 일을 그가 좌우할 수는 없는 노릇.“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마침 경교에 신 씨 가문의 별장이 있었기에 일행은 우선 그곳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가족을 맞이하는 기쁜 길이 이렇게 막힐 줄은 몰랐지만 조정의 일 앞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들이 방향을 돌리려는 순간, 성루 위에서 갑작스러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성문을 열어라! 어서 열어라!”주홍빛 동못이 박힌 거대한 성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자 성 안에서 차가운 철갑을 두른 기병 한 기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길 양옆에 서 있던 군졸들이 성문 앞에 몰려 있던 백성들을 급히 몰아냈고 신 씨 가문의 마차들 역시 한쪽으로 밀려났다.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먼지가 가라앉기도 전에 체구가 크고 갑주가 서늘한 철기병들이 호랑이 울음 같은 기세로 성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서 달리던 남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3화

    신수빈은 그쪽으로 걸어갔는데, 형수는 이미 마차에서 내려와 있었다. 신수빈은 마치 아이처럼 그녀를 끌어안은 채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형수는 처음엔 그저 시집온 뒤 몇 달 동안 떨어져 지내며 그리웠던 탓이려니 생각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달래주었다.그러나 울음이 좀처럼 그치지 않자, 점점 마음이 다급해졌다.혹시... 수빈이가 그동안 힘들게 지낸 건 아닐까?정 씨는 고개를 들어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신병문은 아내의 눈빛에 담긴 의문을 알아차리고는, 신수빈에게 낮게 말했다.“수빈아, 이제 그만 울어라. 앞으로는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도 곧 나오실 텐데 네가 이렇게 울고 있으면 괴롭힘당한 줄 알겠다.”신수빈은 울음을 삼키며 몸을 일으켜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쳤다.“그냥... 형수를 보니까 너무 좋아서요.”정 씨는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도 매일 네 생각을 했단다. 네가 장안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낯설어 힘들지는 않은지 늘 걱정했어. 네가 굳이 장안으로 시집만 오지 않았어도 항주에서 혼처를 정해 평생 네 오빠랑 가까이서 살았을 텐데.”신수빈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기색이었다.신병문은 누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부인은 알지 못했지만 방금 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건드렸을 것이다.“그만하자. 바람도 센데 어서 아버지, 어머니를 뵙고 마차에 오르자. 집에 가서 천천히 이야기하자.”“아버지, 어머니는 지금 막 잠드셨어요. 먼저 돌아가세요.”정 씨가 답하자 신수빈은 형수의 마차에 올랐다.마차 안에는 갓 백 일을 넘긴 조카딸이 있었다. 살결은 눈처럼 희고 인형처럼 단정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예쁠 줄은 미처 몰랐다.“오라버니는 형수가 딸을 낳았다고만 했지 이렇게 예쁜 아기라는 말은 안 했어요. 정말 한 번 보면 마음 깊이 좋아질 수밖에 없는 아이네요.”신수빈이 아이를 안으려 손을 내밀자 정 씨는 그녀가 회임 중인 것을 염려해 곁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02화

    은보는 이마를 짚으며 그녀를 힐끗 곁눈질했다.‘제발 부탁이야... 앞으로 사자성어는 쓰지 말아줘.’신수빈은 그 말에 웃음을 머금고 두 자매 같은 아이들과 함께 정원을 두어 바퀴 거닐다가 이내 돌아가 쉬었다.그날 밤 신수빈은 깊이 잠에 들었다. 가을밤에 우는 벌레 소리조차 그녀의 잠을 깨우지 못했다.한편 은보는 야간 당직을 서던 중, 창이 살짝 열리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장 몸을 일으켜 안채로 들어가 희미한 빛에 의지해 보니, 침상 곁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를 확인한 은보는 말없이 조용히 물러났다. 참으로 지독히도 고집이 센 사내였다.이도현은 깊이 잠든 신수빈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요하고 온화한 잠든 그녀의 얼굴은 누구보다 아름다웠다. 그런 얼굴의 그녀가 이렇게 결단이 빠르고, 수단이 강경한 성격이라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본래 그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계산에 밝지만 먼저 남을 해친 적은 없었고 그녀가 내딛는 걸음마다 모욕을 견뎌낸 뒤의 반격일 뿐이었다. 이토록 분명하고 단호한 사랑과 미움. 그 명확함이 오히려 그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았다.그는 종실의 왕야로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기 위해 이미 많은 것을 고려하고 양보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끝내 혼인을 거절했다. 그 사실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분노가 가라앉자 마음은 더욱 놓아주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오늘 그는 이 일을 핑계 삼아 그녀를 꾸짖을 생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이렇게 곤히 잠든 모습을 보자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밖은 소란으로 뒤집혀 있었으나 그녀는 그 모든 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듯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둥글게 부푼 배로 옮겨 갔다. 그녀의 마음속에 이 아이 말고, 애틋하게 품는 존재가 없는 걸까?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마침내 한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서 또렷이 자리 잡았다. 그는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팔을 괴고 위에서 내려다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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