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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정대천
신수빈은 혼인 첫날밤, 합근주를 마신 뒤로 머리가 어지러운 게 꿈속을 거닐고 있는 느낌을 받긴 했지만, 선물처럼 지아비의 손에 의해 이도현의 침상으로 보내질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전생은 그녀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반면, 이도현에 대한 기억은 그의 권위가 높다는 것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주 왕조를 다스리고 태후와 폐하마저 그를 우러러봤으니.

신씨 가문과 그가 친분이 있다지만 그건 그냥 조부님과 아버지의 한에서였다. 권세 있는 사내와 마주쳤다 한들,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다 혼인 후 그와 몇 번 마주치긴 했으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그의 노골적인 무례함은 그녀를 불편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선은 단지, 그의 침상으로 보내졌을 수많은 여인을 바라보는 눈빛이었을 것이다.

권력자가 노리개를 찾은 듯한 그 눈빛에 존중이 담겨 있을 리가.

그로부터 몇 해 지나서 가을 사냥에서 이도현이 낙마로 인해 명을 다하자, 윤씨 가문의 적자인 그녀의 아이가 모든 사람의 눈엣가시가 됐고, 상인가 여식의 그녀는 어미로서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다. 게다가 신씨 가문마저 태후에게 멸족당해, 이 땅에 더 이상 신씨 가문은 존재하지 않게 됐다.

신수빈이 고개를 들어 높디높은 저택의 담장을 바라봤다.

'이 담장 너머에 더 높은 황궁의 담이 있을 테고, 그보다 더 높은 건 지고지상인 왕권이겠지.'

그녀는 이번 생에 반드시 복중의 아이를 지키고 자신의 가문을 지키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궁으로부터 어명이 내려왔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윤서원이 이재민을 구제했다는 공에서 그의 부인과 첩을 삼품 고명으로 봉한다는 어명이었다.

윤서원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상관 내시가 전하는 명을 듣는 신수빈의 눈에는 차가운 한기가 어려 있었다.

고명은 본디 정실부인만이 하사받을 수 있는 칭호였다. 첩의 신분으로 고명을 받는 이는 아마 천하에 주서화가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신수빈은 잘 알고 있었다. 이는 태후가 주서화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임을. 또한, 모든 사람에게 주서화가 비록 윤서원의 첩으로 시집갔지만 정실부인과 별반 다를 바 없고 그 누구도 감히 경시하지 말라는 태후의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어명이 전해지고 신수빈은 윤서원과 주서화와 함께 어명을 받들며 예를 올렸다.

그렇게 모든 절차를 끝낸 주서화가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선 내시를 맞이했다.

"이른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십니다. 사람을 시켜 차를 준비해 뒀으니 상선께선 안으로 드시지요."

어명을 전하러 온 내시는 태후의 심복이었기에 주서화는 그를 잘 알고 있었다. 안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에 정작 안주인인 신수빈이 비교되는 순간이었다.

상선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한쪽에 서 있는 신수빈을 흘겨보다 이내 상냥한 말투로 주서화를 향해 몸을 굽히며 말을 건넸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 테니 두 분은 소인과 함께 입궁하여 폐하께 사은하러 가실 채비를 하십시오."

태후 곁을 모시는 내시가 주서화를 공손히 대하는 태도에, 눈치 빠른 후부의 아랫것들은 그들이 섬겨야 할 주인이 누구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몇몇 하인들이 상선을 안으로 모셨고, 남은 이들은 궁으로 들 채비에 나섰다.

*

삼품 숙인의 예장으로 환복하는 신수빈을 돕던 몸종 청하가 억울함에 눈가가 벌겋게 물든 채 울먹였다.

"나리도 참 너무하십니다. 혼인한 지 겨우 석 달이온데 이리도 아씨를 능멸하시니… 서화 군주에게는 태후마마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어 앞으로 이 댁 사람들이 아씨를 함부로 대할까 겁이 납니다..."

신수빈은 자신을 대신해 억울해하는 청하의 모습에 가만히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다독였다.

전생의 신수빈 역시 지금의 청하처럼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주서화와 맞서 다투는 일이 꽤 많았었다. 그 탓에, 그녀를 '질투 많은 악처'라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전생의 오늘날 그녀는 응당 입궁해 황은에 감사를 올려야 했으나, 태후가 주서화에게도 삼품이라는 칭호를 내린 것에 불만을 품고 몸이 편치 않다는 핑계로 궁에 들지 않았었다. 이로써 태후의 하교로 꾸지람을 듣고 석 달간 금족령을 받는 수모를 겪었으며 도성의 웃음거리가 되었었다.

'이번 생에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야.'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청하야, 네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하나, 앞으로 그들을 만나거든 얼굴에 미소를 띠고 예를 다해야 한다."

청하는 갑작스레 변한 제주인의 태도에 의아함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수빈은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윤서원이 첩을 들인다는 소식에 주서화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었으니…

"예, 아씨..."

청하는 답답해 났지만 감히 주인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

신수빈과 주서화는 같은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신수빈은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했고 주서화는 곁에 시녀에게 손목을 주물러달라고 했다.

"쓰읍, 살살 좀 하거라"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주서화의 호통에 신수빈이 눈을 떠보니, 겁에 질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와 손목을 돌리고 있는 주서화의 모습이 보였다.

주서화 역시 신수빈의 시선에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제가 언니의 단잠을 방해한 건 아니련지요... 송구합니다."

"괜찮다."

"그럼 다행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금 홑몸이 아니라 서방님을 모실 형편이 되질 않습니다. 하여 어젯밤에 언니에게 가는 게 어떻냐 권했더니, 서방님께서 글쎄 혼인 첫날밤이라며 기어코 제 방에 머무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어제 고생 좀 했습니다."

주서화는 일부러 손목을 문지르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냈다.

신수빈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혼인 전에 몸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 지아비를 모시는 예법을 익힌 바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윤서원을 마음에 두는 여인이 아니었기에 주서화의 이런 잔꾀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청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당장이라도 주서화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고생이 많구나. 내게 좋은 연고가 있으니 저택에 돌아가거든 사람을 시켜 보내주마. 손목에 바른 후 문지르면 덜 아플 것이다. 다만, 혈액 순환에 좋은 약이다 보니 많이 바르지는 말거라. 무튼 홑몸이 아니지 않더냐."

주서화는 부처 같은 그 말에 그만 할 말 잃고 멈칫했다.

전에 주서화가 신수빈에 대해 알아본 바로는, 그녀가 상인가 여식이라지만 가문의 독녀라 오냐오냐 키워온 탓에 성격이 제멋대로라고 들었었다. 그래서 그녀가 태후의 앞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그녀의 성질을 돋운 것인데 이런 반응일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신수빈은 멈칫하는 주서화의 표정에 속으로 조소를 흘렸으나, 온화한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서방님도 참... 회임한 여인은 늘 조심히 다뤄야 하는 법이거늘… 서방님께서는 아직 혈기 왕성하시고 너는 홑몸이 아니다 보니 아마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테지. 숨 좀 돌리게 내 조만간 여인 두 명을 보내주마. "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말에 주서화가 연신 손을 흔들었다.

혼인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인을, 그것도 두 명씩이나 집으로 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수빈은 그녀의 억지웃음을 보고도 모르는 체했다.

*

마차는 곧 궁궐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가마로 다시 갈아탄 후, 반 시진이 지나서야 태후의 침전에 들 수 있었다.

예를 올린 신수빈은 태후의 앉으라는 명에 자리에 앉았고 주서화는 태후의 손짓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앉으며 평소처럼 애교 어린 소리를 냈다.

"태후마마…"

그러자 태후가 조용히 그녀에게 윤씨 저택에서의 근황을 물었다.

반면 신수빈은 조용히 주변을 살펴봤다. 태후의 침전에 모인 이들은 그들뿐만 아니라 중신가 규수들도 여럿 있었고 대부분이 전생에 익히 보았던 조정 중신가의 규수들이었다.

그러나 태후는 지난 생에 그저 먼 발치에서 한 번 본 게 다였다. 하지만 먼 발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의 태후는 위엄이 하늘을 찔렀고,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아우라가 그녀에게서 풍겨 나왔었다.

태후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인 신수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내가 태후마마와 닮았다고 하는 데에 이유가 있었군.'

그녀조차도 닮았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다만 북방 출신의 태후 미간에는 단호함과 기백이 서려 있었고 강남에서 자란 신수빈은 오히려 여인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이 더해져 있었다.

태후는 올해 스물여섯에 불과했다.

선제가 붕어한 뒤, 군공이 뛰어나고 병권을 틀어쥔 이도현이 선제의 수많은 황자 중, 태후의 소생인 구황자를 제위에 올렸고, 그 뒤 수년간 그는 남북을 평정하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세간에는 섭정왕 이도현과 황후가 본디 어릴 적 소꿉친구였으나 선황의 구애로 둘은 결코 이어지지 못했고 이도현이 목숨을 걸고 천하를 안정시킨 것도 태후와 그녀의 아들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았었다.

전생에서 그가 낙마로 숨을 거둘 때까지 부인을 맞이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신수빈은 전생의 일이 떠올랐다.

'그래, 지금쯤이었지…'

혼례를 올린 지 얼마 안 된 그녀는 사당에 향을 피우러 동자 스님의 안내에 따르다가, 이도현의 별채에 발을 들인 적 있었다.

그때의 신수빈은 혼인 첫날밤에 자신과 몸을 섞은 이가 바로 눈앞의 사내라는 사실을 몰랐던 탓에 길을 잘못 들어섰다며 연신 사죄를 하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그가 길을 막아섰었다.

"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한 신수빈은 혹시라도 누가 볼까 그저 두려웠다.

"왕야께서는 어인 일로 절 찾으시는지요? 소인의 시어머니께서 아직 대전에서 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부디 길을 비켜주시길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지금의 신수빈은 그때 이도현의 표정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뒷짐을 진 채 문 앞에서 커다란 몸짓으로 그녀의 앞길을 막은 것만은 기억에 남았다.

"윤서원에게 왜 시집을 간 것이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신수빈은 그를 올려다봤었다.

그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는 짙은 안개처럼 알 수 없는 감정이 어려 있어, 도무지 그 속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고 신수빈은 그의 강압적인 시선에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야 서방님을 사모하는 마음에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자가 널 출셋길의 노리개로 여기고, 하루빨리 첩을 들이려 하는데도 그자를 사모하느냐?"

그때의 그녀는 윤서원에게 완전히 빠져있었기에, 그가 말하는 '노리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주서화와 관련된 일만 들어도 금세 성을 내는 그녀였기에 격분에 찬 말투로 대답했다.

"그게 왕야님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러십니까? 왕야께서는 천하를 걱정하시는 분이시거늘, 어찌 규방 부인들처럼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시는 겁니까?"

섭정왕을 상대로 다소 예의에 어긋나는 발언이었으나 신수빈에게 있어선 이미 그가 섭정왕이라는 점을 고려해 최대한 분을 억누른 표현이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 했으나 이도현은 다시 한번 길을 막아섰고, 옷깃 너머로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윤씨 가문에서 생활이 편치 않다면 사람을 보내 내게 알리거라. 내 너를 데리고 나올 것이니."

이도현은 신수빈이 놀라 움찔하며 몸을 떨어서야 비로소 그녀를 놓아주며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자네 조부님을 비롯해 부친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다. 해서, 왕부로 들어오면 천대받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수빈은 그저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의 무례한 말들이 그녀를 몹시 불편하고 난감하게 해서였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이도현의 숨결과 말투가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날 사당에서 돌아온 뒤로 그가 잡고 있던 손목에 멍이 선명하게 남은 기억만은 또렷했다. 당시엔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그의 손길이 그리 거셌던 것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게 손목을 잡혔을 뿐인데도 그녀는 마치 온몸이 묶인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의 불편한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까 겁이나 늘 그를 피해 다녔었다.

'지난 생에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은 역시 불순했어…'

신수빈은 과거 이도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태후가 정말 놀랍게도 닮은 탓이었다.

그때였다.

"혹여 내게 언짢은 일이라도 있느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내 말에 응하지 않는 것이냐?"

냉담하고 불쾌 어린 목소리가 신수빈의 과거 회상을 깨트려서야 그녀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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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수빈이 마음 편히 지내는 것과 달리 태후는 소영이 처형된 이후 크게 앓아누웠고 열흘이 훌쩍 지나서야 겨우 차도를 보였다.태후의 오라버니인 정양왕은 두 차례나 입궐해 문안을 드렸고 그녀가 기운 없이 축 처진 모습을 보자 부인에게 서난각에 자주 들러 태후의 곁을 지키라고 일렀다.오늘의 태후는 비교적 상태가 좋아, 화랑 앞에 앉아 두 마리 사자고양이가 공을 쫓으며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시 하나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보이자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아차린 태후는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혹시 섭정왕이더냐?”내시는 고개를 한껏 숙인 채 조심스럽게 아뢰었다.“태후 마마, 정양왕비께서 오셨습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태후의 눈빛이 곧바로 어두워졌다.태후는 문득, 조정의 중대한 일이 아니면 이곳에는 오지 않겠다고 했었던 이도현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이토록 오래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도 그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들라 하거라.”태후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곁에 서 있던 여관 황상궁에게 다시 물었다.“내가 병석에 있던 동안 섭정왕이 사람을 보내 안부라도 물은 적이 있느냐?”비록 황상궁이 소영만큼 태후의 곁에서 중용되던 인물은 아니었으나 오래된 심복으로 태후의 속내를 잘 알고 있었다.“없었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태후의 얼굴에 있는 쓸쓸함이 더욱 가려지지 않았다.이윽고 정양왕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태후의 안색이 한결 좋아 보이자 그녀 역시 마음을 놓는 기색이었다. 지금의 천자는 아직 나이가 어렸고 장 씨는 외척이었기에 일가의 모든 영광은 태후 한 사람에게 달려 있었다. 태후에게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곧 장 가의 가장 큰 손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를 마친 뒤, 태후는 정양왕비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재가하여 장 가로 들어온 몸이었지만 최 씨 가문은 중원에서 손꼽히는 명문가이자 인재가 끊이지 않는 집안의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 장 가가 권세를 누리고 있긴 하지만, 뿌리가 얕은 만큼 최 씨와의 혼인은 그들에게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80화

    서 씨는 이때 몹시 수척해 보였다. 얼굴빛은 창백했고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떠날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고작 스무 날 남짓한 사이에 어찌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서 씨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하지만 딸 하나는 황명을 기다리며 남은 인생을 몇몇 환관들과 함께 보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유일한 아들 또한 중풍에 걸렸다.서 씨는 윤서원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녀들에게서 한마디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눈을 붉힌 채 신수빈을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이 망조 든 년아! 집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윤 가를 이렇게 뒤흔들어 놓는 것이냐! 게다가 내 아들까지 병들게 하고, 서화의 뱃속 아이까지 잃게 만들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오늘 내가 너 같은 천한 년을 가만두지 않겠다!”서 씨는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손을 치켜들어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금자와 은보가 앞으로 나서며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서 씨는 두 사람을 향해 더욱 거칠게 악을 썼다.“이 천한 계집종들이 감히 나를 막아서는 것이냐?”그때 큰 마님이 지팡이를 바닥에 세차게 내려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낮고 엄한 음성이 울렸다.“이제 그만하지 못하겠느냐? 집안이 이만하면 충분히 어지럽지 않으냐!”그제야 서 씨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그 눈물이 윤서령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윤서원을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큰 마님의 시선이 신수빈의 배로 옮겨 갔다.그녀는 가느다란 허리와 옷차림 덕분에 배가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회임한 기색은 분명히 보였다.“이 일은 본래 네 잘못이 아니니 스스로를 탓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제 몸에 아이도 있으니 마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몸부터 잘 돌보거라.”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신수빈의 배로 쏠렸다. 과연 아랫배가 살짝 불룩해져 있었다.그때 호위들이 들것을 들고 와 마차에서 윤서원을 내려놓았다. 그가 하반신이 마비되었다는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아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79화

    이도현 역시 어딘가 멋쩍은 기색을 띠고 있었고, 더는 그녀를 왕비로 맞이하겠다는 말도, 왕부에 들어와 첩이 되라는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신수빈의 말대로 그녀의 신분은 확실히 낮았다. 방금 전, 그 한마디 역시, 그 자신도 어찌하여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여운이 짙게 남아 있었다. 이도현은 그녀를 끌어안은 채,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그녀는 다른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 말은 이도현 역시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귀족이든, 재물이 넉넉한 집안이든, 심지어는 장터의 평범한 백성조차 약간의 여유만 생기면 첩 한 명쯤은 두려 했다. 그들의 아내가 된 여인은 불만을 품어서는 안 됐고 설령 불만을 드러내더라도 질투 많은 여인이라는 이유로 내쳐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디를 보아도 현숙한 여인들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니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조차 견디지 못하는 일을 여인이 어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신 씨, 본왕은…!”이도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그녀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다른 여인은 없다고,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전전하며 살았기에 다른 세가의 자제들처럼 어린 나이에 통방 시녀를 둔 적도 없었다고, 이후 몇 차례 일을 겪고 나서는 정사에 마음을 둘 여유조차 없이 십수 년을 남과 북의 전장을 오갔다고… 올해에 이르러서야 전쟁이 조금 잠잠해졌을 뿐이라고… 만약, 그날 밤, 암계에 걸리지 않았다면 그녀와 이런 인연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침상에서는 어떤 여인인지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다른 친왕들처럼 어느 명문가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 몇 명의 첩을 들이며 무난한 일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녀의 첫 사내였고 그녀 또한 그의 첫 여인이었지만, 그는 이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권세를 쥔 인물이 되었다. 스물일곱의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사내들은 이미 모두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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