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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정대천
'그날 밤... 자의가 아니었다라…'

이도현은 비록 그날의 기억이 혼란스럽긴 했기만 그때 그녀의 어딘가 이상해 보이는 안색과 흐린 눈빛만큼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신수빈은 약에 당한 게 분명해 보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침에 윤서원이 관직 얘기를 하며 아첨하는 모습이 역겹게 느껴져 이도현의 눈빛은 한층 더 차가워졌다.

눈물을 머금으며 조소가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수빈의 시선에 그는 헛기침하며 눈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목에 자신이 물어 생긴 멍 자국을 바라보고 있으니 남아있던 얄팍한 죄책감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출세의 도구로 윤서원에게 이용당할 바에야 내가 데려와 보살피는 게 더 나을지도... 사죄의 의미에서 말이다.'

옷이 흘러내려 반쪽 가슴이 드러나 있는 신수빈의 모습에 이도현은 자신이 조금 전 다소 성급했던 걸 깨닫고 손을 들어 그녀의 옷을 여며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자세를 바로 하고 정돈하는 중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더 이상 조롱도 억울함도 아닌 평소와 같은 태연함만 남아있었다. 옷을 정돈하는 동작마저 그와 쾌락을 즐긴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순결을 지키는 열녀들처럼 지아비가 아닌 외간 사내와 잠자리했다고 제가 자결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셨지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옷의 마지막 끈을 묶고는 손을 짚어 돌 탁자에서 내려와 한 발짝 이도현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제게 그런 것쯤은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냥 개한테 한 입 물렸다 치면 그만입니다."

그녀의 말에 이도현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그의 아래턱이 당겨지고 턱선이 굳어진 게 분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신수빈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에 얹었다. 옷깃 너머로도 그의 단단한 근육과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신수빈이 고개를 들어 눈부시게 웃으며 농염하고도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감히 왕야의 생각을 짐작해 봐도 되겠습니까? 지금 절 왕부로 데려가 어릴 적 이루지 못했던 그 애틋한 마음을 풀고자..."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도현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가득했고 차가운 시선과 점점 거세지는 손의 압력은 그녀에게 선을 넘었다며 경고하고 있었다.

강제로 고개가 젖혀진 신수빈은 그의 압력에 따라 점차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도현은 원래 그녀가 겁에 질려 살려달라 애원할 줄 알았으나 예상과 달리 피식 웃던 그녀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신수빈이 이대로 죽을 거라고 생각하던 그때, 이도현의 손에서 힘을 풀렸다.

"입조심하거라. 그 입 하나가 너희 가문을 무너뜨릴 수도 있으니."

말을 마친 그는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수빈은 어두운 눈빛을 한 채 돌 탁자를 부여잡고 한참을 기침했다.

그녀가 이처럼 무모하게 행동했던 건 그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태후를 닮았어도 그녀는 태후가 아닐뿐더러 그의 연정을 푸는 욕망의 대체물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을!

잠시 후, 길을 안내했던 어린 내시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부인, 소인이 길을 안내해 드리겠사옵니다."

내시는 멍으로 얼룩진 신수빈의 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왕야도 참으로 매정하시지. 저리 잘 보이는 곳에 저런 망측한 흉을 남기시다니. 부인께서 평양 후부로 돌아가면 이를 어쩔꼬...'

-

저택으로 돌아간 신수빈은 따로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목에 난 자국은 분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회임 중이라 태아에 해로울 것 같아 아프다는 핑계를 대기로 했다.

주서화가 평양 후부로 들어온 지 얼마 안 됐고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시점에서 그녀의 병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신수빈은 목에 남은 자국이 연해질 동안 별채에서 보름 가까이 지냈다.

신수빈은 자신의 아랫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곧 있으면 배가 불러올 터였다.

"청하야, 보름 전에 내가 시킨 일, 대공자(大公子) 측에선 뭐라 하더냐?"

주인의 물음에 청하는 주변을 살폈다.

어린 시녀들은 마당에서 놀고 있었고 신수빈의 곁을 지키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한 청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대공자 측 사람이 다녀갔사온데 계획대로 일이 진행됐고 나리도 덫에 걸려들었답니다."

신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에 비친 거의 보이지 않는 목의 흔적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청하야, 채비를 도와다오. 몸도 나았으니, 보살님께 공양드리러 가야겠다."

"예."

청하는 짧은 보름 동안 주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궁에서 돌아온 후 주인의 목에 남겨진 이상한 자국들은 그녀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게다가 신수빈은 곧바로 친정에 전갈을 보내 대공자더러 거액을 주고 한 여인을 사 오게 했다.

그들은 상경한 여인을 가족을 찾으러 온 처자로 위장시켜 악당들에게 당하는 모습을 윤서원에게 고의로 보였고 계획대로 윤서원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 여인은 비싼 값을 주고 데려온 사람답게 불과 보름 만에 윤서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그녀를 위해 거처까지 마련해줬다.

대관음사로 가는 마차 안.

결국 청하는 참지 못하고 신수빈에게 물었다.

"아씨, 새로 첩을 들여 서화 부인의 총애를 뺏고 싶으신 거라면 집으로 들이는 편이 훨씬 낫지 않습니까? 나리께서 그 여인과 밖에 머무시는 건 아씨께도 득이 되진 않을 듯 싶은데요."

청하는 이 모든 계획이 실은 신수빈이 주서화를 견제하기 위한 수법이라 생각했다.

신수빈은 그저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내 사람이라면 넘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청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윤서원은 분명 신수빈과의 혼인을 그토록 간절히 원했었는데 혼인하고 나서 왜 이토록 냉담해진 것인지.

"서화 부인의 총애를 뺏는다 해도 나리께서는 저희 창란원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듣기로 그런 종류의 여인들은 어릴 적부터 사내를 섬기는 법을 익힌다던데 그런 여인을 곁에 두면 나리께서 더더욱 아씨께 눈길을 주지 않으실 텐데요…"

신수빈은 그저 담담하게 웃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청하도 제주인이 완강히 말을 아끼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마차가 여의방(如意坊)에 다다를 무렵, 신수빈은 가림막을 걷어 바깥을 바라봤다. 그러다 낯익은 그림자를 보고 눈 밑에 웃음을 띠었다.

"방금 서방님께서 지나간 듯싶은데?"

마부와 마차 앞에 앉은 하인은 평양후 부인의 지시로 신수빈과 함께 집을 나선 사람이었다.

하인도 지나간 사람이 윤서원과 닮았다고 생각했었기에 신수빈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 나리께서는 지금 근무 중이실 텐데 여의방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

신수빈은 모르는 척하며 마부에게 말했다.

"저쪽으로 가보거라."

윤서원의 뒤를 따라가 보니 그가 골목길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대문의 크기가 크지 않은 걸로 봐서 소박한 민가였다.

마차에서 내린 신수빈이 마당 앞으로 다가갔다.

"오상댁, 나와 함께 들어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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