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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Author: 정대천
그녀가 끝내 자신의 첩이 되길 거부하고 윤서원과의 화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기어이 뱃속의 잡종을 지켜내려고 고집을 부릴 때마다 이도현의 심기는 어김없이 불편해졌다. 그의 말이 칼날처럼 박힌 순간, 신수빈의 심장 속에는 오직 싸늘한 빙설과 꺼져가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몇 차례 머뭇거린 것을 눈치챘으나 끝내 그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담담히 읊조렸다.

“그만두세요.”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약 본왕이 반드시 이 아이를 없애라 한다면 너는 어찌할 셈이냐?”

차마 목구멍을 넘지 못한 이 한 마디는 번번이 이도현에 의해 삼켜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바깥에서 집사가 조용히 알현을 청했다. 신수빈은 곧장 몸을 바로 세우며 그의 곁에서 물러섰다. 이도현은 곁눈질로 그녀를 한차례 흘겨본 뒤 집사를 들이라 명했다. 집사는 정성스레 상자를 두 손에 받쳐 들고 와 올렸다.

“왕야, 이것이 오늘 찾으라 하신 옥지고입니다. 전조의 궁중 비방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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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62화

    신수빈은 사람을 시켜 짐을 꾸리게 했다. 호국사로 떠날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그녀는 떠나기 전 창고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윤부로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들은 하나같이 값비싼 것들이라, 다시 태어난 뒤로 그녀는 줄곧 윤 가 사람들을 경계해 왔다.그 덕분인지, 다행히 그 사이 잃은 것은 윤서령이 몰래 빼돌린 장신구 몇 점뿐, 나머지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이도현이라는 사람은 평소에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지만, 한 번 손을 대면 반드시 그 뒤에 더 큰 수를 준비해 두는 사람이었다.그래서 자신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 물건들이 훗날 누군가의 손에 넘어갈지도 몰랐다. 호국사로 떠나기 전, 반드시 혼수를 빼내야 했다.하지만 십리홍장으로 들어온 혼수였다. 그 양이 너무도 방대해 남의 눈을 피해 몰래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신수빈은 창고를 한 바퀴 둘러본 뒤, 마음에 드는 물건들을 골라 상자에 담았다.잠시 더 살펴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이것들 따로 정리해서, 신 가 전당포 사람들을 불러 옮기게 하거라.”함께 시집온 유모는 그 말을 듣고 조심스럽게 말했다.“마님, 아직 마님은 윤 가의 며느리이십니다. 화이도 하지 않으셨고요. 이런 상황에서 신 가 사람들이 와서 혼수를 가져가려 하면 윤 가에서 막을 겁니다. 그러면 신 가 쪽도 할 말이 없어집니다. 관아에 가도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혼수는 분명 여인의 재산이었지만, 화이하거나 파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사실상 시가의 재물로 여겨지기도 했다.설령 화이하거나 쫓겨난 경우에도, 체면 없는 집안이라면 혼수를 붙잡고 놓지 않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하지만 신수빈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그냥 시키는 대로 하거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유모는 더 말하지 못하고 물러났다.정오가 되자 신 가 전당포 사람들과 인부들이 도착해 혼수를 옮기기 시작했다.창란원의 문을 나서자마자, 윤서원의 사람들은 곧장 그에게 소식을 전했다.신수빈은 조금도 숨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61화

    신수빈은 서 각로의 말을 들은 후, 한참동안 이도현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입술이 가늘게 떨려오며 눈가에도 희미하게 눈물이 맺혔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몰랐다.이도현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속으로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를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조정 대신들이 모두 지켜보는 자리라 끝까지 연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는 난처하면서도 자책하는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서 본왕이 감히 청하기 어려운 부탁이라 한 것이다. 부인은 복과 덕을 겸비한 사람이지 않느냐. 본왕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 어린아이를 부인께 맡겨 부인의 자식으로 삼고, 한 번 어머니라 부르게 하고 싶다. 부인의 복덕을 빌려 이 아이가 평안히 자라길 바라는 것이다. 허락해 주겠느냐?”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윤서원은 이 광경을 바라보며 속이 뒤틀려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조산으로 아이를 잃었다느니, 의모를 들인다느니, 그건 모두 허울 좋은 말일 뿐이었다.이 두 사람이 짜고 신수빈이 낳은 아이를 다시 신수빈 곁으로 돌려보내려는 속셈이 분명했다.그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그는 막을 방법이 없었다.조정 대신들 역시 조용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신수빈이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눈가가 붉어지고, 입술을 떨며 감정을 억누르는 모습을 보자 다들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의 외모를 떠나, 그저 한 사람의 여인으로서도 충분히 연민을 자아낼 만한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장안성을 위해 애쓰다 조산으로 아이를 잃은 몸이었다.그런 그녀가 이 말을 듣고 보이는 반응에 누구라도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이도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훗날 이 아이가 자라면, 반드시 부인을 친어머니처럼 지극히 섬길 것이다. 부디 본왕의 이 난처함을 풀어 주거라.”신수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복잡한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온몸을 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60화

    “신첩은… 왕야께서 이토록 큰 예를 올릴만한 사람이 아닙니다.”이내 이도현의 눈꼬리에 봄바람 같은 부드러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그와 동시에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낸 신수빈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부인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품행이 고결하고 덕과 용모를 모두 갖춘 이는 천하에 부인뿐이니, 본왕이 예를 갖추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신수빈은 속으로 외쳤다.‘그만 좀 하십시오! 눈에 웃음이 다 보이지 않습니까! 더 하다가는 정말 들키겠습니다!’다행히 이도현은 선을 넘을 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이곳에는 눈 밝은 조신들이 가득했다. 이 자리에서 신하의 부인을 탐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드러냈다가는, 훗날 걷잡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돌아올 터였다.이도현은 눈가에 어리던 웃음기를 말끔히 거두었다.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몇 걸음 천천히 걸었다. 얼굴에는 은근한 울적함이 어려 있었다.신수빈은 이 남자와 반년 가까이 얽혀 지냈다.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 리 없었다.그래서 자연스럽게 물었다.“왕야께서는 어찌하여 한숨을 쉬십니까?”이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난처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기다렸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본왕에게 염치없는 청이 하나 있는데, 말해도 될지 모르겠군.”신수빈은 그가 또 무슨 곤란한 말을 꺼낼지 몰라 살짝 긴장했다.하지만 수많은 시선이 지켜보는 앞에서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왕야께서 말씀해 보십시오. 신첩이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힘을 보태겠습니다.”“본왕이 듣기로, 부인은 선항족 군이 성을 함락하던 날 큰 충격을 받아 조산했고, 끝내 아이를 잃었다고 하더군. 본왕은 그 소식을 듣고 몹시 마음이 아팠다. 부인처럼 어진 사람이 그런 일을 겪다니, 참으로 하늘도 무심하지.”신수빈은 잠시 말을 잃었다.‘이 개자식… 그 아이가 어떻게 된 건지,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슬픈 기색을 지으며 낮게 말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9화

    윤서원은 이도현의 이 한 수에 허를 찔린 듯,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상좌에 앉은 사내의 눈동자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고, 흐트러짐 없는 자세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은 대전의 돌바닥처럼 서늘했다.“윤 경은 설마 내키지 않는 것인가? 폐하의 병세가 깊어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보겠다는 뜻이냐.”오만하고도 거침없는 말투였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대전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가라앉았다.윤서원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수많은 조신들이 지켜보는 대전 위에서, 그것도 천자를 위한 기도를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가슴속에서는 원망과 증오가 들끓었지만, 그는 결국 그 사내의 권세 앞에 짓눌려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폐하를 위해 기도 드리는 저희에게는 영광입니다. 신 또한 부인과 함께 가서 기도를 올리겠습니다.”부부는 한 몸이라 하지 않았던가.아무리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부부를 억지로 갈라놓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신수빈이 입을 열려던 바로 그때, 상좌의 사내가 가볍게 팔을 들어 올렸다. 다른 손으로는 소매 끝을 스치듯 털어 내는데, 그 태도는 한없이 느긋하고 나른했다.“부인만 가면 된다. 윤 경, 너는 갈 필요 없다.”이도현은 눈꺼풀을 들어 대전 한가운데 무릎 꿇은 윤서원을 한 번 훑어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덧붙였다.“경은 덕이 모자라고 품성이 천하다. 네가 기도를 올리면, 도리어 신명께서 노하실 것이다.”윤서원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그 한마디는 그의 옷을 벗겨 거리 한복판에 내던진 것과 다름없었다. 온 조정의 문무백관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도현은 그의 마지막 체면마저 발밑에 짓밟고 있었다. 윤서원은 속에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조정 대신들 역시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렸다가는 체통을 잃는 일이었기 때문이다.신수빈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이도현과 눈이 마주치면 자칫 웃음이 새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8화

    청하는 신수빈을 한 번 바라보더니,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마님, 오늘은 왕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떠세요? 오늘 밤만이라도… 왕야 마음에 마님 생각이 깊이 남게 해 두시면, 훗날에도 쉽게 잊지는 못하실 테니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청하의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신수빈은 옅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그분이 원하는 건 내 얼굴뿐이다.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은 얼마든지 많아. 그분이 정말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이었다면, 이십여 년 동안 후원을 비워 두었을 리가 없지.”신수빈은 이도현이 훗날 다른 여인을 들인다 해도 크게 마음 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청하에게 윤연우를 잘 돌봐 달라고 당부한 뒤, 더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출발하기로 한 날은 정월 스무 날이었다.그날은 유난히 눈이 거세게 쏟아졌지만, 윤서원은 끝내 길을 나서겠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하지만 막 관이 윤부를 나서려던 순간, 궁에서 내시가 칙명을 전하러 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윤서원과 신수빈을 입궁시키라는 전갈이었다.윤서원의 안색이 미묘하게 어두워졌다. 혹시라도 일이 틀어질까 싶었던 그는 곧장 앞으로 나섰다. “내관, 아버지의 영구를 고향으로 모셔 가야 하니 시간을 늦출 수 없습니다. 부디 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내시는 그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차갑게 되물었다.“네 아버지의 시간이 중하냐, 폐하의 명이 중하냐?”윤서원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결국 그는 더는 토를 달지 못하고 칙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입궁한 두 사람은 곧장 조회가 열리는 전각으로 이끌려 갔다. 아직 조회가 끝나지 않아, 백관들은 모두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윤서원은 대전 한가운데 무릎을 꿇었다.신수빈은 호국부인으로서 초품 고명에 오른 몸이었기에, 군주 앞에서도 절을 면하고 대전 안에 그대로 서 있었다.백관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한꺼번에 쏠린 가운데, 윤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폐하께서 신과 신의 부인을 이 자리에 부르신 연유를 여쭙고자 합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57화

    이도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며, 굳게 다문 입매에도 미세하게 힘이 들어간 듯 보였다.“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거라. 문주가 누구인지도 반드시 알아내고! 그리고… 부인 쪽에 무비랑 암위를 몇 명 더 붙이거라.”“예.”지시를 마친 뒤에도 그는 한동안 손에 든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편지에는 윤서원이 집안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신수빈의 말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그의 긴 눈매가 깊게 가라앉았다. 무언가를 조용히 곱씹는 듯한 눈빛이었다.*이튿날 아침, 윤서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곧장 움직였다. 평양후의 세습 작위를 사양하겠다는 상소를 올리고, 상여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집안 사람들까지 모두 떠날 채비를 시켰다.이런 일은 조정이라 해도 함부로 막을 수 없었다.윤서원은 근정전 안에 서서, 상좌에 앉은 이도현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조용히 기다렸다.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이도현이 권세를 앞세워 남의 부인을 빼앗으려 드는 것.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가 두 사람을 간통한 남녀로 몰아가고, 결국 그 소문이 그들을 짓누르는 것이었다.긴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서원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자, 깊고 어두운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도현과 눈이 마주쳤다.한참 뒤에야, 이도현이 입을 열었다.“허한다.”윤서원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쳐 지나갔다.신수빈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결국 그 정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아무리 아끼는 여자라 해도, 높은 권세 앞에서는 그저 버릴 수 있는 패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신, 왕야께 감사드립니다. 폐하께도 감사드립니다. 신은 부인과 돌아가는 길에도 밤낮으로 왕야와 폐하의 안녕을 빌겠습니다.”윤서원은 겉으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비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 사람’이 말한 대로였다.신수빈을 장안에서 데려가기만 하면, 이도현이 억지로 빼앗으려 들 경우 조정 안팎의 여론이 그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했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35화

    임 태의는 이 말을 듣자마자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갔다.방 안에는 태후와 이도현,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그는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낮고 평온된 목소리로 말했다.“신은 아직 자객을 추적해야 하옵니다. 그리고 태의도 태후의 상처가 심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편히 쉬십시오.”한참 뒤에야 태후가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 속에는 많은 무력함과 불복이 서려 있는 듯했다.“그렇다면 가거라. 나를 신경 쓸 것 없다.”이도현은 잠시 우뚝 서 있다가 말했다.“신, 물러가옵니다.”이도현이 떠난 뒤에야 소영이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18화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저는 젊었을 적 세상과 운명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 훗날 한 사람을 만났고, 그는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마음속의 악마를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준 덕분에 다른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서 이제는 그 소년 시절의 일들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지요.”신수빈은 그의 눈썹과 눈매 사이에서 번지는 그 온화하고 여유로운 기운을 바라보았다. 여러 강이 모이는 곳인 만천을 품고도 바다처럼 넉넉한 포용이 있는 듯한 모습은 윤서원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만약 세상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22화

    어진 태후라면, 병든 명부를 억지로 불러 문안을 올리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가장 화가 난 사람은 주서화였다. 본래 신수빈이 죽은 후 자신이 곧 정실로 봉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신수빈의 명은 끈질겼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겨우 태기만 흔들리고 놀란 정도라니!신수빈이 임신했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아는 바였고 윤서원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그는 화가 나고 분해서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신수빈이 감히 다른 남자의 애를 가졌다니!주서화가 돌아와 울며 물었을 때 윤서원의 신경은 이미 한껏 곤두서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119화

    서원은 유난히 넓었기에 끝내 금자가 신수빈을 업고 돌아왔다.그들이 춘진각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해시 말이 되어 있었다. 신수빈은 조용히 동쪽 행랑에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금자에게 당부했다.“도련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외간 남자이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가 물속에서 나를 구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온갖 험담을 해댈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부터 누가 묻는다면 네가 나를 물에서 구했고 밀림에서 길을 잃어 지금에서야 돌아왔다고 말하거라.”금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은보는?”신수빈이 묻자 금자는 그제야 동행랑에 그녀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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