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주용화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만약 원한을 품은 사람이 한 짓이었다면 현우는 지금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주용화의 분석은 틀리지 않았지만 하지율은 그래도 사람을 시켜 한 번 조사해 보기로 했다.하지율의 주변은 늘 사건이 끊이지 않았기에 어떤 일도 방심할 수 없었다....계약을 마친 뒤, 하지율은 병원으로 나현우를 찾아갔다.다행히 나현우의 부상은 심각하지 않았고 가벼운 뇌진탕 정도였다.강원희가 나현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하지율은 몇 마디 안부를 묻고 나현우에게 며칠 휴가를 주려던 참이었다.그때 나현우가 입을 열었다.“지율 씨, 잠깐만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까요?”하지율이 주용화를 바라보자 주용화가 말했다.“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강원희도 눈치가 빠르게 병실을 나갔다.두 사람이 나가자 나현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지율 씨... 저 아무래도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하지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왜요? 쉬고 싶거나 치료가 더 필요하면 휴가라도 줄 수 있어요.”나현우는 미안한 듯 웃었다.“그게 아니라... 어머니가 갑자기 심장병으로 쓰러지셨어요. 오늘 오는 길에 그 소식을 듣고 정신이 팔려서 사고가 난 거고요. 저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도 이제 연세가 많으세요. 게다가 자식은 저 하나뿐이에요. 그동안 계속 밖에서 일하느라 집에도 거의 못 갔어요. 이 세상에 제 가족은 어머니 한 분뿐인데 이제는 제가 곁에서 모셔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을 들은 하지율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나현우의 업무 능력도 사람 됨됨이도 하지율은 무척 만족하고 있었기에 가능하다면 계속 함께 일하고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편찮으신 상황에서 곁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말릴 수는 없었다.하지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이미 결정한 거라면 더 붙잡지는 않을게요. 나중에라도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현우 씨를 향한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요.”나현우는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다.“지율 씨 밑에서 일할 수 있어서
하지율은 눈앞의 주용화가 어쩐지 이상하다고 느꼈다.하지율이 낮게 주용화를 불렀다.“화야 씨.”그러자 주용화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주용화는 천천히 하지율 앞까지 걸어왔다.그러더니 손에 들고 있던 외투를 하지율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밤바람이 추우니 감기 걸리지 마세요.”그 순간, 방금 느꼈던 모든 것이 그저 착각이었던 것처럼 알 수 없던 압박감이 사라졌다.하지율은 고개를 돌려 나현우를 바라봤다.“먼저 돌아가세요. 내일 아침에 다시 저를 데리러 와 주세요.”내일 하지율은 또 계약서에 서명해야 했고 이미 나현우와 시간을 정해 둔 상태였다.나현우는 대답한 뒤 주용화에게도 인사를 하고 차를 몰고 떠났다.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주용화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다음 날, 하지율은 일찍 일어났다.계약에 필요한 서류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빠진 것이 없는지 살핀 뒤 나현우가 데리러 오기를 기다렸다.나현우는 눈치가 빠르고 일 처리가 깔끔한 경호원이었다.업무 능력도 꽤 좋아서 지금까지 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평소라면 약속 시간보다 40분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는 했고 단 한 번도 늦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미리 오기는커녕 약속 시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무슨 일이 생긴 걸까?’하지율은 걱정이 되어 나현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나현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두 번 더 걸어 보았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하지율은 미간을 찌푸리며 강원희에게 전화를 걸었다.“강원희 씨, 나현우 씨가 출발했나요?”강원희가 말했다.“현우 씨는 아침 일찍 나갔습니다. 왜요? 아직 도착 안 했습니까?”그러자 하지율이 대답했다.“아직 안 왔어요. 전화도 여러 번 했는데 안 받아요. 무슨 일 생긴 건 아닌지 걱정돼서요.”강원희가 곧바로 말했다.“지율 씨, 제가 지금 바로 현우 씨의 위치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기사님 한 명 더 보내드릴까요?”하지율은 시간을 확인했다.“아니요. 시간이 없어요. 제가 직접 갈게요.”전화를 끊자마자 하지율은 차 키를
심다희는 더 묻지 않고 바로 말했다.“내가 한번 알아볼게. 소식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그러자 하지율이 대답했다.“고마워.”전화를 끊은 뒤, 하지율은 나현우와 강원희에게도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보라고 지시했다.단종건마저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으니 주용화의 상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반드시 최대한 빨리 치료를 개입해야 했다....며칠 뒤, 하지율은 심다희의 전화를 받았다.“지율아, 정신의학 쪽의 전문의를 한 명 찾았어. 해외에서 명의로 유명했던 도그 박사의 제자래. 조현병이나 양극성 장애, 강박증 같은 정신질환 분야에서는 꽤 권위 있는 사람이래. 원래는 도그 박사를 찾아보려고 했는데 돌아가신 지 오래돼서 제자밖에 못 찾았어. 내가 지금 자료 보내줄 테니까 한번 봐.”하지율이 말했다.“다희야, 고마워.”심다희가 웃으며 말했다.“너도 그동안 날 많이 도와줬잖아. 제대로 보답도 못 했는데 이번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 오히려 기뻐.”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기에 굳이 더 많은 감사 인사를 주고받을 필요는 없었다.전화를 끊은 하지율은 심다희가 보내온 의사의 자료를 살펴봤다.의사의 이름은 윈터였다.전형적인 미인이었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30대 정도의 여성이었다.자료만 봐서는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하지율은 곧바로 유소린에게 전화를 걸어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주용화를 치료할 의사인 만큼 아무에게나 맡길 수는 없었다.이어 하지율은 단종건에게도 전화를 걸어 도그 박사를 아는지 물었다.그러자 단종건이 말했다.“인연은 좀 있었어. 하지만 벌써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어. 네가 말한 도그 박사의 제자는 몇 번 본 적도 있고 이름도 들어봤어. 해외에서는 꽤 유명하더구나. 다만 아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야. 난 외국 사람들하고는 말이 안 통해. 그래도 자료를 보내 봐. 내가 안병철한테 한번 보여 줄게. 그 영감은 조건만 맞으면 동물하고도 친구가 되는 사람이니까.”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기 너머에서 안
하지율이 말했다.“이렇게 되면 앞으로 연정미는 심씨 가문에서 편할 날이 없겠네.”심다희가 말했다.“부모님께서 이미 믿을 만한 사람 몇 명을 붙여서 연정미를 철저히 감시하고 있어. 친자 확인에서 손 못 쓰게 하려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도 다시 친자 확인을 할 거야. 혈연이 뒤바뀌는 일 없게 말이야.”잠시 말을 멈춘 심다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네 말대로 앞으로 연정미가 심씨 가문에서 편히 지내긴 어려울 거야. 아마 널 괴롭힐 정신도 없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쁠걸?”하지율은 심다희의 말뜻을 알아차렸다.“자기 앞가림하기도 힘들다는 게 무슨 뜻이지?”심다희가 목소리를 낮췄다.“부모님이 연정미를 받아들인 건 사실 아이 때문이야. 일단은 아이 때문에 붙잡아 두려는 거지. 부모님의 생각은... 아이만 남기고 엄마는 내보내는 거야. 연정미가 아이를 낳으면 오빠랑 이혼시키려고 해. 오빠는 지금 연정미한테 푹 빠져 있고 아이까지 생겼으니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 기밀 유출 사건까지 터졌잖아. 오빠가 아무리 연정미를 믿고 좋아해도 이제는 경계할 수밖에 없어.”심다희는 다시 말을 이었다.“게다가 부모님은 오빠한테 심씨 가문보다는 조금 못한 집안 아가씨들을 소개하고 있어. 전부 심연 그룹에 입사시켜 놨어. 오빠가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으면 집안이 딱 맞는 명문 가문의 아가씨를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잖아. 하지만 집안이 조금만 낮아도 심씨 가문에 시집오고 싶어 하는 아가씨는 아직도 많아. 예전에는 오빠가 워낙 사생활이 깨끗했고 부모님도 오빠를 믿으셔서 거의 간섭하지 않으셨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부모님은 절대 연정미를 심씨 가문의 안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거야. 오빠가 자기 주관은 있어도 부모님을 정말 존중하는 사람이잖아. 하루이틀은 버틸 수 있어도 평생 부모님이랑 맞서 싸우기는 어렵겠지. 게다가 부모님이 뒤에서 계속 판을 깔아 주면 오빠가 끝까지 안 흔들릴 가능성도 낮아.”하지율은 심다희의 뜻을 이해했다.무서운 건 작정하고 달려드는
하지율은 마음을 가다듬은 뒤 심다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율아.”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심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심다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조심스러웠다.하지율이 물었다.“뉴스에서 심씨 가문에 일이 터졌다는 걸 봤어. 다희야, 상황이 많이 심각해?”심다희가 무겁게 대답했다.“응. 사실 심씨 가문에 며칠 전부터 조금씩 문제가 생기고 있었어. 그런데 최근 들어 점점 더 심해졌고... 이제 뉴스에까지 보도됐다는 건, 더는 숨길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야.”하지율이 다시 물었다.“대체 무슨 일이야? 정말 영업 기밀이 유출된 거야?”심다희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맞아.”“우리 심씨 가문에서 맡고 있는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 하나가 있는데 그 기밀이 유출됐어. 아직 정식으로 시작도 안 한 프로젝트라 자세한 내용은 부모님이랑 오빠밖에 몰라. 회사 임원들도 구체적인 내용은 몰라. 그런데 최근에 그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갔어.”잠시 말을 멈춘 심다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 기밀문서는 줄곧 오빠가 직접 보관하고 있었어. 그래서 부모님은 오빠 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라고 생각하고 계셔.”심다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지금 부모님은... 심씨 가문의 기밀을 빼돌린 사람이 연정미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고 계셔.”“연정미?”하지율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심다희가 설명했다.“오빠 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심씨 가문에서 연정미뿐이야. 평소 오빠가 없을 때는 나나 부모님도 서재에는 들어가지 못해. 연정미는 예전에 연경 그룹에서 일했잖아. 경영이나 사업도 잘 알고 있어서 오빠 컴퓨터에서 기밀 자료를 빼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영업 기밀은 아무나 훔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사업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떤 자료가 중요한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심다희는 말을 이었다.“심씨 가문의 기밀이 유출되기 시작한 시점도 연정미가 우리 집에 들어온 뒤부터야. 그래서 의심받을 수밖에 없어.
하지율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이 솜으로 꽉 막힌 것처럼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주용화에게 최면 치료를 받게 한다는 건, 결국 두 사람이 헤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주용화와 하지율은 이제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와서 주용화와 떨어지라니.하지율은 받아들일 수도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단종건은 그런 하지율의 마음을 읽은 듯 조용히 말했다.“지율아, 나도 알아. 너와 주용화 그 녀석이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수많은 일을 겪고 겨우 함께하게 됐다는 것도 알고 있어.”단종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하지만 어떤 문제는 사랑만으로 해결되지 않아. 감정이 깊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사랑으로 감화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예를 들어 누군가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봐. 병원도 가지 않고 의사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서 신께 병을 고쳐 달라고 기도만 한다고 정말 나을 수 있겠느냐?”단종건은 하지율을 오랫동안 지켜봐 왔고 진심으로 하지율을 아꼈다.그래서 지금까지 하지율에게 수많은 도움과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만약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하지만 하지율만큼은 달랐다.단종건은 하지율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미리 대비하길 바랐다.하지율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고 눈동자에는 어렴풋한 혼란스러움이 어려 있었다.단종건은 이 결정이 하지율에게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알고 있었다.“천천히 생각해 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하지만 하지율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단종건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단종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하지율의 머리카락과 뺨을 스쳤다.그러자 서늘한 기운이 피부를 파고들었다.하지율은 조각상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그때 부드러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야옹.”하지율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윤기 나는 털
경호원들이 하지율을 둘러싸고 밀려드는 인파를 막아섰지만, 누군가 물건을 던질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하지율은 무언가가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느꼈다.달걀이 얼굴에 닿기 직전, 한 실루엣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곧이어 하지율의 시야에 들어온 건, 화야의 손에 잡힌 달걀 몇 개였다.하지율이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화야가 다시 달걀을 던졌다.달걀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던 한 젊은 여성의 얼굴에 떨어졌다.“꺄악!”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순간 현장은 얼어붙었다.하지율은
“아무리 권세가 대단하다고 해도 해외에서 나댈 수는 없으니까요.”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임채아가 조심스레 말을 보탰다.“다른 건 참을 수 있지만... 선생님을 공경하지 않는 건... 전 정말 용납이 안 됩니다.”그러면서 지난번 대회장에서 하지율을 마주쳤을 때, 하지율이 현성 대가에게 눈곱만큼도 예의를 보이지 않았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곧이어 하지율에 대한 남은 호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레이나가 콧방귀를 뀌었다.“저런 인물이 무대에서 활개를 치다니, 음악가의 수치와 다름없
그날 밤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연정미는 소파에 앉아 있다가 몇 번이나 그대로 잠들 뻔했다.그러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문 쪽에서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꾸벅꾸벅 졸던 연정미는 순간 번쩍 정신이 들어서 곧바로 몸을 바로 세우고 문 쪽을 바라봤다.밖에서는 손형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보현 오빠, 어제 정미한테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아서 무슨 일 생긴 게 아닌지 걱정되어서 보현 오빠한테까지 연락할 수밖에 없었어요.”단보현이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 조사해보니 연정미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곳은 여기였어.”손형서
손형서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주용화 앞으로 내밀고 저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얘기했다.“화야 씨, 뭐 마실래요?”주용화는 메뉴판을 받지 않고 말했다.“연정미 씨 말로는 여기 라테가 대표 메뉴라던데요. 라테로 할게요.”손형서의 미소가 미세하게 굳었다.“정미가... 왜 그걸 화야 씨한테 말했죠?”이 카페는 연정미가 예전부터 자주 오던 곳이었다.주용화가 태연하게 답했다.“지난번 같이 식사했을 때 들었어요.”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그날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둘은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