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뭐야?”
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 “…….” 회사 정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선우야.” 선우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김민재. “너 여기까지 왜 왔어?” “선우 네가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차단했어.” “그래도 얘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무슨 얘기?” “선우야, 나 진짜 이번에는—.” “됐어.” 선우가 단호하게 잘랐다. “끝났어.”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김민재는 끈질겼다. “내가 설명할게.” “싫어.” “왜!” 민재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렸다. “…….” 선우의 얼굴이 굳었다. 회사 앞이었다. “나 진짜 너 사랑해.” “그 말 지겨워.” “선우야.” 민재가 다시 손을 뻗었다. “일단 가서 얘기하자.” “손대지 말라구.” 선우가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김민재는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선우와 민재 사이로 그림자가 하나 끼어들었다. “그만하지 좀.” 낮고 건조한 목소리. “권윤오?” 언제 따라왔는지,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서 있었다. 윤오가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얼굴. 손. 그리고 다시 민재. 눈빛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회사까지 찾아와서 뭐 하는 짓이야.” 김민재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왜 끼어들어?” “김선우가 싫다잖아.” “그러는 너는 좋대?” 그 질문에 선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민재가 윤오와 선우를 번갈아 보더니 비웃듯 말했다. “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 “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 “맨날 권윤오, 권윤오 하더니 결국 이거였네.” “김민재!” 선우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봐. 아니라고 못 하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이 년 동안 숨기고 또 숨겨온 마음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 수치심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건. “그만하라고 했지.” 윤오가 선우를 등 뒤로 완전히 가렸다. “이제부터는 좋게 말할 생각 없어.” ***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철컥. 좁은 공간 안에 갇히자 기계가 돌아가는 낮은 진동음만 웅웅 울렸다. “…….” 선우가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김민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쏟아내던 구질구질한 변명.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그 한가운데. '봐. 아니라고 못 하잖아.' '그만하라고 했지.' 최악이었다. “하……” 선우가 반사적으로 가슴을 눌렀다. 정상이라며. 그런데 왜 이렇게 난리인 건데. “중증이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잠시 생각하다가 정정했다. “아니. 중독인가.” 권윤오 중독. 그딴 병명이 있다면 이미 말기였을 것이다. 띵. 생각이 더 이상해지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김 과장?” 첫마디부터 날카로웠다. 선우의 표정이 굳었다. 오 차장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꼭 언제 나타나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리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병가 낸다더니 출근은 하셨네?” “오전에 병원을 좀 다녀왔습니다.” “술병은 아니고?” 알면서 묻는 게 분명했다. “그럴리가요.” 아주 건강합니다. 심장만 좀 개판이고요. 오 차장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신규 위스키 론칭 코앞인 거 알지?” “네.” “정신줄 놓을 때 아니에요. 개인적인 일은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회사 일에는 지장 없게 해요.” “알겠습니다.” 선우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괜히 한마디 붙였다가는 상당히 피곤해질 것 같았다.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익숙한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꼭 전쟁터 같았다. 신제품 론칭을 앞둔 사무실은 늘 그랬다. 괜스레 소음이 반가웠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김 과장.” “네?” 봉 부장이 기다렸다는 듯 손짓했다. “잠깐 이리 와봐.” 봉 부장이 턱으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오늘 신임 본부장님 오셨으니까 인사 한번 해.” 선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본부장님이요?” “왜 그렇게 놀라? 본사에서 파견 온다고 며칠 전부터 얘기했잖아.” “아…….” 그제야 기억났다. 맞다. 신임 본부장. 본사에서 직접 내려오는 인물이라고 했다. 어제 봉 부장이 말을 전할때에 훨씬 시끄러운 일이 있었던 탓에. 퇴근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간이었다. [수정이] 그날 수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진 한 장만 보냈다. 그게 이상했다. 압구정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수정은 선우에게 단순한 지인이 아니었다. 사원 딱지를 떼기 전, 매주 금요일이면 선우는 수정의 바를 찾았다. 수정이 내어주는 위스키를 마시며 시장의 민심을 읽었고, 술꾼들이 무엇에 열광하는지를 가르쳐준 스승이자 아군이었다. 수정이 설명 없이 사진부터 보냈다는 건 사고라는 것이 아닌가? 선우가 서둘러 메세지를 열었다. “…….” 손끝이 굳었다. 사진 속 장소는 너무 익숙했다. 낮게 깔린 조명. 바 테이블의 매끄러운 질감. 수도 없이 드나들었던 곳이었다. 눈을 감고도 동선을 그릴 수 있는 장소. 그런데 사진 한가운데. 김민재였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는. “……허.” 웃음인지 숨인지 모를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그래서였구나. 최근 들어 연락이 뜸했던 이유도. 자꾸 약속을 미뤘던 이유도. 자신이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도. 초저녁에 다른 곳도 아닌 수정의 바에서 바람을 피우는 남자라니. 김민재가 이렇게 꼴통새끼였나. “김 과장?” “…….” “김 과장!” “아…… 네.” 봉 부장의 목소리가 다시 선우를 현실로 끌어올렸다. 봉 부장이 회의실 문을 열어놓은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갑니다.” *** 선우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들어오세요.” 대답이 떨어졌다. 선우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쿵. “…….” 선우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회의실 안에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 낯선 얼굴이었다. 흐트러짐 하나 없는 검은 머리, 선명하게 뻗은 눈썹 아래로 깊게 자리 잡은 눈매. 반듯하게 떨어지는 콧날과, 무언가를 쉽게 허락하지 않을 듯 단정하게 다물린 입술까지. 완벽하게 재단된 짙은 수트가 넓은 어깨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었다. 남자가 아주 느리게 입을 열었다. “김선우 과장님?” 그리고 그 순간. 선우는 아직 알지 못했다. 십이 년 동안 한 사람에게 묶여 있던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 남자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는 것을.“…….” “…….”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에 섞인 희미한 위스키 향까지 느껴질만큼.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선우가 눈을 들었다. “정말 안 갈 겁니까?” “…….” 끄덕. 선우의 목이 움직였다. 다음 순간. “……!” *** 입술이 맞닿았다. 처음에는 놀랄 만큼 가벼웠다. 정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것처럼. 이윽고 손끝이 선우의 뺨을 감쌌다. 안개가 성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너진 돌 틈 사이로 달빛이 길게 스며들었고, 산 능선 위에 낮게 걸린 별들은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빛났다.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잠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지가 뺨을 아주 느리게 쓸었다. 꿈이라면 느낄 수가 없는 온기였다. “눈 감아요.” 선우는 눈을 감았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멀어졌다. 바람 소리도. 안개 사이로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오직 체온과, 숨결 사이로 희미하게 번지는 위스키 향만 선명했다. *** 입술이 떨어졌다. 선우가 숨을 고르며 눈을 떴다. “…….”
젖은 풀 냄새가 짙었다. 발밑에서 이끼가 축축하게 눌렸고, 낮게 깔린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몇 분쯤 걸었을까. 안개 너머로 거대한 돌벽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긴.” “발베니 성입니다.” 에단이 말했다. “지금은 폐허지만,” 그가 무너진 성벽을 바라봤다. “한때는 이 하이랜드를 지키던 요새였죠.” 무너진 벽. 금이 간 계단. 이끼가 뒤덮은 돌. 800년이라는 시간이 돌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었다. “…….” 안개가 산자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사이로 고성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장엄하고 거대했다. 특히 산의 능선을 따라 걸린 별빛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게 아니라, 저 멀리 검은 지평선 위에 하나씩 박아놓은 것처럼 보였다. “우와.” 별이 이렇게나
더프타운의 아침은 차가웠다. 3번 창고에 도착하자 이미 현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냉각기는 복구되어 있었지만, 폭풍이 남긴 습기와 열의 흔적은 여전히 창고 안에 남아 있었다. 에단은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현지 책임자인 캘럼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스코틀랜드 억양이 섞인 영어로 상황을 쏟아냈다. “냉각기 복구 시점.” 캘럼이 즉시 답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습도는?” “정상 범위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가 창고를 바라봤다. “어제 우리가 확인한 건 가능성이었어요.” 잠시 멈췄다. “오늘 필요한 건 확신입니다.” 그 말과 함께 에단의 시선이 선우에게 향했다. “김 과장님.” “네.” “3번 창고 전체 캐스크를 다시 봅니다.” 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전부요?” “전부.” *** 작업은 힘들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열 번째. 서른 번째. 캐스크마다 마개를 열고 샘플을 뽑았다. 색을 보고. 향을 맡고. 입안에서 굴리고. 기록하고. 버리고. 다시 다음 캐스크. 같은 캐스크라도 숙성 위치와 열의 영향을 받은 정도에 따라 향과 질감이 미세하게 달랐다. 어떤 것은 바닐라가 지나치게 강했다. 어떤 것은 오크의 탄닌이 입안을 말려버렸다. 어떤 것은 향은 화려했지만 모틀락과 붙이는 순간 중심이 사라졌다. 선우의 머릿속이 점점 숫자와 향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세 시간쯤 지났을까. 87번 캐스크 앞에서 멈춰 섰다. 선우는 천천히 마개를 열었다. 퐁. 공기가 바뀌었다. “…….” 잔을 돌렸다. 색을 확인했다. 코끝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리고 입안에 아주 조금 머금었다. “…….”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부장님, 이것 좀 봐주세요." 멀리서 도표를 확인하던 에단이 바로 시선을
“그리고.”낮은 목소리가 불꽃 사이로 스며들었다.“당신이 아직 그 사람을 좋아한다고 해서.”“…….”“내가 당신을 좋아하면 안 되는 것도 아니고.”쿵.눈치없는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서 눈앞의 남자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거리가 조금 좁혀졌다.하지만 닿지는 않았다.그가 언제든 물러날 수 있고, 선우 역시 언제든 피할 수 있는 거리.“그냥 당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보라고 하는 겁니다.”선우는 숨을 죽였다.“그리고 지금.”에단의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당신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그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도망가지는 않잖아요.”“……그건.”선우가 변명하려 했다.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질문 끝났으면 이제 자요.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에단이 잔을 내려놓았다.“벌써요?”아니.벌써가 아니라.선우는 어안이 벙벙했다.“…….”잠깐 전까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던 게 우스울 정도였다.잠이나 자라는거지?이 남자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선우는 헛웃음을 삼켰다.“본부장님.”“네.”“이 상황에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요?”에단이 눈을 들었다.“…….”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아까 그 말.”“어떤 말.”선우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물어봅시다.”눈빛이 조금 전과 달랐다. 주황빛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였다.“지금도 내가 무섭습니까?”음.대답하지 못했다.“…….”괜히 고개를 돌렸다.얼굴이 뜨거웠다.벽난로의 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에단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무섭느냐고.그래.무서웠다.그런데 처음 그가 무서웠던 이유와 지금 무서운 이유는 완전히 달랐다.처음에는 이 남자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서웠다.그런데 지금은.선우가 그를 돌아봤다.에단의 눈빛이 불꽃 너머에서 느리게 휘었다.“……네.”반대였다.이 사람이 정말 진심일까 봐.“하.”말을 내뱉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웃음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도 민망할 정도였다.“엄청 무서워요.”“왜죠?”“본부장님이…….”진짜일까봐요.선우가 말을 삼켰다. 대신 잔을 손안에 깊숙이 움켜쥐었다.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도 모르는 병신인데.선우는 잔을 내려다봤다.“가짜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손끝에 닿은 유리잔이 차갑게 느껴졌다.“본부장님이 원래 여자들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고, 나한테도 그냥 재미로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죄책감이 덜해지니까.선우가 또 말을 삼켰다.“…….”에단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다만 그녀가 삼킨 말의 의미까지 알아들은 사람처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데 자꾸 아니더라고요.”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제가 아빠 일 때문에 정신없이 뛰쳐나갔을 때도.”“…….”“다음 날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일을 대신 처리해놓으셨을 때도.”“…….”“오늘 여기까지 와서도.”선우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입장이 줄곧 같으시네요, 본부장님은.”“선우 씨니까요.”“그러니까요.”이런 말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없었다.윤오에게도.그 누구에게도.“윤오는 제가 아무리 오래 좋아해도 저를 선택하지 않았어요.”“…….”“그런데 본부장님은.”선우가 숨을 삼켰다.“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꾸 저를
“본부장님은 왜 저예요?”에단의 잔이 입술 앞에서 멈췄다.“…….”이번에는 선우도 피하지 않았다.술기운 때문인지, 폭풍 때문인지, 아니면 이 남자가 만들어낸 이상할 만큼 안전한 침묵 때문인지 모르겠다.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회사에 저보다 유능한 사람 많잖아요.”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선우가 잔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루시 씨처럼 진짜 프로인 사람도 있고.”잠시 숨을 삼켰다.“그런데 왜 굳이…….”선우가 에단을 바라봤다.“저예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달그락.작은 소리가 오두막 안에 또렷하게 울렸다.불꽃이 한 번 크게 일렁였다.그제야 선우는 알아차렸다.에단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느슨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그는 무릎을 세운 채 벽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주황빛 불길이 날카롭게 정돈된 옆얼굴을 스쳐 지나갔다.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나도.”에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낮은 목소리였다.“지금의 선우 씨처럼 흔들리던 때가 있었습니다.”선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에단은 여전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아르벨라라는 이름은 달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뭘 위해 여기까지 왔는지는 몰랐어요.”짧은 웃음이 흘렀다.웃음이라기보다 오래된 기억을 비웃는 소리에 가까웠다.“해야 할 일은 넘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