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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uthor: 밤이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3 17:21:13

“왔네.”

권윤오가 있었다.

흰 가운 차림으로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저는 혼자 이불 속에서 스무 번쯤 죽었다 살아났는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곳도 없었다.

“앉아.”

예.

선우가 의자에 앉았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

“…….”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쿵.

선우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꺾었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

십이 년이었다.

십이 년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것 같았다.

“……야.”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있잖아.”

용기를 냈는데.

“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

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

“……뭐?”

“금방 끝나.“

권윤오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나 멀쩡해.”

“확인만 하는 거야.”

선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인이라니.

지금도 네 앞이라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을,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맥박도 불규칙했고.”

“…….”

“심전도 한 번 찍어보자.”

윤오가 차트를 덮었다.

“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 배고프잖아.”

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챙긴다.

걱정한다.

밥을 먹인다.

이 모든 행동에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이 뻔한 술래잡기는 제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

“갑자기 왜 난리인데.”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윤오의 손이 멈췄다.

툭.

차트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

“…….”

눈이 정면으로 선우를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눈.

“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

“…….”

“너는 못느꼈을 수도 있지만.”

아니, 너무나도 잘 느껴졌는데.

“원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권윤오의 눈동자는 현미경 렌즈처럼 정밀했고, 진료실 내부에는 조밀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켜쥐었다.

“원인이 뭔데.”

설마, 너한테 다 읽혀버린 걸까.

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널을 뛰는 이 멍청한 심장 소리를.

말이 나오고 나서야 후회했다.

두려웠다.

선우는 숨을 죽였다.

권윤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스트레스.”

담담한 목소리는 교과서를 읽는 모범생처럼 한마디를 더 얹었다.

“수면 부족.”

선우의 시선이 한참을 윤오를 향했다.

“또 약간의 알코올 의존 증세?”

“…….”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개소리.

내 십이 년치 짝사랑이, 네 눈에는 병증으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

결국 기세에 밀린 선우는 심전도 검사를 끝내고 전극을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다.

피부에 붙어 있던 패치를 떼어낼 때마다 미세한 따끔거림이 남았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모니터였다.

“…….”

권윤오가 화면에 남은 파형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 가슴 안에서 날뛰는 것을 모조리 읽어내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문제없네.”

너무 쉽게 나온 결론이었다.

선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문제없는 건 나도 알거든.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이었지만 삼켰다.

의학적으로는 정상.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더 엉망이었다.

기계로는 잡히지 않는 것이 있었다.

십이 년째 지속중인 아주 지독하고 고질적인 짝사랑.

정상이라는 한마디로 덮어버릴 수가 있는 거였다.

권윤오.

적어도 너한테는 그렇겠지.

“사람 불러놓고 별걸 다 시키네.”

선우가 괜히 투덜거렸다.

권윤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차트를 정리하고,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끄는 손길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저 태평한 얼굴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얄미웠다.

“이제 가도 되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선우가 몸을 돌렸다.

도망치듯 진료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밥 먹어.”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이 멈췄다. 윤오가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일이나 하지 왜 따라와.”

“점심시간이니까.”

참나.

멀대같이 키만 커서 사람 뒤에 서 있기만 해도 거슬럭거리는 주제에.

선우가 홱 돌아섰다.

“나 안 배고파.”

“거짓말.”

순간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배고프면 더 짜증 내잖아.”

윤오가 먼저 문을 열었다.

“가자.”

***

식당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선우의 기분은 묘한 상태를 유영했다.

편했다.

그런데 동시에 불편했다.

십이 년 동안 쌓인 짝사랑은 익숙함과 함께 자라서, 이제는 사소한 친절 하나에도 날이 서 있었다.

권윤오가 맞은편에 앉았다.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았다.

“여기 해장국 두 개 주세요.”

“나 국물 안 땡겨.”

“따뜻한 국물 먹어.”

어이가 없어서 권윤오를 쳐다봤다.

저 인간은 대체 언제부터 남의 식성을 본인 식성처럼 결정하는 버릇이 생겼을까.

잠시 후 뜨거운 국물이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선우는 숟가락을 들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맞은편의 권윤오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단정한 손.

길게 뻗은 손가락.

고개를 숙일 때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

“…….”

선우가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뜨겁고 얼큰해서,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야.”

“왜.”

“너는 이게 늘 문제야.”

권윤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왠 난데없는 개소리냐는 눈빛이었다.

“뭐가.”

“……쓸데없이.”

선우가 말을 멈췄다.

차마 나오지 않는 단어가 목 끝에 걸렸다.

다정해.

“쓸데없이 뭐.”

권윤오가 물었다.

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국물만 휘저었다.

“……몰라.”

“뭘 몰라.”

“그냥 몰라. 밥이나 먹어.”

선우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권윤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유죄인간 권윤오.

저 무심한 다정함이 자신을 십이 년 동안 같은 자리에 묶어놓았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우가 국물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윤오의 병원에서 선우의 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

시간이 맞는 날이면 두 사람은 별다른 약속도 없이 점심을 함께했다.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이상할 만큼 의식됐다.

일정한 보폭.

비슷한 속도.

굳이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걸음.

십이 년이라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놓은, 너무 익숙한 리듬이었다.

선우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또 넘겼다.

왜인지 모를 ​어색함에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였다. 어느새 회사 건물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선우가 먼저 브레이크라도 걸린 것 마냥 걸음을 늦췄다.

“여기까지면 돼.”

윤오도 걸음을 멈췄다.

“어.”

평소와 다르지 않은 짧은 대답.

선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간다.”

“그래.”

이번에도 붙잡지 않았다. 선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째.

“…….”

발이 멈췄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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