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왔네.”
권윤오가 있었다. 몹시도 무결한 흰 가운 차림으로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저는 혼자 이불 속에서 스무 번쯤 죽었다 살아났는데.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곳도 없었다. “…….” 나는 그냥 술주정뱅이다 이거지.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앉아.” 예. 선우가 의자에 앉았다. 올라간 눈꼬리와는 상반되는 짐짓 순종적인 몸짓이었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 “…….” 눈이 마주쳤다.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쿵ㅡ. 선우가 본능적으로 시선을 꺾었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마! “왜 불렀는데 그래서.” 일단 모르는 척 작전이었다. “…….” “…….” 윤오가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다. 그러더니 픽 웃는다. 십이 년이었다. 십이 년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고 있었다. “……야.” 결국 선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있잖아.” 용기를 냈는데. “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 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 “……뭐?” “금방 끝나.“ 권윤오가 너무 태연하게 말했다. “나 멀쩡해.” “확인만 하자는 거야. 조기수축일 수도 있고, 갑상선 문제나 빈혈 때문에 심장이 그렇게 뛸 수도 있어.” 윤오의 목소리가 한층 차분해졌다. “그러니까 심전도 한 번 찍어보자고. 별거 아니면 그냥 별거 아닌 거 확인하고 나오면 되잖아.” 선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인이라니. 지금도 네 앞이라고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미련 곰탱이 심장을,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먹자. 배고프잖아.” 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늘상 선우의 친오빠라도 되는 듯이 걱정하고, 챙기고. 이 모든 행동에는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이 뻔한 술래잡기는 미련 곰탱이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 “갑자기 왜 난리인데.” 그런 네가 어련히 원망스러워서, 목소리가 날카롭게 나가고 만다. 윤오의 손이 멈췄다. 툭. 차트가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 “…….” 단정한 눈이 정면으로 선우를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지만, 동시에 온 힘을 다해 도망치고 싶은 눈. “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 오늘도 예쁘구나, 권윤오 너. “너는 못느꼈을 수도 있지만.” 아니, 너무나도 잘 느껴졌는데. “원인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고.” ”원인?“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권윤오의 눈동자는 현미경 렌즈처럼 정밀했고, 진료실 내부에는 조밀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선우가 저도 모르게 손끝을 움켜쥐었다. “원인이 뭔데.” 네가 제발 알아주기를, 아니 제발 몰라주기를. 너한테 다 읽혀버린 걸까. 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널을 뛰는 이 멍청한 심장 소리를. 말이 나오고 나서야 후회했다. 두려웠다. 권윤오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숨이 막히게 두려웠는데. “스트레스.” 담담한 목소리는 교과서를 읽는 모범생처럼 한마디를 더 얹었다. “수면 부족.” 선우의 시선이 한참을 윤오를 향했다. “또 약간의 알코올 의존 증세?” “…….” 픽.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개소리. 내 십이 년치 짝사랑이, 네 눈에는 병증으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 결국 기세에 밀린 선우가 심전도 검사를 끝내고 전극을 하나씩 떼어내고 있었다. 피부에 붙어 있던 패치를 떼어낼 때마다 미세한 따끔거림이 남았다. 짜증나. 이까짓 자극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모니터였다. “…….” 권윤오가 화면에 남은 파형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 가슴 안에서 날뛰는 것을 모조리 읽어내려는 사람처럼. 그리고. “문제없네.” 너무 쉽게 나온 결론이었다. 망할 놈. 선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문제없는 건 나도 알거든.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이었지만 삼켰다. 의학적으로는 정상.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기계로는 잡히지 않는 것이 있었다. 십이 년째 지속중인 아주 고질적인 짝사랑. 제 해묵은 감정은 정상이라는 한마디로 덮어버릴 수가 있는 거였다. 권윤오. 적어도 너한테는 그렇겠지. “사람 불러놓고 별걸 다 시키네.” 선우가 괜히 투덜거렸다. 윤오는 대꾸하지 않았다. 차트를 정리하고, 펜을 내려놓고, 모니터를 끄는 손길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저 태평한 얼굴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얄미운거였다. “이제 가도 되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선우가 몸을 돌렸다. 도망치듯 진료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밥 먹자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이 멈췄다. 윤오가 어느새 바로 뒤까지 따라와 있었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성격이 급해?“ “일이나 하지 왜 따라와.” “점심시간이니까.” 참나. 멀대같이 키만 커서 사람 뒤에 서 있기만 해도 거슬럭거리는 주제에. 선우가 홱 돌아섰다. “나 배 안고파.” “거짓말.” “…….” “배고프면 짜증부터 내는 게 무슨.” 순간 선우의 말문이 막혔다. “…….” 됐다. 말을 말자. *** 식당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선우의 기분은 묘한 상태를 유영했다. 편했다. 그런데 동시에 불편했다. 십이 년 동안 쌓인 짝사랑은 익숙함과 함께 자라서, 어느새 사소한 친절 하나에도 날이 서 있었다. 권윤오가 맞은편에 앉았다. “여기 해장국 두 개 주세요.”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았다. “나 국물 안 땡겨.” “따뜻한 국물 먹어야 속 풀리잖아, 너.” 어이가 없어서 권윤오를 쳐다봤다. 저 인간은 대체 언제부터 남의 식성을 본인 식성처럼 결정하는 버릇이 생겼을까. 잠시 후 뜨거운 국물이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 선우는 숟가락을 들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맞은편의 권윤오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시작했다. 단정한 손. 길게 뻗은 손가락. 고개를 숙일 때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아주 반질반질 주인의 얼굴처럼 윤이 나는 권윤오 머리카락. “…….” “…….” 하, 속 터져. 선우가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 뜨겁고 얼큰해서, 속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는 거였다. “야.” “왜.” 대답은 참 잘하는 권윤오. “너는 늘 이게 문제야.” 권윤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왠 난데없는 개소리냐는 눈빛이었다. “뭐가.” “……쓸데없이.” 선우가 말을 멈췄다. 다정해. 차마 나오지 않는 문장이 목 끝에 걸렸다. “쓸데없이 뭐.” 선우가 괜히 국물만 휘저었다. “……몰라, 인마.” “뭘 모르는데.” “밥이나 먹어.” 선우가 뾰족하게 대꾸했다. “…….” 시비를 털어도 타격도 없는 권윤오. 권윤오가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유죄인간 권윤오. 저 무심한 다정함이 자신을 십이 년 동안 같은 자리에 묶어놓았다. “…….”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우가 국물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윤오의 병원에서 선우의 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 시간이 맞는 날이면 두 사람은 별다른 약속도 없이 점심을 함께했다. 그래서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나란히 걷는 발걸음이 이상할 만큼 의식됐다. 일정한 보폭. 비슷한 속도. 굳이 맞추려고 하지 않아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걸음. 십이 년이라는 시간이 두 사람 사이에 만들어놓은, 익숙한 리듬이었다. “…….” 선우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넘기고 또 넘겼다. 왜인지 모를 어색함에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였다. 어느새 회사 건물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선우가 먼저 브레이크라도 걸린 것 마냥 걸음을 늦췄다. “여기까지면 돼.” 윤오도 걸음을 멈췄다. “어.” 선우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었다. “나 간다.” “그래.” 선우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 쪽으로 걸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세 걸음째. “…….” 내딛던 발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뭐야?”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윤오의 검은색 SUV가 선우의 집 앞에 멈춰 섰다. “김선우.”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오가 내렸다. 단정한 셔츠에 소매를 두어 번 걷어 올린 차림이었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선우가 대답하지 않자 윤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야. 괜찮아.” 웃는 얼굴이 영 어색했다. 밤새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눈가가 무거웠고,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에는 좀처럼 생기가 돌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두고 몇 번이나 화면을 확인했는지 몰랐다. 혹시 새벽에라도 연락이 왔을까 싶어 눈을 뜰 때마다 손부터 뻗었다. 알림은 없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금세 깨어났다. 에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상하이에서 무슨 문제가 벌어진 건지. 물어볼 곳도,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괜찮기는. 눈 밑이 다 꺼졌구만.” 윤오가 선우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손끝이 관자놀이를 가볍게 스쳤다. “가는 길에 좀 자. 도착하면 깨워 줄게.” “아빠 상태는 어때?” “오전 검사 결과는 다 좋대. 어제보다 안정적이고, 담당 교수님도 회복 경과를 괜찮게 보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마.” 그제야 선우의 어깨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 “다행이다…….” “그래. 이제 한시름 놔도 돼.” 차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호에 걸렸다. 윤오가 운전하는 서울의 도로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익숙했다. 출근길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횡단보도 앞에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는 밤새 술을 마신 듯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고, 도로변 카페에서는 직원이 야외 입간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풍경이었다. 그런데 자신만 어딘가 잘못 도착한 사람 같았다. “…….” 상하이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했으면서. 물론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정신없이 바쁠 수 있었다. 지사에 문제가 생겨 직접 날아
고요하던 정원에 진동음이 길게 번졌다. 선우를 바라보던 시선이 잠시 휴대폰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받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에단이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꼭 쥐었다가 놓았다.“Ethan Lowell speaking.”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영어가 쏟아졌다.“Slow down. Start from the beginning.”(천천히 말하세요. 처음부터.)조금 전까지 선우를 바라보던 눈빛에서 부드러운 기색이 빠르게 걷혔다. 그는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다만 손에 들린 휴대폰을 쥔 손가락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에단의 얼굴만으로도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차례 짧게 질문했고, 마지막에는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Don’t send anything else. Preserve every original file. I’ll review it myself.”(추가로 아무것도 보내지 마세요. 원본 파일은 전부 보존하고요. 제가 직접 확인하겠습니다.)통화가 끝났다. 에단이 휴대폰을 천천히 내렸다.“무슨 일이에요?”에단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 사이를 채우고 있던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일정이 바뀌었습니다.”“네?”“오늘 오전 비행기로 서울에 돌아가세요. 항공편은 변경해 뒀습니다.”***공항 전용기 터미널 앞에 차가 멈췄다.“큰일은 아니죠?”그의 얼굴을 살폈다. 상하이 지사에서 걸려 온 전화, 통화 내내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 전화를 끊은 뒤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지던 지시들. 에단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정을 정리했지만, 그럴수록 선우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전화하셨을 때 표정이…….”“선우 씨.”에단이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걱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독이려는 듯, 그녀의 뺨
“여기 있었군요.”에단이었다.선우는 황급히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번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는 동안 화면을 끄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았다.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든 휴대폰에 잠깐 머물렀다.“연락이 왔습니까?”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윤오한테서요.”에단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선우는 그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냥 안부요.”작게 끄덕인 에단은 더 묻지 않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선우는 망설이지 않고 그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에단의 입가에 미세한 웃음이 번졌다.“그럼 나와 조금 더 걸을까요?”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의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깊게 들어왔다.“오늘 밤은 제가 독점해도 되겠습니까?”선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본부장님.”“네.”“질문이 많으세요.”에단이 낮게 웃었다.테라스 끝에는 작은 정원이 이어져 있었다.연회장의 음악은 유리문 너머로 물러나 있었다. 현악기의 선율이 간간이 바람을 타고 흘러나왔고, 정원에는 낮에 내린 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짙은 녹음을 머금은 잎사귀마다 물방울이 맺혀 달빛을 받아냈다. 이름 모를 흰 꽃들이 돌담 아래 소담하게 피어 있었고, 젖은 풀과 꽃잎에서 우러난 싱그러운 향이 밤공기 속에 번졌다.정원 너머로는 코모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산자락을 따라 늘어선 마을의 불빛이 수면 위에 길게 번졌다. 검푸른 물결이 바람에 밀려왔다가 조용히 흩어질 때마다 불빛도 함께 잘게
그때였다. 셔츠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선우가 걸음을 늦추며 화면을 확인했다. [윤오] ㄴ선우야, 아버님 수술 방금 잘 끝났어. 경과도 아주 좋대. 이제 걱정 마. 한순간, 거리의 소음이 멀어졌다. “…….” 선우는 화면을 다시 읽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경과가 좋다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는데도 안도감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가슴 한복판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숨을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시간이 끝났다는 사실이, 그제야 몸에 와닿았다. “……하.” 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 점점 눈앞이 흐려졌다. 참으려고 할수록 눈물이 차올랐다. 이곳에서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먼저 무너졌다. 아버지가 괜찮아졌다는 말.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선우 씨?” 몇 걸음 앞서가던 에단이 돌아봤다. 선우가 황급히 눈가를 훔쳤다. “죄송해요. 잠깐만요.” “무슨 일입니까?” “아니, 그게…….” 말을 잇지 못했다. 에단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진열대의 조도와 설치 일정을 따지던 눈빛에서 날카로운 업무의 기색이 걷혔다. 그가 선우에게 다가와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무슨 일이에요?” 선우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루카 씨,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번역가가 말을 옮기자 루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고객들이 익숙한 싱글몰트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정말 새로운 제품을 원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자신이 돈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확신할 수 없어서일까요?” 루카의 손이 멈췄다. 선우는 서두르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트비트는 익숙한 브랜드의 이름을 바꿔 붙인 제품이 아닙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 원액의 역사에 무라노 장인의 기술을 더했어요. 이 병의 곡선은 단순히 눈에 띄기 위해 만든 형태가 아닙니다. 유리를 다루는 장인이 어느 각도에서 빛을 받아야 가장 깊은 색이 살아나는지 계산한 결과죠.” 선우는 시안을 펼쳐 병의 측면을 가리켰다. “이탈리아 고객에게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를 하나 더 소개하는 거라면, 루카 씨 말씀이 맞습니다. 이미 선택할 수 있는 제품은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이건 다른 이야기를 가진 제품입니다. 원액의 역사와 유리 공예의 미학이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났다는 것. 고객은 위스키를 구매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번역가의 손짓이 커졌다. 선우의 말이 이탈리아어로 옮겨지는 동안 루카의 시선은 다시 병의 형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모든 고객이 새로운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지는 않겠죠.” 선우는 담담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중 시장을 노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취향에 확신이 있고, 남들과 같은 것을 고르는 데 만족하지 않는 고객부터 공략하는 겁니다. 하트비트는 익숙함을 대체하는 제품이 아니라, 익숙한 선택만으로는 부족해진 사람에게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제품이니까요.”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카는 선우를 바라보다가 시안을 다시 집어 들었다. “Una nuova storia, dunque.” (그러니까 새로운 이야기라는 건가.) “Esattamente.” (정확히 그렇습니다.) 선우가 대답했다. 루카는 병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는 디자인의 결점을
무라노의 아침은 수로를 가르는 바포레토의 엔진음으로 시작됐다.물살을 밀어내는 둔중한 소리가 오래된 건물 사이를 돌아 들어왔다. 창틀에 걸린 햇빛은 밤새 식지 못한 방 안의 공기를 무심하게 밀어냈다. 여섯 월의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어젯밤 두 사람 사이에 오갔던 말과 입맞춤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침대 위로 떨어진 빛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선우는 홑이불을 걷어 내고 한동안 천장을 바라보았다.눈을 감으면 어젯밤이 떠올랐다.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에단의 목소리. 입술이 닿기 직전, 마지막까지 대답을 기다리던 눈빛. 그리고 그가 자신을 안아 주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그의 품을 찾아 들어갔던 자신의 몸.무엇보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끌어 안았던 순간이 자꾸만 생각났다.에단.입안에서 소리 없이 이름을 굴려 본 선우는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 올렸다.미쳤나 봐.어제까지는 본부장님이었는데.물론 지금도 회사에서는 본부장님이었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문제는 어젯밤 이후로 그 호칭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이었다.그렇다고 아침부터 달라진 얼굴로 마주할 자신이 있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할수록 사소한 것까지 의식하게 될 게 뻔했다.선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평소보다 꼼꼼하게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거울 속 얼굴은 다행히 멀쩡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건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일어났습니까?”거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선우의 발걸음이 멎었다.에단은 테라스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완벽하게 갖춰 입은 수트에 단정한 셔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넥타이. 한 손에는 에스프레소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