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
“왔네.” “어.” 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앉아.” 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 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 “……야.” 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어제 있잖아.” 용기를 냈는데. “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 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 “……뭐?” “금방 끝나.“ “야, 나 멀쩡ㅎ…….” “확인만 하는 거야.” 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 “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 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 “갑자기 왜 난린데.” 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 “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 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 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 쓰이는 기분. 결국 이 눈싸움에서 먼저 백기를 드는 건 선우였다. “야, 나 멀쩡해.”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적을 찢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당장이라도 이 숨 막히는 진료실을 빠져나가려던 참이었다. 건조한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낚아챘다. “멀쩡하면, 어제 그 반응 안 나와.” 선우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전율을 느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윤오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흰 가운만큼이나 흐트러짐 없는 얼굴로. “심박 120 넘었어. 불규칙했고.” "……." “원인도 명확했고.” 눈동자는 현미경 렌즈처럼 정밀했다. “원인이 뭔데.” 진료실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원인'이라는 단어가 선우의 날 선 신경을 사정없이 긁어댔다. 설마, 너한테 다 읽혀버린 걸까. 어제 네 손이 닿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친 듯이 날뛰던 멍청한 심장 소리를. 곧 윤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스트레스. 과음했고.” 마치 교과서를 읽는 모범생처럼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를 더 얹었다. “수면 부족.” 선우의 시선이 한참을 윤오를 향했다. 그리고 이내 자조 섞인 헛웃음을 터뜨렸다. 개소리. 너를 향한 내 12년 치 짝사랑이, 네 눈에는 고작 스트레스 수치 따위로밖에 안 보이는구나. *** 결국 기세에 등 떠밀린 선우가 심전도 검사를 끝내고 전극을 떼어내고 있었다. “문제 없네.” 윤오는 모니터에 남아 있는 파형을 한 번 더 확인하더니, 별다른 설명 없이 고개를 들었다. 문제없는 건 나도 알거든. 선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대꾸를 삼켰다. 의학적으로 정상 판정을 받았음에도 기분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찝찝해졌다. 기계로도 잡아낼 수 없는 이 지독한 짝사랑의 소음을 '문제없음'이라는 단어로 갈무리당한 기분이라서. “그러니까. 사람 불러놓고 별걸 다 시키네.” 툭 던지듯 쏘아붙였지만, 윤오는 평온했다. 차트를 정리하고 펜을 내려놓는 그 일상적인 동작이 너무나 무심해서 오히려 선우의 속을 긁었다. “이제 가도 되지?” 선우는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밥 먹어.” 그런데 그가 이미 바로 뒤까지 거리를 좁혀 와 있었다. 멀대같은 새끼. 뒤통수를 타고 내려와 뒷덜미를 간지럽히는 숨결이 유독 뜨겁게 느껴지는 탓에, 선우는 숨을 순간적으로 멈춰야 했다.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애써 무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너 일 안 해?” 한가하냐구. 날 선 물음에도 윤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려는 선우를 가두듯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점심시간.” *** 식당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때까지도 선우의 기분은 묘한 상태를 유영했다. 긴 세월이 빚어낸 익숙함이라는 편안함과, 12년째 이어온 짝사랑이 만든 날카로운 긴장감. 그 기묘한 불균형이 선우를 소리 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주문은 윤오가 알아서 했다. 메뉴판도 보지않고 척척 주문을 마친 그가 물을 따라놓고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저, 저 얼굴. 모든 재앙의 근원. 선우는 제 가슴 속의 박동이 다시금 불규칙한 파형을 그려내고 있음을 느꼈다. 기계는 속여도, 제 자신은 속일 수 없었다. “나 국물 안 땡겨.” 괜히 시비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윤오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냅킨 위에 수저를 정갈하게 놓으며,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꾸할 뿐이었다. “해장해야 돼.” 선우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토를 달아봤자 결국 제풀에 지치는 건 저 뿐이라는 걸 선우는 27년이라는 세월을 통해 학습해 왔다. 곧이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이 차려졌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말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정적은 길었으나 그 사이를 메우는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평온했다.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 혹은 지독한 관성이었다. "……." 눈앞에서 단정하게 식사를 이어가는 윤오가 자꾸만 시야에 걸렸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제 속을 빤히 들여다보는 그 얼굴이 오늘따라 유독 가슴을 옥죄었다. 오늘따라 더 배알이 꼴렸다. “야.” “왜.” “너는 이게 늘 문제야.” 그는 입안의 음식물을 천천히 삼키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 티 없이 맑은 눈이 선우를 향해 곧게 뻗어 왔다. 그 눈빛에 악의라곤 당연히 십 원 어치도 없었다. “뭐가.” “쓸데없이…….” 다정해. 목에 걸린 원망이 가시처럼 섞여 들었다. 차라리 잔인하기라도 하지. 다정하지라도 말지. 그랬다면 이 오답을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녀의 시선이 끝내 국물 위로 일렁이는 제 그림자에 위태롭게 머물렀다. “원래도 이 정도는 했어.” “몰라.” 선우의 뾰족한 대꾸에도 윤오는 이번 역시 별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철없는 아이의 투정이라도 되는 양 가볍게 흩트려버릴 뿐이었다. 제가 얼마나 사람을 조바심 나게 만드는지, 그는 정말로 아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윤오의 병원에서 선우의 회사까지는 걸어서 십 분 남짓한 거리였다.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라, 두 사람은 시간이 맞으면 자주 점심을 함께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정한 보폭으로 나란히 걸었다. 특별히 걸음을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세월이 만들어낸 자석 같은 리듬이 발끝에서부터 맞물려 들어갔다. "……."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데, 본인만 부자연스러운 거였다. 선우는 제 곁에서 일정하게 들려오는 윤오의 발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자꾸만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바람이 살랑일 때마다 괜히 제 머리카락만 넘겨대고 있었다. 왜인지 모를 어색함에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한 채였다. 어느새 회사 건물이 지척으로 다가오자, 선우가 먼저 브레이크라도 걸린 것 마냥 걸음을 늦췄다. “여기까지면 돼.” “어.” 윤오가 건조하게 대꾸하고, 선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대신하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세웠다. 하지만 채 두 걸음도 떼지 못하고 땅에 박힌 듯 멈춰 서야했다.그런데 액정에 떠오른 이름을 보는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멈췄다.[윤오] “…….”에단을 향해 짧게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왜.”ㅡ “어디야.”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목소리. 스물일곱 해를 들어온, 지나치게 익숙한 음성이었다.“……밖.”ㅡ “밖 어디.”“왜.”수화기 너머로 짧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ㅡ “차. 점심에 병원에 두고 갔잖아.”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답답함이 배어 있었다.ㅡ “지금 어디야.”선우는 무심코 에단을 힐끗 바라봤다.“……압구정.”ㅡ “압구정? 누아르 오크?”척하면 척이었다.“응.”ㅡ “거기 있어.”툭. 대답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진짜.”선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 작게 혀를 찼다.우리 아빠도 이 정도는 아닌데.“바쁘신가 봅니다.”에단이 잔 속 얼음을 천천히 굴리며 물었다.“……그냥, 차 때문에요.”“그럼 가보셔야겠네요.”그는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야.”공기를 가르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선우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익숙한 차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권윤오였다.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선우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턱을 들었다.“빨리 와.”왜 명령이야.선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왜.”“차 타.”“나 걸어갈 건데.”또 오기였다. 윤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큼. 단 한 걸음.“말 길게 하게 하지말고.”참 나.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묵직한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아니, 이건 짜증보다 훨씬 더 비겁하고 축축한 감정이었다. 권윤오의 저 말투, 저 태도, 저 확신.나를 다 안다는 듯한 그 눈빛이, 결국 나를 한 발짝도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릴 것 같아서.“넌 맨날 이런 식이야.”“……뭐?”“물어보는 척하고, 이미 다 정해놓고.”그게 싫었다.아니.싫어해야만 했다.윤오가 다시
“여보세요?”찰나의 정적이 흘렀다. ㅡ “김선우 씨.”선우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제 예상을 완벽히 빗나간 탓이었다. 분명 오늘 처음 들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낯설지 않은 음절의 무게.ㅡ “에단 로웰입니다.”아, 이 기시감의 원인은 역시나였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ㅡ “뒤 돌아보시겠어요.”선우가 삐걱거리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 곳에, 그가 서 있었다.“…….”낮은 조도가 일렁이는 바 한가운데, 낮의 정갈한 수트 차림과는 전혀 공기를 두른 남자. 그는 마치 이 공간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맞물린 순간, 바 안의 소음들이 먼 곳의 일처럼 아득해졌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른하게 흐르던 음악도 베일 너머로 사라지고 오직 그가 몰고 온 긴장감만이 폐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선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이 머물던 공간의 밀도가 순식간에 진득하게 바뀌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느낄 뿐이었다.찰나는 짧은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길게 늘어졌다.본부장이, 여길 왜?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벙찐 선우의 앞으로 에단이 터벅, 터벅 걸어왔다. 느릿한 발걸음인데도 이상하게 주변의 공기까지 그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곧 발걸음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놀란 건 비단 선우뿐만이 아니었다.수정 역시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인중을 길게 늘어뜨리고 그 광경을 관조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을 그녀였지만, 지금만큼은 머릿속 계산기가 멈춘 듯했다. “놀라셨죠.” “……여기까지 어떻게.”도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우연이 있을 수가 있나? “거래처 리스트 보다가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오신 거예요? 시장조사?” “겸사겸사요.”겸사겸사. 그 말은 애매했다. 철저히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마자 낯선 기류에서 오는 긴장감이 피부를 훑었다. 그리고 넓은 회의실 창가, 쏟아지는 역광을 등지고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수트 핏과 조각처럼 고정된 자세.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모든 산소를 독점하고 있는 듯한 실루엣. “…….”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창을 가로지른 빛이 그의 얼굴 위로 선명한 궤적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건 깊은 눈매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표정이었다. 화려한 외모였다. 하지만 선우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이목구비의 생김이 아닌, 그의 시선이었다. 가볍지도, 그렇다고 위압적이지도 않았으나 단숨에 상대를 묶어 두는 힘이 있었다. “김선우 씨?”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였다. “네, 김선우입니다.” 한 박자 늦게 터져 나온 대답 위로 남자의 구두 소리가 얹혔다. 그가 거리를 좁혀올수록, 선우는 자신이 사냥감이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에단 로웰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부장님.”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은 짧은 찰나, 선우는 자신의 맥박이 상대의 손끝에 실시간으로 읽히고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름은 이미 들었습니다.” 그가 손을 놓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아시아 태평양 브랜드 총괄로 파견 왔습니다. 이번 분기 신규 위스키 론칭부터 김선우 과장님과 함께하게 될 겁니다.” 과하게 힘을 주지도, 가볍지도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그의 저음에는 거부할 수 없는 확신과 지배력이 실려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여유롭게 웃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선우는 에단의 시선이 제 얼굴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신경 쓰였다. 이 남자의 눈동자는 꼭 잘 숙성된 위스키의 원액처럼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위험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업무 복귀해 보겠습니다.” 선우가 서둘러 몸을 돌린 찰나였다. “김선
“뭐야?”목소리에 당혹감이 잔뜩 묻어났다. 회사 정문 앞, 낯익은 실루엣 하나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긋지긋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지는 얼굴. 민재였다.“……선우야.”그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평화롭던 공기가 단숨에 비틀렸다. 윤오와 걷던 길 위에 남아있던 가슴 떨리는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회사까진 왜 왔어?”“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보고…. 계속 연락했는데…….”“차단했거든.”정곡을 찔렸다. 그가 멍청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비굴함은 이내 집요함으로 변질되어 또 끈질기게 거리를 좁혀왔다.“그래도 우리 얘기 좀 하자.”“할 얘기 없어.”“나 진짜 이번에는…….”“됐어.”더 들어 볼 이유도 없었기에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관계에 미련 따위 남아있을 리 없었다. 남이야 그러던 말던 민재는 끈질겼다. 그의 손이 선우의 팔을 향해 뻗어지던 찰나, 묵직한 그림자가 들어섰다.“그만하지 좀.”언제 다가왔는지 윤오가 선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민재의 미간이 단번에 일그러졌다.“권윤오?”윤오는 대답 대신 선우의 상태를 짧게 살폈다. 그러고는 다시 민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는 건조한 경멸이 서려 있었다.“회사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이야.”민재의 시선이 윤오와 선우. 두 사람을 번갈아 향하더니 이윽고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니네 진짜….”그의 시선이 선우에게 날카롭게 꽂혔다.“나랑 헤어지고 바로 붙어먹는 게 또 권윤오야?”“뭐? 김민재, 너 말 똑바로 해.”선우의 눈동자가 분노로 번뜩였다. 민재가 답답한 듯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선우야, 내가 말했잖아. 어제 그거 다 오해라고—.”“오해?”기어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할 지경이었다.내가 도대체 무슨 시간 낭비를 한 거지?“바람 피운 게 오해야?”결국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다보니 회사 입구를 채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
권윤오가 있었다. 차트를 넘기고 있는 손, 고개를 드는 타이밍,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이 무결했다.“왔네.”“어.”짧은 인사와 대답이 오갔다. 윤오가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앉아.”그녀가 의자에 앉자마자 팽팽하게 당겨진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 질렀다. 윤오가 차트에서 눈을 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맞물린 찰나, 선우의 머릿속으로 어제의 장면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제발 좀 잊어버리고 싶었다.결국 화상을 입은 듯 먼저 시선을 꺾었다. 12년이다. 이 지긋지긋한 짝사랑의 세월 동안 숨소리 하나, 눈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얼마나 자신을 채찍질해왔던가. 권윤오의 두 눈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소음처럼 의식되는 거였다.“……야.”결국 선우가 먼저 침묵을 깼다.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어제 있잖아.”용기를 냈는데.“심전도 검사 한번 하자.”선우의 해명이 허공에서 맥없이 잘려 나갔다.“……뭐?”“금방 끝나.““야, 나 멀쩡ㅎ…….”“확인만 하는 거야.”선우가 입을 합죽이했다. 확인이라니. 지금 네 눈앞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이 심장 소리를, 기계로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선우는 제 마음을 들킬까 겁이 나면서도,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채 무심하게 차트만 넘기는 저 잘생긴 옆얼굴이 야속해졌다.“금방하고 점심이나 같이 하자. 배고프잖아.”어르고 달래는 투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12년째 반복되는 이 뻔한 술래잡기는 그녀의 속만 시커멓게 태웠다.“갑자기 왜 난린데.”선우의 날 선 물음에 윤오가 들고 있던 차트를 ‘툭’ 소리 나게 덮었다. 두 눈.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제일 두려워하는 눈이 자신을 향했다.“어제 심박 이상 있었어.”윤오가 선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치 눈동자 너머로 숨겨진 맥박 하나까지 다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한 시선으로.“…….”간질 간질, 가슴 쪽이 신경
낯익은 천장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초점이 겨우 맞물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억은 파편화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낮게 가라앉은 눈빛,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느껴지던 숨결, 그리고 제 뺨을 감싸 쥐던 단단하고 뜨거운 손가락.나는 홀린 듯 권윤오를 올려다보았고, 그의 시선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내 입술로. 1초가 1분처럼 느껴지던 정적 속에서 윤오가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을 때—.‘……선우야.’고막을 간질이던 낮은 음성.쿵.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너 부정맥인 거 같아.’뭐라고?“뭐야?”선우가 눈을 깜빡였다.“아…….”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머릿속의 무게추가 한 박자 늦게 따라붙으며 관자놀이를 마구 때려댔다.숙취의 통증이 뇌세포 하나하나를 망치로 때리는 기분이었다. 선우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이불을 얼굴 끝까지 끌어올렸다. 꿈인가? 꿈이겠지?“…….”그냥 죽자, 김선우.콱 죽어버리자.선우가 제 얼굴을 이불로 둘둘 감아 봉인해버렸다. 숨이 막혀오는 답답함이 차라리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흑역사 필름보다 나았다.“죽어! 그냥 죽어!”퍽ㅡ, 퍽ㅡ.선우가 침대 위에서 발버둥을 쳤다. 이불이 여기저기 형편없이 주름졌다.어제는 꽤 마셨다. 아니, ‘꽤’라는 부사는 이 대참사에 너무 예의 바른 표현이었다. 명백히, 그리고 아주 화려하게 선을 넘었다.원래 이 정도로 자신을 방치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글로벌 위스키 브랜드 한국지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해온 그녀에게 술은 업무의 연장선이었고, 스스로의 주량 컨트롤은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어제는 감정이 이성을 앞질렀고, 위스키는 그저 그 뒤를 따르는 훌륭한 공범이었을 뿐이다.근데 왜 하필! 권윤오냐고!선우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괴로워. 너무 너무 괴로웠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어제의 '키스 미수 사건'의 충격 때문에 뇌가 정지한 건지 분간이 안 갔다.이게 다 내 술기운이 만들어낸 화려한 망상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