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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증거 없는 폭력

Autor: 데이지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6-23 18:08:23

장미 미용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언제나 조금 늦게 공간에 닿았다.

종이 먼저 울리고, 그 다음에야 사람이 들어온다.

이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손에 쥔 컵을 내려다봤다.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의뢰는 늘 그렇게 시작됐으니까.

여자는 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은 채 안과 밖의 경계를 가늠하는 사람처럼.

외투는 단정했고, 구김 하나 없는 셔츠와 낮은 굽의 구두는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게 정돈돼 있었다.

머리카락은 묶여 있었고, 화장은 거의 없었다.

눈에 띄지 않으려는 사람의 차림이었다.

“영업 중…이죠?”

여자의 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

확신이 아니라 허락을 구하는 톤.

“네.”

이수는 짧게 대답했다.

그 한 음절에 여자는 안도하듯 숨을 내쉬었다.

안도는 늘 무언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 나온다.

여자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가방을 가슴 앞에 안은 채 잠시 바닥만 내려다봤다.

말을 고르는 시간이었고, 이수는 그 시간을 건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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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73. 파장

    준혁은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손의 감각이 먼저 떠올랐고,그 다음에는 그 손을 거두지 않았던 짧은 지연이 반복됐다.그는 그 지연을 의도라고 부르지 않았다.실수라고도 부르지 않았다.그저 ‘잠깐’이었다고 생각했다.잠깐이면 지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아침이 되자 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알람이 울리기 전이었고, 집 안은 아직 조용했다.아내는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준혁은 그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익숙한 얼굴이었다.그래서 어디서부터 낯설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그는 조심스럽게 침대를 빠져나와 부엌으로 향했다.커피를 내리면서도 손이 자꾸 멈췄다.물의 양, 필터의 위치,평소라면 자동으로 하던 동작들이 그날은 자꾸 어긋났다.통제는 이런 순간에 필요해진다.준혁은 컵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다.알림은 없었다.그 사실이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다.회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어제의 동선을 머릿속으로 되짚었다.카페, 골목, 우산, 어깨.그중 가장 오래 머문 건 어깨였다.닿았다는 사실보다, 닿아 있었다는 시간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불안은 사람을 두 가지 방향으로 몰아간다.숨기거나, 통제하거나. 준혁은 후자를 택했다.그는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아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좀 늦을 것 같아.아무 이유도 덧붙이지 않았다.이유를 붙이지 않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그는 그 문장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내쉬었다.먼저 보내는 메시지는 주도권을 되찾았다는 착각을 준다.장미 미용실에서, 이수는 아침 내내 손이 느렸다.바쁘지 않았고, 일정도 비어 있었지만, 그녀는 서두르지 않았다.어제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지워질 필요도 없었다.그건 이미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하빈은 미용실 문을 잠그고 안으로 들어왔다.“아침부터 메시지 왔어.”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뭐래.”“오늘 늦는다고.”이수는 그 말을 예상했다.예상된 행동은 설계

  • 불륜해드립니다.   72. 감각의 잔존

    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굵어졌다.카페의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대화 사이사이에 끼어들었고,그 소리는 시간을 늘리는 대신 결정을 재촉하는 것처럼 들렸다.준혁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이런 날은 집에 바로 가기 애매하죠.”그 말은 질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결론을 포함하고 있었다.이수는 잔을 비우지 않았다.비우지 않는다는 선택은 밤을 길게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비 그치면 움직이죠.”그녀의 대답은 조건이었고, 조건은 선택을 미룬다.준혁은 그 미루기를 허락으로 받아들였다.비가 조금 잦아들 즈음,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이수는 계산대 쪽으로 먼저 걸었고, 준혁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문을 나서는 순간, 차가운 공기가 둘 사이로 밀려들었다.준혁은 우산을 펼쳤다.그리고,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이수 쪽으로 확실하게 기울였다.그 동작은 배려처럼 보였고, 그래서 변명의 여지가 있었다.이수는 우산 아래로 조금 더 들어왔다.이번에는 조금이 아니었다.어깨가 닿았다.닿았다는 사실을 둘 다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준혁은 몸을 떼지 않았다.떼지 않는다는 선택은 행동이었다.골목을 걷는 동안, 그는 자기 손이 어디에 있는지 의식하고 있었다.의식하고 있다는 건 이미 넘고 있다는 뜻이었다.그의 손이 이수의 팔꿈치 근처로 왔다가 멈췄다.완전히 닿지는 않았지만, 비를 핑계로 거리 조절은 가능했다.이수는 그 움직임을 피하지 않았다.피하지 않는다는 건 허락처럼 보인다.그 오해를 그녀는 정정하지 않았다.골목 끝에서, 이수는 멈춰 섰다.“여기서 갈게요.”그 말은 분명한 경계였다.준혁은 그제야 자기 손을 거두었다.거두는 동작이 늦었다.그 지연이 사진에는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하빈은 맞은편 차 안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아직은 이수의 선택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준혁은 한 걸음 다가왔다.이번에는 망설임이 적었다.“잠깐만.”그가 말했다.그 말은 잡아두고 싶다는 뜻이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리고, 시

  • 불륜해드립니다.   71. 우연

    준혁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면 전날의 선택이 오늘의 일정으로 굳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는 그 굳어짐을 조금 더 미루고 싶었다.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셔츠를 고르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어제, 닿지 않았던 손의 거리. 멈춘 순간의 공기.그 기억은 후회가 아니라 재현 욕구에 가까웠다.회사에 도착한 뒤, 준혁은 의외로 일을 잘했다.집중력이 높아졌고, 회의에서는 말을 줄였다.말을 줄이는 건 마음을 숨길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점심 무렵, 휴대폰이 진동했다.예약 알림.장미 미용실. 며칠 전 그가 직접 잡아둔 시간이었다.그는 그 알림을 지우지 않았다.지우지 않는다는 선택이 이미 오늘의 방향을 정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이수는 그날, 일부러 미용실 문을 조금 일찍 열었다.바쁘게 보이지 않게, 한산해 보이게.우연히 들러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그 분위기는 준비된 우연의 기본값이었다.하빈은 카운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그녀를 봤다.“오늘 들어올 거야.”“알아.”“네가 먼저 연락한 건 아니지.”“아니.”이수는 일정표를 넘기며 말했다.“그가 만든 약속이야.”하빈은 그 말에 표정을 굳혔다.“자기가 만든 약속이면 책임도 자기 몫이지.”“그래서 더 빨리 가.”이수는 머리끈을 정리하며 덧붙였다.“우연처럼 보여야 해.”준혁은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일찍 도착했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자발적이라는 착각은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다.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이수는 창가 쪽 정리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개를 들지 않는 건 환영보다 더 강한 신호였다.예상했다는 뜻.“오셨어요.”그 말은 확인에 가까웠다.“네.”준혁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오늘은 사람이 없었다.그 공백이 그를 편하게 만들었다.머리를 감고, 정리하는 동안 대화는 많지 않았다.이수는 질문을 하지 않았고, 준혁도 설명하지

  • 불륜해드립니다.   70. 의도된 멈춤

    카페를 나설 때, 준혁은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다.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라는 감각이 그를 느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이미 늦었고, 이미 돌아가지 않았고, 그래서 더 이상 시간을 세는 건 의미가 없었다.이수는 그보다 한 발 앞서 문을 열었다.나서는 동작이 자연스러웠고, 뒤돌아보지 않았다.뒤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앞으로 갈 준비가 된 사람처럼 보인다.준혁은 그 오해를 붙잡았다.밤공기는 차분했다.골목은 밝지 않았고, 사람도 많지 않았다.이수는 일부러 큰길로 가지 않았다.지름길도 피했다.이건 도망이 아니고, 유도였다.준혁은 그 선택을 문제 삼지 않았다.문제 삼는 순간, 지금의 이동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여기,”이수가 멈춰 섰다.간판은 작았고, 불빛은 낮았다.밖에서 보면 무슨 곳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운 장소.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자리였다.“괜찮아요?”준혁이 물었다.“잠깐이면요.”이수의 대답은 다시 한 번 조건이었다.그는 그 조건에 고개를 끄덕였다.조건을 받아들이는 건 이미 책임을 나누는 일이었다.안은 조용했다.테이블 간 간격이 넓었고, 음악은 낮게 깔려 있었다.이수는 구석 자리를 골랐다.벽 쪽, 뒤가 막힌 자리.사람은 뒤가 막힌 자리에 앉을 때 앞으로 더 쉽게 기운다.준혁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꼈다.그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이수를 보았다.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웠다.“이런 데는,”그가 말했다.“설명 안 해도 되니까 좋네요.”이수는 잔을 받으며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설명 안 해도 되는 곳은,”그녀가 말했다.“대신 오해는 빨라요.”그 말은 경고 같았지만, 그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오해라는 단어는 아직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술이 나오고, 잔이 채워졌다.이수는 먼저 들지 않았다. 기다렸다.기다림은 상대에게 주도권을 넘긴다.준혁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건,”그가 웃으며 말했다.“회사 사람들한테 말할 수 있

  • 불륜해드립니다.   69. 명분

    준혁은 예약 시간을 두 번이나 확인했다.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화면을 닫지 못했다.확인하는 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미 정해진 선택을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서였다.미용실에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머리를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그 명분은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설명이 되어주고,설명이 생기면 사람은 죄책감을 미룰 수 있다.그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장미 미용실은 그날따라 조용했다.예약이 비어 있는 시간대, 손님이 몰리지 않는 틈.이수는 그 시간을 일부러 남겨두었다.강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놀라지 않는다는 태도는 상대를 ‘예정된 사람’으로 만든다.“오셨어요.”그 말은 환영도, 확인도 아니었다.기록에 가깝게 들렸다.“네.”준혁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한 번 훑었다.익숙한 공간인데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그 이유를 그는 곧 알게 됐다.오늘의 이수는 평소보다 말을 적게 했다.질문하지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다.필요한 말만, 필요한 순간에만 꺼냈다.그 침묵이 준혁을 편안하게 만들었다.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가장 쉽게 선을 넘는다.머리를 다듬는 동안, 이수는 일부러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선이 오래 머물면 그건 선택이 된다.대신 손끝의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했다.기술적인 손길, 감정이 배제된 움직임.그 균형이 준혁을 안심시켰다.“요즘,”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응했다.“네.”“집에 잘 안 들어가게 되네요.”그 문장은 자기 보고였다.상담을 원해서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수는 그 문장을 받아 적듯이 들었다.“그래도,”그가 덧붙였다.“이상하진 않아요.”“뭐가요.”“이렇게 되는 게.”그는 자기 말을 스스로 정리했다.“원래 사람은 편한 쪽으로 가잖아요.”그 말은 합리화였다.이수는 그 합리화에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

  • 불륜해드립니다.   68. 선택의 유예

    준혁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돌아가려다 멈췄다.차는 이미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와 있었고, 경비실 앞에서 속도를 줄인 상태였다.그러나 차를 세우지 않았다.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그는 그대로 단지를 지나쳤다.그 순간, 준혁은 자신이 뭘 선택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집을 지나친 뒤에도 곧장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그게 중요했다.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건 계획이 되고, 계획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만든다.그래서 그는 한동안 차를 몰았다.라디오를 켰다가 다시 끄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바깥 공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차 안에 혼자 있다는 감각이 답답해졌기 때문이다.휴대폰이 대시보드 위에서 가볍게 울렸다.아내였다.준혁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지금의 선택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동이 멈추고 잠시 후, 다시 울렸다.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는 그 사실을 ‘무시’라고 부르지 않았다.‘나중’이라고 생각했다.나중이라는 말은 모든 선택을 미뤄두는 데 아주 유용한 단어였다.장미 미용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그러나 준혁은 그 앞을 지나치며 속도를 줄였다.문은 닫혀 있었고, 안은 어두웠다.그럼에도 그는 차를 세웠다.차에서 내려 한동안 서 있었다.유리문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그 공간이 아직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았다.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연락하지 않았다.연락하면 그건 행동이 된다.아직은 행동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이수는 미용실 안에 있었다.불은 꺼져 있었지만, 완전히 닫힌 상태는 아니었다.하빈이 창가 쪽에서 밖을 보고 있었다.“있다.”그가 낮게 말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차.”“알아.”“내렸어.”이수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이건 예상된 장면이었다.준혁이 집으로 가지 않고,그렇다고 들어오지도 못한 채 머무는 상태.선택을 미루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아직은 문 안 열어.

  • 불륜해드립니다.   32. 변수

    이수는 컵을 씻고 있었다.물은 따뜻했고, 거품은 금방 꺼졌다.손에 남은 감각은 물의 온도보다 오래 남았다.어제의 조건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미용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았다.밖에서 지나가는 발소리, 멀리서 들리는 차 소리,그 모든 것들이 유난히 또렷했다.기다림은 소리를 키운다.이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시간을 세는 순간,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지금은 마음이 아니라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전화는 예상보다 빨리 왔다.벨소리가 한 번 울리고, 두 번째 울리기 전에 이수는 받았다.“네

  • 불륜해드립니다.   11. 좁혀진 거리

    문을 닫는 소리가 카페 안에 잠시 남았다.손님이 나간 뒤의 소리였다.그 소리는 언제나 비슷했고, 그래서 특별하지 않았다.특별하지 않은 소리들이 쌓일수록, 하루는 빨리 끝나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이미 깨끗한 테이블이었지만, 한 번 더 닦았다.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생각이 덜 생겼다.생각이 줄어들면, 결정도 늦춰진다.진상은 계산대 아래를 정리하다가 시계를 봤다.시간을 확인하는 동작이 자연스러웠다.이미 몇 번이나 본 시계였다.“오늘은.”그가 말을 꺼냈다.어제와 비슷한 시작이었다.그러나 어

  • 불륜해드립니다.   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 불륜해드립니다.   9. 거리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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