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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문 앞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9 15:34:55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

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

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

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

“여기… 시끄럽진 않아요.”

그가 말했다.

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

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

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괜찮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

안쪽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흘러나왔다가 잠시 끊겼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공간이 존재했다.

진상은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이번엔 놓지 않았다.

잡고 있는 시간이 조금 길어졌다.

“진짜… 가볍게예요.”

그가 덧붙였다.

‘진짜’라는 말은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안심시키는 말이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그 끄덕임은 아직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는 동작이었다.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따뜻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술 냄새와, 기름기 섞인 안주 냄새. 일상의 냄새였다.

이수는 한 발을 들였다가 멈췄다.

멈춘 이유는 없었다.

멈출 수 있는 순간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은 먼저 들어가지 않았다.

이수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책임을 넘기는 방식이다.

“안 불편하면…”

그가 말을 꺼냈다가 끝을 흐렸다.

이수는 그를 보았다.

지금 이 남자는 선택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선택한 상태만 원하고 있었다.

“조금만.”

이수가 말했다.

전에 카페에서 그가 썼던 단어였다.

말을 되돌려 쓰는 건 관계를 빠르게 만든다.

진상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갔다.

안도의 흔적이었다.

둘은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은 생각보다 좁았다.

테이블 몇 개,

바 자리 몇 개.

벽에는 오래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의자는 조금 낮았다.

이수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벽 쪽. 도망칠 수 있는 방향을 자연스럽게 확보하는 자리.

진상은 맞은편이 아니라 옆에 앉았다.

마주 보는 건 부담이고, 옆은 핑계가 된다.

“여기 괜찮죠.”

그가 말했다.

이미 앉아놓고 괜찮냐고 묻는 건 대답을 바꾸지 못하게 만드는 질문이다.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의자를 조금 안쪽으로 당겼다.

몸의 각도가 바뀌자 시야도 바뀌었다.

메뉴판이 놓였다.

진상은 펼치지 않았다.

“맥주?”

그가 물었다.

선택지를 하나로 줄였다.

“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오늘의 방향은 정해졌다.

맥주 두 잔이 놓였다.

거품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잔은 차가웠고, 테이블은 약간 끈적였다.

“이런 데 오면…”

진상이 말했다.

“괜히 말이 줄어요.”

말이 줄어든다는 건 생각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이수는 잔을 들었다.

바로 마시지는 않았다.

유리 너머로 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져 보였다.

“원래 말 많은 편이세요?”

이수가 물었다.

사소한 질문. 그러나 방향은 분명했다.

“아니요.”

그는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집에서는… 더 말이 없어요.”

이 말은 설명처럼 들렸지만, 이미 고백에 가까웠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잔을 입에 가져갔다.

한 모금. 쓴맛이 먼저 왔다.

그 다음에 탄산이 올라왔다.

술은 늘 감각의 순서를 바꾼다.

“괜히…”

진상이 다시 말을 꺼냈다.

“괜히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 같아서.”

그 말은 사과 같았지만, 이미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말이었다.

“괜찮아요.”

이수는 말했다.

지금 이 말은 처음과 다른 의미였다.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이수보다 먼저 마셨다.

속도가 빨랐다.

“오늘은…”

그가 말했다가 멈췄다.

이수는 기다렸다.

기다리는 쪽이 관계를 쥔다.

“오늘은 그냥.”

그는 말을 바꿨다.

‘그냥’이라는 단어는 책임을 흐린다.

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이 공간에서 가장 또렷했다.

“그냥이면.”

이수가 말했다.

“더 위험해요.”

그 말은 경고처럼 들렸지만, 실은 확인이었다.

진상은 잠시 말을 잃었다.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낮게 말했다.

“조금만.”

또 그 단어였다.

조금. 사람을 가장 멀리 데려가는 말.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술집 안의 소음이 잠시 커졌다가 줄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은 이 자리와 상관없었다.

이수는 생각했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그러나 동시에 이미 충분히 일어났다는 것도.

문은 이미 닫혔고, 자리는 정해졌고, 술은 반쯤 비어 있었다.

이수는 잔을 다시 들었다.

이번엔 조금 더 마셨다.

그리고…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고,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는 이미 문 밖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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