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
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
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
“원래…”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번엔 서두가 길었다.
“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
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말을 멈추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집에 있으면,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서요.”
시간 이야기는 사람이 혼자라는 뜻이다.
혼자는 대개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을 때 꺼내는 말이다.
이수는 잔을 들었다.
이번엔 한 모금이 아니었다.
두 모금 정도. 목 안쪽이 조금 따뜻해졌다.
“느리면 좋은 거 아닌가요.”
그녀가 말했다.
동의처럼 들리지만, 선택을 상대에게 돌리는 문장.
진상은 웃었다. 웃음이 길지 않았다.
길게 웃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다.
“사람이 없으면요.”
그가 말했다.
“느린 건… 생각이 많아져서.”
그 말은 자기 합리의 연장이었다.
생각이 많아서 힘들다는 말은 생각할 이유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아주 짧게. 짧은 시선은 상대를 방심하게 만든다.
“그래서 술이요?”
이수의 질문은 가벼웠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했다.
진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질문을 정면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는 다시 그 단어를 썼다.
“잠깐.”
잠깐이라는 말은 시간을 잘게 쪼갠다.
잘게 쪼개진 시간은 책임이 줄어든다.
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천천히. 내려놓는 동안 그의 시선이 잔을 따라 움직였다.
“잠깐이면.”
이수가 말했다.
“괜찮죠.”
확인처럼 들렸지만, 이미 결론이 들어 있는 문장.
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자기 마음을 따라가는 사람의 움직임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술집 안에서는 시간이 숫자가 아니라 공기로 느껴진다.
다른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한 번 터졌다가 곧 가라앉았다.
그 웃음은 이수와 상관없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또렷했다.
진상은 두 번째 잔을 주문했다.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선택은 이미 상대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수는 막지 않았다.
막지 않는 태도는 대개 오해를 부른다.
그리고 오해는 관계를 빠르게 만든다.
“미용… 배운다고 했죠?”
그가 불쑥 말했다.
아까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손이 그래서 그런가.”
그는 이수의 손을 봤다.
노골적이지 않은 시선. 그러나 분명한 방향.
“어떤 게요.”
“익숙해 보여서요.”
익숙함.
그 단어는 사람을 안전하게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안전함은 경계를 낮춘다.
“연습 많이 해서요.”
이수는 말을 아꼈다.
연습이라는 단어는 노력을 강조하면서도 목적을 숨길 수 있다.
“그래도…”
진상은 말을 이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은 쉽지 않잖아요.”
그 말은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자주 쓰이는 문장이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맞아요.”
짧은 동의. 그러나 충분했다.
그는 그 동의에 힘을 얻었다.
“그래서 가끔은…”
그가 잠시 멈췄다.
“누가 그냥 옆에만 있어 줬으면 싶을 때가 있어요.”
그 말은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이수는 잔을 들었다.
이번엔 마시지 않았다.
잔을 들고 있는 시간만 늘렸다.
“옆에 있으면.”
이수가 말했다.
“생각이 줄어드나요.”
그녀의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확인을 요구했다.
진상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대신 잔을 들이켰다. 이번엔 길게.
“적어도…”
그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혼자는 아니니까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이미 관계를 정의하고 있었다.
이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미세하게. 그 움직임은 상대를 더 말하게 만든다.
“지금은요?”
이수의 질문은 조용했다.
진상은 숨을 들이마셨다.
짧지 않은 숨.
“지금은…”
그는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괜히 괜찮은 척 안 해도 돼서.”
그 말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공간 때문도 아니었다.
이수는 그 말을 기억해 두었다.
이 남자는 지금 자기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잔은 어느새 반 이상 비어 있었다.
이수는 더 마시지 않았다.
마시지 않는 선택은 정신을 남겨둔다.
진상은 이수를 힐끔 봤다.
확인하는 시선.
“괜찮아요?”
그가 물었다.
처음으로 상대의 상태를 묻는 질문.
“네.”
이수는 대답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답은 그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조금만 더 있다 갈까요.”
시간을 늘리는 제안.
선은 넘지 않겠다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은 선을 밀어내는 말이다.
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물기가 동그랗게 남았다.
“조금이면.”
그녀가 말했다.
“얼마나죠.”
숫자를 요구하는 질문은 상대를 현실로 끌어온다.
진상은 잠시 생각했다.
진짜로 시간을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한 잔만 더”
그는 말했다. 자기 통제에 대한 믿음.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 사이 술집 문이 열리고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외부의 공기가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문은 다시 닫혔다.
이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나갈 수 있는 문은 여전히 거기 있다는 것.
그러나 문이 있다는 사실과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다르다는 것도.
진상은 세 번째 잔을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물을 하나 더 시켰다.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다는 표시.
그 배려는 이수를 더 오래 앉아 있게 했다.
잔이 다시 채워졌다.
이수는 이번엔 아주 천천히 마셨다.
시간은 여전히 흘렀다.
흐르면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고, 그래서 더 많은 걸 만들었다.
이수는 알았다.
오늘은 선을 넘는 날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동시에 오늘이 지나면 선은 더 낮아질 거라는 것도.
잔의 높이는 다시 조금 내려갔다.
병원 복도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정리된 뒤 남는 종류의 정적에 가까웠다. 흰색 벽과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조명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바닥을 따라 퍼지는 빛이 거의 흔들리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었다.이수는 그 복도를 여러 번 오갔다.걸음을 일부러 빠르게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느리게 끌지도 않았다. 일정한 속도로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그 반복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멈추지 않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문 앞에 다시 멈췄다.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병실 안이 보였다.하빈.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기계가 일정한 리듬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그 리듬은 너무 규칙적이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는 쪽에 가까웠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를 더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이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문을 열지 않았다.손잡이에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그저 보고 있었다.그리고 아주 천천히, 문을 밀었다.안으로 들어갔다.공기가 달라졌다.조금 더 차갑고, 더 고정된 상태.이수는 침대 옆까지 걸어갔다.의자를 끌어당겼다.앉았다.손을 올렸다.하빈의 손 위에 차갑지 않았다.하지만, 반응도 없었다.이수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얼굴로 올라갔다.눈은 감겨 있었고,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은 상태였다.평소보다 더 조용한 얼굴.이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을 꺼내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그리고, 입을 열었다“하빈.”이름이 처음으로 공간에 떨어졌다.소리는 작았지만, 분명하게 울렸다.이수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 한 단어만으로도 충분히 무거웠기 때문이다.잠시 후 다시 입을 열었다.“나…”말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말했다.“…말 못 했는데.”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처음으로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아직…”말이 끊
문 바깥의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면서, 닫혀 있던 공간은 더 이상 완전히 고립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는 발소리, 짧게 교차하는 지시, 그리고 문고리를 잡는 소리까지 이어지며,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태로 흔들리고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시선은 여전히 하빈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손은 놓지 않은 채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아주 미세하게 호흡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문이 열렸다.강하게 열리는 소리가 아니라, 통제된 힘으로 밀려 들어오는 형태였다.경찰.두 명이 먼저 들어왔고, 그 뒤로 한 발 늦게 기자들이 따라붙었다.카메라가 동시에 들렸다.플래시가 터지지는 않았지만, 렌즈가 움직이는 방향은 분명했다.민준.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았다.이미 움직일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나간 상태였고, 그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경찰이 빠르게 다가왔다.“칼 내려놓으세요.”짧은 지시.민준은 한동안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 시선이 아주 천천히 이수 쪽으로 움직였다.그리고, 처음으로. 조금 다르게 보였다.“……네가 불렀네.”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신이 담겨 있었다.이수는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대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응.”짧은 대답이었다.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하빈에게 있었다.“여기서 끝내야 하니까.”그 말은 상황 설명이 아니라, 선택의 결과였다.경찰이 다시 한 번 말했다.“칼 내려놓으세요.”이번에는 더 가까운 거리.민준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리고, 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짧은 금속음.그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다.경찰이 바로 움직였다.민준의 팔을 잡았다.저항은 없었다.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시선만 움직였다.이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처음부터”그가 말했다.말이 끊기지 않았다.“이거까지 계산했네.”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었다.확인에 가까웠다.이수는 그제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공간은 분명히 갈라져 있었다.짧게 스친 금속의 감각과, 그 뒤에 따라붙는 아주 낮은 파열음 같은 것이 한 번에 지나갔고, 그 순간을 기준으로 공기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층으로 내려앉았다. 이수의 시야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가 다시 고정됐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장면이 아니라 위치였다.하빈이 앞에 있었다.너무 가까운 거리.방금 전까지 나란히 서 있던 위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끼어든 위치.이수의 눈이 천천히 내려갔다.하빈의 어깨.팔.그리고, 손.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그 자연스러움이 더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입이 열리지 않았다.소리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그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늦게 도착하는 감각이 있었다.붉은 색.천천히 번지는 속도. 처음에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하지만, 시선이 한 번 인지한 순간부터는 더 이상 놓치지 않았다.이수의 손이 움직였다.의식적으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닿아야 한다는 감각이 먼저였고, 그 뒤에 손이 따라갔다.하빈의 옷을 잡았다.젖어 있었다.따뜻했다.이수의 호흡이 끊겼다가 이어졌다.“하…”짧게 새어나온 소리.그것도 완전히 이어지지 않았다.하빈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시선이 이수에게 닿았다.그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고통이 얼굴로 먼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이수는 그 눈을 보고 있었다.움직이지 못했다.“괜찮아.”하빈이 말했다.그 말은 자연스럽게 나왔다.억지로 꺼낸 소리가 아니었다.이수의 눈이 더 흔들렸다.“아니야.”그녀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아니야… 그거”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손이 더 강하게 붙잡았다.하빈의 몸이 아주 미세하게 기울었다.균형이 무너지는 방향.이수는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았다.무너지지 않게.떨어지지 않게.그 순간 뒤쪽에서 움직임이 있었다.민준.그의 손에 들려 있던 칼이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었다.하지만
파일이 완전히 펼쳐지는 데 걸린 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장면은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종이 위에 인쇄된 것은 사진이 아니라 기록에 가까웠고, 단순히 눈으로 보는 장면이 아니라 상황 전체를 다시 구성하게 만드는 정보들이었다.이수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하나씩 읽었다.문장.시간.기록.그날 병실의 출입 시간, 의료진의 메모, 보호자 동의 절차,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공백.의도적으로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 빈 구간. 이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기억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아니 맞지 않는다기보다는, 비어 있는 쪽이었다.그녀는 고개를 아주 천천히 들었다.민준을 봤다.“이건…”말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민준은 기다리지 않았다.“빠진 부분.”그가 말했다.“의도적으로.”그의 시선은 이수를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다.“네가 기억 못 하는 시간.”공기가 한 번 더 내려앉았다.이수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하빈이 옆에서 움직였다.아주 작게.하지만 분명하게.이수의 시선이 다시 기록으로 내려갔다.그 공백.그 짧은 시간.그 안에 무언가 있었다.이수의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민준이 말을 이어갔다.“사진은 장면이고, 영상은 일부야.”그의 목소리는 일정했다.“근데 이건”그가 손가락으로 파일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흐름이야.”그 단어가 공간에 떨어졌다.흐름.이수의 시선이 다시 멈췄다.머릿속에서 장면들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문 앞.병실.손.그리고, 그 사이.비어 있던 시간.이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그리고 말했다.“그래서.”짧은 질문이었다.민준은 바로 답했다.“그래서 네가 뭘 했는지…”잠시 멈췄다가 이어갔다.“…기억 못 하는 거야.”그 말은 공격이 아니라, 침투였다.이수의 눈이 흔들렸다.이번에는 분명했다.하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그건”그가 말을 꺼냈다.하지만 끝까지 이어가지 못했다.이수의 손이 아주 작게 들
민준의 말이 떨어진 뒤에도 공기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 끝났다고 단정해버리는 사람의 확신이 그 안에 남아 있었고, 그 확신이 공간 전체를 천천히 눌러앉히고 있었다.이수는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그 대신 시선을 한 번도 떼지 않은 채 민준을 그대로 바라봤다. 말이 아니라, 그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확인하는 쪽에 가까운 시선이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직 아니야.”짧았지만 단정적인 부정이었다.민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이수는 멈추지 않았다.“네가 가져간 건… 장면이지.”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정리되어 있었다.“그걸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거면”잠시 멈췄다가 이어갔다.“…착각이야.”공기가 아주 얇게 갈라졌다.민준은 웃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며 이수를 바라봤다.“그래?”그의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이수는 그대로 밀어붙였다.“영상, 사진, 증언.”그녀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를 가볍게 건드렸다.“다 봤어.”그리고,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안 끝나.”민준의 시선이 그 봉투로 잠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이수는 말을 이어갔다.“왜 그런지 알아?”그녀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이건 네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잠시 숨을 고르고 이어갔다.“…내가 선택한 일이니까.”그 문장은 단순했지만,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민준의 눈이 아주 미세하게 좁혀졌다.이수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넌 계속 장면만 쌓았어.”그녀가 말했다.“사람들이 보기 좋게.”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근데 장면으로는 끝 못 내.”이번에는 하빈이 아주 미세하게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그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수의 흐름이 어디까지 가는지 알고 있는 눈이었다.민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뭘로 끝내는데.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왔을 때, 어제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같은 공간이었고, 같은 구조였으며,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안을 걷고 있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면 공간이 주는 압력도 전혀 다르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이수는 멈추지 않았다.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섰고, 버튼을 누르는 동작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전날에는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짧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이번에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끝까지 갔다가 돌아온 상태였고, 그 사이에서 무엇을 놓고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하빈은 옆에 서 있었다.둘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긴장이 아니라 정렬에 가까웠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두 사람은 동시에 안으로 들어갔다.이수는 층 버튼을 눌렀다.짧은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위로.어제와 같은 방향.하지만, 이번에는 올라가는 감각이 달랐다.도망치지 않고 올라가는 쪽. 하빈은 벽에 기대지 않았다.이수도 마찬가지였다.둘은 중심을 스스로 잡고 서 있었다.거울처럼 반사되는 벽면에 두 사람의 모습이 겹쳐 보였지만, 시선을 그쪽으로 두지 않았다.이수는 정면만 보고 있었다.그리고 말했다.“들어가면…”말을 멈추지 않았다.“…이번엔 내가 끝까지 말할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그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엘리베이터가 멈췄다.문이 열렸다.복도는 어제와 같았다.길지 않은 거리, 소리를 흡수하는 카펫, 일정한 밝기의 조명.이수는 방향을 확인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었다.걸음을 옮겼다.멈추지 않았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번에는 멈춤이 길지 않았다.노크를 하지 않았다.손잡이를 잡았다.돌렸다.그리고, 문이 열렸다.안쪽 공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왔다.그곳에는 민준이 있었다.어제와 같은 위치.창가 쪽.빛을 등지고 있는 자리.이수는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갔다.하빈도 뒤따라 들어왔다.문이 닫혔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그가 말했다.물음이 아니라 확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