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비는 새벽에 그쳤다가, 아침에 다시 내렸다.
내리는 방식이 비슷해서 더 지쳤다.
젖는 게 새롭지 않은 날이었다.
이수는 카페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종이 울렸고, 안쪽 공기는 눅눅했다.
커피 냄새가 평소보다 무거운 건, 아마 습기 때문일 것이다.
습기는 냄새를 붙잡고 오래 놓아주지 않았다.
진상은 이미 카운터 뒤에 서 있었다.
오늘은 기계를 닦고 있었고, 천천히 닦는 손이 어딘가 과했다.
바쁘지 않은데도 서두르는 사람처럼. 그런 날은 보통,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쉰다더니, 어떻게 왔어요?.”
그가 말했다.
물음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말 속에 ‘기쁨’을 숨기 듯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일정이 연기되서요.”
이수는 짧게 답했다.
자세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변명이 길어지는 순간, 사람은 설명해야 할 사람이 된다.
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
끈을 묶는 손끝이 차분했지만, 매듭을 마지막에 한 번 더 당겼다.
단단히 묶는 습관은 무언가를 쉽게 풀지 않겠다는 태도와 닮아 있었다.
카페는 오전 내내 한산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 길면 말이 생긴다.
말은 일을 채우고, 일이 비는 곳을 마음이 차지한다.
진상은 커피 머신을 예열하다가 멈췄다.
기계가 멈춘 건 아니었다.
그가 손을 멈춘 것뿐이었다.
“혹시… 원래 알바 오래 해봤어요?”
그가 물었다.
일 이야기처럼 꺼냈지만 관심의 방향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요.”
이수는 컵을 닦으며 대답했다.
‘조금’은 가장 좋은 단어였다.
거짓말에도, 진실에도 붙일 수 있는 말.
“손이 빠르네.”
그가 말했다.
칭찬 같았지만, 관찰이었다.
관찰은 상대를 가까이 두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배우는 중이라서요.”
이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미용을 배우는 중.
그 말은 이수에게 여러 겹의 의미가 있었다.
기술을 배우는 중이기도 하고, 사람을 다루는 법을 더 정확하게 배우는 중이기도 했다.
“미용?”
진상이 되물었다.
그는 더 알고 싶어졌다.
“네. 아직… 제대로 벌 만큼은 아니고요.”
이수는 말을 그 정도에서 끊었다.
불안정한 수입, 그래서 알바. 이 구조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된다.
사람은 이해가 쉬운 이야기에 의심을 덜 쓴다.
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이상한 안도가 섞여 있었다.
이수가 ‘뭔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를 편하게 만들었다.
필요가 있는 사람은 거절하기도 쉽고, 쥐기도 쉽기 때문이다.
“힘들겠네요.”
그가 말했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대화가 길어진다.
그리고 길어진 대화는 관계를 만든다.
그 대신 컵을 내려놓고 물을 갈았다.
물소리가 잠깐 공간을 채웠다가 사라졌다.
진상은 그 물소리 뒤에 말을 덧붙였다.
“요즘은… 다들 힘들죠.”
그 말은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대개는 자기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척하면서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작게.
그 작은 반응이 그를 더 용감하게 만들었다.
점심이 가까워지자 손님이 몇 명 들어왔다.
이수는 주문을 받고, 컵을 건네고, 테이블을 닦았다.
동작은 매끄러웠고, 매끄러운 동작은 사람의 시선을 오래 잡는다.
특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이면 더.
진상은 자꾸 말을 붙였다.
일에 관련된 말로 시작해 점점 일 밖의 말로 흘렀다.
“여기 동네는 원래 조용해요.”
“비 오면 더 손님이 줄어요.”
“요즘은… 뭐가 재미가 없네요.”
마지막 문장은 카페와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개인적인 말이었다.
이수는 계산대 아래를 닦으며
“그럴 때도 있죠” 정도로만 답했다.
그 이상은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진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집에 가면… 더 조용하니까.”
그가 말했다. 주어가 없었다.
그 주어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었다.
이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더 말하게 두었다.
“그런 날 있잖아요. 뭐… 내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는 웃었다. 웃음이 얕았다.
웃음이 얕을 때 사람은 자기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선을 주면 그는 더 멀리 갈 것이다.
그런데 진상은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그냥… 내가 예민한가 봐요.”
예민. 그 단어는 편리했다.
폭력도, 통제도, 무례도 ‘예민함’이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있다.
이수는 그 단어를 들으며 손끝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수건이 테이블을 더 단단히 문질렀다.
“그럴 수도 있죠.”
이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동의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동의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은 듣고 싶은 방식으로 듣는다.
진상은 그 말에 안도했다.
안도는 다음 말을 낳는다.
“근데… 웃긴 게.”
그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비밀을 공유하는 톤이었다.
“여기 오면… 좀 괜찮아져요.”
그 말은 공간의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은 사람을 더 용감하게 만든다.
진상은 그 용기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러니까… 이게.”
그는 말을 멈췄다.
자기 입으로 끝까지 말하면 돌아갈 길이 없어진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수는 그 멈춤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리고 그는 끝까지 말하지 못한 대신 다른 방식으로 꺼냈다.
“오늘… 끝나고 술 한 잔 하고 갈래요?”
그 문장은 아주 사소해 보였다.
그러나 사소한 문장일수록 사람의 인생을 쉽게 바꾼다.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그를 봤다.
길지 않게, 그러나 흐리지 않게.
“여기서요?”
그녀가 물었다.
거절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확인은 상대에게 가능성을 남긴다.
“아니, 근처에… 조용한 데 있어요.”
진상이 말했다.
‘조용한 데’라는 말이 그의 마음을 드러냈다.
사람은 조용해지고 싶을 때 어딘가로 데려가고 싶어진다.
이수는 잠시 침묵했다. 바로 답하지 않았다.
바로 답하면 그건 수락이 된다.
이수는 시간을 두고, 마치 일정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말했다.
“오늘은… 조금 어려워요.”
그 말은 ‘안 된다’가 아니라 ‘오늘은’이었다.
오늘만 피하면 내일은 가능해진다.
진상은 실망한 표정을 아주 잠깐 드러냈다가 곧 웃었다.
“아, 그렇죠. 내가 괜히…”
그는 말을 줄였다.
그러나 줄인 말의 끝에는 희망이 남아 있었다.
“그럼… 나중에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이수는 앞치마를 벗었다.
천이 손끝에서 미끄러졌고, 그 미끄러짐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진상은 계산대를 정리하며 또 한 번 말을 꺼냈다.
“내일은 나오죠?”
그는 묻는 척했다.
하지만 이미 정답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그가 안도하는 순간, 이수는 속으로 정리했다.
오늘은 ‘합리’의 날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민하다고 말했고
집이 조용하다고 말했고
여기 오면 괜찮아진다고 말했고
결국 ‘같이’ 술을 마시자고 말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서는 많은 일이 끝나 있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비는 다시 내리고 있었다.
이번 비는 얇았지만 오래 갈 것 같았다.
이수는 집으로 걸었다.
버스를 타지 않았다.
걷는 동안 생각이 정리됐다.
생각은 정리될수록 감정이 줄어든다.
집에 도착하니 하빈이 부엌에 있었다.
칼질 소리가 일정했다.
그 일정함이 이수에게는 이상하게 편했다.
“왔어?”
그가 물었다.
“응.”
이수는 외투를 벗으며 대답했다.
하빈은 이수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도마를 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늘 한 번 더 참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어땠어.”
“그냥.”
이수는 물을 따랐다.
컵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 오늘의 ‘조용한 데’라는 말이 떠올랐다.
사람은 그런 말을 쉽게 하지 않는다.
쉽게 하지 않는 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하빈이 낮게 말했다.
“조심해.”
그 말은 금지나 통제가 아니었다.
그저, 끝까지 지키고 싶은 사람의 말이었다.
이수는 컵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말래도.”
아는 것과 멈추는 건 항상 다른 문제였다.
방으로 들어가 거울 앞에 앉았다. 화장을 지웠다.
눈가의 선이 흐려지고, 입술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이수는 손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접시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많이 만진 날이었다.
그 손이 깨끗해진다는 감각은 오지 않았다.
이수는 불을 끄고 누웠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생각이 더 선명해졌다.
‘조용한 데.’
그 말은 데이트가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이미 허용된 선이었다.
오늘 그는 자기 안에서 먼저 허락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허락을 밖으로 꺼내 보였다.
이수는 눈을 감았다.
내일은 그 허락이 행동처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강하지 않게, 그러나 멈추지 않게.
미정은 그날 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미용실을 나서며 이수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도망이 아니라, 거리를 두는 거예요.그 문장은 생각보다 오래 붙잡혔다.미정은 그 말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버스를 탔다.버스 안은 조용했다.저녁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휴대폰 화면 속으로 고개를 묻고 있었다.아무도 미정을 보지 않았다.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버스에서 내려 작은 모텔 간판 앞에 섰을 때, 미정은 잠시 멈춰 섰다.손이 가방 끈을 놓지 못한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오늘 하루뿐이야.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며 문을 밀었다.그 시간, 장미 미용실에는 이수와 하빈만 남아 있었다.영업을 마친 뒤에도 불을 바로 끄지 않았다.어둠이 들어오기 전의 애매한 시간대는 둘에게 익숙했다.하빈은 창가에 기대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연락 올 것 같아?”그가 물었다.“올 거야.”이수는 서랍을 정리하며 말했다.“오늘은.”“왜.”“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간 날이니까.”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다.“이번 남편.”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전보다 위험해 보여.”“응.”“술 때문만은 아니야.”“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는 눈이야.”이수는 손을 멈췄다.“그 사람도 그랬어.”그 이름이 나오자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하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괜히 말을 얹으면 이수가 더 멀어질 것 같았다.“미정 씨 남편은.”이수가 말을 이었다.“밖에선 완벽한 사람이야.”“그게 더 문제지.”“응.”“그래서 균열은 안에서부터 생겨.”하빈은 이수 쪽으로 돌아섰다.“이번엔.”“네가 직접 나서야 할 수도 있어.”이수는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알아.”“근데 이번엔 그게 무서워.”하빈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왜.”“겹쳐 보여서.”“미정 씨 남편이 민준 씨랑.”그 말은 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이었다.이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계속 말했다.
미정은 그날 밤 거의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남편의 손이 어깨를 밀치던 감각이 다시 살아났고,잠깐이라도 의식이 가라앉으려 하면 ‘기록해 보라’던 그의 비웃음이 귀에 남았다.아침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잠든 적이 없었다.부엌에 나가 물을 마시다 싱크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눈 밑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이유 없이 갈라져 있었다.화장은 하지 않았다.그럴 여유도, 용기도 없었다.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셔츠는 다려져 있었고, 구두도 정리되어 있었다.“오늘 일찍 나가야 해.”그는 신문을 넘기며 말했다.어제와 이어진 말은 아니었다.그래서 더 잔인했다.“아침 안 먹어?”미정은 고개를 저었다.“안 먹어.”“그래.”“요즘 입맛 없더라.”그는 그 말을 던지듯 하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다는 게 배려가 아니라는 걸 미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현관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사라지자 미정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휴대폰을 꺼냈다.메모 앱을 열었다.08:12아침,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 어제 일 언급 없음적으면서 손이 떨렸다.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이수의 말이 떠올랐다.-폭력은 늘 다음 단계를 준비해요.-전날보다 오늘이 평온하면, 그건 멈춘 게 아니라 숨 고르는 거예요.미정은 메모를 저장하고 가방을 챙겼다.오늘은 미용실에 가기로 한 날이었다.장미 미용실은 평소보다 조용했다.이수는 가위를 손에 쥔 채 머리를 자르고 있었지만,손님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공간을 편하게 만들었다.미정이 문을 열었을 때, 종이 울리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이수는 거울을 통해 미정을 봤다.어제보다 조금 더 굳은 얼굴.“어서 오세요.”미정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머리는… 다음에요.”“오늘은 그냥.”이수는 의자를 가리켰다.“앉으세요.”하빈은 카운터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미정을
미정은 집에 들어오기 전 현관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손잡이를 잡은 채,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TV 소리도, 발소리도. 이런 정적은 언제나 불길했다.미정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다.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주방 쪽에서 희미한 냉장고 불빛만 새어 나왔다.술병이 열려 있다는 뜻이었다.“왔어?”남편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소파에 누운 채였다.“응.”미정은 괜히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괜히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이건 습관이었다.그의 기분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몸의 기억.“오늘은 늦었네.”“병원 갔다가.”거짓말은 아니었다.다만 설명을 덜 했을 뿐이었다.남편은 고개를 돌려 미정을 봤다.눈빛이 이미 조금 흐려져 있었다.“병원?”“어디 아파?”“아니.”“그냥.”그의 시선이 미정의 얼굴에서 목으로, 어깨로 내려갔다.“근데.”“왜 화장했어?”미정의 손이 순간 굳었다.“했나?”“그냥… 립밤만.”“아니.”“했어.”그는 몸을 일으켰다.술 냄새가 확 끼쳤다.“누구 만났어?”미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이수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설명하지 마세요.“아무도.”짧게 말했다.그 짧음이 남편의 신경을 건드렸다.“아무도가 뭐야.”“말을 그렇게 해?”“피곤해서.”“피곤하면.”“집에 바로 와야지.”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왜 꼭 밖에서 시간을 써.”미정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했다.“그만해.”그 말이 선을 넘었다.남편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술을 마시기 전과 후,그리고 이 순간 미정은 그 차이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만?”“지금 나한테 그만하라고 했어?”그는 탁자 위의 술병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너.”“요즘 말투가 달라졌어.”미정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아니야.”“아니긴 뭐가 아니야.”“나를 무시하잖아.”그는 미정의 팔을 잡았다.
미정은 이수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이 명령처럼 들렸기 때문이 아니라,그 말이 너무 오랜만에 자기 편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이다.“제가…”미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뭘 해야 하죠.”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대신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미정 앞에 놓아주었다.손이 조금 덜 떨리게 하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단계였다.“아무것도 새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이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말투는 차분했고,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다.“지금까지 해오던 걸 조금만 다르게 하시면 돼요.”미정은 고개를 들었다.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남편분은,”이수가 말을 이었다.“술을 마시면 미정 씨를 의심하죠.”“네.”“그리고, 그 의심을 말로 풀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요.”미정의 손이 다시 수건을 쥐었다.“그건 폭력이고,”이수는 단정적으로 말했다.“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이유예요.”미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그런데,”이수가 말을 이었다.“그 사람은 자기 행동을 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하빈이 그 말을 받았다.“정당화하고 있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술 때문이라고 하고,”“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고,”“미정 씨가 말을 안 들어서라고 하겠죠.”미정은 그 말을 듣는 동안 아무 반박도 하지 못했다.이미 수없이 들어온 말들이었다.“그래서,”이수가 말했다.“이 경우에는 설명이 아니라 기록이 필요해요.”“기록이요?”“네.”이수는 테이블 위에 있던 노트를 열었다.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페이지였다.“미정 씨는 이제부터 하루에 한 가지만 하시면 돼요.”“뭐죠.”“시간.”이수는 펜으로 노트 위에 ‘시간’이라고 적었다.“남편이 술을 마시기 시작한 시간.”“집에 들어온 시간.”“말투가 바뀌는 시간.”“눈이 달라지는 순간.”펜 끝이 종이를 누를 때마다 작은 소리가 났다.“그리고, 그때마다 무슨 말을 했는지.”미정은 조
미정은 말을 멈춘 채 손에 쥔 수건만 바라보고 있었다.수건은 이미 젖어 있었고, 그 위로도 물이 조금씩 떨어졌다.비 때문인지, 손 때문인지는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이수는 서두르지 않았다.이런 순간에 질문을 먼저 던지면 사람은 설명을 하게 되고, 설명을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된다.지금 필요한 건 변호가 아니라 고백이었다.“술은…”이수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자주 드세요?”미정은 고개를 저었다.아주 작게.“남편이요.”그 말에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예상과 다르지 않았다.“처음에는,”미정이 말했다.“회사 회식 때문이라고 했어요.”“그 다음엔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했고요.”미정은 웃으려다 말았다.웃음이 아니라 습관처럼 올라온 표정이었다.“이제는 이유를 말하지도 않아요.”그 말이 방 안에 오래 남았다. 하빈은 한 발짝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필요할 때만 개입하는 거리. 이수는 그 존재가 지금은 든든했다.“금주 센터도 다녔었어요요.”미정이 말했다.“병원도요.”“몇 달은 괜찮았어요. 정말로.”그녀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근데,”“술을 안 마시는 게 괜찮은 게 아니라…”“술이 없으면 불안해져요.”미정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자기도 모르게 몸 어딘가를 달래는 움직임이었다.“잠을 못 자고,”“괜히 화가 나고,”“제가 뭘 하고 있든 다 의심해요.”이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정리했다.알코올 의존.금주 실패.그리고 통제 욕구.가장 위험한 조합이었다.“오늘은,”이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더 심했던 것 같아요?”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제가,”“술 좀 그만 마시라고 했어요.”그 말은 너무 평범해서 그래서 더 무서웠다.“그게…”미정은 고개를 숙였다.“그 사람한테는 도발이었나 봐요.”그 순간, 이수의 기억 어딘가가 아주 낮게 울렸다.말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괜찮을 거라고 믿었던 말.그 한마디가 폭력을 불러왔던 순간들.“그때,”미정
비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했다.예보도 없었고, 그럴 기색도 없던 하늘이었다.한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에는 앞이 흐려질 만큼 굵어졌다.이수는 유리창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이런 비는 대개 사람을 집 안에 붙잡아두거나, 아니면 어디로든 밀어내버린다고.“이 정도면,”하빈이 말했다.“오늘은 문 닫아도 되겠다.”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괜히 고개만 끄덕였다.아직은 닫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그때, 문 위에 달린 종이 한 번 크게 울렸다.조심스러운 소리가 아니었다.문이 반쯤 밀리며 억지로 난 소리였다.둘 다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여자가 서 있었다.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머리카락은 얼굴에 붙어 있었고, 옷은 물을 먹어 무거워 보였다.신발에서 떨어진 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여자는 문을 완전히 닫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숨을 고르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가슴이 빠르게 들썩였다.“저기…”목소리가 떨렸다.너무 떨려서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이수는 말없이 다가갔다.이런 사람에게 처음부터 질문을 던지는 건 늘 잘못된 선택이었다.여자는 이수를 보자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거의 무너진 목소리로 말했다.“살려주세요.”그 말이 비 소리보다 먼저 공기를 갈랐다.“남편이…”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입술을 떼었다 붙였다 하다가 끝내 참지 못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남편이 저를 죽일지도 몰라요.”그 순간, 이수는 움직이지 못했다.얼굴에 남은 붉은 자국. 급히 닦아낸 듯 번진 화장.소매 끝 아래로 보이는 손목의 멍.설명하지 않아도 너무 많은 것이 보였다.하빈이 먼저 움직였다.아무 말 없이 수건을 가져와 여자에게 건넸다.“일단…”그가 낮게 말했다.“좀 닦으세요.”여자는 수건을 받아 들었지만어디에 대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춰 있었다.손이 떨리고 있었다.“앉으세요.”이수가 말했다.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했다.여자는 그 말에 그제야 다리가 풀린 듯 의자에 주저앉았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