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차가 멈춘 곳은 학교 근처 번화가 한복판에 있는 일식집 앞이었다.문이 열리자 안에서 우렁찬 구호가 터져 나왔다.“이랏샤이마세!”브리는 그대로 멈칫했다.안쪽 바 테이블 너머로 셰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열댓 명쯤 되는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조명은 은은했고, 실내엔 진한 육수 냄새가 감돌았다.브리는 에이든을 돌아봤다.“야.”“왜.”“이건 컵라면이 아니잖아.”“비슷해.”“어디가.”에이든은 태연하게 대답했다.“면이잖아.”브리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잠시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직원이 정중하게 둘을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좁고 긴 바 자리였다. 셰프들이 바로 앞에서 면을 삶고, 육수를 따르고, 토핑을 올리는 게 다 보였다.브리는 속으로 생각했다.‘이렇게 좁아터진 의자 말고 한강공원에서 라면이나 땡기고 싶다고.’하지만 막상 첫 그릇이 나오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얇은 면부터 두꺼운 면, 맑은 육수부터 진한 미소 베이스까지, 조그맣게 나뉜 여러 종류의 라면이 차례대로 나왔다. 진짜로, 말도 안 되는 라멘 오마카세였다.브리는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렸다.“이건 또 뭐야…”“먹어봐.”브리는 조심스럽게 한입 먹었다.그리고 잠깐 눈을 크게 떴다.“…맛있네.”에이든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그러니까.”브리는 그다음 그릇도 먹고, 그다음 것도 먹었다. 마지막엔 후식처럼 작은 말차라떼까지 나왔다. 위에 얇은 꽃잎 모양 장식이 얹혀 있었다.브리는 컵을 내려놓고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고마운데.”“응.”“난 다음엔 그냥 분식집 가서 라면 먹고 싶어.”에이든이 그대로 멈췄다.브리는 턱을 괸 채 솔직하게 덧붙였다.“이렇게 좁은 의자 말고, 한강공원 같은 데서. 김밥이랑 같이.”에이든은 몇 초쯤 브리를 빤히 보더니, 휴대전화를 꺼냈다.“야야. 됐어. 또 뭘 해.”브리가 손을 내밀었지만 에이든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여기 코리아타운 분식집, 내일 저녁 예약 가능한 데 전부 알아봐.”브리는 두
브리는 밤새 스피치 원고를 붙들고 있었다. 처음엔 뭐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노트북 화면 위에 커서만 깜빡이기 시작하자, 말들은 이상하게 전부 목구멍 근처에서 걸렸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새벽이 오자, 흰 창틀 사이로 스며든 빛이 방 안 바닥을 서서히 밀어냈다. 브리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그 희미한 빛을 큰 숨으로 빨아들였다. ‘이런 새벽이면 먼저 밥부터 차렸지.’ 애들 학교 보내고. 남편 출근시키고. 싱크대에 쌓인 그릇 치우고. 집 안 청소하고. 황미영으로 살던 시간의 새벽은 늘 누군가의 배를 채우는 시간이었다. 자기 배가 고픈지, 피곤한지, 졸린지 같은 건 맨 끝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처럼 아무도 깨우지 않는 새벽은 아직도 조금 낯설었다. 노크 소리가 두 번 들렸다. “브리님?” 샐리였다. 브리는 노트북을 반쯤 덮고 문 쪽을 봤다. 문이 열리고, 샐리가 브런치가 차려진 은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버터 향이 은근하게 퍼졌다. 갓 구운 크루아상, 잘린 과일, 반숙 계란, 따뜻한 차. 정갈하고 아름다웠다. 브리는 은쟁반을 내려놓는 샐리를 보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걸리던 질문을 꺼냈다. “샐리.” “네, 브리님.” “샐리한테 우리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샐리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건 눈 깜빡일 사이의 일이었다. 샐리는 곧 익숙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 멋진 분이셨죠. 꼭 요즘의 브리님을 보는 것 같아요.” 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나요?” “네. 경쾌하면서도, 할 일은 척척 해내고… 현명하고 멋진 분이셨어요.” 브리는 괜히 어깨가 아주 조금 으쓱해졌다. “그 일만 없었다면…” 샐리의 말끝이 낮게 꺼졌다. 브리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 일?” 샐리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 말은 공손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지막 온도가 차갑게 느껴졌다. “이만 내려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아침 되시길.” 문이 닫
브리의 방엔 희한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샐리가 올려준 미니 컵케이크, 포도, 젤리, 그리고 한 번 따면 절대 한 봉지로 안 끝나는 짭짤한 과자들까지. 침대 위엔 폭신한 담요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고, 세 사람은 각자 파스텔톤 파자마 차림으로 엉망진창이 된 채 그 위를 뒹굴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브리만 뒹굴고 있었다.“아 진짜, 덥다.”브리는 침대 위에서 배를 깔고 누운 채 베개를 끌어안았다. 금발이 사방으로 흩어져 얼굴을 반쯤 덮었다.클로이는 네일 파일로 손톱을 다듬다가 브리를 힐끗 봤다.“네가 아까 담요 세 개나 끌어안고 있었잖아.”“그건 감성이지.”“지금은?”“지금은 더위.”앨리샤가 그 말을 듣고 빵 터졌다.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웃다가 손에 들고 있던 젤리를 떨어뜨렸다.그 순간, 침대 아래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하얀 치와와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퓨리!”브리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퓨리는 젤리를 물진 못하고, 대신 그 앞에 떨어진 리본끈을 덥석 물었다. 그러곤 마치 전리품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치켜들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클로이가 질색했다.“쟤 또 시작했다.”“안 돼, 그거 먹는 거 아니야!”브리가 손을 뻗자 퓨리는 즉시 크르릉거리며 침대 아래로 후퇴했다. 작은 몸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사납고 진지한 으르렁거림이었다.앨리샤가 배를 잡고 웃었다.“진짜 신기하다. 얘는 왜 너한테만 이래?”브리는 정색했다.“몰라. 나도 너무 억울해.”“아니, 근데 예전보다 좀 나아지긴 했어.”클로이가 턱을 괴고 말했다.“전엔 진짜 널 물어뜯으려고 했잖아.”“맞아.”브리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요즘은… 음. 날 죽이고 싶어 하는 건 아닌 것 같아.”그 말에 셋이 동시에 웃었다.그때 퓨리가 다시 침대 밑에서 얼굴만 쏙 내밀었다. 까만 눈이 반짝였다. 브리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퓨리는 잠깐 망설이더니 아주 짧게 코끝을 킁킁대고는 다시 쏙 숨어버렸다.브리는
브리아나는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밴드부실 앞 복도를 지나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서는 기타 줄 튕기는 소리와 드럼 스틱이 가볍게 리듬을 쪼개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누군가 웃었고, 누군가 음정을 틀렸다며 타박하는 소리도 들렸다.브리는 괜히 문틈 너머를 한 번 들여다봤다.그리고 그 안쪽에서, 케이블을 정리하던 이안을 발견했다.이안은 허리를 숙인 채 선을 한 번 감아 올리고 있었다. 교복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손목에 핏줄이 옅게 드러나 있었다. 별거 아닌 장면인데 이상하게 눈에 익었다. 저 애는 늘 저렇게 조용히 뭔가를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브리는 저도 모르게 문 앞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이안.”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괜히 반가운 마음이 먼저 올라왔다.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이안이 고개를 들었다.그는 브리를 보자 아주 잠깐 멈췄다. 손에 감겨 있던 검은 케이블도 같이 멈췄다. 시선이 브리 얼굴에 닿았다가, 그 입가에 걸린 웃음에 닿았다가, 다시 아주 느리게 아래로 떨어졌다.브리는 그 짧은 정적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더 가볍게 웃었다.“뭐 해? 아직 안 끝났어?”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손에 들고 있던 케이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밴드부 안쪽에서 떠들던 애들이 둘 사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하나둘씩 소리를 줄였다. 결국 드럼 스틱 소리도 끊겼다.브리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왜 그래?”이안은 문 쪽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가까워질수록 표정이 더 잘 보였다. 화가 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 차분해서 더 이상한 얼굴. 일부러 감정을 눌러놓은 사람 얼굴.브리는 웃음기를 조금 거뒀다.“나 뭐 잘못했어?”이안은 아주 잠깐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브리를 봤다.그 눈빛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차갑다기보단,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사람 같았다.“브리.”그가 낮게 불렀다.브리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올리버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양손으로 서류철을 껴안고 있었다. 바네사가 직접 자기 이름을 부른 순간부터, 그의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고 있었다. “나… 나를?” “응.” 바네사는 너무 자연스럽게 웃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헤일리는 멀찍이 물러났고, 바네사는 일부러 창문이 반쯤 열린 조용한 복도 쪽으로 올리버를 데리고 갔다.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올리버는 안경을 고쳐 쓰며 헛기침했다. “무슨 일이야?” 바네사는 서류철 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너 이번 스피치 대회 스태프라면서.” “어… 응.” “역시.” 바네사는 감탄하는 척 눈을 반짝였다. “난 네가 그런 거 할 줄 알았어.” 올리버 귀가 빨개졌다. “그래?” “응. 너 이런 거 잘하잖아. 꼼꼼하고, 섬세하고.” 바네사는 말을 고르듯 아주 잠깐 멈췄다. “다들 널 이상하게 보는데, 난 아니야.” 올리버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한마디가 생각보다 세게 꽂힌 게 보였다. 바네사는 속으로 웃었다. “사실 부탁 하나만 하려고.” 올리버는 거의 즉시 고개를 들었다. “부탁?” “응.” 바네사는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마치 정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처럼. “브리아나 로즈 있지.” 올리버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커뮤니티에서 모를 리가 없지. 바네사는 길게 한숨 쉬는 척했다. “나 진짜 쟤랑 이렇게까지 되고 싶진 않았어.”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리버를 올려다봤다. “근데 넌 봤잖아. 요즘 걔가 얼마나 심한지.” 올리버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바네사는 그 망설임마저 다 읽고 있었다. “난 그냥…” 그녀는 낮게 말했다. “무대 위에서만큼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당당한 얼굴로 올라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올리버 손가락이 서류철 모서리를 더 세게 잡았다.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바네사
훈련장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호루라기 소리, 런닝화 밑창이 잔디를 미는 소리, 누군가 지르는 욕설 비슷한 농담이 뒤섞였다. 에이든은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필드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첫 패스부터 이상했다. 툭. 평소 같으면 손에 딱 들어왔어야 할 공이 손끝을 스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 옆에서 누군가 감탄하듯 소리 냈다. 오스틴이었다. 멀리서 보면 럭비공을 잘못 사람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애. 진저미머리에 배는 아주 살짝 나왔고, 웃으면 볼살이 먼저 들썩였다. 뛰는 폼은 우스운데 묘하게 빠른, 그래서 더 얄미운 수비수. 오스틴은 헬멧을 한 손에 든 채 에이든을 빤히 봤다. “우리 밀러 님 오늘 컨디션이 아주 화려하시네.” 에이든은 공을 다시 주워 올렸다. “닥쳐.” “오, 말투는 나쁘지 않은데?“ 오스틴은 스포츠 음료를 벌컥 마시고는 배를 한 번 툭 치며 웃었다. “근데 손은 왜 그래? 설마 여친님 생각?” 에이든은 고개를 돌려 오스틴을 노려봤다. 오스틴은 그 표정을 보자마자 더 신이 났다. “와. 진짜네.” “시끄러워.” “아니, 나 하나도 안 시끄러운데? 네가 너무 티 나게 조용한 거지.” 코치가 멀리서 소리쳤다. “밀러! 오스틴! 장난칠래?” 오스틴이 바로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에이든 쪽으로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근데 진짜 브리아나 때문이지?” 에이든은 대답 대신 공을 다시 던졌다. 이번엔 받았다. 그런데 다음 드릴에선 반 박자 늦었다. 수비를 읽는 타이밍이 미묘하게 밀렸다. 오스틴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야.” “왜.” “너 오늘 진짜 왜 이러냐.” 에이든은 턱을 한 번 쓸었다. 복도. 헤일리 글. 브리가 말하던 차가운 얼굴. 아까 저건 김이 빠져 있었어. 브리가 괴롭힘을 정말 당한걸까? 하지만 꽤 당당한 그녀의 태도와 자태가 자꾸 머리를 스쳤다. 공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엔 가슴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