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천우는 희한한 요구에 절로 헛웃음을 지었다.
“어찌 말입니까?”
“자네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얘기해보라는 것이지. 이 장신구 어디에 무슨 흠집이 나 있다든가…….”
정연복은 천우를 의심하는 기색을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강인하고 뚝심있는 무인으로 보였던 그 얼굴이 어찌 이렇게 심술궂게 비쳐보일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증명이라고요.”
천우가 불끈한 속을 감춘 채로 장신구를 향해 손을 가져갔다.
2년 넘게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었으니 그 무게와 감촉마저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제 아버님의&h
이도가 즉위한지 26년째 되던 해였다.추수가 끝나고 청명한 가을 하늘이 높게 떠 있는 어느 낮이었다.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 한 점 없는데 햇살마저 포근한 그런 날이었다.늦은 사냥에 나선 잠자리 몇 마리가 부산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떨어진 낱알 주워 먹으러 산속에서 내려온 사슴 가족도 귀를 팔랑대며 가을날의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팍-인기척을 느낀 사슴들이 줄행랑을 쳤다.두 사람이 텅 빈 전답(田畓)의 고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였다.서로 거리를 조금 둔 채로 걷는 것이, 연인이거나 부부 사이는 아닌 듯했다.척-남자 쪽이 먼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았다.한마디 말없이 한적한 들판을 쭉- 눈으로 훑는데, 그 얼굴에 옅은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잠시 후, 여자 쪽도 남자가 서 있던 곳으로 다가왔다.여자 또한 남자가 보는 곳을 따라 눈을 돌렸다.두 사람은 아무런 소리도 내질 않고 한동안 그렇게 고요히 있었다.“편안하십니까?”여자가 물었다.“네.”남자 쪽이 대답했다.“어떠십니까?”이번에는 남자 쪽이 되물었다.“이리 바뀐 세상
“갑자기 세상에 나와 너만 남겨두고 숨을 거두었을 때, 그냥 아무런 생각도 안 나더구나. 몸은 여기 있는데 영혼은 어딘가로 떠나버린 기분. 그래. 그랬었다. 텅 비어버린 기분이었지.”“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조금도 나질 않습니다.”“그럴 수밖에. 네가 젖을 떼자마자 가버렸으니.”“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아름다웠다.”백사성이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현명하고 헌신적이며, 또 누구라도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예뻤지. 사람이 아닌 미르조차 그 미색(美色)에 반해버렸으니 말이다.”“아버님께서도……. 혹시 사모하셨습니까?”“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기우사를 떠나 용의 알을 밴 사람을 따라갔겠느냐?”백사성의 얼굴에 시원섭섭한 빛이 어렸다.“그래도 좋았다.”백사성이 말을 이었다.“내 몸 하나 바쳐 사모하는 여인을, 그리고 조선의 하늘을 수호할 물빛미르를 지켜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했다.”“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그것이 사람이다. 어리석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자기 뜻하는 대로 살아가는 생물이지. 어찌 보면 붉빛미르는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더욱 사람과 가까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백사성이 거기까지 말하곤 술 한 잔을 홀짝 비웠다.천우가 얼른 부친의 빈 잔을 채워넣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이도가 못내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옆에 함께 서 있던 백사성, 지운도 눈을 반짝이며 답을 채근하고 있었다.“그렇게 안고 난 뒤에 말입니다.”이도가 조바심을 냈다.“그렇게 그냥 끝났습니까? 붉빛미르가 그냥 끝을 냈습니까?”“그러하였습니다. 전하.”천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붉빛미르는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포옹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말입니다.”“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껴안고 있던 중에 붉빛미르가 사라졌습니다.”“물빛께서 안고 계시던 품에서 말입니까?”“네. 마치 연기처럼.”천우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투로 웅얼거렸다.“이 팔에 안겨있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있거늘…….”아쉬운 것인지, 꿈을 걷는 것 같은 몽롱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인지는 몰랐다.그러나 품안 가득 다가왔던 온기, 촉감, 부드러움은 방금 있었던 일처럼 생생했다.“천우 네 말은.”잠자코 듣고 있던 백사성이 나서 말했다.“붉빛미르가 나타났고, 하늘로 돌아가겠다며 작별을 고했고,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달라고 했고
붉빛미르가 이어 말했다.“우리 두 미르는 사람들의 지혜가 늘어나 천문을 읽게 되는 순간, 더 이상의 쓸모가 없어 하늘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알고 있소.”“저는 그것이 싫어 불로 저항했던 것입니다. 왜 사람의 행보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요. 하지만 물빛미르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만을 바라보셨지요. 사람과 섞여 사셨고요.”머리칼을 가만히 넘기는 기척이었다.“저 또한 그것이 어떤 삶일지 궁금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여인의 모습으로 지내보기도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저는 사람보다는 미르에 가까운 넋이었습니다. 더욱 이해할 수가 없더군요. 사람은 여전히 어리석고 폭력적인 생물이지요. 그렇지만 미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만큼 단단한 생명이기도 하고요.”“…….”“물빛미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겨우 깨달았습니다. 나와 같은 미르가, 이토록 사력을 다해 사람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 또한 미르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나, 붉빛미르가 일으킨 사단은 항상 울음소리와 피만을 불러왔지요.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언제부턴가 의심이 들더군요. 그래도 인정 못하고 마지막 발악으로 내가 당신을 가장 미워하던 때로 시간을 돌려 싸워보기도 하였고요.”“이포교를 숙주로 삼았을 때의 말이로군.”“네. 그리고 결국 물빛께서 저와 대등하게 맞서셨지요. 그리고 천지신명께서도 직접 답을 주셨고요.”붉빛미르의 고개가 올라갔다.
“역시 당신이었군.”천우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붉빛미르 쪽에서 어둠 속에서 가만히 고개만 끄덕여보였다.“언젠간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했소.”천우의 칼 쥔 손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당신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생각했지.”“똑똑하시네요.”“이렇게 나타나주어 고맙소. 마음 졸이며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끝을 내는 것이 나을 것이오. 나한테든, 당신에게든.”천우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산속에 잠든 물 전체가 우르릉- 대는 소리와 함께 진동했다.천우의 명에 맞추어 움직이겠다며 한껏 예기(銳氣)를 다듬는 듯했다.붉빛미르는 가만히 이쪽을 살피기만 할뿐, 손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불길이라도 내밀 줄 알았는데, 별일이었다.“어떠셨습니까?”불쑥, 붉빛미르가 그리 물었다.“뭐를 말이오?”천우가 되물었다.“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의 조선 땅 말입니다. 물빛께서 보시기에는 이쪽의 삶이 만족스러우십니까?”“갑자기 무슨…….”“이쪽의 삶은, 시간은, 붉빛미르가 나타나지 않은 세계. 천지신명의 뜻을 받든 붉빛미르가 세상을 침범하지 않고, 천문을 읽으려는 사람들을 놔두기로 결심한 세계.
지운이 물었다.“서촌 말씀이십니까?”“이왕 여기까지 나온 김에 그동안 하늘 보는 거 어디까지 되었나 살펴보기도 하고 말입니다. 학사들 은자(銀子)라도 좀 챙겨줘야 닭백숙이라도 고아 먹으면서 일하지 않겠습니까?”“전하의 은덕이 하해와 같으십니다.”그렇게 4명의 사내는 순식간에 다음 행보를 정하고는 곧바로 서촌으로 옮겨갔다.“저, 전하!”어김없이 장영실이 나와 맞이했다.지난 기억보다 조금 더 피곤하지만, 눈의 생기만큼은 곱절은 더한 장영실이었다.장영실뿐 아니라, 다른 학사들도 여럿이 한자리에 있었다.밤중에 오직 장영실 혼자만 일하던 기억 때문일까. 학사들이 우글거리는 광경이 오히려 낯설게 보였다.“어, 어인 일로 옥체를 직접 행차하셨습니까?”“잠깐 볼일이 있어 암행을 나왔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한번 와 보았다. 자, 일단 이것들 좀 받고.”이도가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옆에 있던 학사에게로 건넸다.천문 연구에 지친 사기(士氣)를 채워줄 묵직한 은자 덩어리였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은자를 받아든 학사가 전원이 허리를 굽히며 감사했다.장영실이 그 학사를 가만히 불렀다.“이여립. 자네는 얼른 그것을 가지고 장터에 나가 좋은 술과 포(脯)를 사오게.”“
“그러하옵니다.”이포교가 상전 대하는 자세로 지운의 말을 받았다.“수고하셨소.”지운이 천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천우는 그저 여차하면 물의 힘으로 쳐버릴 작정으로 당당히 서 있기만 했다.“둘만 있게 해주시겠소?”지운은 그런 천우의 모습은 상관도 않고 가만히 이포교를 물리쳤다.탁-이포교가 문을 닫고 나갔다.둘만 남게 되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앉으시게.”지운이 천우에게 자리를 권했다.“아니요.”천우가 뻗댔다.“서 있겠습니다.”“그럴 텐가?”지운이 조금 놀란 투로 되물었다.두 사람의 눈싸움이 불이
“이곳은 내가 물빛미르와 겨루고 세상 밖으로 튕겨난 후로 처음으로 다시 조선 땅을 찾아왔을 때의 그 시점. 순수하게 당신만을 증오하고, 진심으로 당신을 해하고 싶었을 때의 현실. 그리고 두 미르가 다시 한 번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맞붙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고, 또 절대로 물러날 수 없는 전장(戰場). 우리 둘은 이곳에서 다시 싸우고 있는 것이에요. 원래의 역사라면 존재할 수 없는 곳에서.”“원래의 역사?”“그리고 또 하나. 제가 궁금하다고
나를 멸하겠다.그런 말을 듣는데 심정이 곱게 들 리 없었다.어리의 붉은 기운에 맞서, 천우 또한 허장성세로 보일 만큼의 푸른 기운을 쏟아내어 주위에 둘렀다.여차하면 내가 그대를 멸할 것이다……. 라는 무언의 위협이었다.불끈거리는 속에 반응한 것인지, 푸른 기운이 어리의 것 못지않게 위협적으로 일렁였다.“무시무시하네요.”&n
양손에 불을 두른 채였다.천우의 양쪽 귀를 앗아갈 기세였다.탓-이번에는 천우도 가만있지 않았다.온몸에 힘을 모으고, 칼날에 푸른 기운을 응집시킨 채로 도약했다.어리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그러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냉소를 머금은 채로 공중에서 더 빨리 날아들었다.파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