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거듭 미안하오."
천우가 다시 사과했다.
"나는 정말로 낭자께서, 대군마마의 정인인 줄 알고…….”
“아니오. 아닙니다. 포교님께서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다행입니다. 저는 혹여 낭자께서 불쾌해하셨을…….”
“저는 대감마님의 정인이 맞으니까요.”
어리가 담백하게 중얼거렸다.
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정인이시라고요.”
“일어나게, 이 친구야!”꿈결 속에서 들리는 듯한 목소리였다.천우는 비몽사몽한 와중에 조금씩 눈을 떴다.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찾아들고 있었다.밤새 타오른 군불 때문인지 누워있던 방안 공기가 제법 후끈했다.“언제까지 누워 있을건가? 일어나라니까.”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이포교였다.이포교가 옆자리를 치우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구수한 밥 냄새가 방안에 그득하다 싶었는데, 언제 내왔는지 두 사람 몫의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쌀과 콩을 섞은 밥과 간장으로 간을 한 나물 반찬이 정갈하게 놓여있고, 김이 모락모락 솟는 된장국에는 두부까지 들어 있었다.“웬 밥상인가?”천우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이포교는 방금 전에 김초시가 들고 온 것이라며, 식기 전에 한술 뜰 것을 권했다.“대감마님께서 특별히 잘 챙겨주라 하셨다는군.”“대감마님이?”“그래. 오랜만에 온 손님인데 절대 배곯게 할 수 없다고 그러셨다네. 지금은 집에 있는 게 없어서 이 정도이지, 밤에는 갈비짝이라도 내온다 하셨다더군. 내가 예전에 여기 머물 때 보다 훨씬 씀씀이가 커지셨어. 자넨 정말 내 덕에 복 받은 줄 알게.”“이 빚은 꼭 갚겠네.”“웃자고 한 얘기일세.”
“과, 과찬이십니다.”천우가 허둥지둥 어리의 말을 받았다.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기에 더욱 몸이 근질거렸다.“아마 한양에서 나고 자라셨다면.”어리의 말이 이어졌다.“포교님 앞에 여염집 아낙들이 줄을 섰을지도 모르겠군요.”“망극한 소리를 하십니다.”“식객으로 계시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텐데, 서로 좋은 소리 하고 지내면 그것대로 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천우가 조용히 말했다.“전 이곳에서 오래 식객으로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며칠 정도만 신세를…….”“포교님이 여기 식객으로 계시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옵니다.”어리가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천우가 쳐다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엉켰다.“그게 아니라 하시면…….”“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 것뿐입니다.”어리가 어딘지 모르게 기대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포교님이 이 집을 떠나신다 하여도, 계속해서 포교님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이상한 느낌이요.”무슨 말일까.분명 되는대로 뇌까리는 말임에 틀림없었으나, 거기에는 딱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함께 담겨있었다.말마따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당신은 누구지? 하고 묻는 듯한 호기심…….왜 당신 앞에서는 친근하게 굴고 싶을까? 이해가 가질 않는 의문 등등…….“으음…….”천우를 빤히 응시하던 어리가 옅은 신음과 함께 기지개를 폈다.함께 긴장하고 있던 주변 공기가 일순간에 풀어지는 듯했다.“제가 너무 오래 포교님을 붙잡고 있었네요.”어리가 면목 없다는 투로 중얼거렸다.천우는 이제야 하는 심정으로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괜찮습니다.”“포교님도 내일 등청하셔야 할 텐데, 얼른 들어가서 주무셔야죠.”“낭자도 들어가시지요. 밤이 늦었습니다.“저는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가렵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잠이 오질 않네요.”“밤공기가 찹니다만…….”“추위를 타지 않는 몸이랍니다. 옛날부터 쭉 그래왔지요.”어리가 자기 보라는 듯 새초롬한
"거듭 미안하오."천우가 다시 사과했다."나는 정말로 낭자께서, 대군마마의 정인인 줄 알고…….”“아니오. 아닙니다. 포교님께서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으십니다.”“그렇습니까?”“물론입니다.”“다행입니다. 저는 혹여 낭자께서 불쾌해하셨을…….”“저는 대감마님의 정인이 맞으니까요.”어리가 담백하게 중얼거렸다.난생 처음으로 여인의 머리통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정인이시라고요.”“네.”“허언입니까? 또?”천우가 불퉁거리며 되물었다.어리가 그 앞에서 생긋 웃었다.“아닙니다. 진담입니다.”“아무래도 낭자의 말을 믿기가 힘듭니다.”“어찌하면 포교님께서 믿으시겠습니까?”“두 분이 연모하신다는 증거라도 있다면 모를까.”“어머나.”어리가 새삼 다시 입을 가리며 살짝 몸을 돌렸다.동시에, 속눈썹을 요란스레 깜박이며 이쪽을 흘겨보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들었다 놓을지 궁리하는 듯했다.“지금 제게 남녀의 증표라도 내놓으라는 말씀이신지요, 포교님?&rdqu
“네?”오히려 놀란 것은 천우였다.어리의 당돌한 물음에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듣지 않으셨습니까?”어리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생글거리는데, 하얀 목덜미와 가는 손목이 어둠 속에서도 하늘하게 빛났다.“대감께서 제게 잘 해주시느냐 궁금해 하지 않으셨습니까?”“아, 그건…….”“어떤 부분부터 말해드리리까?”어리가 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언제 처음 얼싸안았느냐, 언제 처음 입을 맞추었느냐. 이런 것들이 궁금하십니까?”“아닙니다. 아니에요.”천우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두 손을 내저었다.그러나 어리는 뭔가 건수를 잡았다고 여겼던지, 얼굴 가득 일견 사악해 보이는 웃음까지 지으며 천우를 놀려댔다.“왜 그러시죠? 포교님을 불끈거리게 하는 데는 너무 약합니까?”“낭자…….”“먼저 말을 꺼낸 건 포교님이십니다. 어차피 저희 두 사람 모두 알 것 다 아는 나이인데, 무엇이 그리 부끄러우십니까?”“낭자. 제발…….”“저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대감마님의 팔뚝에 솟은 힘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활시위를 당길 때 불룩 솟아오르는 그것을 보면, 어찌나 아찔하고 황홀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흠흠.”가만히 있기 뭐했던 천우가 재차 헛기침을 했다.“낭자께서도 잠이 오지 않으신 모양입니다.”“조금 그러하였습니다.”어리가 조금 샐쭉해진 목소리로 답했다.그리고는 턱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달빛에 비친 눈빛이 사뭇 날카로웠다.“오늘따라 별도, 바람도 요란스러운 지라.”“요란스럽다?”“별 뜻 없이 뇌까린 말입니다. 맘에 담아두지 마소서.”어리가 허공으로 향했던 시선을 다시 천우에게로 돌렸다.하얀 얼굴이 거기 있으니, 달덩이 하나가 야음을 틈타 지상으로 내려앉은 듯했다.“2년 전이라면…….”어리의 입술이 달싹거리듯 움직였다.“한양에 큰 변고가 났던 그때로군요.”“그렇습니다.”“포교로 계셨다면, 필시 그때 많은 고생을 하셨겠습니다.”“아, 저는 포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양에 대화재가 벌어졌다는 것도 들어들어 알았지, 제가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는 못하였습니다.”천우는 그리 말하고선 조금 어리의 눈치를 살피다가 되물었다.
‘미인이다.’어리라는 여인과 처음으로 마주보고 섰을 때, 대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하늘 아래 그 누구도 이 여인을 가리켜 아름답다 하지 않을 리 없었다.깊은 숲속에 홀로 고고하게 피어난 백일홍.가장 좋은 실과 기름으로 짜낸 비단.수백 년을 견뎌온 질 좋은 원석을 최고의 장인이 목숨처럼 벼려낸 보석…….어떤 미사여구라도 눈앞의 여인을 오롯이 담아낼 수 없었다.왕이라고 해도 이 여인의 마음에 들려 눈치를 살피지 아니할리 없었고, 도를 닦은 승려조차도 이 여인에게는 흑심을 품고 달려들었으리라.치명적인 미색의 여인이었다.그러나 천우에게는…….‘그뿐이다.’희한한 일이었다.천우 앞에 서 있는 여인은 분명 천하를 뒤흔들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하지만 천우에게는 그저 이름난 절경(絶景)을 보는 듯한 기분만 들게 하였다.높은 폭포, 굽이치는 강, 쭉 뻗은 산을 보고 감탄은 하되, 그것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 것처럼.한양에 처음 도달한 날, 흔한 기녀들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천우였다.그치들과 비교도 안 되는 양갓집의 규수가 바로 앞에서 속삭이고 있음에도 마음속에 아무런 동요가 일지 않으니, 실로 기묘한 일이었다.너무나 압도적인 미(美)와 만난 탓일까.살아있는 것과 마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