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검은 알이 혹시라도 깨질세라 푹신한 바구니에 옮겨 담은 후, 우리들은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이동했다.
조금 전까지 불꽃이 튀고 얼음 조각이 날리며 어둠의 파편에서 빛의 기둥까지 세상에 있는 힘없는 힘 모두 뒤엉키는 아수라장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는 이질적으로 창가를 통해 나른한 햇갈이 쏟아져 내렸다. 이 비현실적인 고요를 깬 것은 황제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래, 그대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 공작저의 최고급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카엘루스는, 엘리노아의 부서진 아티팩트 조각을 장난감처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려댔다. 엘리노아는 도대체 왜 저 쓸모없는 파편을 애착인형마냥 아직도 들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입을 다물기로 했다. “질문을 바꿔 보지. 자네들이 쫓던 그 ‘가시 왕관’의 흔적이 얼마 전 태양궁 응접실 벽지까지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설마 정보 길드장이라는 카시안 공자가 모르진 않았겠지?” 카시안 오라버니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은 최근 남부 성벽 밖의 기현상들이 ‘가시 왕관’과 연관이 있다는 것까지만 파악했습니다. 그놈들이 이토록 깊숙이 황궁에 잠입해, 폐하의 곁에까지 불순물을 심어두었을 줄은….” 황제가 가만히 내 얼굴을 응시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사실 이 어여쁜 공작가 막내가 정체 모를 몰골로 기사단장실에 들이닥쳤을 때만 해도, 돼먹지 않은 소리를 지껄이는 불순물 정도로만 여겼지.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고.” 그는 즐거운 듯 입꼬리를 완만하게 말아 올렸다. “카시안이 조만간 누군가를 보낼 거라 예고하긴 했지만, 그게 엘리노아 공녀일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큰오빠, 칼라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카시안을 향해 으르렁대듯 내뱉었다. “그게 엘리노아가 남장까지 감행하며, 고작 황제의 시종 따위로 한 달씩이나 네 곁을 지킨 것과 무슨 상관이지? 당장 설명해, 카시안.” “그, 그게…. 남부 조사에 인력을 다 쏟아부었더니 황궁처럼 위험한 곳에 밀어 넣을 사람이 마땅치 않더라고. 기본 소양도 갖췄겠다, 무엇보다 엘리노아는 금서인 로판 소설에 미쳐서 황궁 도서관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전적이 있….” —콰직! “거니…… 으억! 아, 악! 그, 그만!” “미친 새끼.” 큰오빠가 옆자리에서 입을 나불대던 작은오빠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나 역시 사심을 가득 담아 반대편 작은오빠의 허벅지를 아. 주. 세. 게. 꼬집었다. 아니, 날 고작 ‘남는 인력’ 취급했다고? 감히 이 귀하고 유능한 인력을 그런 식으로……! “크흠, 나머지는 내가 없을 때 하도록. 저놈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엔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니까.” 황제가 짐짓 엄숙하게 헛기침을 하며 거들었다. 하지만 칼라일의 시선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카엘루스, 너도 마찬가지다. 만약 네가 처음부터 엘리노아의 정체를 알고도 위험에 방치했다면, 이건 우리 루체른 가문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다.” 바닥에 구겨진 카시안 오라버니를 뒤로한 채, 두 남자의 살벌한 기싸움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 숨 막히는 긴장감 사이에서 나는 그저 찻잔 속에 코를 박고 사라지고 싶을 뿐이었다. ‘망했다. 황제 앞에서 내 로판 덕질을 들키다니……!’ —뀨! 꾸룩, 꾸루룩! 정적을 깬 것은 바구니 속 검은 알이 내뱉은 기묘한 울음소리였다. 역시 부숴버리는 게 상책이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칼라일 오라버니를, 카엘루스가 나직하게 제지했다. “아마 이미 느꼈겠지만, 엘리노아 영애가 지녔던 그 은빛 원통은 ‘루세티아의 파편’이다. 본래라면 빛의 여신이 남긴 순수함의 결정체여야 했으나…….” 황제는 말을 멈추고 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 오염된 성물을 정화해 낸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지. 하지만 성물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는 건, 이미 ‘그들’이 마수를 뻗쳤다는 뜻이기도 해.”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엘리노아 공녀, 설명할 기회가 없어 제대로 못했으나 이미 짐작한 데로 어젯밤 네 방을 습격한 건 내 그림자가 아니었다. 내 이름을 사칭해 숨어든 쥐새끼들이었지.” 그제야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머릿속에서 날카롭게 맞물리기 시작했다. 카시안 오라버니는 황제와 손을 잡고 그 가시 왕관이라는 세력들을 쫒고 있었고, 나는 운 나쁘게 그 판에 끼어들었다가 내 ‘정화 능력’을 들키고 만 것이다. ‘아, 제대로 엮였다.’ 현재 저 불순한 것을 태워 없애는 건 결국 제국의 태양인 저 남자뿐이지만, 정화의 힘으로 되돌리는 것은 결군 나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로 묶여버린 것이다. 수많은 로판을 탐독하며 꿈꿔왔던 다정하고 섬세한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은 이제 안녕. 바이바이… 눈앞의 얼굴만 번지르르한 악마를 마주하고 있자니, 당장이라도 바닥을 구르며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알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카엘루스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고정하며 들어 올렸다.“글쎄, 영애라면 이걸 어떻게 하고 싶을까?”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었다.‘헉! 위험하다…… 이건 마치 로판 30화쯤 나오는 남주의 전형적인 유혹 포즈잖아?!’머릿속 덕후 본능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은 정직했다. 서 있는 황제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느라 목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저…… 폐
“내가 인내심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기억하지 못하나?”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영애가 강조했던 그 ‘최상급 기념품’을 친히 받으러 왔지.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인내심이 좀 없다고… 그런데, 기념품치고는 꽤 살벌한 걸 준비했군. 영애의 취향이 이렇게 과격한 줄은 몰랐어.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지.”칼라일 오라버니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카엘루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황권의 마력이 오라버니의 한기를 단숨에 눌러버렸다.“비켜라, 공작. 저건 루체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쿠궁—!내 처절한 헛소리는 공중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듯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매트리스 가 천장을 전통으로 들이받은 후 중간 부분이 부서졌다.동시에 비명 같은 파열음이 그 사이로 강렬한 은빛 광채와 함께 뿜어져 나오며, 힘을 이기지 못한 유리창들이 덜덜 떨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저건…!”카시안 오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저 물건은 설마! 너 지금 저 침대 속에서 튀어나온 저 물건이 뭔지나 알고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꼬맹아? 저게 지금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기나 하냐고!”칼라일 오
“공녀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내 방 문 앞에 서 있던 기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번듯한 제복을 입은 황실 기사단의 모습이었으나, 내 눈은 속일 수 없었다.기사단장 엘릭이 달고 있었던 비슷한 모양의 검은 그림자가 슬금슬금 촉수처럼 뻗어 나오기 시작하던지 점점 내 방 안쪽 내 침대를 향해 탐욕스럽게 일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아, 진짜 오늘 일진 왜 이래?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냐고!’루세티아 여신님께 좀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뒷걸음질 치는 대신 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