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카엘루스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고정하며 들어 올렸다.
“글쎄, 영애라면 이걸 어떻게 하고 싶을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었다. ‘헉! 위험하다…… 이건 마치 로판 30화쯤 나오는 남주의 전형적인 유혹 포즈잖아?!’ 머릿속 덕후 본능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은 정직했다. 서 있는 황제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느라 목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저…… 폐하. 지금 상황이 음, 묘하게 섹시하시긴 한데…… 제가 살짝 거북목이라, 이 자세가 좀 많이 불편하고 힘드네요.” 내 헛소리에 황제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안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영애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나?” “아니, 분위기 잡으시는 건 알겠는데 제 목뼈는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저기 저 알, 방금 또 ‘뀨-’라고 했다고요.” 황제의 손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악마 같은 매력을 뿜어내던 그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무슨 웃음을 멈추지를 않는다. 아아, 나의 몽글몽글한 로맨스판타지가 이렇게 또 한 번 장르 파괴를 당하고 있었다. “거북목이라니. 영애는 정말…… 매 순간 예상을 뛰어넘는군.” 카엘루스가 관자놀이를 짚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멀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칼라일 오라버니가 살벌한 냉기를 뿜으며 앞을 막아섰다. “한가한 놀음은 그쯤 하시죠, 폐하. 지금 제 동생은 목숨을 위협받는 음모에 휘말렸고, 루체른 공작 가는 그 대가로 전쟁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칼라일의 시선이 바구니 속의 알로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선명해진 은빛 광채가 검은 껍질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기괴한 생명체를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황궁 내부도 더 이상 안전지대는 아닐 텐데요.” 카엘루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장난기 어린 기운이 순식간에 휘발되고, 제국의 주인다운 위압감이 들어찼다. “맞는 말이다. 놈들이 성유물에 손을 댔다는 건 이미 금기를 넘었다는 뜻이겠지. 일단 이 알은 놈들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마탑에 보내는 건 어떻습니까?” 칼라일의 제안에 나는 마시려던 찻잔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마탑! 로판에서 온갖 고지식한 천재들이 모여 마법 공학을 연구한다는 그 신비로운 장소! “제국 최고의 마법사들이라면 이 알의 정체를 밝히고 본거지를 추적해 낼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세상과 단절된 마탑이 보안 면에서도 확실하겠죠.” 오라버니의 현실적인 제안에 황제가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카엘루스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로 향했다. “마탑이라…… 나쁘지 않군.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카엘루스가 손가락으로 바구니를 가리켰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알 속에서 다시 한번 ‘뀨우—!’ 소리가 들리더니, 분명 바구니에 넣어 두었던 알이 언제부턴가 나와서 내 쪽으로 데구루루 굴러오는 것 아닌가? 그러고는 마치 온기를 찾는 강아지처럼 껌딱지가 되어 내 치맛자락 끝에 찰싹 달라붙었다. “저 알 속의 생명체는 이미 엘리노아 영애한테 각인한 듯하거든. 뭐 이제야 생각해 보자면 뛰어난 영애의 정화력이 핵에 스며들었으니 당연한 결과였겠지.” 황제의 입가에 다시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영애가 없는 마탑에서 저 녀석이 얌전히 연구에 협조할까? 가자마자 마탑 전체를 날려버리려 들 것 같은데.” “그,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당황해서 알을 떼어내려 치마를 흔들어 봤지만, 알은 오히려 내 치맛자락을 꽉 붙잡으려는 듯 기묘한 진동을 내뿜으며 따라다녔다. 칼라일 오라버니의 안색이 수심으로 가득 찼다. 여동생을 위험한 황제 곁에 두기도, 정체 모를 괴생명체와 마탑에 보내기도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결국, 카엘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최후통첩과도 같은 제안을 던졌다. “선택권을 주지, 칼라일. 이 알을 마탑으로 보내고 그대의 동생이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그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엘리노아 영애를 정식으로 내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해, 내 비호 아래 두고 이 사건을 함께 해결할 것인가?” 뭐? 보좌관? 그건 말이 좋아 보좌관이지, 그냥 황제 옆에 24시간 찰떡같이 붙어 다니란 소리잖아! ‘내 평온한 라이프, 진짜로 망했어……!’*“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오라버니, 일단 진정해요. 저도 지금 엄청 황당하긴 한데, 어찌 되었든 황제는 제 정체를 알고도 돌려보냈잖아요. 그리고… 사실 카시안 오빠 문제보다 더 급한 건이 있어요.”나는 아까 응접실에서 보았던 검은 실타래가 정화되었음에도 끈질기게 다시 살아나던 모습을 떠올렸다.“황궁이 아무래도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아. 작은 오빠가 말한 그 ‘불순물’이… 사실은 내 빛으로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두 오빠에게 오늘 황궁 응접실에서 목격한 그 기괴한 검은 거미줄에 대해 털어놓아야
“카시안 루체른, 당장 나와라!”그가 집무실 문을 향해 거칠게 손을 뻗자 육중한 문은 단숨에 얼음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흩날렸다.‘음, 황실 청구서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우리 집 수리비 걱정을 해야 할지도…’나는 속으로 수리비를 계산하며 조용히 큰오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히익! 형님, 형님! 진정하세요, 제발! 이건 다 거시적 관점에서 가문의 미래를 위한……!”집무실 안에서는 카시안 오빠가 소파 뒤에 처박힌 채 덜덜 떨고 있었다.그는 이미 칼라일이 돌아올 것을 예상했는지 온갖 방어 아티팩
큰오빠 칼라일의 등장은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였다.문을 통째로 날려버린 그 무식한 파괴력조차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성스러운 구원의 빛처럼 느껴졌다.칼라일은 제국의 태양이라는 카엘루스를 향해 고개만 까딱이며 최소한의 예의만 보인 뒤 빙하보다 차가운 시선으로 황제를 꿰뚫어 볼 뿐이었다.“황궁의 보안이 이토록 허술해서야. 감히 출처를 모르는 검은 벌레들 따위가 내 동생의 옷자락을 넘보게 한단 말인가.”칼라일의 살기 어린 목소리에 옆에 서 있던 기사단장 엘릭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 살기의 과녁인 카엘루스
카엘루스는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그의 눈빛은 명백히 ‘어쭈, 이것 봐라?’ 하고 말하고 있었다. 사실 나도 사람인지라 양심이 좀 찔리긴 했지만 지금은 양심보다 목숨이 우선이었다.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무언가 반박하려던 찰나였다.치익, 지지직—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고요한 응접실의 공기를 긁어 내렸다.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조금 전 분명히 정화해 냈던 벽면의 금색 덩굴 문양이 마치 도살당한 짐승의 근육처럼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었다.‘뭐, 뭐지? 분명히 빛으로 태워버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