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종로3가역 3번 출구를 나와 카페까지 걸어가는 동안, 은재는 가방 끈을 3번 고쳐 잡았다.
가방 안에는 오전에 병원에서 받은 의무기록 사본이 들어 있었다.
28장의 서류와, 그중에서 유독 이질적이었던 소견서 한 장.
서류의 무게가 가방 끈을 통해 어깨에 전해졌다.
오늘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5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가 '이상하다'는 말을 해주었다는 사실이 은재의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었다.
카페 간판이 보였다.
유리문 너머로 테이블이 절반 이상 차 있었다.
토요일 오후의 카페는 노트북을 펼친 사람들과 수다를 나누는 모임으로 붐비고 있었다.
은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 구석 자리를 잡았다.
벽을 등지는 자리.
출입구가 보이는 위치였다.
카운터로 가서 메뉴판을 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3,800원이요."
카드를 내밀고 음료를 기다렸다.
시계를 보았다.
1시 50분.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음료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얼음이 녹는 소리가 빨대 옆에서 갈라졌다.
카페 안의 웅성거림과 음악 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은재는 가방 위에 손을 올린 채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안에서 서류의 모서리가 손등에 닿았다.
2시 정각, 카페 문이 열렸다.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여자가 안쪽을 둘러보았다.
회색 코트에 어깨가 좁았고, 가방을 앞으로 안고 있었다.
은재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서은재 씨요?"
은재가 일어섰다.
"네. 앉으세요."
여자가 맞은편에 앉았다.
코트 깃을 여미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직원이 다가오자 따뜻한 유자차를 주문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가 사라졌다.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니까……기억이 나네요."
"저는 죄송하지만, 기억이 잘 안 나요."
"당연해요. 입원 기간에 간호사가 여러 명 교대하니까."
여자가 유자차를 받아들고 잔을 감쌌다.
손가락이 가늘었고, 손등에 주근깨가 있었다.
은재의 기억 어딘가에서 비슷한 손을 본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저도 신규 간호사였어요. 산부인과 병동에 배치된 지 1년쯤 됐을 때."
"……"
"서은재 씨 담당이 된 건 입원 2주차부터였어요."
"기억나시는 게 있어요?"
"경과가 좋았어요. 투약 반응도 좋고, 상담도 잘 받으셨고. 진료 기록에도 그렇게 돼 있을 거예요."
은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확인한 기록의 내용이 떠올랐다.
'자해 관념 없음. 위험 행동 관찰되지 않음.'
"그런데 퇴원 즈음에 소견서가 하나 나갔어요."
은재의 손이 컵 위에서 멈췄다.
"아까 전화에서 말씀하신……"
"네. 그 소견서에는 '자해 및 영아 위험'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진료 기록에는 위험 없다고 돼 있는데요."
"맞아요. 그래서 이상했던 거예요."
여자가 유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잔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옆 테이블과의 거리가 충분한 것을 확인한 듯했다.
"소견서가 나가는 과정을 봤어요. 보통 담당의가 작성하는데, 그때 그 소견서는……절차가 달랐어요."
"어떻게요?"
"구체적인 건 지금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제가 가지고 있는 기록을 정리해서 드릴게요."
은재의 손가락이 컵을 감쌌다.
차가운 플라스틱이 손바닥에 닿았다.
커피 얼음이 녹으며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뭔데요?"
"소견서만이 아니에요."
은재가 고개를 들었다.
귀가 뜨거워졌다.
"소견서 말고 다른 것도 있다는 건가요?"
"당시에 진술서도 같이 나갔어요. 관계인 진술이요. 그 진술서의 내용도……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달랐어요."
은재의 숨이 멈췄다.
빨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견서뿐 아니라 진술서까지.
법정에 제출된 자료가 여러 가지라는 뜻이었다.
"진술서는 누가 작성한 건가요?"
"그건 저도 확인이 더 필요해요. 시간을 주세요."
은재는 가방에서 오전에 받은 의무기록 사본을 꺼냈다.
서류 묶음에서 소견서 페이지를 찾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다른 서류와 양식이 다른 그 한 장이었다.
"이건 오늘 열람한 의무기록이에요. 여기 이 소견서 한 장, 다른 서류들과 양식이 달라요."
여자가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예요."
"이 소견서가 전화에서 말씀하신 그 소견서요?"
"네."
카페 안의 음악이 재즈에서 팝으로 바뀌었다.
은재는 소견서를 조심스럽게 파일에 넣고 가방 안에 밀어 넣었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기록을 정리해주신다고 하셨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2주 정도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사본을 만들어야 해서. 원본은 제가 보관할게요."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하나만 부탁드려요."
"네."
"아직 다른 곳에 말씀하지 마세요. 정리가 끝나기 전에 알려지면 곤란해요."
"알겠습니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자차 잔에 절반이 남아 있었다.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여자가 코트 깃을 세우고 카페를 나갔다.
유리문 너머로 회색 코트의 뒷모습이 인파 속에 섞여 사라졌다.
은재는 자리에 남아 녹는 얼음을 바라보았다.
카페 안의 소음이 다시 들려왔다.
면담 동안에는 주변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었다.
빨대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소견서뿐만이 아닌 거라고 했다.'
은재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소견서와 진술서.
2개의 서류.
5년 전에 은재의 삶을 무너뜨린 근거가 되었던 것들이 겹쳤다.
간호사가 카페를 나가기 직전에 한 말이 돌아왔다.
"진술서, 보신 적 있으세요?"
은재는 빈 잔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주일 뒤 금요일 저녁.은재는 다시 중고 서점에 갔다.도하에게 줄 그림책을 한 권 더 사려는 것이었다.2층 아동 도서 코너로 올라갔다.한지오가 있었다.같은 자리, 같은 선반 앞.이번에는 검은 니트에 면바지 차림이었다.손에 책 한 권을 들고 읽고 있었다.은재가 계단 위에서 멈추었다.한지오가 고개를 들었다."또 왔네요.""또 왔습니다."한지오가 읽던 책을 선반에 도로 꽂았다.은재가 그림책 선반 앞으로 갔다.지난번에 샀던 나무 이야기 옆에 새로운 책이 꽂혀 있었다.구름 위를 걷는 고양이 이야기."그 책 표지 좋네요. 고양이예요?""네. 구름 위를 걷는 고양이 이야기요.""아이가 고양이 좋아하면 괜찮을 거예요.""도하가 뭘 좋아하는지 아직 잘 모릅니다. 파란색 고른 것밖에.""면접 때 물어보세요. 좋아하는 동물이 뭐냐고.""그러려고요. 목록을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물어볼 것들."은재가 고양이 그림책을 꺼내 펼쳤다.그림이 수채화풍이었다.구름 위에 앉은 고양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래에는 작은 집들이 있었다.한지오가 선반 반대쪽에서 에세이 코너를 보고 있었다.은재가 그림책을 넘기다가 한지오를 보았다.서류를 볼 때의 긴장이 없었다.
금요일 퇴근 후.은재는 집 근처의 중고 서점에 들어갔다.작은 서점이었다.1층에 소설과 에세이, 2층에 아동 도서와 그림책이 있었다.은재는 2층으로 올라갔다.도하에게 줄 그림책을 찾으려는 것이었다.다음 감독 면접이 2주 뒤로 잡혔다.이번에는 간식 외에 그림책을 가져가고 싶었다.5살이 좋아할 만한 그림책을 고를 자신이 없었다.은재가 도하의 취향을 아는 것은 파란색을 골랐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2층은 좁았다.나무 선반 3개가 벽을 따라 서 있었고, 가운데에 낮은 테이블이 있었다.테이블 위에 추천 도서가 쌓여 있었다.은재는 그림책 선반 앞에 서서 제목을 읽기 시작했다.동물 이야기, 계절 이야기, 가족 이야기.가족 이야기 앞에서 손이 멈추었다.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알 수 없어서 한 권을 꺼내 펼쳐보았다.아빠와 아들이 산에 가는 이야기였다.은재는 책을 다시 꽂았다.다른 책을 꺼냈다.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친구를 찾는 이야기.그림이 부드러웠다.파란색 배경에 작은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가격표에 3,000원이라고 적혀 있었다."그 책, 좋습니다."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은재가 돌아보았다.한지오가 서 있었다.평소의 셔츠 차림이 아니었다.면 재킷에 청바지, 캔버스 운동화.은재가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변호사님?""안녕하세요."&nbs
수요일 오후.은재가 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을 때 총무팀장이 다가왔다."은재 씨, 우편물 와 있어요. 등기."총무팀장이 노란 봉투를 건네주었다.은재의 이름 옆에 회사 주소가 적혀 있었다.발신인은 ○○ 법무법인.등기 우편, 내용증명이라고 적혀 있었다.은재는 봉투를 받아 책상 위에 놓았다.동료가 곁눈으로 봉투를 보았다.은재는 봉투를 서류 밑에 넣었다."감사합니다."총무팀장이 돌아갔다.은재는 점심시간까지 봉투를 열지 않았다.점심시간이 되자 회의실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들어가 문을 닫았다.봉투를 열었다.A4 용지 2장.내용증명 우편이었다.'수신: 서은재 귀하발신: ○○ 법무법인 (권태윤 대리인)제목: 접근 행위에 대한 경고 및 중단 요청'은재가 첫 번째 문단을 읽었다.'귀하는 미성년 자녀 권도하에 대한 피해자보호명령(접근 제한)의 전력이 있는 자로서, 현재 해당 보호명령은 종료되었으나, 자녀의 생활 영역에 대한 접근은 아동의 안정적 양육 환경을 저해할 우려가 있습니다.'은재가 2번째 문단을 읽었다.'귀하가 자녀의 유치원 인근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사실상의 감시 행위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이에 즉각적인 중단을 요청합니다.'3번째 문단.'상기 행위가 지속될
한지오의 사무실.은재가 상담실에 들어서자 한지오가 서류를 펼치고 있었다.테이블 위에 서류가 3묶음으로 나뉘어 놓여 있었다."조사관 보고서 열람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은재가 맞은편에 앉았다.한지오가 첫 번째 서류를 밀어주었다."면접 보고서입니다. 조사관의 관찰 의견이 기재되어 있어요."은재가 서류를 받아 읽었다.'아동은 신청인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 간식 제공 시 자연스럽게 수용하였으며, 블록 놀이 시 신청인에게 지시하는 등 상호작용이 관찰됨.'은재의 눈이 그 문장 위에서 멈추었다.도하가 블록을 놓으라고 지시한 것이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이거 여기.'아이의 짧은 말이 법원의 언어로 '상호작용이 관찰됨'이 되어 있었다."긍정적인 내용인가요?""네. 아이가 울거나 회피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록된 것은 중요합니다. 다음 면접을 위한 근거가 됩니다."한지오가 2번째 서류를 꺼냈다."다음은 의무기록 열람 결과입니다."은재가 서류를 받았다.의무기록 사본이었다.은재의 입원 기간 기록 중 담당 의사와 다른 서명이 있는 페이지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병원 측에서 의사 명단을 제공했습니다. 이 서명과 일치하는 원내 의사는 없었습니다.""원내 의사가 아니라는 거죠?""맞습니다. 외부에서 온 의사가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보입
월요일.출근 전에 한지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조사관 보고서가 접수되었습니다. 열람 신청하겠습니다.''결과가 좋은 건가요?''보고서 내용을 확인해봐야 합니다. 하지만 면접이 중단 없이 진행된 것 자체가 긍정 요소입니다.'은재는 메시지를 읽고 핸드폰을 넣었다.출근길 지하철 안이었다.주말 동안 면접 장면을 수십 번 떠올렸다.도하의 목소리, 블록 쌓는 손, 파란 색연필.떠올릴 때마다 세부가 조금씩 흐려지는 것이 두려웠다.그래서 핸드폰 메모장에 기억나는 것을 모두 적어놓았다.아이가 말한 문장, 아이가 만진 것, 아이가 쳐다본 방향까지.퇴근 후, 은재는 도하의 유치원 근처로 갔다.면접 이후 처음이었다.느티나무가 보이는 자리에 섰다.하원 시간이었다.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하나둘 나왔다.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갔다.도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5분이 지나서 도하가 나왔다.파란 가방을 메고 있었다.면접 때 본 가방과 같은 것이었다.도하의 옆에 여자가 있었다.유세린이었다.세린이 도하의 손을 잡고 있었다.은재가 마지막으로 세린을 본 것은 5년 전 법원에서였다.세린의 머리가 길어져 있었다.묶지 않은 머리카락이 등 중간까지 내려와 있었다.세린이 도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도하가 고개
면접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다.은재는 현관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운동화를 신발장에 넣으려다 멈추었다.아침에 깨끗하게 닦아 신고 나간 운동화였다.면접교섭센터 3층까지 이 운동화를 신고 걸어갔고, 도하와 같은 방에서 1시간을 보낼 때 이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바닥에 얼룩 하나 없었다.신발장에 넣었다.주머니에서 파란 색연필을 꺼냈다.책상 위에 놓고 의자에 앉았다.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색연필의 파란색이 또렷했다.가운데 부분에 아이의 지문이 남아 있었다.작은 손가락의 흔적.은재는 그 자리를 손끝으로 만져보았다.살짝 매끄러운 표면 위의 아이 손기름.닦으면 없어질 자국이었다.은재는 닦지 않았다.'아줌마, 이거.'도하가 색연필을 내밀었을 때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 있었다.아줌마.엄마가 아니었다.은재를 부르는 말이 아줌마였다.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5년 동안 만나지 않은 사람을 엄마라고 부를 아이는 없다.은재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여동생에게도 말했었다.'안 부를 거야. 나를 모르니까.'그 말이 사실이 되었을 뿐이었다.하지만 아이가 색연필을 건넸다.아이의 손에서 은재의 손으로.12색 중에서 아이의 손이 고른 것이 파란색이었다.도하의 유치원 가방이 파란색이었다.아이가 파란색을 좋아하는지, 우연인지, 알 수 없었다.핸드폰이 울렸다.여동생이었다."어떻게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