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숙은 마을에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여자들 사이에서는 표현숙이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았다는 소문이 돌았고 젊었을 땐 다른 집 남자들을 유혹했다고도 했다.이런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면서 행패를 부리는 여자라는 이미지가 생겨 그 후로는 아무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사실 표현숙도 이 마을에 특별한 애착은 없었다.처음에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나중에는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위해 이곳에 남았다.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마을에 남아 그 무엇도 기다릴 이유가 없어졌다.그런데 오늘, 표현숙은 처음으로 이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옆에 있는 박한빈은 조용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으니까.그는 평소 위로의 말을 잘 하지 않았지만 애써 몇 마디를 꺼냈다.“사실, 제가 오늘 감사하다고 말한 이유는 성유리를 구해주신 거 뿐만 아니라... 성유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유리가 원했던 것들을요.”표현숙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외부 세계와는 다소 격리된 생활을 했던 표현숙이지만 박한빈의 경제적 여유를 알 수 있었다.박한빈이 성유리에게 준 것이 분명히 좋은 것들일 텐데 그럼에도 자신이 성유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지 고민이었다.박한빈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성유리는 어릴 때 가족과 헤어졌어요.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되어 산골 마을에 팔려 갔고 그곳에서 양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리의 양어머니는 끝까지 그녀를 지키려고 했죠. 안타깝게도 그 어머니는 유리를 보호하다가 크게 다쳐 지금까지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박한빈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유리의 친부모는 유리가 15살 되던 해에 결국 찾아냈지만 이미 집에는 다른 여동생이 있었고 유리가 양아버지에게 당한 일을 알게 된 부모는 성유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유리는 저와 결혼했어요. 하지만 그때의 저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죠.”박한빈은 어두운 얼굴로 계속 말했다
“당연히 너희들이 언젠가 도시에서 사는 삶이 지루해져서 돌아오고 싶으면 그 방은... 내가 너희를 위해 남겨둘게.”표현숙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박한빈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표현숙은 걸음을 멈췄지만 다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표현숙은 이미 떠났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았다.이곳의 경제나 발전은 금성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지만 공기는 정말 좋았다. 금성에서는 고개를 들어도 끝없이 이어지는 고층 빌딩만 보였고 달빛도 희미했다.그러나 이곳의 달빛은 매우 밝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한참 뒤, 천천히 일어나서 맞은편 집으로 걸어갔다.그는 몰랐지만 사실 박한빈이 표현숙과 대화할 때, 그 문 뒤에는 한 사람이 몰래 서 있었다. 그들의 대화는... 뒤에 서 있던 그 사람의 귀에 다 들렸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뺨에서는 차가운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한편, 연정우는 파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번 파티는 작은 규모의 축하 모임이었다. 결국, 그는 지화의 인수 작업에서 한 작은 부분을 완성한 셈이었다.박한빈의 사망 소식 덕분에 지화의 많은 오래된 주주들이 별다른 노력 없이 그를 배신했고 연정우는 이미 상당한 지분을 인수했다.이제 곧 있을 주주 총회에서도 연정우는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그쪽 상황은 이제 그의 손안에 있었다.그리고 결국 피라미드 꼭대기 위에 있던 사람이 연정우에 의해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갔다. 사실 연정우는 박한빈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그가 이렇게 죽은 채로 일이 끝나버리면... 박한빈이 너무 쉽게 죽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박한빈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다.그에게 모든 것을 하나하나 빼앗는 모습을 직접 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정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예전에 자신처럼.그는 박한빈이 이렇게
연정우가 성유리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사씨 가문의 대저택이었다. 그날 성유리는 미리 핸드폰으로 해둔 녹음으로 자신을 협박하려 했다.연정우는 당연히 성유리의 뜻대로 되게 두지 않았다. 그는 본래 성유리와 차분히 대화하고 싶었지만 성유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휴대전화를 빼앗으려는 과정에서 성유리는 계단에서 떨어졌었다. 사씨 가문 사람들이 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미 피가 사방에 흐르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연정우가 성유리를 차에 태우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연정우는 성유리를 숨기기 위해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사실 그는 이 모든 계획을 미리 세워 놓았다.만약 성유리가 의식을 잃지 않았다면 그날 밤에라도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던 것이다. 차에 태운 후, 감시 카메라에 찍히지 않도록 다른 차로 갈아탔고 그 차의 목적지는 연정우의 어머니의 고향이었다.그곳에 성유리를 돌볼 사람을 이미 준비해 두었고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진행되었다.그러나 박한빈이 금성으로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은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연정우는 그 차가 중간에 사고를 당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사고로 운전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자는 운전사 한 명뿐이었다. 차 뒷좌석에 있어야 할 성유리는 막상 흔적조차 없었다.연정우는 성유리가 차에서 튕겨져 나갔다고 생각했었다.차는 고속도로에서 떨어졌고 운전사의 시체는 온전치 못했다. 그래서 사실 이 시간 동안 박한빈뿐만 아니라 연정우도 성유리를 찾고 있었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리를 찾을 가능성은 점점 더 희박해졌기에 연정우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생각에 연정우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자신의 비열함을 알고 있었다.자신의 손은 이미 더럽혀졌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 남아있던 아주 작은 진심 모두 성유리에게 바쳤다.사실 연정우는 정말로 성유리와 함께하고 싶었다.그래서 성유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성유리가 눈앞에 서 있는
연정우가 강한 힘으로 자신의 두피를 뜯어낼 듯 당기자 여자는 참을 수 없어 비명을 질렀다.“왜 비명을 지르지? 듣기 싫은데.”연정우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여자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원래 사과라도 하려고 했지만 연정우의 눈빛에 말문이 턱 막혔다.“연 대표님, 죄송해요.”한참 뒤, 여자는 고통을 참으며 입을 뗐다.“뭐가 죄송한데요?”“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대표님이 기분이 나쁘셨다면 제 잘못이에요.”여자는 아주 재빠르고 깔끔하게 인정했다.연정우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었다.“잘 아네요. 똑똑한가 봅니다?”칭찬을 들은 여자는 즉시 웃으며 아부했다.“하지만 유리는 절대 저한테 이렇게 웃어주지 않았습니다.”연정우의 말이 끝나자 여자의 웃음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연정우의 모든 표정도 사라졌다.그의 차가운 눈빛은 마치 밤의 어두운 하늘에 숨어있는 포악한 늑대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제야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여자는 즉시 이곳을 떠나려 했지만 연정우는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여자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여자는 한밤중에 구급차에 실려 갔다. 구급차에 실려 가기 전, 연정우는 먼저 방을 떠났다. 그는 이 일이 언론에 노출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어차피 연정우는 방법을 찾아서 뉴스를 덮을 것이다. 사실 그가 직접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그를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호텔을 나선 연정우는 곧바로 차에 올랐다. 스포츠카의 엔진은 기분 좋게 울려 퍼졌고 고요한 밤 속에서 더욱 유혹적인 소리를 냈다.연정우는 더 세게 가속 페달을 밟았다. 이미 새벽 3시가 넘었으니 그가 있는 금성은 비록 '밤을 잃지 않는 도시'라 불리지만 이 시간에는 조금 적막했다.거리에 차량도 거의 없었기에 연정우는 마음껏 차를 몰았다.가속 페달을 힘껏 밟고 있는 연정우의 눈은 여전히 광기를 담고 있었다.얼마나 시간이 흐
연정우의 집안은 항상 외부에서 ‘학자 집안‘이라고 불렸다. 그가 자란 동안 그는 항상 이런 평가를 듣고 자랐다.그래서 연정우는 이런 집안에서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 집안의 법을 잘 따라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어릴 적부터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에 따라 정직하고 성실하며 품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이 모든 것들이 연정우에게는 큰 자랑거리였다. 비록 많은 부담이 따랐지만 연정우는 그에 맞는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어느 날, 그는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꾸민 비밀스러운 음모를 알게 되었다. 그제야 연정우는 깨달았다.그가 항상 알고 있던 집안의 품위와 정직은 사실 외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에 불과했음을. 그들은 겉으로는 고귀한 이미지로 포장했지 속에는 매우 더러운 진실이 숨어 있었다. 연정우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그 사실을 들추려 했으나 가정에서 큰 싸움으로 이어졌다.그의 가족은 연정우를 고지식하고 어리석다고 비난하며 손바닥까지 때렸었다. 그들은 연정우에게 가르친 정직과 성실이 구식이고 어리석다고 말하며 그를 비웃었다.그러나 그때 연정우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그렇다면 그동안 저에게 가르치신 교육들은 무엇이었습니까?”결국 연정우가 알게 된 것은 그가 자라온 세상 자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사실이었다.연정우는 어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그렇게 썩어 있는 줄 몰랐다. 그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가진 겉모습에만 신경을 썼지만 사실 그들의 속은 이미 타락해 있었다.이 깨달음은 연정우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는 점차 이 세상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에 대해 믿을 수 없고 충격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정우도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성인이 된 연정우는 이제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놀라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얻은 것과 그가 감수해야 했던 대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연정우가 원했던 만큼 얻은 것이 적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잠시 후, 금미라는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맞는 말이네. 만약 그 여자가 진짜라면 성유리였다면 네가 사람을 때려 병원에 보낼 일이 없었을 텐데.”연정우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마치 금미라의 말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그런데 이렇게 되면 더 문제야! 만약 성유리가 아니라면 왜 이런 불필요한 일을 만들었어?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알아?”금미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제가 시간을 빼서 병원에 찾아온 건 결국... 이런 말을 듣기 위함입니까?”연정우가 말을 짜증 섞인 목소리로 금마리의 말을 뚝 끊어버리자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몇 초 후, 금미라가 다시 말했다.“나는... 너를 걱정해서 그런 거야. 네가 지금까지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만약 이 일 때문에 너의 모든 걸 잃게 된다면... 너도 알지?”“너무 불필요한 걱정이시네요.”연정우는 금미라의 말을 다시 끊어버렸다.“이런 작은 일로 저를 잡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머니께서 걱정하는 건 제가 어머니께서 말한 그 여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거죠?‘연정우의 말에 금미라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 연정우는 자신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죄송하지만 저는 그 여자들을 만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연정우는 단호하게 말했다.“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만날 일이 없을 겁니다. 제 인생을 어머니께서 통제하려 하지 마세요. 아시겠습니까?”연정우의 말에 금미라는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러다가 있는 힘껏 옆에 있는 가구를 발로 차며 외쳤다.“너 이게 무슨 말이야? 연정우, 나는 네 엄마야. 근데 지금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야?”“어릴 때부터 내가 너를 어떻게 교육했는지 기억 안 나? 이게 바로 내가 너를 교육한 결과니?”연정우는 처음에 돌아서려 했지만 금미라의 말에 갑자기 발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어젯밤 자신이 꾼 꿈이 떠올랐다.그 꿈속에는 모든 걸 기대하고 있었던 소년이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밤이 깊어지고 도시에는 화려한 불빛들이 하나둘 켜졌다.이번 연회는 채 회장의 개인 와인 농장에서 열렸다. 연정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앞마당에는 다양한 고급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샴페인 향기가 코를 찔렀다.현장에는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모여 있었는데 일종의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연 대표님 오셨습니까?”1년 전만 해도 연정우가 이런 곳에 온다면 아마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제는 연정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대화를 시작했다.이 사람들은 바람을 잘 타는 가식적인 사람들이다.연정우는 속으로 그들을 경멸했지만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채 회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채 회장님.”소리를 들은 남자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그는 눈으로 연정우를 스캔한 후, 마치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말했다.“아, 당신이군요. 연 대표님!”채 회장 앞에는 몇몇 고령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상회에 고정된 멤버들이자 이 업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다.채 회장은 연정우를 팔짱을 끼고 끌어들여 모두에게 소개했다."여기 계신 이분은 연정우 대표님입니다. 장성 그룹의 창립자이죠."“장성 그룹? 요즘 정말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그 그룹 말인가요?”“맞아요. 창립자가 이렇게 젊을 줄은 몰랐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사람들은 모두 연정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들의 시선은 분명한 찬사를 담고 있었다. 그들의 칭찬에 연정우는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여러분. 과찬이십니다."“연 대표님과 사 대표님 관계가 좋아 보이던데... 사 대표님은 오늘 오시지 않았나요?”그들의 말이 끝나자 모두 연정우의 뒤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연정우는 웃으며 대답했다.“최근에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오늘은 오시지 못했어요. 지나치게 즐기려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저는 아직 후계자가 없어서 쉴 수 없죠.”“후계자
시끄러운 소리에 채 회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처음에는 누군가 소란을 피우러 온 줄 알았다.보디가드를 시켜 나가보라고 할 참이었지만, 그 순간 마주 오는 사람을 보고 움직임이 멈췄다.검은색 슈트에 안에는 하얀 셔츠를 입어 깔끔하고도 단정하지만 손에 부상이 있는지 재킷은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단정하게 올린 머리, 뚜렷하고 날카로운 이목구비. 완벽한 얼굴선과 강렬한 존재감은 그 순간 파티장의 모든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다.그리고 그와 함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바로 연정우였다.다른 사람들은 놀랐지만 오직 연정우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당황하고 있었다.‘이게 뭐지? 박한빈이... 살아 있다고?’‘아니, 이건 말도 안 돼.’만약 박한빈이 살아 있었다면 연정우가 보내둔 사람들이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아니, 정말 살아 있었다면 그동안 자신이 벌인 일에 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은 명백히 박한빈이었다.연정우는 지금 자신이 혹시 꿈을 꾸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박... 박 대표님?”숨 막히는 정적을 깨뜨리며 채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그의 목소리에는 박한빈의 등장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선명한 불신이 담겨 있었다.박한빈은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그리고 마침내, 채 회장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손을 쓱 내밀었다.“채 회장님, 오랜만입니다.”익숙한 억양, 익숙한 목소리. 그리고 그 익숙한 미소, 더불어... 그 눈빛까지.연정우는 여전히 술잔을 쥐고 있었지만 손끝에 힘이 들어가 유리잔이 금방이라도 깨질 듯했다.“박 대표님... 그동안 어디 계셨던 겁니까?”채 회장이 모든 사람이 궁금해하는 질문을 대신 던졌다.“아, 그냥 한동안 어디서 휴가를 좀 보내고 있었습니다.”박한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그쪽 신호가 별로라서요. 돌아오고 나서야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습니다.”그는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마침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