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아가 아직 반씨 가문 사모님이었다면 반씨 가문 홍보팀에게 주의를 줬겠지만, 오늘 벌어진 일은 모두 반하준의 잘못이고 부신 그룹이 흔들려도 그녀와 아무 상관 없었다.강민아는 중환자실 입구에 서서 병상에 누워 있는 민이를 유리 너머로 바라보았는데, 기구들과 새하얀 이불에 덮여있는 아이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강민아의 귀에는 민이가 두세 살 때 병원에서 강민아의 허리를 붙잡고 작은 몸을 그녀의 품에 파묻은 채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그때만 해도 그녀밖에 모르던 아이였다.어느새 강성진이 강민아 앞에 다가왔고, 강민아는 그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벨트를 차갑게 바라봤다.“옴 테크의 임원들이 벌써 나한테 연락이 왔어. 네가 강승 테크 대표로 나가서 인수에 대해 상의했으면 좋겠다네.”강성진은 강민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피식 웃었다.“다음 주에 회사로 나와. 부사장 자리를 줄게.”딸이 유명한 카레이서 루나이고, 다국적 거대 자본인 옴 테크의 눈에 들자 강성진은 눈가에 번지는 탐욕을 감추지 못한 채 히죽 웃었다.“역시 내 딸이야!”그가 강민아의 어깨에 손을 대려고 하자 강민아는 곧장 손을 들어 그의 손을 쳐냈다.“건드리지 마요. 역겨우니까.”강민아는 강성진에 대한 역겨움을 숨기지 않았다.“너!”강성진은 욕을 하려다 자기 손가락에 강나현의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았다.강민아도 여자라 손에 묻은 피를 보면 무서울 거다.딸이 자신에게 가져다줄 큰 혜택을 생각하며 강성진은 강민아를 보면서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그래그래, 손 씻고 올게. 민아야, 넌 역시 내가 가장 아끼는 딸이야. 우리 우강 그룹의 미래가 너에게 달렸어!”강민아는 속이 메스꺼운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했다.“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우강 그룹의 미래는 저한테 맡겨요!”...연진숙은 강민아와 정이를 보내고 병원 복도에 앉아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언론사 몇 군데 찾아서 반씨 가문 도련님이 중환자실에 있는데 엄마인 강민아는 곁을 지키지도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연 회장님, 죄송합니다만 상부로부터 여사님에게 칭호를 수여하지 않기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연진숙은 심장이 철렁하며 서둘러 물었다.“누가 날 제보했어요?”설마 강민아가 정말 그녀에게 불리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걸까?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강민아가 7년 동안 반씨 가문에 있으면서 첩자 노릇이라도 했던 건 아닐까.“연 회장님, 아드님은 경찰에게 잡혀갔고 인터넷에서는 악덕 시어머니라고 욕하는데 이런 여론 속에서 우리 부녀연합회는 선을 그을 수밖에 없습니다.”“위원장님...”연진숙이 말을 잇기도 전에 상대방은 전화를 끊었다.연진숙이 다시 전화를 걸려는데 이번엔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적십자사 직원이 걸어온 전화에 연진숙의 마음속에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여보세요.”“연 회장님, 죄송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댓글을 감안해 명예 위원장 명단에서 회장님 이름은 지워야겠습니다.”연진숙의 심장이 쿵쾅거렸다.“어떻게 이럴 수가...”그녀가 말하려는 순간 잇달아 다른 전화가 걸려 와 통화버튼을 누르기 바쁘게 자선단체에서 맡았던 그녀의 직책도 내놓으란다.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비서에게 물었다.“내가 뭘 잘못했는데?”...그날 밤 강나현의 SNS 계정은 폐쇄되었지만 강나현이 5살 아이와 오토바이를 탔다는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강민아는 집에 있던 중 반용화의 전화를 받았다.“석현이가 자기 대신 위로의 말을 전해달래.”눈 덮인 산 정상에서 녹아내리는 맑은 샘물처럼 그의 목소리가 강민아의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멀리 울려 퍼지는 그의 말은 다소 내키지 않는 것처럼 들렸다.강민아가 답했다.“전 괜찮아요.”“경기는 아주 잘했어.”반용화가 덧붙였다.“석현이가 하는 말이야.”강민아는 입술을 말아 올리며 물었다.“반하준이 경찰에 연행돼서 조사받는 걸로 부신 그룹 주가가 흔들릴 텐데, 선생님께도 영향이 있을지 걱정되네요.”그녀는 반용화를 유난히
며칠 후.강민아와 육성민, 윤세현이 승용 건물 꼭대기 층 사무실에 모였다.이곳은 서경의 신흥 개발 지역으로, 66층 통유리창 앞에 서면 멀리 드넓은 부두와 선착장이 보이고 대형 화물선들이 해수면을 지나 천천히 항해하고 있었다.육성민은 의자 뒤편에 정장 재킷을 던져놓고 몸에 꼭 맞는 테일러 셔츠만 입은 채 넥타이를 매지 않고 자연스럽게 옷깃을 풀어 헤쳐 구릿빛 피부와 반듯한 쇄골을 드러냈다.소매를 걷어 올리자 근육이 잘 발달한, 힘 있고 탄탄한 팔이 드러났다.그는 다리를 약간 벌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내가 소유한 센트럴 이노베이션이 이미 강승 테크 인수전에 참여했지만, 센트럴이 옴 테크보다 높은 인수 가격을 제시하더라도 강성진이 센트럴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어. 단기간에 강성진이 옴 테크를 버리고 다른 회사에 강승 테크를 팔게 하기는 어려워.”강민아는 3인용 소파에 앉아 손에 쥔 정보를 훑어보았다.“난 강성진이 완전히 믿을만한 사업가가 필요해. 다른 기업에서 강승 테크를 인수해도 강성진에게 거대한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믿게 할 사람.”하지만 강민아는 강성진의 모든 인맥을 살펴보고 그가 믿을만한 사람을 찾긴 했어도 마음 놓고 그들에게 일을 맡길 수 없었다.육성민과 윤세현의 경우 두 사람의 이름으로 상장된 회사가 있긴 했지만, 두 사람이나 그 밑에 있는 사람들 모두 강성진의 경계를 늦추기에는 역부족이었다.그때 방문을 두드리며 비서가 문 앞에 서서 보고했다.“대표님, 심 대표님 오셨습니다.”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강민아를 향해 곧장 걸어왔고, 그가 다가오자 마치 순백의 불빛이 사무실 전체를 환하게 비추는 듯했다.“심은호 씨는 절 보러 오셨어요?”강민아는 육성민이 심은호도 부른 걸 모르고 있었다.남자는 그녀 앞에 서류 하나를 건넸다.“제 명의로 된 페이퍼 컴퍼니인데 강승 테크를 4천억에 인수하려고 합니다.”강민아는 심은호로부터 계획서를 받아 들고 이렇게 말했다.“옴 테크보다 두 배나 높은 가격이지만 이렇게 높으면 오히려 강성진이
“심은호 씨, 나 좋아하죠?”강민아의 물음은 직설적이고 대담했다.남자의 귓불이 순식간에 붉어지며 테이블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인 그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에 살짝 떨림이 느껴졌다.하지만 이미 목구멍에서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네, 좋아해요.”그는 이 말을 하면서 강민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드넓은 은하수처럼 반짝여 강민아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으며 그의 찬란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심은호는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았다.이 순간 온 세상이 조용해졌다.“내가 언제 그 쪽한테 끌렸는지 알아요?”강민아는 생각에 잠겨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루나로 출전하는 대회마다 1등을 했을 때요?”심은호가 웃었다.“서경대 단상에 올라가서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을 때, 트랙에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던 때, 사랑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던 때,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학교와 반씨 가문을 오가며 바쁜 삶을 살던 때... 민아 씨 삶의 매 순간이 좋아요. 매일, 매년 늘 활기차게 인생을 살아가니까. 반하준한테 법원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할 때는 더 좋아졌고요.”윤세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은호의 노골적인 고백에 귀를 기울였다.육성민은 온몸이 저기압에 잠식되어 있었다. 강민아의 명령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저 자식을 통유리창 밖으로 던져버릴 수 있었다.“지금 민아한테 연애하자고 강요하는 겁니까?”육성민의 말투는 불친절했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앞의 남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듯 살벌했다.하지만 심은호는 오로지 강민아에게만 집중하며 육성민을 무시했다.“다 큰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고 연모하는 마음을 숨겨야 하나요? 하지만 내 마음에 대답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쪽을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고, 이런 내 감정에 책임져야 하는 사람도 나니까. 그래도 민아 씨에 대한 내 마음이 불편하고 불쾌함을 안겨줬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거겠죠. 민아 씨 마음이 편하도록 내가 한발 물러나 있을게요.”강민아는 심은
말하는 순간 심은호는 두 손을 꽉 말아쥐며 심장이 흠칫 떨렸다. 뜨거운 열기가 가슴 속에 퍼져나갔다.너무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닐까.강민아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진 않을까.고개를 숙인 그는 조용히 강민아의 ‘심판’을 기다렸다.오로지 모든 걸 강민아에게 맡겼다.“만약 우리가 정말 연인 사이라면 그걸 미끼로 강성진을 유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강민아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강승 테크를 손에 넣는 날 우리 협업도 끝나는 걸로 하죠. 그때 대외적으로 헤어졌다고 말하고 심은호 씨는 더 이상 제 남자 친구가 아닌 거예요.”그녀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심은호는 목이 바짝 말랐다.“그러면 제가 한 달 동안 민아 씨 남자 친구가 되어줄게요.”강민아가 심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그쪽이 말한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감정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거예요. 내가 당신에게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꺼이 그것을 경험하고, 느끼고, 당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게요.”강민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심은호가 손을 맞잡기를 기다렸다.심은호는 손을 뻗어 강민아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그러다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듯 이내 다시 손을 거두었다.흥분한 나머지 테이블 위를 마구 굴러다니고 싶었다.귀는 핏빛으로 묽게 물들었고 코끝에서는 뜨거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심은호는 다시 한번 강민아의 손끝을 매만지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손을 빼낸 그가 강민아와 맞닿은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듯 빤히 자기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잘 부탁해요. 여친님.”육성민은 날카로운 눈썹을 들썩이며 튀어나오는 욕설을 간신히 참았다.윤세현은 강민아 옆에 앉더니 강민아의 손가락을 자기 손으로 가져가 만지작거렸다.“저렇게 욕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봐.”그녀는 강민아에게 속삭였다.“심은호 씨 때문에 나까지 당황했어.”강민아도 작게 대꾸했다.“나도 처음 봐. 근데 생각해 보면 경험해 봐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
이어서 윤세현에게 말했다.“그쪽도 승진해서 그다음 후궁이 됐고.”육성민은 관자놀이가 지끈거렸고 얼굴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일어나서 가려던 강민아가 무심하게 물었다.“왜 우리 오빠와 세현이한테 별명을 지어줬어요?”심은호는 그녀를 따라 문을 나섰다.“여친님이 싫다면 그렇게 안 부를게요.”별명이 아니라 서열이니까 뒤에서 몰래 부르면 그만이다.강민아와 심은호가 떠난 후에야 윤세현은 입을 열었다.“심은호 씨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게 좀 수상하지 않나요?”육성민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저 히죽거리는 얼굴 좀 봐요.”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입찰 제안서를 집어 들었다.“지금 민아 편에서 강성진의 믿음을 얻고 우리도 믿을만한 사람은 심은호밖에 없어요.”윤세현은 곰곰이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강민아와 심은호가 차에 타자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비추었다.“민이 깨어났어요. 알아요?”심은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강민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민이가 깨어나고 강기성이 문자 보냈어요.”민이가 사고를 당한 날 이후 강민아는 더 이상 정이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연진숙은 말이 통하지 않으니 정이를 데리고 가봤자 원수처럼 대할 게 분명하고, 게다가 여러 자선단체의 명예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어 강민아를 보면 가죽이라도 벗길 기세로 달려들 것이다.그녀가 가서 연진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민이가 쉬는 데 영향을 끼치는 것도 당연했다.“전 할 만큼 했어요.”...오늘 정광사는 또 한 번 반씨 가문의 등장으로 대외 손님을 받지 않았다.연진숙은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입으로는 염불을 외웠다.휠체어에 앉은 민이는 손발에 깁스를 하고 목에는 고정기를 차고 있었다.머리를 밀고 거즈로 여러 겹 감은 채 초췌한 얼굴이었다. 향 타는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 숨을 쉴 때마다 팔다리에 아득한 통증이 동반되었다.이제 깨어난 지 사흘밖에 안 됐는데 연진숙은 서둘러 아이를 정광사로 데려와 부처
이른 아침, 검은 치타처럼 생긴 마이바흐 S클래스 세단이 강승 테크가 있는 건물 아래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자 훤칠한 다리가 나타나며 반짝이는 가죽 구두가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짙은 회색의 수제 맞춤 정장을 몸에 딱 맞게 재단한 심은호가 차에서 내렸다.그는 뒤돌아 차에서 내리려던 강민아에게 손을 내밀었다.“여친님.”강민아는 이미 역할에 몰입한 그의 모습에 웃으며 손을 뻗어 남자의 넓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심은호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선 강민아 뒤로 센트럴 이노베이션의 인수 프로젝트 담당자와 감사, 재무, 세무팀 직원들이 동행했다.기세는 대단했다.강민아와 심은호가 맨 앞에서 걸어가고 센트럴 담당자는 두 사람을 몇 번이나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강민아는 날렵하고 곧게 뻗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가 돋보이는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담당자는 강민아와 심은호가 같은 브랜드의 정장을 입고 나란히 걸으며 거대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새삼 흐뭇한 광경이었다.강민아는 강승 테크에 두 번이나 왔던 터라 회사 내부 구조가 익숙한지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엇?”데스크 직원이 그들을 보고 하이힐을 신은 채 달려왔다.“왜 엘리베이터를 눌러요? 예약했어요?”강민아가 돌아보며 대꾸했다.“새로 온 부사장 강민아입니다.”“그쪽이 그렇다면 그런 거예요? 난 오늘 부사장이 온다는 연락 못 받았어요.”강민아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직원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봐선 누군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게 분명했기에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데스크 직원이 소리를 지르며 버튼을 누르더니 강민아를 밀치려고 했다.하지만 강민아에게 닿기도 전에 하나같이 건장한 센트럴 쪽 사람들이 강민아 앞을 막아 나서며 둘 사이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감사팀, 재무팀, 세무팀 직원으로 온 이들은 모두 퇴역한 군인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서 있기만 해도 한낱 직원을 압도하긴 충분했다.강민아와 심은호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뒤 강민아가
그녀를 바라보는 심은호의 별처럼 반짝이는 깊은 눈동자엔 늘 그녀뿐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고 강민아가 걸어 나왔다.그녀는 회의실 쪽으로 곧장 걸어가면서 뒤따라오는 센트럴 이노베이션 사람들에게 지시했다.“3분 안에 모든 임원들을 회의실로 모이게 하세요.”그녀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고, 그들은 제각기 임원들을 붙잡아 회의실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당신들 누구야?”“이 손 안 놓으면 경찰을 부를 거야!”몇몇 임원들은 언쟁을 벌이며 얼굴까지 빨개졌다.회의실로 끌려간 그들은 타원형 회의 테이블의 맨 상석에 앉아 있는 강민아를 발견했다.가녀린 체구에 부드러운 눈매를 가졌지만 상석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모두를 뒤흔들었다.임원들은 모두 강민아를 알아봤고 그중 몇 명은 강민아의 친척이기도 했다.“민아야, 네가 우리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켰니?”“민아야, 이건 무례한 행동이지.”강민아는 손을 들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회의 시간인데 다들 지각했으니 보너스 30% 삭감할게요.”“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 보너스를 깎아?”강씨 성을 가진 한 임원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데 그때 강성진도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그는 씩씩거리며 강민아를 보자마자 다그쳐 물었다.“지금 반항하는 거냐?”강민아는 부드럽게 말했다.“아버지, 아버지께서 직접 저를 부사장으로 임명하고 인수 프로젝트 담당자로 선정했잖아요. 제 일에 협조해 주세요.”강성진은 강민아를 세 살짜리 어린애 취급하듯 무시하며 비웃었다.“그래, 이참에 기어오른다 이거지? 언제까지 시건방 떨 수 있는지 두고 보자.”말을 마친 강성진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심은호가 있는 걸 눈여겨보고 강민아와 얘기를 나누면서 캐비닛으로 걸어가더니 거기서 시가 한 상자를 꺼냈다.그러고는 심은호에게 시가를 건네며 아부 섞인 미소를 지었다.“도련님, 바쁠 텐데 웬일로 시간을 내서 제 딸과 함께 오셨어요?”심은호는 섬섬옥수로 시가를 집어 들며 조용히 콧방귀를 뀌었다.“강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