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원래 그렇게 말을 안 들어요?”
도아윤은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조금 전까지 런던의 유명 기업 HR 그룹에서 계약 조건을 논의하던 남자였다. 잘생긴 외모만큼이나 차갑고 냉정한 태도로 자신을 상대하던 사람. 그런데 그 남자가 지금은 친구의 집 현관에서, 그것도 자신과 불과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그가 올리비아의 오빠라는 사실이었다. “……이사님.” “네.” “혹시 원래 이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으세요?” 레이 컨덜튼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남의 일이라.” “네. 제 손목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손을 다쳤으면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게 그렇게 불쾌했습니까?”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말투가 꼭 제가 초등학생이고 이사님이 선생님인 것 같아서요.” 레이는 잠시 아윤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말을 잘 들으면 되겠군요.” “…….” 아윤은 깨달았다. 이 남자와는 말싸움을 해봤자 자신만 피곤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두 사람 사이로 올리비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잠깐만. 너희 뭐야?” “뭐가?” 아윤이 돌아봤다.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처음 만나는 사람들 같지가 않아?”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아니니까.” 레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올리비아의 눈이 커졌다. “뭐?” “오늘 회사에서 만났어.” “회사?” “DW 입점 계약.” 아윤이 덧붙였다. “HR에서 미팅했거든.” 올리비아는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다 손뼉을 쳤다. “아! 오늘 오빠가 그 미팅에 들어간 거야?” “응.” “대박!”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지 올리비아는 혼자 신이 났다. “그럼 잘됐네! 윤, 우리 오빠 어땠어?” 아윤의 입이 다물어졌다. 레이가 느긋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궁금하네.” “…….” “나도 듣고 싶은데.” 아윤은 억지로 웃었다. “아주.” 한 박자 쉬었다. “인상 깊으셨어.” 올리비아가 눈을 반짝였다. “진짜?” “응.” “어떤 점이?” 아윤은 레이를 똑바로 바라봤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성격이더라.” 레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싸웠어?” “아니.” “아닙니다.”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아윤은 그제야 확신했다. 앞으로 이 남자와는 가급적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 저녁 식사는 생각보다 화기애애했다. 적어도 아윤이 레이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을 때는 그랬다. 컨덜튼 부인은 아윤을 보자마자 직접 만든 수프를 내어주었고, 로빈은 자신이 오늘 그린 그림을 보여주겠다며 그녀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 “윤 누나, 이거 봐!” 로빈이 작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림에는 머리가 유난히 크고 팔이 긴 여자 하나와 그보다 훨씬 작은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윤은 진지하게 그림을 살폈다. “우와. 이거 누구야?” “누나!” “나?” “응!” “너무 예쁘다.” 로빈이 활짝 웃었다. “그리고 이거 나!” 아윤이 작은 사람 그림을 가리켰다. “이게 우리 로빈이야?” “응!” “그럼 옆에 있는 커다란 동그라미는?” “케이크!” “아하.” “누나랑 같이 먹을 거야!” 아윤은 로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누나가 제일 큰 조각 줄게.” “진짜?” “응.” “사랑해!” 아이가 두 팔을 벌렸다. 아윤은 망설임 없이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누나도 사랑해.” 그리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이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윤은 아이를 안고 있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던 여자였다. 계약 조건 하나를 두고도 상대방의 논리를 끝까지 반박했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날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눈가를 접어 웃으며 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있었다. 그가 처음 만난 도아윤은 어느 쪽일까. 회의실에서의 여자. 지금 눈앞의 여자. 아니면. 삼 년 전 빗속에서 울고 있던 여자. 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오래 바라봤다. “오빠.” 올리비아가 불렀다. “……왜.” “뭘 그렇게 봐?” 레이가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윤 예쁘지?” 아윤이 수프를 먹다 멈췄다. “야.” 하지만 올리비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윤 진짜 예쁘지 않아?” 레이가 아윤을 바라봤다. 아윤은 눈으로 경고했다. ‘대답하지 마.’ 그런데 레이는 오히려 천천히 웃었다. “예쁘네.” “…….” 아윤의 손이 멈췄다. 올리비아가 신나서 웃었다. “그치?” “응.” 레이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순간 아윤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보다요?” “네.” “그 말은 꼭 안 하셔도 됐을 텐데요.” “칭찬인데.” “칭찬을 참 특이하게 하시네요.” 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분 나빴습니까?” “아니요.” 아윤이 환하게 웃었다. “앞으로 안 들으면 되겠네요.” 컨덜튼 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레이, 윤 놀리지 마.” “놀린 적 없는데요.”아윤은 레이를 바라봤다.레이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왜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가 웃었다.“그냥 조금 신기해서.”“뭐가요?”“그날 비가 안 왔으면 우리 못 만났을 수도 있잖아요.”레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겠죠.”“그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레이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그래서.”그가 천천히 말했다.“나는 그날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아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아윤 씨를 만났으니까.”그 말이 끝나는 순간.톡.빗방울 하나가 아윤의 뺨에 떨어졌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이어서 두 번째.세 번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어?”아윤이 손을 뻗었다.“진짜 오네.”레이가 주변을 둘러봤다.가까운 곳에 건물의 차양이 보였다.“이쪽으로.”그가 아윤의 손을 잡았다.“……!”아윤은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봤다.레이도 곧바로 멈췄다.“괜찮습니까?”아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큰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다.따뜻했다.삼 년 전.비 오는 거리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던 손처럼.아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제야 레이가 그녀와 함께 걸었다.두 사람은 건물 차양 아래로 들어갔다.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레이는 휴대전화로 운전기사에게 연락한 뒤 아윤을 돌아봤다.“조금만 기다리죠.”“네.”아윤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 순간 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잠깐.”“네?”그가 손을 들었다.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레이의 손끝이 그녀의 관자놀이 가까이 다가왔다.젖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붙어 있었다.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손끝이 피부를 스쳤다.아윤의 숨이 멈췄다.“…….”레이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눈이 마주쳤다.차양 아래는 생각보다 좁았다.한 걸음만 움직이면 서로의 어깨가 닿을 거리였다.레이의 시선이 아윤의 눈에 머물렀다.그리고 아주 천천히.입술로 내
그런데 안전벨트를 당기는 순간 손목이 욱신거렸다. “아.”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레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직 아픕니까?” “조금요.” 레이가 몸을 숙였다. “제가 하죠.” “아니, 혼자 할 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멈췄다. 아윤을 바라봤다. “해도 됩니까?” 아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제야 레이가 상체를 숙였다. 순간 아윤의 숨이 멈췄다. 가까웠다. 예상보다 훨씬. 그의 어깨가 아윤의 시야를 가렸고, 코트 안쪽으로 부드러운 향이 스쳤다. 레이는 안전벨트를 당겨 그녀의 어깨와 허리 앞으로 넘겼다. 손끝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움직임이 오히려 아윤을 더 의식하게 만들었다. 딸깍. 벨트가 채워졌다. 하지만 레이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윤의 목걸이가 안전벨트 아래에 걸려 있었다. “잠깐.” 그가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손가락이 쇄골 아래의 체인에 아주 잠깐 닿았다. 아윤의 어깨가 움찔했다. 레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불편합니까?” 아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불편한 건 아니었다. 다만.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아니요.” 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윤은 차 문이 닫힐 때까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사람.’ 정말 위험했다. ⸻ 레이가 데려간 곳은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다. 유명한 호텔이나 화려한 고급 식당일 거라고 예상했던 아윤은 조금 놀랐다.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테이블마다 놓인 생화와 부드러운 조명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강물이 천천히 흘렀다. “여기 자주 오세요?” 아윤이 물었다. “가끔.”
[보고 싶어서.] 도아윤은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다섯 글자를 벌써 열두 번째 읽고 있었다.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상대방이 잘못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에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영국식 농담인가 싶었고, 네 번째부터는 슬슬 화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화가 나는 척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대체 뭐야.” 아윤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았다. 목욕을 마친 뒤라 머리카락은 아직 조금 젖어 있었고, 무릎에는 가벼운 담요가 덮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캐모마일 차와 오늘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 그리고 수정 중인 주얼리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미 노트북을 열고 내일 일정을 정리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문제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내일 점심시간 괜찮습니까?] [무슨 일인데요?] [식사.] [왜요?] [보고 싶어서.] 다시 읽어도 이상했다. 업무적인 이유도 없고, 계약 조건을 추가로 검토하자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어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너무 직접적이잖아.” 그것이 문제였다. 레이 컨덜튼은 지금까지 아윤이 만난 남자들과 달랐다.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게 굴다가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걱정했다는 말도 그랬다. 보고 싶다는 말도.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레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낮에 작업대 앞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뒤로 넘어지려는 자신을 붙잡아 주던 팔, 허리를 받치던 단단한 손바닥, 가까워진 얼굴과 입술에 잠시 머물렀던 시선까지. 그때 레이는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상대방을 확인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야.’ 아윤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착각하지 마.’ 삼 년 전의 일이 있은 뒤, 그
레이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생각보다.” “…….” “잘 넘어지네요.” 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네?” “어제도 그렇고.” “…….” “오늘도 그렇고.” 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사님.” “네.” “지금 저 놀리세요?” 레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아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재수 없어!’ 방금 잠깐이라도 두근거렸던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 레이가 돌아간 뒤에도 아윤은 한동안 작업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완성된 수정 스케치가 눈앞에 있었다. 레이가 그린 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훌륭했다. 그녀가 설명한 곡선의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했고, 수정 방향도 제대로 반영했다. 문제는. 그걸 그리던 사람이었다. 아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 “……하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그의 가슴에 닿았던 손이었다.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단단했던 감촉. 허리를 받치던 손. 가까이서 바라본 눈. 그리고 잠깐 입술에 머물렀던 시선. “미쳤어.” 아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짜 왜 이래.” 그때 문이 열렸다. “대표님?” 엘리스였다. 아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엘리스가 멈칫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안 놀랐는데요.” “얼굴이 빨개요.” “더워서요.” 엘리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지금 실내 온도 스물한 도인데요.” “제가 더위를 많이 타요.” “대표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잖아요.” “…….” 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엘리스.” “네.” “오늘 회의 자료는요?” 엘리스가 피식 웃었다. “말 돌리시는군요.” “업무 얘기예요.” “알겠습니다.” 엘리스는 자료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케치북을 보았다. “어? 이거 수정하셨네요?” “응.” “손목 괜찮으세요?” “레이 이사님이 그려주셨어요.” 엘리스의 손이 멈췄
“그런데 말하지 못한 사랑이라.” 아윤이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잖아요.” 그녀는 첫 번째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는 고백하기 전의 마음을 담아 선물하고, 누군가는 오래 함께한 사람에게 말없이 전하고 싶을 수도 있겠죠.” “말보다 물건이 더 솔직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럴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레이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목걸이의 구조를 살폈다. “그런데 여기.” 그가 중앙의 보석을 가리켰다. “두 곡선이 끝까지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닿지 않은 마음이니까요.” “그렇군요.” 레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이건 완성되지 않은 사랑입니까?” 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레이의 눈이 아윤에게 향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네.” “고백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를 텐데.” “그러니까 이걸 선물하는 거죠.” 아윤이 웃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 전해 달라고.” 레이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야기네요.” 아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다만.” 그 말에 아윤의 미소가 멈췄다. ‘역시.’ 레이는 태블릿을 들었다. “현재 디자인만 보면 그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 “컨셉 설명을 읽기 전에는 평범한 커플 목걸이와 구별하기 어렵군요.” 아윤은 순간적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문제 때문에 수정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맞아요.” 레이의 눈썹이 올라갔다. “인정하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아윤은 새로운 스케치를 꺼냈다. “그래서 이렇게 수정하고 있어요.” 레이가
도아윤은 그날 아침, 자신의 손목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였다. 그것도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사람. 레이 컨덜튼. “……왜.” 아윤은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생각나는데.” 세면대 옆에는 하얀 손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삼 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지만 어젯밤 이후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손수건 모서리에 새겨진 R.C.라는 글자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그 글자를 볼 때마다 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 짙은 눈동자. 사람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웃던 입술. 그리고 이상하게 다정했던 목소리. ‘오래됐다고 안 아픈 건 아니죠.’ 그 말을 떠올리자 아윤은 손수건을 집어 서랍 안에 넣었다. 달칵. “그만.” 아무도 없는 욕실에 대고 선언했다. “도아윤, 정신 차려.” 레이가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계약 협상을 할 때도 그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성격까지 좋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굳이 자신과 만날 때마다 말싸움을 벌이는 남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아윤은 스스로의 결론에 만족하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거울을 다시 봤다. “……그래도 웃을 때는 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아, 진짜!” 그녀는 머리를 대충 묶고 욕실을 나왔다. 오늘은 바빴다. 새 컬렉션 디자인 수정도 끝내야 했고, HR과 논의한 입점 계약의 세부 조건도 검토해야 했다. 무엇보다 손목을 확인하러 병원에 가야 했다. 레이가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자신의 손은 소중한 업무 자산이었으니까. 그런 이유였다. ⸻ “다행히 골절은 없습니다. 가벼운 염좌로 보이네요.” 의사의 설명을 들은 아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작업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