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밤공기는 차분했고,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서 있던 가희가 태하의 차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가희는 웃었지만, 태하는 차에서 내리면서도 웃지 않았다. “무슨 중대한 진술이라도 받으러 온 거야?”“백가희.”“뭐야… 혹시 나… 뭐 잘못했어?”“응.”순식간에 긴장감이 몰려온 가희가 마른침을 삼켰다.방금 전까진 엄청나게 설렜는데, 진짜로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어서.“뭔데 그래? 일단 미안해.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바보같이… 나를 왜 아직도 좋아해.”“….”가희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설마 또 거절인가? 너무 자주 귀찮게 했나? 오늘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나?별의 별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눈물이 찔끔 맺힐 듯 말 듯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이 태하의 눈에는 너무나 작고도 애처로워 보였다. 팔을 벌려, 가희를 품안에 꼭 안아주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오, 오빠…”“늦었지만, 우리 이제라도 제대로 시작해 보자.”결국 참아왔던 눈물이 안도의 숨과 함께 터져버렸다.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과는 달라졌다고 느끼긴 했지만, 오빠의 입에서 이런 고백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흐흑… 나 울어엉… 오빠아아앙…”태하는 어깨를 들썩이며 엉엉 우는 가희를 더 단단히 품 안으로 감쌌다.밤공기 속, 고백 위로 떨어지는 눈물에 마치 아팠던 시간들이 전부 다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울 거야? 대답은 안 할 거야?”가희가 눈물 콧물 범벅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흐아앙… 오빠앙… 오늘 집에 못 가.”“뭐?”“오빠가 책임져. 오빠가 나 울렸잖아.”“이게 진짜, 발랑 까져가지고.”“나도 이제 어른이라고!”***조명이 은은하게 켜진 침실 안.고요한 공기 속에서 서로를 막 갈구하기 시작하던 그때, 가희가 태하의 옆구리에 난 흉터를 보고는 모든 행동을 멈췄다.“이게 뭐야?”“아, 그거… 전에 범인 잡다가.”“개새끼! 죽여버릴 거야! 누구야!”이럴까 봐 말을 못 한 건데, 동료들한테도
이현과 은하의 결혼식 날.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가희와 태하는 함께 한강으로 향했다. 태하는 라면을 호호 불며 먹는 가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배 안 불러? 식장에서도 엄청나게 먹던데.”“라면은 그냥 디저트로 먹는 거지. 그리고 스테이크 엄청 느끼했단 말이야.”“그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의문이다.”“근데 오빠.”“응?”“결혼식 보니까 어때? 은하 언니 오빠 첫사랑이잖아.”아무렇지 않은 질문에 잠시의 정적이 흘렀지만, 그 정적은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았다. “은하는 이제 친구지.”“그게 가능해?”“응, 가능해.”“그럼 오빠 마음은 지금, 아주 확실하게 비어 있다는 소리네?”“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가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오빠가 먼저 연락했잖아!”태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내가 언제?”“내 사진을 보면, 늘 마음이 평온하다며.”“그게 무슨 소리야…?”“사실 이거 비밀인데… 내가 바로 비블이지롱!”태하는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가희는 핸드폰을 들어 자신의 SNS 계정을 보여주었다. “이거 봐, 맞지? 비블!”“그 비블이… 진짜 너였어?”태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가희를 바라봤다.비블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좋아하는 계정이다.특이하지만 따뜻한 사진들도 마음에 들었고, 짧은 한 줄의 문장들로 그간 지친 마음을 위로받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백가희였다니. 그 모든 위로를 백가희가 해줬던 거라니. “정말 내 사진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졌어?”“응, 그런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네. 진짜 신기하다.”“나 사실… 그날 오빠가 남긴 댓글 보고 연락하고 싶었어.”“하지 그랬어.”“그냥… 그때는 뭔가 자신이 없었달까? 우리 오빠 마음이랑 좀 비슷했던 것 같아.”“백이현, 백가희. 너네 둘은 예전부터 진짜 놀랄 일 투성이 남매다.”그 말에 가희가 웃음을 터뜨렸다.“인정. 정상적인 남매는 아니지.”“뭔가 되게 고맙다, 네가 비블이라서.”생각지도 못한 말에 가희의 심장은 이미 쿵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도착하자마자 호텔방을 잡고 봄 내음을 맡으며 사진기를 들고 걷던 중, 가희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지하철역 앞, 한 남자가 다급히 걷다 어르신 한 명과 부딪힌 것.어르신은 중심을 잡지 못한 채 넘어지고 말았고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어르신을 지나쳤다.“저 자식 뭐야? 사과도 안 하고 저렇게 간다고?”주변에서는 지나가던 행인들이 어르신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곧장 그 남자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뭐? 나?”“반말하지 마시고요, 그쪽 때문에 어르신께서 넘어지셨잖아요. 사과는 하고 가셔야죠!”그 순간이었다. 남자의 눈빛이 일그러지더니, 대뜸 가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오지랖 부리다 큰코 다치는 거야. 알아?”퉤에!입에서 튄 가래침이 가희의 신발 옆으로 뚝 떨어졌다. 비릿하고 더러운 냄새가 섞인 숨결이 코끝을 찔렀다.하지만 가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부릅뜬 채, 손목을 거칠게 털어냈다.“성격 한번 더럽네, 이거 놓으세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행인들이 다급히 신고를 했고, 결국 남성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와… 오자마자 재수 한 번 더럽게 없네.’***경찰서에 도착해서도 가희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반성 따윈 없는 가해자의 표정을 보니 괜히 더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어디 싸가지 없이 어르신한테!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그러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믿기지 않는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태하 오빠?”맞다. 태하는 경찰이었고, 하필 자신이 온 파출소가 하필이면 태하 오빠가 근무하는 곳이였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태하는 곧장 가희를 향해 다가왔다.“백가희, 네가 왜 여기 있어? 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그렇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조사를 받았다. 씩씩거리며 모든 일들을 털어놓자 이제야 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아 맞다, 태하오빠!’그대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태
가희는 결국 휴학을 결심했다. 처음부터 애정 없던 학교와 학과였다. 유치원 선생님이 될 것도 아니었고, 적당히 성적에 맞춰 들어왔던 곳에 더이상 머무를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어쩌면 목적 없이 살던 순간부터 어긋난 궤도 위에 있었던 거겠지.그날 밤, 휴학을 결심하고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나… 학교 휴학할까 해.”“힘들면 그렇게 해.”생각보다 덤덤한 대답에 오히려 놀란 쪽은 가희였다.“뭐야? 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안 말려?”“애초부터 유아교육과가 말이 되냐? 차라리 내가 무용학과 졸업하는 게 훨씬 더 빠르겠다.”“…죽을래?”“휴학하고 뭐 할 건데.”“나… 프라하 놀러 가면 안 돼?”“여긴 안 돼, 위험해.”“치, 됐어. 그냥 여행이나 다닐까 봐.”“그래, 아빠 카드 펑펑 써. 대신 그 시간 안에서 뭐든 찾길 바란다.” 이제라도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제대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이 아닌 휴식, 절망이 아닌 발견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휴학 후, 가희는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아빠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이런 자유를 누리진 못했겠지.’전과는 다르게 생각이 많아지며, 자연스레 감사라는 감정마저 자리잡았다.그리고, 여행 사진들을 찍어 게시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개인 계정이 아닌 @B_travel이라는 아이디로 새로운 계정을 팠다. 시작은 단순히 취미용이었다.하지만 특이한 구도와 몽환적인 느낌, 하루하루를 닮은 짧은 문장에 점차 팔로워 수가 늘어났고, 어느새 사람들은 가희를 ‘비블’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다른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것, 비블은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자유로운 연애도 하긴 했지만 딱히 만남이 깊게, 오래도록 지속되진 않았다. 이제는 사랑조차 자유로운 감정이 되어버린 걸까. 그러던 어느 날, 비블로 살아간 지 일 년이 지났을 무렵. 한 팔로워가 댓글을 남겼다.- @jungth_12 : 비블님, 비블님 사진을 보면 늘 마음이 평온해요. 오늘도 멋진 사진 감사
눈이 팅팅 부은 채로 울기만 하던 가희는 문득 오빠, 백이현이 떠올랐다.세상에 믿을 사람이라곤 멀리 있는 오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백가희.”익숙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눈물이 차올랐고, 이현은 가희의 떨리는 숨소리를 듣자마자 숨을 삼켰다. “…오빠.”“너 우냐? 무슨 일 있어?”“한국 언제 와…?”“왜 그러는데. 왜 우는데.”“그냥… 학교도 힘들고… 다 힘들어.”“당장은 못 가지. 근데 백가희.”“응.”“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고 싶으면 차라리 나한테 말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오빠는 안 힘들어? 오빠도 거기, 억지로 간 거잖아.”이현은 잠시 말이 없었고, 그 침묵에 가희는 가슴이 더 저려왔다. 이렇게 꺼내면 안 되는 말이었을까. 혹시 상처를 건드린 걸까.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이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응, 억지로 온 거 맞아. 근데 억지로 시작된 자리에서도 나름 버티게 되는 이유가 생기긴 하더라.”“이유?”“보고 싶은 사람들 만나러 가려면, 하루도 허투루 못 보내지. 너도 그렇고.”눈물은 또 흘렀지만, 이번엔 조금 덜 아팠다.세상에 단 한 명,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게 바로 오빠였다.왜 이런 사실을 어릴 땐 몰랐던 걸까. 왜 그렇게 떽떽거리기 바빴던 걸까.“몰라, 아무튼 빨리 와.”“그래, 울지 말고. 씩씩하게.”그날 이후, 단비와 성찬은 더는 숨기지 않고 보란 듯이 연애를 시작했다.함께 찍은 사진들은 SNS에 매일같이 업로드됐고, 대놓고 손을 붙잡고 캠퍼스를 누비곤 했다. 수업 때마다 단비를 마주할 땐 복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그저 혼자만의 시간이 또다시 시작돼 버린 느낌이었다.가희는 그렇게 점점 더 조용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겨울 방학이 막 시작됐을 무렵, 홀로 일본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던 어느 날.자취방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누구세요?”“나, 공성찬.”순간 멈칫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자취방에는 아버지, 백 회장이 예고 없이 찾아와 있었다. 다행히 성찬은 집에 없었지만 미처 치우지 못한 옷가지들과 신발, 칫솔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방학 때도 본가 한번을 안 오더니, 대체 뭘 하고 지내는 거야?”“왜 연락도 없이 오고 그래.”“20살이라고 다 어른인 줄 알아? 카드는 그렇게 펑펑 써대면서?”“아까워? 그래서 지원이라도 끊고 싶어서 찾아 온 거야?”“삐딱하기는. 집에 남자 함부로 들이고 하지 말아라. 그렇게 막 살라고 얻어준 집 아니니까.”아무래도 아버지는 모든 걸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긴, 화장실만 가도 흔적들이 넘쳐나니까.“막 산다고? 누구 기준으로?”“네 오빠도 정신 못 차리고 집안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딸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야.”“그래서 오빠도 불쌍해. 아빠 때문에.”백 회장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희가 뱉어낸 말은 너무 정확하고 아픈 말이었다. 가희는 멈추지 않았다.“누구를 위해서 산다는 말, 다 거짓말이잖아. 아빠도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늘 회사랑 체면이 우선이니까.”백 회장은 더 이상 어떤 말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닫고 모습을 감췄다. 현관문이 쿵- 닫히는 소리보다 더 크게 남은 한 문장.“그렇게 막 살라고 얻어준 집 아니니까.”텅 빈 자취방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없고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 공간에서는, 늘 혼자만 진심인 것 같은 사랑이 조금씩 메말라 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메말라 가는 마음을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성찬에게는 더 이상 서운함을 토로하지 않았다. 괜히 사이가 멀어질까 봐, 다툼이 될까 봐. 그리고 다툼 때마다 다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이제는 연락이 오면 오는 대로, 오지 않으면 안 오는 대로.누구도 닦달은 커녕 서운함조차 토로하지 않는 사이가 되어버린 연인. 그럴수록 성찬이 가
태하는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동시에 확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현과 은하 사이에 정확하게 멈춰 섰다. 시선은 은하를 먼저 스쳤다. 짧고도 묘한 무게감이 담긴 눈빛은 곧장 이현을 향해 차갑게 바뀌어갔다.“그만 좀 해.”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현은 태하를 바라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어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한쪽 입술을 비틀며 지어 올리는 미소, 아직도 벽에 기댄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학생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이현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우주.조용한 진료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업무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 하다 가도, 다시금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은하는 괜찮겠지….”정신과 의사인 우주. 사실 그가 정신 의학과라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동생, 은하 때문이었다.은하가 9살이던 그날 이후.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던 사건이 지나간 후, 은하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으며, 때때로 보이는 불안한 모습과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들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