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잔뜩 인상을 찌푸린 이현이 투덜거렸다.
“뭐야, 너는 왜 또 여기 앉아?”
“자리가 남길래.”
태하는 담담하게 국을 떠먹었다. 태도는 가벼워 보였지만, 그 속에는 '적당히좀 해라' 라는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었다.
갑작스러운 태하의 착석에 은하와 민희 역시 적지 않게 놀란 듯 했다.
모두가 퍽 어이없는 상황, 이현이 은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야 전학생.”
“…….”
“넌 좋겠다. 정태하가 매번 나서서 도와주네?”
도발적인 말이 떨어지고, 은하보다 태하가 먼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백이현.”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날이 서려 있었다.
민희는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지켜보며 숨을 죽였다. 더는 불편한 상황을 견딜 수 없던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들어올렸다.
“민희야. 다 먹었지? 우리 그만 일어나자.”
“응. 가자.”
태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수저질을 이어갔고, 이현의 시선은 여전히 은하에게 향해 있었다.
정태하, 이 자식은 매번 왜 이렇게 간섭질을 해대는 건지. 남의 일엔 관심이라곤 없더니, 전학생 일에는 유독 다르게 구네?
“야, 왜 자꾸 방해질이야?”
“너야말로 매번 왜 이런 식인데?”
“내가 뭘?”
“애들 좀 그만 괴롭혀.”
아, 전학생을 괴롭히는게 싫었구나. 확실히 꽉 막힌 놈이라니까.
“알잖아. 난 너빼곤 죄다 싫다니까?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싫으면, 그냥 신경을 끄면 되잖아.”
“지들이 뭘 안다고 졸부라니 뭐라느니. 처음부터 입을 놀리지 못하게 만들어줘야 돼.”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동안 백이현은 분명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 행동했었다. 언제나 여유롭고, 장난스럽고, 모든 걸 가볍게 흘려보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말투는 그런 말을 들어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가 아니라, 신경 쓰지 않는 척 해왔다에 가까웠다.
“넌 정말, 네 방식이 맞다고 생각해?”
“뭐, 효과는 좋으니까.”
“허구언날 다른 사람들을 신경 안 쓴다고 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자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한 질문에 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태하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이내 표정을 바꾸고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계속 이런 식으로 살 거냐고. 그리고 강은하는 너한테 졸부라는 말, 한적 없는것 같은데.”
“됐어. 하여튼 선비라니까. 너랑 말 섞어봐야 답은 늘 뻔하지. 먼저 간다.”
한편, 교실로 향하는 은하와 민희는 복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은하가 작은 목소리로 사과의 말을 전했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괜찮아. 근데 은하야… 백이현 말이야… 걔 심기는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어.”
“왜?”
“그냥. 걔랑 안 좋게 엮여서 학교생활 제대로 한 애가 없거든.”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복도에 있던 몇몇 학생들은 은하를 힐끔거리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언제쯤 이 관심이 사그라들까. 그러려면 백이현의 관심이 은하에게서 떨어져야 할텐데.
“지금도 애들은, 네가 얼마나 오래 버틸지 기다리고 있을걸?”
“상관없어.”
“진짜…?”
“응.”
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교실을 향해 걸어갔다. 민희는 그런 은하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강은하. 보기보다 단단한 애였네.’
그렇게 은하의 두 번째 등교가 무사히 끝났다.
오늘도 백이현과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역시나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달력에 동그라미 두개가 더해질, 지독히도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일 뿐.
***
종례가 끝나고, 가방을 챙겨 교실을 나서던 은하를 향해 민희가 다가왔다.
“집이 어디야? 여기서 가까워?”
“응. 걸어서 20분 정도.”
“와! 가깝네. 어느 쪽으로 가?”
“…그, 대형 문구점 쪽.”
“대박! 나도 다니는 학원이 그쪽이야. 같이 가자.”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조금씩 가까워지듯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평범한 학생처럼, 어쩌면 아직은 서먹한 친구처럼.
민희의 표정은 밝기만 했지만, 내심 어제 오늘 자꾸만 백이현과 부딪히는 은하가 신경 쓰였다. 1학년 때부터 이현의 모습을 지켜봐 왔기에, 요즘 그의 태도는 불안한 요소였으니까.
“근데 은하야. 백이현 말이야.”
“또 걔 이야기야?”
“진짜 못되 쳐먹은 놈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냥 무시해. 알았지?”
“응.”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태하가 중간에서 애써주잖아. 태하는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도 대단하시고. 애가 참 괜찮은 것 같아.”
“…그렇구나.”
역시나 은하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백이현, 정태하. 그들에게 관심조차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한 시간쯤 달려 도심을 벗어난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한적했다. 차는 산 위를 조금 올라 멈춰 섰고, 도착한 곳은 카페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했고, 전망대라고 하기엔 낮고 작았다. 잔디 위로 나무들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목제 테이블 하나가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은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이블 위를 둘러봤다.화이트 린넨 천 위에 놓인 유리병 속 라벤더, 머그잔 두 개.라탄 바구니 안에서는 뭔가 따뜻한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이게… 이게 다 뭐야?”“짜잔! 점심 데이트, 백이현 버전.”하아, 방금까지 내내 운전만 해놓고 무슨 또 백이현 버전이야. 박 비서님 버전이겠지.“이런 것 좀 하지 마! 괜히 박 비서님이 고생하시잖아!”“강은하! 진짜 무드 없게 이럴 거야?”은하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무드는 개풀, 어젯밤이 진짜 무드였지.“알겠어. 알겠어.”“방금 너 앉을 때, 약간 CF 같았어.”“또 시작이다.”“예쁘니까 그러지.”은하는 시선을 피하듯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았다. 박 비서님이 얼마나 세심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와 샌드위치잖아? 고기도 들었네?”“그럼 뭐 풀만 먹을 줄 알았냐?”“오, 커피도 따뜻해.”은하의 손이 잔을 감쌌고, 산들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문 은하가 오물오물 거리며 말을 이었다.“아, 맞다. 오늘 룸메이트 왔어.”“그래? 어떤 애 같은데?”“예쁘장해. 말도 조리 있게 잘 하고, 걔도 경영학과던데?”“몰라. 알게 뭐야.”“응?”“난 강은하밖에 안 보여. 그래도 룸메가 싸움은 잘 했으면 좋겠다.”“싸움?”"룸메면 되게 친해지잖아. 이왕이면 최약체보다는 싸움꾼이 더 낫지 않을까?"백이현 다운 어이없고 한심한 생각이었다. 살면서 주먹다짐을 할 일이 얼마나 있다고."뭐야? 지금 나는 최약체라는 뜻이야?""굳이 따지자면, 싸움꾼 쪽은 아니지.""그 주먹이 나한테 향하면?""걱정 마, 내가 열 배로 되갚아 줄 테니까."
집으로 돌아온 이현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보랏빛 커튼이 드리워진 작은 침대 위에 앉아 있으니, 아직 은하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아 숨을 들이켰다.눈을 감으면 은하의 숨소리, 보드라운 살결, 그리고 오늘따라 온몸을 크게 떨어대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에 번지는 은은한 보랏빛 불빛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진짜 큰일 났다. 또 보고 싶네.”한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가락은 진심을 담은 메시지를 꾹꾹 눌러담았다.[너 없는 공간은 너무 조용해. 라벤더 향기만 나.]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거긴 나랑 같이 들어가야 되거든? 당장 나와줄래?]“하, 진짜.”이제야 이현이 웃었다.얘는 왜 메시지 하나를 보내도,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거냐고.***은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라벤더 향이 나는 작은 디퓨저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자 어제 밤의 잔향이 아랫배를 간지럽혔다.'진짜 웃겨 백이현, 치이.' 노트북을 켜 학교 홈페이지를 둘러보며 수업 계획표와 학사 일정을 확인하는 사이, 문득 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일찍 왔나 보다.”짧은 단발머리에 세련된 인상과 말투, 은근한 자신감이 풍기는 눈빛까지.아무래도 함께 방을 쓸 룸메이트 같았다.“으응. 안녕.”“어느 학과야? 난 경영학과 박수정 이라고 해.”“아, 나는 디자인 학과. 강은하.”“잘 부탁해.”“나도.”짧지만 깔끔한 첫 인사였다.수정은 곧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짐 정리를 시작했고, 은하는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경영학과? 백이현이랑 같은 학과네….’함께 지낼 룸메이트의 분위기, 그리고 내일부터 펼쳐질 캠퍼스 생활.모든 것이 새로웠고, 조금은 긴장됐지만 이상하게 설레는 감정도 함께 섞여 있었다.점심이 되자 핸드폰 진동음이 책상을 울렸다.이현이였다.“으응. 이제 일어났어?”“어이, 강은하 학생.”“푸흡. 으응.”“개강 전 데이트 할
또 다른 방 문이 열렸다.순식간에 밀려오는 익숙하고 강렬한 향기가 두 사람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라벤더?”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추억의 향이잖아. 그리고 너를 처음으로 안았던 날, 네 목에서도 이 향이 났어.”온 세상이 라벤더 빛으로 물드는 것 같은 향. 은하는 이현의 품에 안긴 채 말없이 그 공간을 바라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침대 주변은 연보랏빛 커튼으로 사방이 덮여 있었고, 조명까지 은은한 보랏빛을 내뿜고 있었다. 중간중간 놓인 향초 워머기, 그리고 곳곳에 놓여 있는 말린 라벤더 꽃잎들까지.이런 걸 다 언제 준비한 건지. 세상 사랑 받는 여자가 된 것만 같아 가슴이 몽글거렸다. “백이현….”“혹시 질리면 말해. 컨셉은 언제든지 바꿔줄 수 있어. 학교나, 감옥이나, 병원이나….”“야!”이현은 은하를 침대 위에 눕힌 뒤, 치명적인 눈빛을 장착했다.“그래서? 이 방에선 이길 수 있겠어?”은하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나는… 너한테 지는 게 좋아.”이현의 입가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더니, 침대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하의 손이 터져 나오는 숨을 막듯 입으로 향하자 이현은 그 손을 곧바로 붙잡았다.“참지 마.”“아… 안돼… 하…”그의 손에 붙잡힌 손은 그대로 머리 위로 밀려 올라갔다. “하읏.”은하의 몸이 크게 떨려왔다. 목에서 터진 날것 같은 소리에 이현의 눈이 깊게 젖어 들었다. 잠시 후, 요란했던 침대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사랑이었고, 본능이었고, 그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하지만 평소와 달리 은하의 몸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너 괜찮아?”“하….”“강은하!”“….”제대로 된 대답도 없이 눈까지 풀린 모습에 이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왜 그래? 응? 어디 안 좋아?”“아니…너무 좋아서.”“아씨, 놀랐잖아!”은하가 겨우겨우 눈을 떴다.고통이 아니라 벅차서, 온몸을 채우는 감정이 너무 커서, 모든 걸 다 토해버린 눈망울이었다.“매번 좋았는데,
주방 안에는 된장찌개의 구수한 향이 녹진하게 퍼졌고, 고등어도 나름 노릇하게 구워졌다.은하가 젓가락을 들며 눈을 반짝였다.“생각보다 괜찮은데?”“진짜! 비주얼은 나름 볼만 해.”이현은 고등어를 찢어 잘 익은 살을 은하의 접시 위에 올려주었다.“많이 먹어.”“응. 너도.”그러다 된장찌개 안에 든 두부를 먹던 은하가 눈을 키웠다.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대박, 진짜 된장찌개 맛이야.""그럼 김치찌개 맛이 나겠냐고.""백이현, 너 요리 좀 한다?""푸흡."성공적인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말없이 식탁을 정리했다.식탁 위를 물티슈로 닦는 동안에도 기분 좋은 여운은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리고 은하는 이현의 집 이곳저곳을 구경하기 시작했다.그러다 침실 안, 작은 협탁 테이블에 위에 놓인 그림 액자를 발견했다. 천천히 다가가 액자를 손에 들었다.요트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나란히 서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있었다.“이거, 여기다 두기로 한 거야?”“응. 밤마다 보려고.”손끝이 액자 모서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응. 사랑이 확신이 됐지.”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소를 머금었다.가슴 안쪽이 화하게 따뜻해졌고, 눈물도 웃음도 아닌 감정이 울컥 치밀어올랐다.그래서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네가 그렇게 말해버리면, 나는… 평생 널 떠나지 못할 것 같아.’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는 은하의 모습에, 이현이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강은하, 기숙사 통금 몇시까지야?”“12시.”“지금 몇시게?”은하의 눈이 이현의 방 안에 놓인 시계로 향했다. “7시잖아!”“그러니까,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소리지.”“….”그대로 은하를 침대 위로 눕혔다.은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을 감았다. 그는 한 손으로 은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하루 종일 엄청나게 안고 싶었다고.”“…나도.
[나와. 앞이야.]메시지를 확인한 은하는 편안한 트레이닝 원피스에, 운동화를 꿰어 신은 채 기숙사 문을 나섰다.그리고 차에서 내린 이현은 곧장 은하를 향해 다가갔다.붉게 달아오른 눈두덩을 본 이현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아무 말 없이 두 팔을 벌리자, 은하는 주저하지 않고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많이 울었어?”“응.”“강은하, 완전 애기네. 애기.”“몰라. 그냥 엄청나게 낯설고… 꼭 혼자가 된 기분이야.”커다란 손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혼자 아니야. 나 있잖아.”“…응. 다행이야 정말.”“차에 있을테니까 짐 정리하고 나와. 저녁 먹으러 가자. 응?”“알겠어. 근데 좀 오래 걸릴 것 같은데….”“괜찮으니까 천천히 해.”***한편,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우주에게는 익숙한 공기와 정적이 동시에 밀려왔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말없이 왼손으로 눈가를 훔쳤다.“아, 진짜… 주책 맞게 왜 이러냐.”흐르는 눈물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어차피 혼자니까. 누구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으니까. 홀로서기를 한 동생이 어른이 된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숙사 안,작은 공간 한 쪽은 이제 은하의 물건들로 온전히 채워졌고, 아직은 낯설지만 조금씩 살아갈 공간이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문을 닫고 나서며, 은하는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앞으로 잘 지내보자.’건물 앞에는 이현이 차에 기대 서 있었다."백이현!"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언제나처럼 든든한 안심과 기다림이 담겨 있었다.“끝났어?”“응.”“가자.”은하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너는? 짐 정리 다 했어?”“어제 다 끝냈지.”“집은 어때? 괜찮아?”“궁금해?”“당연하지.”“아 안되는데, 한 번 들어오면 못나가는데.”“……또 시작이지?”응, 또 시작이야. 아니, 사실은 끝났던 적이 없어.“저녁은 집에서
은하는 우주와 함께 기숙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사기 위해 집을 나섰다. 동네 마트부터 생활용품점까지, 메모장에 적어둔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며 조금씩 집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나기 시작했다.우주는 말은 많지 않았지만, 은하가 무거운 물건을 고르거나 망설일 때마다 먼저 손을 뻗거나 괜히 다른 브랜드를 권하며 곁을 지켰다.“기숙사 생활, 정말 괜찮겠어?”“응. 기대 되기도 하고.”“그래도 자취보단 기숙사 생활이 오빠 마음이 편해.”“알아.”“언제든 답답하거나 불편하면 오빠한테 꼭 이야기해. 알겠지?”“응. 오빠.”***이현 역시 홀로 살아갈 공간에 이것 저것 가구들을 꾸리고 짐을 정리하기 바빴다. 거실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박스들이 널려 있었다. 혼자 살기엔 꽤나 넓은 아파트. 이 역시도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겠지.어릴 때부터 제공 받았던 기준이 다른 사람들과는 많이도 달랐다는 걸 이제서야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버지 도움 없이도 모든 걸 해내야겠지.’창밖에는 한창 꽃을 피우기 직전의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풍경은 지금의 마음과 많이도 닮아 있었다.무언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시점. 막 움트기 시작한 감정과 결심. 여전히 부족할지 몰라도, 언젠가 '내가 꾸려온 인생'이라 말할 수 있는 날을 막 걷기 시작한 것이다.짐 정리가 어느정도 끝난 뒤, 침대 옆에는 은하가 선물한 그림 액자를 조심스레 올려 놓았다.지난 날 요트에서의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라, 그의 마음을 다시 한번 간지럽혔다. '보고싶어 미치겠네.'***떠나기 전날 저녁.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봄의 끝자락은 유난히 낯익고 정겨웠다.식탁 위엔 언제나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냄비와 정갈하게 놓인 따뜻한 밥그릇이 놓여있었다.은하는 괜스레 마음이 내려앉았다.항상 넷이서 둘러 앉아 시끌벅적하게 웃고 떠들던 그 자리에 이제는 셋이 앉아 있었고, 앞으로는 오빠 혼자 앉아 식사를 하는 날이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우주.조용한 진료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업무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 하다 가도, 다시금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은하는 괜찮겠지….”정신과 의사인 우주. 사실 그가 정신 의학과라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동생, 은하 때문이었다.은하가 9살이던 그날 이후.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던 사건이 지나간 후, 은하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으며, 때때로 보이는 불안한 모습과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들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은하를 안아들고 보건실로 향해 걸음을 옮기는 태하. 팔에 안긴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숨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민희 역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따르며 은하의 핸드폰을 꽉 쥐고 있었다.보건실로 향하자마자 은하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 놓았다.놀란 보건 선생님이 급히 다가와 은하의 상태를 살폈고, 담임 선생님 역시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달려왔다.“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큰 소리에 갑자기 놀란 듯 하더니… 가방에서 약을 꺼내 먹었어요.”“약? 무슨 약?”민희는 서둘러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은하가 먹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