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생각해 보니, 곧 부모님의 기일이 다가오고 있었다.기일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조여왔던 은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어지는 학교, 멀어지는 친구들, 그리고 다시 돌아온 현실.수련회에서 있었던 일들, 순간 순간 느꼈던 감정들. 모든 게 꿈처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어제 있었던 일, 오빠한테 왜 얘기 안 해?”“이미 다 들었을 거 아니야.”“그래도. 오빠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이번 걱정은 부담이 아니라 의문이었다.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던 길고 긴 시간들, 잃어버린 기억. 오빠는 분명 모든 걸 알고 있겠지. 그러니까 늘 나로 인해 전전긍긍 하는 거겠지.“오빠….”“응. 은하야.”“어제… 기억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장면이 떠올랐어.”운전대를 잡은 우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무슨 장면?”“누군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고, 그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어. 그리고… 가만히 있으라고, 움직이면 더 위험해진다고. 그런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렸고.”그때였다. 우주의 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갓길에 멈춰 섰다.은하의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우주의 손이 이미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은하는 확신했다. 이건, 평범한 반응이 아니다. 분명, 말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갑자기 왜 그래?”“아니… 아니야. 잠깐 놀라서.”“그러니까 왜? 내가 떠올린 기억, 그거 9살 때 있었던 일이랑 관련 있는 거지?”화살같은 질문이 공기를 울렸다. 이미 우주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한 가득 담겨 있었고, 그건 은하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빠.”“부모님은, 기일날 다시 찾아뵙자.”“응?”“일단 집으로… 집으로 가서 얘기하자.”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우주는 서둘러 기어를 조작하고 다시 차를 출발 시켰다.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평소와 다른 공기가 감돌았다. 한 곳에 서 있지 못하고, 마치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소파 근처를 오가며 서성거리는 우주.머릿속을 정리하는 건지, 대체 무슨 고민을 저렇게
모닥불을 바라보며 입을 삐죽 내민 이현, 하지만 마음속에는 잔잔한 파문이 일고 있었다. 강은하는 정말 나에게 친구, 그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건가? 내가 성급했나?장난이 섞인 말이었지만, 이상하게 대답을 듣고 나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분이었다. 숙소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희가 돌아왔다.약간의 어색함이 남아 있었지만, 표정 만큼은 후련해 보였다. “은하야.”“응?”“나… 수혁이랑 만나보기로 했어.”눈만 깜빡이며 잠시 입을 다물었던 은하가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정말? 축하해. 둘이 잘 어울려.”민희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달라지는 표정.“근데, 있잖아….”“응?”“너는 백이현이랑 정태하, 둘 중에 누구야?”또 다시 말을 잃은 은하. 민희는 팔짱까지 끼고 오늘따라 집요하게 굴어댔다.“솔직히 둘 다 너한테 관심 있는 거 알잖아.”“글쎄… 나는 그런 생각 해본 적 딱히 없는데.”대답을 하는 순간,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이 가슴 한쪽을 스치고 지나갔다.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감정, 그건 앞으로도 없을거라는 보장은 없는거잖아.“뭐, 아무렴 어때. 시간이 알려주겠지.”민희의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은하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이현과 태하 역시 오늘 밤 만큼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침대에 누워 있긴 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너희는 나한테 처음으로 생긴 소중한 친구야.’은하의 단호한 말이 두 사람의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았다.그 말은 단순한 선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을까. 이현이 한참을 뒤척이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태하 역시 쉽게 잠들고 있지 못하는 듯 보였다. “야 정태하. 자냐?”“아니. 왜.”“나 오늘, 강은하한테 실수한 거냐?”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태하는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그냥… 너무 빨랐던 거겠지.”“무슨 뜻이냐?”“은하는 지금, 자기 감정
한참을 고민한 끝에 조심스레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이현의 미소가 보였다. “강은하.”“…응?”“뭐냐? 후드 집업 왜 벗었냐?”은하는 순간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지만, 금세 침대 위에 놓인 집업을 챙겨 입고 숙소를 나섰다. 그런 은하의 옆에는 그 어느때보다 진심이 담긴 미소가 함께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오늘 하루는 혼란스러웠지만, 남아있는 오늘 밤 만큼은 조금은 따뜻해질지도 모르겠다고.두 사람은 캠프파이어 장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 아니었으면, 또 안 나올 생각이었지?”“그냥… 다들 잘 노는데, 굳이 나까지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너는, 별것도 아닌 일에 매번 고민하더라?”“뭐…?”“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다들 잘 놀고 말고를 왜 신경 써. 태하랑 민희도 엄청 기다려.”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닥불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고, 밤바람이 가볍게 스쳐 지나 갔다.은하의 말이 조심스레 이어졌다.“근데… 오늘 좀 이상했어.”“응? 어떤 게?”“아까 그 사람들 만났을 때… 뭔가 갑자기 기억이 떠 올랐어.”그래서 반응이 그랬던 건가? 이상하긴 했어. 깜짝 놀라는 모습에 텅 빈 눈동자까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아냐고.“아홉 살 때 잃어버렸다던 기억?”“모르겠어… 그 기억이 진짜인지, 꿈인지…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겠어.”이현은 그런 은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나는 그냥, 그게 기억이든 꿈이든. 그게 널 불안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해.”“…….”“물론 쉽진 않겠지만, 솔직히 꿈이면 다행이고, 잊고 있던 기억이어도 다행인 것 같은데?”“…왜?”“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까.”맞다. 그 일이 무엇이었든 그건 다 과거다. 혹은 꿈이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과거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네. 다행이네.”작은 대답이 가벼운 숨처럼 흩어졌다.“그럼, 이제 진짜 가볼까?”이현이 손을 내밀자 은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이번엔 그 모닥불이 타오르는 불빛 속으로 함께 걸어
이제야 안도한 이현이 은하를 자신의 품으로 끌더니, 꽉 끌어안았다.“미안해. 조금 더 빨리 올 걸.”은하는 목이 메인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따스한 가슴팍에 안겨있었다.“그래도, 우리 진짜 빨리 뛰었다. 강은하.”이상하게도 백이현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은 체온을 데워주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그런지, 한동안 굳어있던 입술이 열렸다.“…알아. 고마워.”태하와 민희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이현은 자신의 후드 집업을 벗어 은하에게 덮어주었다. 더 이상은 그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은하는 괜찮으니까. 공황 증상은 따스한 온기에 스르륵 녹아버렸으니까.***이현과 태하는 은하와 민희가 숙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곧장 담임 선생님과 강사들을 찾아 나섰다. 이현의 얼굴엔 이제 분노만이 서려 있었다.본부 앞을 지키고 있던 담임 선생님과 강사들을 발견하자마자, 무턱대고 언성부터 높이기 시작했다.“수련회 관리를 왜 이따위로 하시는 거죠?”“뭐…?”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태하가 이현을 진정 시키듯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저희 팀 구조 미션 구역에 수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수상한 사람들이라니?”이현이 이를 악물었다.“그냥 수상한 게 아니라, 총을 들고 있던 밀렵꾼들이었다고요. 은하는 그 새끼들 사이에 혼자 있었고요. 저희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했으면… 하…”선생님과 강사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고, 태하는 드론 영상 기록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정말로, 은하 앞에 서 있던 밀렵꾼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강사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핸드폰도 안 터지던데, 이게 다 우연입니까?”한 강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핸드폰은 미션 시간에만 잠시 조치해 둔 거고… 미션 구역은 사전에 다 조사했던 구역이야. 학생들에게 위험 요소가 없는 걸 확인하고, 그 후에 미션을 배정했는데….”강사들은 표정은 누가 봐도 당황한 기색임이 틀림 없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해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
두 남자는 확실하게 은하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은하는 빠르게 주머니에서 GPS기계를 꺼내 손에 쥐었지만,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은하를 향했다.“학생, 여기서 뭐해?”등골이 서늘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온 몸이 굳어버렸다. 하지만 최대한 마음을 진정 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수련회 온 학생인데요. 드론 훈련 중이니까 그냥 지나가시면 될 것 같은데….”침착한 목소리였다.이곳에 있어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에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았다.“…드론 훈련?”하지만 눈빛은 빠르게 흔들렸다. 불법 포획은 잡히면 구속이라, 들키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그리고 그 말은, 지금의 이 상황을 더 알아 봐야 할 이유로 충분했다.“그래? 그럼 학생은 왜 혼자 있는데?”“그냥 단순한 미션이에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그 말이 끝나는 순간, 한 남자의 시선이 은하의 손을 향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꼭 쥐고 있던 작은 GPS 기계.“그거, 이리 줘.”“네?”“손에 들린 거, 당장 달라고.”두터운 손이 은하의 앞으로 다가왔을때, 이상하게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린 기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툭.’마치 손끝조차 닿기 싫다는 듯한 행동에, 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기계를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 보았다.“학생, 왜 이렇게 겁이 났어?”“귀엽네.”말투가 확실하게 변했다. 장난스럽지만, 위협이 섞인 뉘앙스.한 남자가 은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한걸음 더 가까이 내딛는 순간, 삐-익 소리가 나며 숲속 어딘가에서 드론이 저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뭐야? 진짜 드론이잖아?”동시에 태하와 이현의 눈에 비친 화면 속에는, 은하의 앞에 낯선 남자들이 서있는 모습이 목격됐다.“뭐냐? 저 새끼들?”“뛰어!”“정민희. 넌 혹시 모르니까 여기 있어.”“야! 백이현! 정태하!”이현과 태하는 주저 없이 은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민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뛰고 있었다. 드론의 모습을 본 남자들은 순간적으로 당
심장이 뛰어대는 감각이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지,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됐어. 사고나 치지 말고 제대로 찾아와.”“와, 내 이미지 이거 어떻게 된 거냐?”그렇게 구조자는 은하로 결정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구조자 역할을 맡을 학생들은 미리 이동하도록 합니다!”학생들이 웅성거리며 각 팀의 구조자들을 배웅했고, 은하 역시 쭈뼛쭈뼛 강사님을 따라 배정된 장소로 이동했다. 은하가 사라지고 한참 뒤, 미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운동장에 울려 펴졌고 각 팀은 서둘러 드론을 띄웠다. 드론 조종은 태하가 맡았고, 민희와 이현은 태하의 말에 따라 지형을 파악하며 은하를 찾기로 했다. “자, 드론 띄운다.”“좋아! 가즈아!”하지만, 화면을 바라보던 태하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왜?”“생각보다 좀 먼데?”같은 시각, 은하는 배정된 장소에서 조용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산속의 공기는 상쾌하면서도 쌀쌀했다.강사님은 떠나기 전, 작은 기계 하나를 건네 주었다. 비상용 GPS 장치야. 문제가 생기면 빨간 버튼을 누르라는 말을 남겼다.오랜만에 조용한 곳에 혼자 남은 순간.은하는 잠시 수련회는 잊고,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앉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백이현, 정태하… 그리고 민희까지.’‘이제는 정말… 친구 같아.’처음 전학을 오던 날, 잔뜩 날이 선 자신에게 먼저 웃으며 다가와 준 민희, 그리고 시작은 좀 달랐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자신을 챙기며 걱정하는 이현과 태하.그들은 이미 은하에겐 단순한 같은 반 친구들 그 이상이었다.‘나도 이제 평범해질 수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이미 평범해지고 있는 건지도 몰라.’자신도 모르게 손끝으로 후드 집업 소매를 꼭 쥐었다.잠시 동안 이현이 지퍼를 여며주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내가 진짜 애기인 줄 아나.’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한편,이현과 태하, 민희는 지형을 살피며 천천히 이동 중 이었다.그때, 혼자 남은 은하가 걱정됐
태하는 별다른 감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동시에 확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이현과 은하 사이에 정확하게 멈춰 섰다. 시선은 은하를 먼저 스쳤다. 짧고도 묘한 무게감이 담긴 눈빛은 곧장 이현을 향해 차갑게 바뀌어갔다.“그만 좀 해.”짧은 정적이 흘렀다. 이현은 태하를 바라보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어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한쪽 입술을 비틀며 지어 올리는 미소, 아직도 벽에 기댄 채 잔뜩 긴장하고 있는 학생의 얼굴은 이미 창백했다. 이현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며 손을 뻗었다.‘
시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우주.조용한 진료실, 익숙한 풍경, 익숙한 업무였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정리 하다 가도, 다시금 동생의 얼굴이 떠올랐다.“은하는 괜찮겠지….”정신과 의사인 우주. 사실 그가 정신 의학과라는 길을 선택한 이유도 동생, 은하 때문이었다.은하가 9살이던 그날 이후. 그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했던 사건이 지나간 후, 은하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활기라곤 온데간데 사라졌고, 과거의 기억을 잃었으며, 때때로 보이는 불안한 모습과 깊이 새겨진 트라우마들
이번에도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걸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몇몇 학생들의 흘깃거리는 눈초리가 느껴졌다.아무리 고개를 숙이고 걸어도, 모든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다. '첫 날이라 그래, 이것도 내일이면 괜찮아 질거야.'2학년 3반 교실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작은 목소리를 냈다.“저기… 선생님.”“응?”“전학생 소개는 선생님께서 이름 정도만 해주시고요… 저는 바로 자리에 앉고 싶은데요.”선생님은 은하의 표정을 살피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알겠어. 부담 느끼지 말고 편하게 있으면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는 어느 가을날, 희뿌연 햇살이 나뭇가지 사이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은하는 옷장에 걸린 새 교복을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걸려 있는 교복은 마치 새로운 시작을 속삭이는 듯했지만, 은하에게는 그저 낯설고 무거운 천 조각에 불과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벌써 세 번째 전학. 이제는 익숙해야 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이 순간은 낯설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생활은 아직도 1년도 넘게 남아있었다.학교를 옮길 때마다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