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건은 회의를 마치고 대표실로 돌아왔다.비서가 다가와 보고했다.“대표님, 장소미 씨가 도착하신 지 좀 되었습니다.”오늘 밤, 유건은 한 연회에 참석해야 했고, 이번엔 소미가 파트너였다.“유건 씨.”소미가 환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그냥 앉아 있어.”유건은 손을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조애린 씨한테 들었는데, 일을 계속할 생각이야?”“네, 그래요.”소미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설명했다.“양 감독님의 작품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게다가, 이미 절반 정도 촬영했거든요. 광고를 비롯한 일정이 과하게 많은 것도 아니고요. 저는 가만히 있는 게 더 싫어요.”잠시 생각하던 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미의 배를 힐끗 바라보았다.“몸에 이상 없으면 소미 씨 뜻대로 해. 다만, 배가...”언젠가는 드러날 것이었다.“아, 아직 문제없어요. 사극이라 의상 때문에 티도 안 나고요.”소미는 오늘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평평한 신발까지 신은 것을 떠올렸다.유건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양 감독님께 소미 씨 촬영 분량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해달라고 이야기해.”“네, 유건 씨 말대로 할게요.”시간이 늦어서 유건은 휴게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소미와 함께 대표실을 나섰다....연회는 해성 호텔에서 열렸다.주차장에서, 노은범이 먼저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고마워.”진주가 미소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은범은 담담히 말했다.“별일 아니야.”그가 어색해하는 모습을 본 하진주는 웃으며 말했다.“너무 긴장하지 마. 우리 약속했잖아? 친구처럼 지내기로.”“알아.”은범은 살짝 찡그렸다.“하지만, 네가 나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잖아.”“괜찮아.”진주는 고개를 저었다.“이건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엄마도 연관되어 있으니까.”그녀는 남자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그냥 편하게 가자.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들도 우리가 진짜 안 될 거라고 깨달으시겠지.”은범은 한결 편안해졌다.‘나보다도
[알겠습니다, 형님.]전화를 끊자, 소미가 방으로 들어왔다.“유건 씨.”유건은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저었다.“먼저 들어가 있어. 여기 담배 냄새 나.”담배는 임신한 여자에게 좋지 않으니까.“아, 네.”연기가 가라앉은 후, 유건은 문을 열고 들어가 소미가 건넨 물을 받았다.“좀 괜찮아요?”소미가 다정하게 물었다.“네.”유건은 물을 마시고 소파에 기대었다.“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그는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머리가 좀 아프네. 그래도 잠깐 앉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건의 곁에 앉으며 소매를 걷었다.남자가 거부할 틈도 없이, 그녀는 말했다.“눈 감아요. 우리 아빠가 술 마셨을 때 자주 해드렸어요.”여자의 손끝이 관자놀이를 누르자, 유건은 거부하지 않았다.“고마워.”소미가 잔잔히 웃었다.“저한테 뭘 그렇게 고마워하세요? 제가 유건 씨를 도로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평생 함께할 사이잖아요.”‘그래, 앞으로도 함께할 사람이지.’유건은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익숙해져야 했다.소미의 손길이 생각보다 편안해서 그는 점점 나른해졌다.“유건 씨?”그녀가 속삭이듯 부르자, 유건은 반쯤 감긴 눈으로 대답했다.“응...”소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가슴이 뛰었다.‘이건 기회야!’‘내 임신은 거짓말이잖아... 시간을 더 끌면 고유건은 의심할 거고, 배를 감출 수도 없을 거야.’‘그 전에 내가 확실히 해야 해. 이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그녀는 숨을 죽이고 목에서 어깨로 손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유건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남자의 입술과 단 한 뼘도 남지 않은 거리.하지만, 소미는 남자의 입술이 닿기 직전, 유건의 눈이 번쩍 뜨였다.여자가 너무 가까이 있는 걸 깨닫고, 순간 멈칫했다.“소미 씨?”“유건 씨.”소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키스해 줘요.”유건은 말이 막혔고, 본능적으로 미간이 좁혀졌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유건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그는 소미를 한 번 바라보고 나직이 말했다.“가자, 별로 재미없어.”소미는 아무런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무슨 일 있어요?”“아니.”유건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너무 늦게 자면 두 사람한테 안 좋잖아.”“네.”소미는 미소를 띠었지만 속으로 불안했다.‘어떡하지? 이 사람, 아이를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지금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나중에 크게 곤란해질지도 몰라.’“왜 그래?”유건은 소미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몸이 안 좋아?”“아니에요.”소미는 웃으며 얼버무렸다.“그냥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같이 가자.”“괜찮아요...”“아니.”유건은 단호했다. 그녀가 지금 상태에서 혼자 다니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니 말이다.그는 결국 화장실 입구까지 소미를 데려다주었다.“천천히 다녀와.”“네.”소미는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이 남자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이렇게 다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겠어?’유건은 조금 떨어진 흡연 구역으로 이동했다.담배를 꺼내 들었지만, 불을 붙이기도 전에 시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았다.‘시연이? 여기 온 이유는 뭘까?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찾는 거야?”“네?”시연이 놀라 돌아보았다.유건을 보자, 그녀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여기 B동 6층 맞나요?”유건은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6층은 맞는데, 여긴 B동이 아니라 C동이야.”“아.”시연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두드렸다.“아, 진짜! 또 길을 잘못 들었네요.”“또?”유건은 그녀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무심코 물었다.“길을 자주 잃어버려?”시연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사실, 자주 그런 건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 방향 감각이 떨
유건은 결국 함정에 빠졌다. 재빨리 걸음을 멈추고 시연을 놓아주었다.“배가 어떻게 아파? 심한...”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시연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지시연!”유건은 당황하며 몇 걸음에 따라잡아 그녀를 끌어안았다.시연은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이 얼어붙었다. 뭔가 반응할 새도 없이, 유건의 넓고 따뜻한 손이 여자의 눈을 가렸다.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보지 마.”“뭐를요...?”시연은 놀라며 남자의 손을 잡고 떼어내려 했다.“왜 이러는 건데요? 안 가려도 돼요...”‘안 가리면 어떡하라고?!’유건은 앞쪽을 매섭게 노려보았다.노은범이 하진주에게 자기 재킷을 벗어 걸쳐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이걸 시연이가 본다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유건 씨!”시연이 저항하자, 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자신의 쪽으로 돌렸다.“너, 으음...”시연이 놀라서 입을 열려는 순간, 유건이 그녀를 덮치듯 입을 맞췄다.‘뭐야?!’시연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놔... 윽...”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유건은 더욱 거칠게 여자의 입술을 탐했다.남자의 키스는 점점 깊어졌고, 점점 더 강렬해졌다.시연은 필사적으로 유건의 가슴을 두드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그녀는 화가 치밀어 올라 손을 번쩍 들었다.찰싹!깨끗한 타격음이 울리며 유건의 뺨이 돌아갔다.유건은 순간 멍해졌다. 손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충격받은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미안해, 나는...”그는 단지 시연이 은범을 보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키스하고 나서 이성을 잃어버렸다.그녀를 원했고, 가까이하고 싶었으며, 심지어 그녀를 독차지하고 싶었다.시연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마치 혐오스러운 존재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너무나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우리... 그래도 예전에는 부부였고, 이 사람의 포옹과 키스를 받아들일 이유라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이제 우리는 이혼을 앞둔 상태잖아!
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흘끗 바라보았다.유건은 즉시 기세가 꺾였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안 보면 신경도 안 쓰이겠지!’“얼른 가.”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은범에게 손짓했다.“시연아, 고마워.”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 말했다.“진주를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제발 화내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지?”시연은 대답 대신 다시 손짓했다.“얼른 가.”“조금만 기다려!”은범은 시연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빨리 다녀와서 시연이를 만나야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시연은 멀어지는 은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제 와서 아쉬운 거니?”뒤에서 나직한, 그러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은범을 보고 있다면, 유건은 그런 시연을 보고 있었다.유건은 자신도 모르게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자기 남자를 놓아주고 대단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과연 그럴까?’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난 바보가 아니야. 고유건이 갑자기 나한테 키스한 것도,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하진주라는 여자가 은범이랑 같이 있는 걸 나한테 보여주지 않으려 한 거야.’시연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유건 씨, 왜 그렇게 조급해해요? 혹시라도 내가 은범이랑 잘 안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걱정하다니?’‘지금 나더러 본인이 노은범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라는 건가?’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을 향해, 시연이 느긋하게 물었다.“‘응’이랑‘아니’중에 골라서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이게 무슨...?’유건은 시연의 집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짜증스럽게 턱을 까딱하며 짧게 대답했다.“응.”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덧붙였다.“처음엔... 나도 너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
“장소미...”시연은 그녀가 화를 내도록 놔두었다.솔직히, 남자 친구가 전처와 함께 있는 걸 보고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난 네 남자 친구한테 매달린 적 없어. 정말 우연히 만난 거야.”“허!”소미는 이를 악물고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일부러 가정법원 가는 걸 피해서,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하는 이유는 뭔데?!”“뭐?”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보았다.“소미 씨.”유건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그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야. 내가 바빠서...”“지시연.”소미는 유건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연을 응시했다.“난 네 대답을 들어야겠어.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한 거, 혹시 유건 씨를 못 잊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박혀왔다.“장소미.”시연은 미소를 거두었다.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내 남편과 불륜 관계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하는 건데?”소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뭐?”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 소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정확히 해두자. 난 아직 고유건 씨와 법적으로 혼인 관계야. 이혼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 네가 참견할 일 아니란 뜻이지.”“지시연...!”소미는 분노에 휩싸여 이를 악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유건 씨는 널 사랑한 적 없어요! 그 결혼도 강요당해서 한 거라고!”“웃기시네.”시연은 무심코 서늘한 눈빛으로 유건을 스쳐보았다. “그럼 누가 칼을 들이대서 강제로 혼인 신고하게 만든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성인이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고유건 씨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랑 결혼했으면, 나는 법적으로 고유건 씨의 아내인 거야. 법이 보호하는 거라고.”그녀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소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유부남을 선택했다면, 유부남이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는 게 도리 아니야?”‘유부남의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