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걸음 떨어진 곳.노은범과 하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그리고 시연과 마주쳤다.“시, 시연아.”은범은 당황해 더듬거렸다.진주는 은범을 한 번 바라보더니 옅게 미소 지었다.“친구야?”“응, 아니... 아니야. 내가 좋아한다던 그 사람이야.”은범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부정했고, 더 이상 진주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시연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시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뜻밖의 조우에 시연은 잠시 놀랐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교수님이 여기서 회의 중이셔. 놓고 가신 자료를 가져다주러 왔어.”그녀가 유건에게 한 말과 똑같았다.“그렇구나.”은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시연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허공을 잡았다.시연은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난 것이었다.은범은 순간 멍해졌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시연아?”시연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지만, 그 속엔 명확한 거리감이 담겨 있었다.“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셔서 먼저 가볼게. 그리고 널 방해하면 안 되잖아.”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지나쳐 걸어가려 했다.은범은 당황했다.시연이 오해했다고 확신했다.“시연아...”“잠시만요.”진주가 갑자기 시연의 앞을 가로막았다.여자의 직감은 빠르다. 이 짧은 순간에도 진주는 분위기를 감지했다.시연과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말했다.“죄송하지만, 잠깐 제 이야기 좀 들어주시겠어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시간 없어서요. 비켜주세요.”거절이었다.진주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강단 있게 나섰다.그녀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잠깐이면 돼요! 금방 끝날 말이에요.”그녀는 은범을 흘끗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당신이 은범이가 좋아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오해하신 것 같아요.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그냥 친구일 뿐이거든요.”“하고 싶으신 말, 다 하신 거예요?”
문 밖.유건, 은범, 그리고 진주는 침묵 속에 서 있었다.가장 먼저 진주의 핸드폰이 울렸다.“엄마. 네, 이제 끝났어요. 곧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진주는 은범을 바라보았다.“은범아, 우리 엄마가 집에 빨리 들어오래.”하지만 은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 없이 굳어 있었다.그는 무조건 시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 작정이었다.진주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그럼 나 먼저 갈게.”“응...”은범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절대 시연을 두고 떠날 수 없었다.그러나 그때, 은범의 핸드폰이 울렸다.강수희였다.“어머니.”[은범아,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진주를 안 데려다준 거니? 서로 친해지는 건 좋지만, 너무 늦으면 진주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야.]은범은 진주를 한 번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강수희의 목소리는 여전히 이어졌다.[이제 늦었으니, 무조건 진주 데려다줘야 해. 알겠지?]이를 악물며, 은범은 짧게 대답했다.“알았어요.”전화를 끊고, 그는 진주를 향해 말했다.“가자, 집까지 데려다줄게.”“어?”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놀라며 회의실 문을 가리켰다.“그래도 돼?”“너랑 같이 왔잖아.”은범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히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게 맞지.”시연에게는 나중에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가자.”“응.”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건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눈빛 가득한 냉소를 띄웠다.‘역시 믿을 수 없는 놈이었어.’그는 긴 다리를 내디뎌 은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 비꼬는 듯한 미소.“어디 가려고?”“고 대표님...”은범이 답하려 했지만, 유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내가 있는 한,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여.”은범은 얼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고 대표님, 전 친구를 집에 데려다줘야 합니다.”“헛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유건의 분노가 폭발했다.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흘끗 바라보았다.유건은 즉시 기세가 꺾였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안 보면 신경도 안 쓰이겠지!’“얼른 가.”시연은 가볍게 웃으며 은범에게 손짓했다.“시연아, 고마워.”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짐하듯 말했다.“진주를 데려다주고 바로 올게. 제발 화내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알겠지?”시연은 대답 대신 다시 손짓했다.“얼른 가.”“조금만 기다려!”은범은 시연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빨리 다녀와서 시연이를 만나야 해!’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주변은 조용해졌다.시연은 멀어지는 은범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이제 와서 아쉬운 거니?”뒤에서 나직한, 그러나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시연이 은범을 보고 있다면, 유건은 그런 시연을 보고 있었다.유건은 자신도 모르게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자기 남자를 놓아주고 대단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너, 분명히 후회하게 될 거야.” ‘과연 그럴까?’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남자를 응시했다.‘난 바보가 아니야. 고유건이 갑자기 나한테 키스한 것도, 지금 이 말을 하는 것도...’‘하진주라는 여자가 은범이랑 같이 있는 걸 나한테 보여주지 않으려 한 거야.’시연은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유건 씨, 왜 그렇게 조급해해요? 혹시라도 내가 은범이랑 잘 안될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건의 숨이 턱 막혔다.‘걱정하다니?’‘지금 나더러 본인이 노은범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라는 건가?’ 한동안 말이 없던 유건을 향해, 시연이 느긋하게 물었다.“‘응’이랑‘아니’중에 골라서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이게 무슨...?’유건은 시연의 집요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짜증스럽게 턱을 까딱하며 짧게 대답했다.“응.”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덧붙였다.“처음엔... 나도 너를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라,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
“장소미...”시연은 그녀가 화를 내도록 놔두었다.솔직히, 남자 친구가 전처와 함께 있는 걸 보고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난 네 남자 친구한테 매달린 적 없어. 정말 우연히 만난 거야.”“허!”소미는 이를 악물고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래? 그럼 하나만 더 묻자. 일부러 가정법원 가는 걸 피해서,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하는 이유는 뭔데?!”“뭐?”시연은 놀라며 유건을 바라보았다.“소미 씨.”유건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미의 손을 잡았다.“그건 시연이 때문이 아니야. 내가 바빠서...”“지시연.”소미는 유건의 말을 무시하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시연을 응시했다.“난 네 대답을 들어야겠어. 이혼 서류에 서명 안 한 거, 혹시 유건 씨를 못 잊어서 그런 거 아니야?”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게 박혀왔다.“장소미.”시연은 미소를 거두었다. 차갑고 단호하게 말했다.“너는 내 남편과 불륜 관계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날 추궁하는 건데?”소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뭐?”시연은 비웃음을 흘렸다. 소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정확히 해두자. 난 아직 고유건 씨와 법적으로 혼인 관계야. 이혼할지 말지는 내 선택이고, 네가 참견할 일 아니란 뜻이지.”“지시연...!”소미는 분노에 휩싸여 이를 악물고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쳤다.“유건 씨는 널 사랑한 적 없어요! 그 결혼도 강요당해서 한 거라고!”“웃기시네.”시연은 무심코 서늘한 눈빛으로 유건을 스쳐보았다. “그럼 누가 칼을 들이대서 강제로 혼인 신고하게 만든 건데?”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성인이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지.”“고유건 씨가 어떤 이유에서든 나랑 결혼했으면, 나는 법적으로 고유건 씨의 아내인 거야. 법이 보호하는 거라고.”그녀는 지친 듯한 표정으로 소미를 바라보았다.“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야. 유부남을 선택했다면, 유부남이 정식으로 이혼하기 전까지는 조용히 있는 게 도리 아니야?”‘유부남의
유건의 날카로운 얼굴선이 순간적으로 긴장되었고, 눈빛도 흔들렸다.그는 차마 시연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정리했다고 거짓말할 수 없었다.“소미 씨, 그 사람은 한때 내 아내였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힘들어하면, 나도 모른 척할 수 없단 말이야. 이해 돼?”소미는 숨이 막혔다.하지만, 유건은 언제나 솔직했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법이 없었다.소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나는요?”“소미 씨.”유건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나는 소미 씨를 선택했고, 분명히 약속했어. 소미 씨, 그리고 우리 아이를 지켜줄 거라고. 그건 변하지 않아.”이 말은 소미를 향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에게도 하는 다짐이었다.“유건 씨!”소미는 울면서 남자의 품에 안겼다.“절 원망하진 마세요! 너무 두려워서 그래요! 유건 씨가 갑자기 저를 버릴까 봐 너무 무섭다고요!”유건은 몸을 굳혔다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 여자는... 내 책임이야.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울게 했어.’“미안해.”그는 낮은 목소리로 사과하며 그녀를 다독였다.“걱정하지 마.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유건 씨...”소미는 더욱 남자의 품에 파고들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저... 유건 씨 없으면 못 살아요.”...돌아오는 길.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조금 전, 시연이 그렇게 떠났을 때 그는 막을 수 없었지만, 늦은 밤에 그녀가 안전하게 도착했는지 확인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는 오늘 밤에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았다.전화기 너머, 시연은 화면을 내려다보았다.이제는 이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유건이 새로 바꾼 번호였다.그녀는 망설이지 않았으며, 받을 생각조차 없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전화를 끊은 유건은, 그녀가 받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손을 꽉 쥐었다.“임진아 집으로 가.”그는 기사에게 지시했다.... 소미 집은 동쪽에 있고, 강울대는 서쪽에 있었다.두
“화내도 돼. 짜증 내도 돼. 하지만 제발,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 난 못 해... 너 없이 못 살아.”“은이야...”눈이 마주쳤고, 시연의 눈빛 속에는 조용한 흔들림이 있었다.“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줘, 응?”거리 한쪽, 벤틀리 안.창문 너머로 유건은 시연과 은범이 서로를 끌어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화해했네. 빠르기도 하지.’‘노은범, 사람 잘 구슬리네.’‘오히려 잘 됐어. 그게 내가 원하던 일이었으니까.’유건은 시선을 거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이제 됐어.’이어서 기사에게 지시했다.“출발해.”“네.”차가 움직이자, 유건은 무심코 백미러를 바라봤다.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를 안고 있었다.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이제는 놓아줘야 해.’‘시연이는 자신의 길을 가야 하고, 나도 내 책임을 다해야 하니까.’그리고 앞으로, 유건은 시연의 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시연은 은범이 진정할 시간을 주고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냈다.“네 어머니... 편찮으시잖아. 요즘 계속 돌봐 드리고 있지?”“응...”은범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어머니가 진주를 많이 좋아하셔. 그래서 어머니 기분이라도 풀어 드리려고 친구처럼 지내기로 한 거야. 하지만 시연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응, 알아.”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여자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졌지만, 속은 쓰렸다.‘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은범이를 위한 거야.’ “하지만, 은이야. 난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내 문제야.”은범은 순간 멍해졌다. 시연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은이야, 미안해.”시연은 입술을 꽉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거 알아? 네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을 때... 네가 다른 여자에게 네 재킷을 걸쳐 줄 때, 난 전혀 슬프지 않았어. 화도 나지 않았고.”은범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
아침, 시연은 막 사무실에 도착해 근무복으로 갈아입은 참이었다. 그때 주재호의 전화가 걸려 왔다.[지시연 씨,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아요? 문제없으면 가정법원에 가서 서류를 처리하시죠.]‘이렇게 빨리?’‘장소미가 어젯밤 한바탕 소란을 피웠더니, 고유건이 바로 일정부터 잡은 모양이네.’ 시연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그녀는 지금 프로젝트팀에서 자료 정리에 집중하는 단계였다.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이라 오후 일정 조정은 문제 되지 않았다.[그럼 오후에 봅시다.]“네, 오후에 뵐게요.”전화를 끊고, 시연은 다시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정리해야 할 자료가 너무 많아 점심시간에도 식당에 갈 겨를이 없었다. 어차피 입맛도 없었기에 따뜻한 물과 식은 식빵 한 조각, 남은 매실장아찌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오후가 되어, 시연은 과장실 문을 잠그고 아파트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시연아! 여기 있었구나, 다행이다!”“서 선생님?”시연을 부른 사람은 양석현 팀의 펠로우, 서성안이었다.서성안이 다급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황 선생님이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곧 있을 수술에 못 들어가게 됐어. 너, 준비하고 바로 들어오도록 해!” “네?”시연은 당황해 멍해졌다. 곧바로 난감한 얼굴로 망설였다. “서 선생님, 저는 아직 대형 수술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요...”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는, 오후에 사적인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가정법원에 가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니 말이다.“응?”예상치 못한 거절에 서성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이런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다고?”“저...”서성안이 말한 ‘기회’라는 게 뭔지는 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 심폐 프로젝트팀에서는 중요한 수술이 있었다. 집도의는 양석현.시연이 직접 수술에 관한 서류를 작성한 수술이었다.만약 가정법원 일정이 없었더라면, 그녀도 망설임 없이 기꺼이 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해야 했다.“서 선생님, 다른 분께 부탁할 수는 없을까요
지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형수님,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형님을 일부러 약 올리는 건가?’‘형님은 이미 커피 두 잔을 마셨어... 그리고 형님의 표정은...’‘폭발하기 직전이라고!’시간이 지나가고, 해는 서서히 서쪽으로 기울었다....수술이 끝났을 때는 이미 오후 5시가 넘었다.“큰일이야!”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시연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수술실을 나섰다. 그리고 급히 병동으로 가서 핸드폰을 꺼내 지한에게 전화를 걸었다.“지한 씨, 나예요.”[형수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지한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분명 짜증이 묻어 있었다.[왜 안 오셨어요?]“미안해요.”시연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갑자기 일이 생겨서 연락할 틈이 없었어요.”[지시연.]전화기 너머로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지한이 스피커폰을 켜둔 상태에서, 유건이 직접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남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거칠었다.[어디야? 당장 여기로 와!]“네?”시연은 당황해서 무심결에 물었다.“아직도 가정법원에 있어요?”[당연하지!]남자의 목소리는 더더욱 거칠어졌다.“네가 안 왔는데, 내가 어디를 가겠어?”시연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거렸다.“알았어요,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고, 시연은 부리나케 병원 정문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 가정법원으로 향했다.가는 동안 몇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가정법원이 다섯 시 반까지였나, 여섯 시까지였나?’‘시간이 맞을까?’하지만 예상치 못한 정체로 인해 시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6시를 넘긴 상태였다.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벤틀리 옆에 서 있는 지한이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미안해요!”시연은 달려가며 사과했다.“제가 아니라...”지한은 차를 가리켰다.“형님한테 사과하셔야죠.”“알았어요.”시연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유건의 날카로운 옆모습을 슬쩍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유건 씨...”쿵!갑자기 유건이 몸을 돌려,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
유건은 할아버지의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머릿속이 순간 새하얘졌다.“할아버지,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흥.”고상훈은 비웃듯 콧소리를 내뱉고, 차갑게 손자를 곁눈질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서 묻는 거냐?”“할아버지...”“유건아, 난 아픈 거지, 죽은 게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지는 목소리.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톤이었다.“너, 또 그 여자 연예인이랑 엮였지? 맞냐, 아니냐?”“그게 아니라... 소미 씨가 그때 다쳐서...”유건은 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고상훈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변명 같은 건 필요 없어!”고상훈은 짜증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안다. 시연이랑 따로 산다는 것도... 내가 몰랐을 것 같냐? 결국 다 그 여자 때문이잖아. 그러고도 네 주제에 시연이가 외도했다고 몰아세워?”그 말에 유건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나는...’고상훈의 시선이 이번엔 시연을 향했다. 그 눈빛엔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가득했다.“시연아, 할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아니에요...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을 막았다. 목이 콱 멘 듯했다.‘이런 말을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넌 좋은 아이야. 그건 내가 제일 잘 안다.”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유건을 향해 돌아섰다.“시연이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건 그냥 핑계야. 네가 책임을 회피하려고 만든 말이지.”“할아버지...”유건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히 내놓을 말도 없었다.‘맞아, 결국 내가 잘못한 거니까.’ “제 잘못입니다.”유건도 더는 변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시연을 오해했고, 다그쳤고, 상처 줬으니 말이다.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됐어.”고상훈은 깊은숨을 내쉬며 말했다.“애초에 넌 시연이랑 결혼할 생각이 없었잖아. 그걸 내가 억지로 밀어붙인 거고. 결국 이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는 거다.”그는 마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 도착할 즈음, 시연이 눈을 떴다.“도착했어요?”“거의 다 왔어.”유건은 살짝 아쉬웠다. ‘이렇게 금방 깨다니... 좀 더 자도 되는데.’“조금만 더 누워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이젠 안 잘래요.”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고, 곧 임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아야, 나야... 응, 나 도착했어. 혹시 골목 입구 쪽으로 나올 수 있어? 눈이 와서 미끄러질까 봐. 고마워.”그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유건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다 정해둔 거야.’‘결국... 나랑은 끝까지 선 긋겠다는 거네.’차가 골목을 돌자, 시연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저기 세워줘요.”시연은 고개를 돌려 유건에게 미소를 지었다.“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진아가 날 데리러 올 거라서, 이만 여기서 내릴게요.”“그래.”유건은 간신히 목을 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혀끝이 씁쓸했다. ‘왜 이렇게 입안이 쓰디쓴 거야...’길 건너, 빨간 롱패딩을 입은 진아가 아이처럼 방방 뛰며 이쪽으로 달려왔다.“시연아!”차에서 막 내리는 시연을 향해 손을 흔들며 외쳤다.“거기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마! 우리 아가 다치면 안 되잖아. 아가야, 이모가 왔어!”시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모! 잘 들려요!” 유건은 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연이 진아의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발을 옮기며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그 모습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그는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앞자리에서 지한이 힐끔 유건을 보았다. ‘형님이 형수님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뻔한데...’‘왜 그렇게 혼자 아닌 척하는 건지... 참 답답하네.’ 지한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외쳤다. ‘이래서야 어찌 제대로 풀리겠냐고요...’그때, 유건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한 번 보고, 곧장 받았다.“네, 할아버지.”전화기 너머로 낮고 단호한
“아...”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놀란 눈으로 유건을 올려다봤다. 이내 눈동자 깊숙이 깔린 공포감이 그대로 드러났다. ‘방금... 진짜로 넘어졌으면 어쩔 뻔했어... 아이까지...’“놀랐지?”유건은 미안함과 자책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유건 역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 턱 끝을 시연의 머리 위에 살며시 대고, 조용히 중얼거렸다.“미안해, 내 잘못이야.”‘네가 손을 뿌리쳤어도, 내가 끝까지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너한테 판단을 맡긴 내가 바보지.’잠시 생각을 정리한 유건은 망설임 없이 긴 팔을 뻗어 시연을 그대로 안아 올렸다.“꺅!”몸이 허공에 뜨자 시연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유건의 목을 두 팔로 감았다.따뜻하고 단단한 품속, 시연은 어느새 어리고 여린 고양이처럼 유건 품 안에 조용히 안겨 있었다.‘왜 이렇게... 익숙하고 편하지...?’유건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물처럼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차까지 안고 갈게. 금방이야.”말을 내뱉자마자, 유건은 조금 후회했다. ‘아니, 너무 가깝잖아? 차를 더 멀리 대라고 할 걸 그랬어...’ 지한이 차 옆에 서 있다가 타이밍 맞춰 문을 열어줬다. 유건은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시연을 차 안에 내려놓았다.그녀는 문득, 시트 위에 놓인 작은 쿠션 하나를 발견했다. ‘예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설마, 날 위해 준비한 건가?’곧 유건도 차에 올라탄 후, 운전석의 지한에게 조용히 말했다.“출발하자. 그리고 천천히 가. 시간은 충분하니까.”“네, 형님.”차는 조용히 눈길을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밖에선 여전히 눈이 퍼붓는 중이었지만, 차 안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시연이 롱패딩을 벗자, 유건은 바로 담요를 꺼내 그녀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잠깐 눈 좀 붙여.”그 순간, 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정돈된 이목구비, 잔잔한 눈빛. 그제야 의문이 떠올랐다.“근데..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시연은 유건의 말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 괜찮다니까요. 그냥... 조금 나른할 뿐이에요.”“시연아.”유건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단호하고 냉정한 톤이었다.“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협의하자는 것도 아니고.”그리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시연의 아랫배로 향했다. 그 시선 하나에, 시연은 숨을 삼켰다.“너, 너 자신은 둘째치고... 얘한테까지 무심할 거야?”아이 이야기까지 나오자, 시연의 눈빛엔 망설임이 번졌다.“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건 일이니까...”‘지금 상황에선 내가 나서야 해...’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데...’유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연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기다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이 문제는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었다. 유건은 바로 양석현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결하면서도 공손하게 상황을 설명했다.“양 교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시연이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졌네요.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네, 감사합니다...”전화기 너머에서 양 교수는 무언가를 길게 말했다. 시연은 가만히 입술을 다문 채 기다렸다. 두 손은 자연스럽게 아랫배에 모아졌다.“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유건은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내려놨다.“양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병가를 내주셨어. 바로 다른 사람을 보내시겠대. 그러니까 너는 그냥 푹 쉬어.” 유건은 시계를 확인했다.“지금 아직 7시도 안 됐어. 대체 인원 도착해서 준비하면 충분해.”세미나는 9시 반 시작이었다. 시간상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시연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고마워요.”작은 목소리였지만, 그 한마디에 유건의 가슴이 묘하게 저릿해졌다.‘이젠... 우리 사이가 이렇게나 멀어진 건가?’ ‘‘고맙다’ 같은 말이 이렇게 남처럼 들리다니.’“고마워할 필요가 없어. 별것도 아니잖아.”표정 하나 변하지
문을 닫자마자 유건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굵은 핏줄이 툭툭 뛰기 시작했다. 시연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모습만 떠올려도 속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 같았다.“고유건, 너 진짜 미쳤다. 짐승이 따로 없네.”그는 작게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시연은 아픈데,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유건은 방에서 나왔다. 그가 부탁한 호텔 측의 얼음찜질팩과 생강차도 마침 도착했다. 유건은 얼음팩을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얹어주고, 생강차를 한 숟갈씩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아플 땐 유난히 말을 잘 듣는 시연이었다. 유건이 물 마시라고 하면 그녀는 얌전히 마셨고, 알코올 솜으로 몸을 닦아줄 때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건은 점점 녹초가 되어갔다. 그 정성은 점차 효과를 보기 시작했고, 결국 밤엔 시연의 상태도 조금 나아졌다. 베개에 기대어 잠든 그녀의 눈가엔 마른 눈물 자국이 살짝 맺혀 있었다. 유건은 그제야 한숨 돌리며 조용히 그녀 곁을 지켰다. 하지만 그는 방심하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체온을 체크했고, 그때마다 시연을 살짝 깨워 물을 마시게 하고, 얼음팩도 계속 갈아주었다. 그렇게 새벽을 지나, 시연의 체온은 다행히 더 오르지 않았다. 곧 동이 트려는 시간이었다. 유건은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그저 시연을 바라보는 눈빛엔 절박함과 집착이 뒤섞여 있었다. ‘다행이야... 내가 와서.’ 그가 오지 않았다면, 지난밤 시연 곁에서 지킨 건 은범이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시연에게 한 모든 일들을... 노은범이 했겠지?’ 그 끔찍한 상상을 하자마자 유건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쭉 흘렀다. ...아침 7시, 시연의 핸드폰에서 알람이 울렸다. 시연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고, 막힌 코도 많이 나아졌다. 이어서 팔을 뻗으며 일어나려는데, 유건이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일어나긴 왜 일어나? 아직
시연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말끝도 흐릿했다. “그냥 눕느라... 새 양말도 못 신었어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건의 손이 시연의 이마에 조심스레 닿았다. 차가운 손바닥이 화끈거리던 열기에 닿으니, 시연은 본능적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 ‘시원하네.’ 그 모습에 유건은 순간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해졌다. ‘귀여워. 아픈 사람 맞나...’ 목이 간질거려서 목소리도 저절로 낮아졌다. “의사 왔으니까, 진료받아 보자.” 이어서 고개를 돌려 의사를 향해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고 대표님.” 의사가 다가와 진찰을 시작했다. 귀찮아하던 시연도, 이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의사는 시연의 체온을 측정하고, 목 상태와 복부 상태를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 걸리셨네요. 다행히 열은 심하지 않아요. 임산부이기 때문에 약물은 조심해야 하고요.” 말을 끝내고 나서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덧붙였다. “이건 알코올이에요. 대동맥이 지나가는 부위, 예를 들어, 목, 겨드랑이, 허벅지 안쪽... 이런 곳을 닦아드릴게요. 물리적으로 열 내릴 수 있을 겁니다.”“그리고 이마랑 겨드랑이에 얼음팩을 올려주시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래도 열이 안 떨어지면, 마지막엔 해열제 투여를 생각해야겠고요.” “그게 다예요?” 유건은 뭔가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강 끓인 물 같은 거, 마셔도 되나요?” 의사가 당황스러운 듯 웃었다. “네, 드셔도 됩니다. 중요한 건 따뜻한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거고요.” 유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던 지한에게 말했다. “지한아, 방 하나 잡아서 의사 선생님이 쉬실 수 있게 도와. 혹시 밤에 또 무슨 일 있으면 모셔야 하니까.” “네, 형님.” 의사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한과 의사가 방을 나간 뒤, 유건은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제야, 뒤편에 아직도 남아 있던
‘허.’ ‘말도 그렇게 하더니, 진짜 행동하는 사람이었네.’ ‘노은범이 이 시간에 여기 온 건... 본인 의지였을까?’ ‘설마 시연이가 직접 불렀을까?’ 그 가능성을 떠올린 순간, 유건의 속은 마치 식초를 들이켠 듯 꽉 막혀버렸다. ‘몸이 아파서 누군가를 불렀는데, 그 누군가가... 왜 내가 아니야?’ 유건은 서늘한 눈으로 은범을 내려다봤다. “노 사장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이 늦은 밤에 남의 아내 방 앞에서 서성이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은범은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 눈빛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 사이, 이미 금 간 지 오래지.’ ‘정상적인 부부였다면... 시연이가 날 찾을 일도 없었겠지.’ 그는 일부러 천천히 말했다.“적절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시연이가 불러서 온 겁니다. 몸이 안 좋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직접 불렀다고?’ 유건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눈꼬리가 번뜩이며, 살기마저 스쳤다. “노은범.” 유건이 한 걸음 다가섰다. “지금, 죽고 싶어서 여기 온 거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건은 양손으로 은범의 옷깃을 거칠게 잡아챘다. “꺼져.”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지금은 참고 있지만, 한 번 더 건드리면 주먹이 날아갈 수도 있다고.” ‘지금 이 순간, 시연이가 내 아내라는 사실은... 네가 잊고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야.’은범은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왜 꺼져야 하죠?” “당신이 대충 다룬 사람일지 몰라도, 내겐... 그 사람이 전부거든요.” 유건의 눈동자가 휘청 흔들렸다. ‘전부?’ 그 말이 유건의 심장을 그대로 쥐어짰다. “죽고 싶구나 진짜.” 이성이 흔들린 유건은 팔을 들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칵- 그리고, 문틈으로 시연이 고개를 내밀었다. “뭐 해...?” 피곤하고 창백한
‘그래서 그런가... 불길한 예감은 꼭 맞아떨어진다니까.’ 저녁 회의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온 시연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처음엔 단순히 목이 간질간질했는데, 곧이어 재채기가 계속 나왔고, 콧물에 눈물까지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깜짝 놀랐다.‘뜨거워... 감기다. 몸살이 왔어.’ 그녀는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시연은 따뜻한 물을 끓여 계속 마시면서, 이불에 몸을 꽁꽁 감쌌다.‘이러면... 땀 나면서 열 좀 빠지겠지.’ 하지만 아무리 이불을 덮고 있어도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몸은 나른하고,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시연은 핸드폰 진동 소리도 듣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같은 시각, G시. 유건은 회사를 나와 BLUE로 향하던 중, 차에 올라타자마자 첫눈을 마주했다. 창밖에서는 조용히 작은 눈송이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겨울이네...’ 그때, 별산장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말해.” [고 대표님, 우주 도련님께서 며칠 뒤에 건강검진 예약이 잡혀 있는데요. 이쪽으로 옮긴 지 얼마 안 돼서, 이전 병원 기록을 요청드리고자 연락드렸습니다.]“나한테 물어보면 뭐 해? 사모님한텐 연락 안 했어?” [네, 사모님께 먼저 연락드렸는데... 전화를 안 받으시더라고요. 바쁘신 것 같아서요.]유건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내가 해볼게.” 전화를 끊자마자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계속 진동음만 울릴 뿐, 받지는 않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회의는 끝났을 텐데.’ ‘잠든 건가?’ 하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했다. ‘그럴 리 없는데...’ ‘시연이... 요즘 몸도 약해졌는데...’ 유건은 핸드폰을 꾹 쥐고 곧바로 옆자리에 앉은 지한에게 말했다. “시연이가 L시에 있는 호텔 이름 확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