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얼음물이 닿자, 유건은 순간적으로 눈을 떴다.넓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자, 또렷한 시야 속에 시연의 단정한 이목구비가 들어왔다.“깼어요?”시연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말했다.유건은 머리가 아파 어리둥절했다.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마치 순진한 아이 같았다.“가만히 있어요.”시연은 경고했다.“움직이면 또 물 뿌릴 거예요.”마치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유건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시연은 손을 뻗어 남자의 젖은 외투를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속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기다려요.”그녀는 욕실로 가서 수건을 적셔 돌아와 간단히 물기를 닦아주었다.“일단 이렇게 하고, 집에 가서 씻어요.”그리고 준비해 온 옷을 하나하나 입혔다.어릴 때부터 키 180cm인 남동생을 챙기며 익숙해진 덕분에, 그녀는 유건을 돌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다 됐어요.”시연은 남자의 양복 깃을 정리하며 툭툭 털었다.“일어날 수 있어요? 집으로 가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를 허리에 감싸 안았다.시연은 굳어버렸다. 한순간도 움직이지 못했다.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건의 짙은 갈색 머리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의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가, 남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힘들어. 너무 힘들어.”남자의 목소리는 흐릿하고 나른했다.“알아요.”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본인이 지금 누구를 안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혹시 나를 장소미로 착각한 건 아닐까?’‘뭐, 상관없어.’그녀는 천천히 유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나도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본 적 있어요. 나도 어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적이 있다고요. 그 마음, 잘 알아요.”생이별의 아픔은, 죽음과 다를 바 없었다.시연은 그저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유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맑았다.“네가 말하는 사람, 노은범이지?”
정기환은 대표실에서 시연을 보자, 놀란 듯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형수님, 어쩐 일이에요? 지금 막 모시러 가려던 참이었는데요.”“괜찮아요.”시연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가방을 내려놓았다.“기환 씨도 바쁘잖아요. 난 애도 아니고, 혼자 올 수 있어요.”그리고 물었다.“유건 씨는 아직 회의 중이죠?”“네.” 기환이 옆방을 가리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알겠어요.”시연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그럼 난 공부하면서 기다릴게요.”“그래요.”기환은 그녀가 펼친 의학서를 흘깃 보았다.책이 꽤 두꺼웠다. 게다가 자신이 모르는 단어들도 빼곡했다. ‘형수님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회의실 쪽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중간에 주지한이 자료를 가지러 들렀다. 시연은 사업적 이야기를 잘 모르지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잠시 후, 유건이 지한과 함께 돌아왔다. 걸어오면서도 바삐 대화를 나눴다.“최대한 빠른 항공편으로 준비해. 직항이 없으면 경유라도 좋아.”“알겠습니다.”두 사람 모두 빠른 걸음이었다. 불필요한 말은 없었다.유건은 사무실로 들어서다가 시연을 발견하고 멈칫하며 이마를 찌푸렸다.‘아, 웨딩드레스 피팅.’“저기, 나...”“들었어요.”시연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분위기를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괜히 유건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나 혼자 가도 돼요. 웨딩드레스 피팅, 별거 아니잖아요.”그녀의 배려심에, 유건은 죄책감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미안해. 정말 일이 있어서 그런데, 이틀만 기다려 줄 수 있어?”“괜찮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이틀 후엔 나도 수술 일정이 있어서 못 가요.”그녀 역시 바빴다. 일도 해야 하고, 시험 준비도 해야 했다.더 나은 방법이 없었고, 유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피팅하면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꼭 얘기해줘. 불편하거나 싫은 건 참지 말고.”“네.”유건 일행은 시간이 촉박해 서둘러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바로 노은범이었다.그는 이곳에서 고객을 만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생각해 보면, 은범과 시연도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었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느꼈다.은범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시연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이야.”“오랜만이네.”은범의 가슴이 저릿했다.그날 이후, 은범이 아무리 찾아도 시연은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고, 메시지도 답이 없었다.은범은 오늘 마주쳤을 때도, 그녀가 외면할 거라 생각했다.은범이 카운터를 가리켰다.“저 팔찌, 마음에 들어? 내가 사줄게.”“아니, 필요 없어.”시연은 당연하다는 듯 남자의 팔을 붙잡고 거절했다.은범이 미간을 좁혔다.그가 말하기도 전에,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오늘 웨딩드레스 피팅하러 왔어.”은범은 충격을 받은 듯 굳어버렸다.‘내가 잘못 들은 걸까? 웨딩드레스?’‘시연이가 결혼한다고?’그는 간신히 물었다.“누구랑?”시연은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유건 씨...”“그 사람이랑?”은범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지만 그 사람은... 장소미와...”‘만나고 있지 않을까?’은범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도 시연이 상처받을까 봐...그러나 시연은 차분했다. 상처받은 기색도 없었다.“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에는 그런 결혼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으니까.”‘무슨 말이야? 체념인가? 아니면 단순한 현실 수용?’갑자기, 은범은 깨달았다.“혹시 우주 때문이야?”‘웰스’로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내 도움을 거부한 이상, 시연이한테 남은 선택지는 고씨 가문뿐이잖아.’‘결국, 내가 시연이를 이렇게 만든 거야?’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시간이 됐네. 난 먼저 갈게.”가볍고도 덤덤한 인사였다.은범은
“시연아.”진아는 간식을 먹을 생각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시연 앞에 내밀었다.“이 사람, 너 맞아?”“뭐?”시연은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또다시 실시간 검색어에 ‘폭탄’이 터졌다.그리고, 그녀가 그 주인공이었다.[GP그룹 대표, 결혼 공식 발표.]시연이 기사를 열어보니, 사진은 없었다.단순히 유건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며, 신부는 어릴 적 정혼한 상대인 시연이라는 내용뿐이었다.딱 고씨 가문의 스타일이었다.고상훈이 언급했던 일이었기에, 시연은 놀라지 않았다.그래서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웃었다.“기사에 나온 그대로야. 나 맞아.”“그런데도 웃음이 나와?”진아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노은범을 두고, 고유건 때문에 이러는 거야?”“응.”하은도 참다못해 끼어들었다. 유건이 재력가인 건 맞지만, 장소미와 얽힌 일을 듣고 난 후로는 그를 응원할 수 없었다.“시연아, 진지하게 생각해 봐. 괜히 부잣집에 시집가서 고생하는 거 아니야?”‘고생?’시연은 씁쓸하게 웃었다.‘아마 나보다는 고유건이 더 힘들 거야.’ ‘나는 ‘혜택’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어.’ ‘그런 입장에서 ‘고생’이라는 말을 할 자격도 없지...’‘내가 감히 ‘고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 위선자가 되는 거 아닐까?’ 그래서 친구들 앞에서 솔직하게 말했다.“나는 고상훈 어르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어. 그에 대한 보답이 필요해.”이제 진아와 하은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우주의 일과 빚을 지기 싫어하는 시연의 성격도 알고 있으니, 두 사람은 시연이 결혼으로 그 은혜를 갚는 것이 방법 중 한 가지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의 침묵을 보고, 시연은 웃음을 지었다.“왜 그렇게 심각한 얼굴들이야? 나는 지금 큰 집에서 살고, 차도 있고, 가정부까지 있어. 나쁘지 않아.”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고씨 가문으로 들어가면서 생활비 부담이 사라졌고, 수입도 온전히 저축할 수 있었다.“점심 같이 먹자. 내가 살게.”하은은 단순한 성격이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시연은 수술이 있었다. 요즘 식욕도 좋아지고, 잠도 잘 자니 컨디션이 최상이었다. 문제 될 게 없었다.프로젝트팀의 수술은 늘 긴 시간이 걸렸다.시연의 핸드폰은 탈의실 사물함 안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결국, 그 전화는 해외에 있는 유건에게 다다랐다.[여보세요. 고 대표님.]유명한 산부인과에서 온 전화였다.“무슨 일이에요?”[고 대표님, 사모님께서 정기 검진을 받으셔야 하는데, 이미 예약일을 이틀이나 넘기셨습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언제 오실 수 있는지 다시 조정하려고 합니다.]‘이런 일이 있었다고?’유건은 미간을 문질렀다.“알겠어요. 내가 전달할게요.”전화를 끊고, 유건은 바로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역시나, 응답이 없었다.‘바쁘겠지. 아마 수술 중일 거야.’크게 신경 쓰지 않고, 그는 메시지를 작성했다.[병원에서 전화가 왔어. 언제 시간이 되는지 연락 달래.]보내고 나서도 답장은 없었다. 유건은 그녀가 일이 끝나면 볼 거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리고 곧이어 미팅 일정이 있어, 준비를 마치고 출발했다....그 시각, 수술실에서 큰일이 벌어졌다.시연은 손 씻는 공간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그녀는 막 수술을 마친 뒤, 가운을 벗고 손을 씻던 중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시연은 병원 내에서 즉시 응급조치를 받았다.진아가 도착했을 때, 시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마에 살짝 긁힌 상처 외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그녀는 눈을 뜨자, 울고 있는 진아와 눈이 마주쳤다.시연은 깜짝 놀랐다.“뭐야, 나... 죽기라도 한 거야?”“야!”진아가 친구를 째려보며 성질을 냈다.“그런 말 하지 마! 나 진짜 놀랐다고!”시연은 피식 웃었다.“내 잘못이야? 울지 마. 나중에 진성빈이 알면, 또 내가 널 괴롭혔다고 할 게 뻔해.”“친구야.”진아는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삐죽였다.“선생님이 그러는데, 네가 갑자기 기절한 건... 아마 배 속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대. 나 너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오선화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그렇다고 좋다고 할 수도 없지. 아직 초기인데, 앞으로 여섯 달 이상 남았잖아. 이렇게 관리하다간 위험해질 수도 있어. 겁주려는 게 아니라, 진짜 조심해야 해.”임신은 원래부터 큰 고비였다. 과거에는 출산 자체가 생사를 오가는 일이었다.지금은 의료기술이 발달했지만, 임신 중 겪어야 할 어려움은 여전히 존재했다.“교수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시키시는 대로 할게요.”진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오선화는 진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더 심기가 불편해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왜 친구가 너를 데리고 온 거야? 네 남편, 고 대표는? 그 아이, 두 사람의 아이잖아?”시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원래부터 고유건과 상관없는 아이야.’“아기가 임신 주수보다 작아.”오선화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다.“영양 수액을 맞는 게 좋겠어. 몸 상태를 더 지켜보는 게 필요해.”영양 수액은 저렴한 치료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연은 ‘고유건 대표의 예비 아내’였기에, 비용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만약 유건이 알게 된다면, 아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에 가만히 있겠는가?그러나 시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저... 당장은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교수님.”오선화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영양 수액은 몸에 전혀 해가 없어. 아이에게도 좋고.”“알아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남편이 없으니까, 돌아오면 상의한 뒤 결정할게요.”그럴듯한 이유였다.오선화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다음 검진 때 다시 보자.”병원에서 나와, 진아는 시연의 팔을 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자 눈물이 핑 돌았다. 참고 또 참았지만, 결국 터졌다.“고유건한테 말할 거야?”“왜 말해?”시연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이 아이, 그 사람의 아이도 아니잖아.”진아는 말문이 막혔다.“그럼 너희 둘,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유건이 생각하기 지금 시연은 강울대에 있거나 강울대병원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별 문제는 없을 터였다.그는 너무 급하게 떠났으니, 돌아온 후에는 시연에게 한마디 전하는 것이 도리였다.그러나, 시연은 단호했다.“당신 혼자 가요. 난 안 갈게요. 아침에 이미 다녀왔어요.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다 끝나면 할아버지 뵙고 집에 갈 거예요.”그녀의 말을 듣고, 유건은 잠시 침묵했다.‘정말 바쁜 걸까, 아니면 나를 피하는 걸까?’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용히 물었다.[나한테 화난 거야?]시연은 피식 웃었다.“내가 화낼 이유라도 있어요?”그녀는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일 때문이었잖아요. 나도 이해해요. 화낼 이유도 없어요. 나도 바쁘니까, 이해해 줘요. 할아버지께서 많이 기다리시니까, 어서 가봐요. 난 끊을게요.”[그래.]통화가 끝난 후, 유건은 핸드폰을 쥔 채 얼굴을 반쯤 가렸다.‘시연이가 말하는 대로 하는 게 맞겠지...’‘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시연이가 아무런 소란 없이 차분하게 행동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니까.’...VIP 병실에서 유건은 고상훈과 짧게 안부를 나눴다.고상훈은 손자에게 당부했다.“예복 맞추는 건 서둘러야 해. 그리고 결혼식 전에, 너랑 시연이는 제남도에 다녀와야 해.”결혼식 과정 점검을 위해, 일종의 리허설을 진행해야 했다.이번 결혼식은 최대한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고씨 가문의 위상을 생각하면 최소한의 격식은 갖춰야 했다.“알겠습니다.”유건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가라앉았다.‘내 아이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새로운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니...’VIP 병동을 나서며 시간을 확인했는데, 아직은 이른 시각이었다.그는 먼저 예복을 맞추러 가기로 했다.출발 전, 유건은 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예복 맞추러 가려고.”[네.]그녀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끝이야?’유건은 핸드폰을 꼭 쥐며 말했다.“바쁘지 않으면 같이 갈래?”‘신부한테 신랑의 예복이 적절한지
시연은 제안했다.“아니면, 절차를 문서로 정리해서 달라고 하세요. 그대로 따르면 실수할 일도 없을 거예요.” “지시연.”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차갑게 끊겼다.유건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시연은 침을 삼켰다.“안 돼요?”“하...”유건은 냉소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더 대충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결혼식도 대신해 줄 사람을 찾는 건 어때?” 이 말에는 날카로운 비아냥이 묻어 있었다.시연은 그걸 알아차렸고,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반박했다.“고유건 씨도 나랑 같은 마음인 거 아니에요?”유건은 말문이 막혔다.“그래요, 난 대충하고 싶어요.” 시연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너무 이기적으로 굴지 마세요.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이 결혼 자체가 없었을 거라는 걸...”“서로 원치 않는 결혼이잖아요. 그냥 형식적인 거고, 난 이미 동의했으니까 협조할 거예요.”“그냥 번거로워서 제안한 거였어요. 당신이 싫다면 철회할게요.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요.”여자의 말에 유건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시연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 결혼은 유건에게도 단순한 절차일 뿐이었다.시연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당신이 원하는 대로 할게요. 일정은 내가 조정하면 되고요.”유건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았다.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몇 초 동안 서 있다가,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 나갔다....제남도 방문 날짜는 모레로 정해졌다.출발 전에, 유건과 시연은 오후 4시에 만나기로 약속했다.점심시간, 시연은 임진아와 함께 식사하기로 했다.요즘 식욕이 아주 좋아졌지만, 이날은 예상외로 입맛이 없었다.“왜 그래?”진아가 시연의 안색을 살폈다.“어디 아파?”“응.”시연은 숨기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랫배가 은근히 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전 내내 나아지지 않았다.“진아야, 나 병원에 좀 가야 할 것 같아.”진아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밥이고 뭐고 필
시연은 진아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뭐, 그런 셈이지.” 그러고는 비웃듯 웃어 보였다. “고 대표는 항상 자기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번엔 미안하지만... 실망 좀 해야 할걸?’ ‘우주를 위해서라면, 난 절대 물러설 수 없어.’ 그날 밤, 유건은 나타나지 않았다. G시에 아예 안 온 건지, 왔지만 시연을 피한 건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시연은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연은 강울대병원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병가 탓에 업무 인수인계를 제대로 못 하고 나온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었다. 서류며 자료가 다 사물함에 있어서, 후임에게 전달하려면 직접 챙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무리하고 병원을 나서려던 때, 외래 진료 대기석에 앉아 있던 지동성이 눈에 들어왔다. 시연은 발걸음을 멈췄다. ‘갈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이번 병환 이후로 지동성은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피부도 푸석했고, 눈빛도 많이 흐려진 듯했다.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먼저 알아챈 건 지동성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시연을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시연아.” 시연은 입술을 꾹 눌렀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오늘 퇴원이에요?” “응. 병원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더니, 집이 그리워지더라.” 지동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더는 입원해도 큰 효과 없는 보존 치료. 그는 이제 집에서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동성의 시선이 시연의 배로 내려갔다. “배가 많이 나왔네.” “네.” 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동성은 개의치 않은 듯 미소 지으며 물었다. “고 대표랑은... 잘 지내고 있어?” ‘잘?’ 시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아마도... 잘 지내는 편이겠죠.”
시연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봤다. “아니, 그냥 책 몇 권 봤을 뿐인데, 그렇게 잡아먹을 듯한 표정은 좀 아니잖아요?” “지시연.” 유건이 그녀의 이름을 낮게 불렀고, 단추를 잠그던 손이 잠시 멈췄다. “너 지금 몇 살이지? 이 상황이 장난 같아? 너 출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기나 해?” 시연은 물론 알고 있었다. 석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내 배 속애를 걱정하는 거예요?” “그럼 안 되니?”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데?’ “하...” 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기네요. 내 배 속의 아이... 당신의 아기도 아니고, 당신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런데 왜 이렇게 오버예요? 드라마 찍고 싶어요?” “지.시.연.” 시연의 무심하고 조롱 섞인 말투는 유건을 제대로 자극했다. 그는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눈빛은 싸늘했지만, 뭔가 폭발하기엔 또 너무 절제된 감정이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결국 그는 손을 놓았다. “밥 먹자.” 시연은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이래도 화를 안 낸다고?’ 아침은 유명한 맛집인 ‘가을’에서 배달 온 것이었다. 둘은 마주 앉아, 마치 조금 전 싸움은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시연이 한입에 모닝빵을 먹자, 볼이 빵빵하게 부풀렸다. “천천히 좀 먹어.” 유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두 입으로 나눠 먹는 게 그렇게 힘들어?” 시연은 생각도 없이 유건에게 맞받아쳤다. “두 입으로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장소미? 혹시 그것 때문에 걔를 좋아한 거예요?”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일부러 던진 말이었다. ‘찔리지? 그래, 찔려야 해.’유건은 순간 움찔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은 없었다. 결국 가볍게 한숨만 내쉬었다. “너 체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별걱정 다 하게 해 놓고선.” 시연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인 채
식탁 위엔 여러 가지 반찬이 깔끔하게 놓여 있었다. 종류는 많은데, 양은 조금씩. 시연이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세심하게 준비된 상차림이었다.한 입 떠먹자마자 익숙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왕성애 이모님 손맛이다.’한동안 못 먹었던 그리운 맛. 시연은 괜히 마음마저 편안해진 듯,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유건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기분이 어떻든, 먹을 건 잘 먹는 건 참 다행이지.’‘이런 건... 늘 본받고 싶을 만큼 좋은 거야.’식사가 끝나자 시연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 순간, 유건이 물 한 잔을 건넸다.“배불러?”“네.”물컵을 받아 두어 모금 넘긴 시연은 남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아까 말한 거, 단 한 글자도 안 믿어요.”“시연아...”“그게 장소미 때문이든 아니든 상관없고, 이제...”시연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말 하나하나가 단단했다.“오늘 밤부로 이 집에서 나가줘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요.”“나 씻고 잘 거니까 나갈 때 문 잘 잠가줘요.”말을 마친 시연은 테이블에 손을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유건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시연은 매끄럽게 피했다.‘이젠... 이런 접촉도 무의미해.’유건이 설거지하고 조금 늦게 침실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이미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샤워기 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유건은 욕실 유리문 가까이 다가가 살짝 두드렸다.“시연아.”대답은 없었다.“씻고 나서 푹 쉬어. 난 할아버지 뵈러 가야 해서 먼저 간다.”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유건은 이마를 조용히 문지르며 한숨처럼 속삭였다.“잘 자, 시연아.”그리곤 조용히 돌아섰다.욕실 안.따뜻한 물줄기 아래, 시연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세게 문지르면서 속으로 중얼댔다.‘이런다고 씻기는 것도 아니지만... 뭔가를 지우고 싶어.’‘오늘 밤, 잠은커녕 눈이라도 붙일 수 있을까?’
“시연아, 넌 날 신고 못 해.”유건은 느릿하게 다가와 시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괜히 흥분하지 마.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내 아내 집에 오는 게 어떻게 불법 침입이야?”시연은 벼락 맞은 듯 숨이 턱 막혔다.‘진짜... 이 인간, 제정신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요?”시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유건을 노려봤다.“왜긴?”유건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조용히 손을 들어 시연의 머리를 쓸어내렸다.손끝이 스치자, 시연의 전신에 닭살이 돋았다.‘지금 뭐 하는 거야, 이 사람?’“쉬는 거 나쁘지 않잖아. 병가도 유급이고, 배도 이렇게 불러왔는데, 나는 그냥... 너랑 아이 둘 다 무사했으면 해서 그래.”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러섰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강하게 말해도 안 되니까, 이제 부드럽게 회유하는 거예요?”“너, 내가 진짜 그렇게밖에 안 보여?”“그럼 뭔데요?”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고 대표님, 기억력이 정말 안 좋으시네요. 며칠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었죠? 남을 위해 나한테 아주 ‘좋은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시연의 입에서 나온 건, 장미리가 시연이 있는 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던 그날의 일이었다.그날, 유건은 시연에게 몇 마디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었다.그 일이 떠오르자, 유건의 턱선이 살짝 굳었다.‘그래... 그땐 확실히 선을 넘었지.’‘그때부터 지금의 이 상황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어.’“넌 말이야...”유건은 이를 앙다물고 한숨을 꾹 눌렀다. 갑작스러운 무력감이 밀려왔다.찰나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다시 물었다.“그래서, 오늘 저녁은 뭐로 할래?”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고 대표님 뜻대로 하세요. 제 의견 따윈 애초에 안 중요하잖아요.”유건은 시연을 조용히 바라봤다.그 말에는, 섣불리 반박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그럼 내가 정할게. 밖에 나가기 싫어 보이니까, 집에서 먹자.”그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일까?’시연은 조용히 유건을 바라봤다. 유건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기만 했다.‘일 못 하게 한 것도, 우주 데리고 간 것도... 다 이 사람의 수단 아니었어?’‘이제 와서, 일 안 하게 하려는 게 목적이고, 우주가 수단이라는 식으로 말하다니.’‘이 사람... 이제 와서 물러서는 척하면서 방심시키려고?’하지만 시연은 알고 있었다. 고유건이라는 남자는, 자신을 무너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람이라는 걸.‘힘의 격차가 너무 커. 내가 이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잖아.’“유건 씨.”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남자의 셔츠 앞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제발... 우리 우주한테는 아무것도 하지 마요.”“우주는... ‘그분’이 자기 아빠란 걸 몰라요. 아빠도, 우리 엄마처럼...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연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곧 조용히 울음이 터져 나왔다.“흑... 부탁이에요... 제발...”시연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유건은 먼저 그녀를 품에 안았다.한 손으로는 등을 감싸 안고, 다른 손으로는 조용히 지시했다.“시연이 집으로 가자.”“네, 형님.”차는 곧장 시연의 집 방향으로 움직였다....시연의 집 앞. 차가 멈췄지만, 유건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고, 그도 할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그는 조심스럽게 시연의 외투를 여며주며 말했다.“올라가서 좀 쉬어. 이런 날, 혼자 생각만 하면 기분만 더 안 좋아져.”시연은 말없이 유건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담긴 뜻을, 유건은 바로 읽었다.“우주는 잘 있어. 별산장에 데려다줬거든. 오늘은 많이 피곤하니까...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 못 믿겠으면... 최 선생님께 연락해서 영상 통화해 봐.”‘그래도... 그 아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 나도 알아.’시연은 길게 떨리는 속눈썹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알겠어요.”유건은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끝까지
진아는, 스무 해가 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었다.이런 경험이라는 것은... 첫 키스. ‘지금 이게 뭐야?’그녀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렇게 모든 감각이 멈춰버렸다.‘이거... 꿈인가? 아니면... 악몽?’다행히도, 지하는 그리 오래 키스를 이어가진 않았다.금세 입을 떼었지만, 두 사람의 이마는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진아의 얼굴을 휘감았다.그리고 듣기만 해도 숨 막히는 낮고 거친 목소리.“진성빈이랑... 잔 거야?”진아는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라고? 내가 누구랑 뭘 했다고?’“묻잖아.”지하의 손이 진아의 턱을 살짝 더 조였다. 그리고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진성빈이랑 잤어? 어젯밤에? 아니면... 그 전부터?”‘이게 지금, 진짜로 나한테 하는 말이야?’그제야 진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진 상태에서 현실로 끌려 나왔다.그리고 엄청난 수치심과 분노가 뒤늦게 터졌다.“미친...!”진아는 손을 번쩍 들어 지하의 뺨을 그대로 올려 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힘껏.철썩!예상치 못했던 손길에 지하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임진아!! 미쳤어?!!”진아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고, 금세 투명한 진주처럼 뚝뚝 흘러내렸다.“진짜... 최악이야, 당신이란 사람!”“문 열어! 나 내려야 해! 당장 내려줘!”진아는 문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써 봤지만, 열리지 않았다.“아저씨!! 이 사람이 미친 거예요!! 문 열어달라고요!!”하지만 지하의 명령 없이, 운전기사가 움직일 리 없었다.“임진아!”지하는 진아가 다칠까 봐 뒤에서 그녀를 껴안은 채 두 손을 감싸 안았다.“좀 진정하고, 움직이지 마.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어디 다친 거 아니야? 내가 좀...”“싫어!!”진아는 겁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울부짖었다.“만지지 마! 제발... 제발 그만 좀 해!!”팔이 붙잡혀 있으니
순간, 유건의 눈빛이 매섭게 가라앉았다. 잘생긴 이목구비에 드리워진 어둠은 말 그대로 ‘폭풍 전야’였다.“귀신이라도 봤어?”“그건 아닌데요.”지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표정은 진짜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그리고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형수님... 주무시고 계십니다.”“자는 게 뭐 어때서?”유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지한이 급히 팔을 잡고 막았다.“형님!”“형수님, 혼자 주무시는 건... 아니에요.”‘뭐...?’유건의 눈이 번쩍 들렸다. 날카롭게 지한을 쏘아보며 낮게 물었다.“누구랑 자는데?”지한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하나하나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우주 도련님, 임진아 씨... 그리고...”말끝을 흐렸지만, 유건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진성빈? 설마 지하 이 자식 말이 맞았다고?’그 순간, 유건의 눈앞에 불이 번쩍 켜졌다.‘씨... 진짜 그럴 줄은 몰랐는데...’이성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끈이 ‘툭’ 끊어졌다.길고 날렵한 다리를 성큼 내디딘 유건은 말 그대로 번개처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하...”지한은 웃음을 참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 형은 꼭 이런 식이야.’“지... 지하 도련님.”민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같이... 안 들어가세요?”“가야지.”지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따라나섰다.“너희 형님이 질투하는 거 구경하는 게 제일 재밌거든. 이건 못 참지.”유건과 지하는 거의 동시에 테라스 쪽 방으로 들어섰다.그리고 두 사람이 본 풍경은...넓은 소파침대 위, 나란히 누운 네 사람이 곤히 자는 모습이었다.왼쪽부터 우주, 시연, 성빈, 그리고 진아.우주와 시연은 단정하게 담요를 덮고 제법 떨어져 자고 있었다.문제는 성빈과 진아.각자 담요는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누워 있었고, 성빈은 무의식중에 진아를 안고 있었으며, 진아는 그 품에 꼭 파묻혀 있었다.두 사람 모두 너무도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아야...”진아를 옮겨 눕힌 성빈이 머리를 살짝 흔들며 중얼거렸다.“좀 어지럽네. 뭐지, 이거...”그러고는 진아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술이 확 돌았나 봐. 좀 누워 있을게.”그 순간, 시연의 눈매가 반짝 빛났다.‘우주 옆은 안 된다더니, 진아 옆은 괜찮다는 거야?’‘그럼... 이건 뭐, 노골적인 배려인가?’“성빈아.”“응?”“요즘은 여자 친구 얘기 안 하네? 설마... 또 헤어졌어?”“푸흐.”성빈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아냐, 저번에 헤어지고 나서 쭉 혼자야. 벌써 얼마나 됐는데.”“그래?”시연은 흥미롭게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왜? 다시 안 사귀는 이유라도 있어?”“딱히... 그냥 이젠 안 끌리더라.”성빈은 팔을 뒤통수 밑에 괴며, 조금 피곤한 듯한 말투로 이어갔다.“연애라는 게... 처음엔 괜찮은데, 조금만 깊어지면 피곤해져. 내가 문제인 거지 뭐. 금방 지치고, 오래 못 가.”‘좋아하는 마음이 부족했겠지.’“흠...”그 옆에서 진아가 작게 코를 훌쩍이며 몸을 말았다.“진아야? 어디 불편해?”성빈은 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있던 담요를 챙겼다. 우주에게 한 장, 그리고 진아에게 한 장 정성스럽게 덮어주었다.‘히터 틀어놨지만, 자다 보면 또 추워질 수 있지.’시연은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근데 궁금한데... 너 정말 연애 많이 했잖아. 그럼 도대체 어떤 스타일이 좋은 건데?”성빈은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순간 눈빛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다들 착하고 괜찮았어. 근데... ‘이 사람이라면 평생 같이 갈 수 있겠다’ 그런 느낌이 안 들었어.”말은 그렇게 했지만, 성빈의 시선은 진아에게 머물러 있었다.진아의 머리끈이 살짝 조여져 있는 걸 보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말없이 고무줄을 빼주었다.찰랑- 길게 풀린 머리가 베개에 흘러내렸다.“뭐 하는 거야?”시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성빈은 자연스럽게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