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은 걷지 않았다.아침에 치료사가 오른쪽 종아리를 확인한 뒤 내린 결정이었다. 통증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발목도 안정적이었고, 발가락 감각에도 변화가 없었다. 전날의 세 걸음 뒤 특별한 이상 반응도 없었다.그런데 그래서 더 걸을 이유도 없었다.“오늘은 근력과 균형만 하겠습니다.”리시안은 예전처럼 곧바로 이유를 묻지 않았다. 대신 한 번 확인했다.“어제 상태가 나빠져서요?”“아닙니다.”“그럼 부하 조절입니까?”“맞습니다. 새 보행화로 네 걸음까지 확인했고, 다음 날 세 걸음으로 조절했습니다. 오늘은 보행 없이 발목과 무릎의 반응만 보겠습니다.”리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리아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이제 오빠가 먼저 답을 거의 다 말하네.”“확인한 거야.”“그게 그거지.”“달라.”“어떻게?”리시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내가 정한 게 아니잖아.”리아가 눈을 깜빡였다.치료사가 웃음을 참듯 입가를 움직였다.리시안은 조금 민망해져 시선을 돌렸다.오늘 걸을지 말지를 자신이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따르는 것도 아니었다. 치료사가 무엇을 확인했고 왜 오늘 걷지 않는지 들었다.그 정도면 됐다.오전 재활은 예정대로 근력과 균형 훈련만 했다. 오른쪽 발목을 천천히 굽혔다 펴고,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에서 체중을 옮겼다. 보행은 없었다. 기립 횟수로 세는 훈련도 하지 않았다.기록은 짧았다.신규 보행화 9일 차.보행 없음.근력·균형 훈련 시행.우측 종아리 긴장 감소. 발목·감각 안정.리시안은 기록을 읽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어제 세 걸음.오늘은 영 보.그런데도 이상하게 뒤로 돌아간 느낌은 들지 않았다.오히려 무엇을 확인하기 위해 멈춘 것인지 알고 있으니 기다릴 수 있었다.문제는 재활실에서 나와 서재로 돌아왔을 때였다.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자 리시안의 시선이 곧바로 가장 위의 종이에 꽂혔다.제3호 매각 협의 — 통행로 현장 실측 결과.어제 자신이 요청했던 자료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다섯 번째 걸음을 묻지 않았다.치료사가 먼저 새 보행화를 벗겨 오른쪽 발목을 확인했다. 복사뼈 주변에 눌린 자국은 없었고, 발가락 감각도 전날과 같았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안 통증도 없었다. 다만 종아리 뒤쪽을 눌렀을 때 전날보다 아주 조금 단단한 부분이 있었다.“아픕니까?”“아니요.”“당기는 느낌은요?”리시안이 발목을 천천히 움직여봤다.“조금 있습니다.”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오늘은 세 걸음 하겠습니다.”리아가 이제는 놀라지도 않고 말했다.“어제 네 걸음 했으니까 오늘 세 걸음.”치료사가 웃었다.“꼭 그것만으로 정하는 건 아닙니다.”“그래도 맞았잖아요.”“오늘은 맞았습니다.”리시안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신발을 다시 신었다. 오른쪽 신발의 지지대를 조절한 뒤 천천히 일어섰다.오늘 기립은 다섯 번이었다.첫 번째에는 체중이 왼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두 번째부터 바로잡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안정적이었다.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로 열을 셀 동안 오른쪽 다리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했다.잠깐 쉬고 걷기를 시작했다.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어제 네 번째를 밟았던 자리보다 한 발 앞에서 멈췄다.“끝.”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리시안은 돌아와 앉았다.이번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전날보다 덜했다. 네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매일 네 걸음을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치료사는 오른쪽 종아리를 다시 확인한 뒤 기록했다.신규 보행화 8일 차.기립 5회.3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전일 4보 반복 수행 후 부하 조절. 우측 종아리 경미한 긴장. 보행 후 증가 없음. 발목·감각 안정.리아가 기록을 보다가 말했다.“이제 오빠도 익숙해졌지?”“뭐가.”“어제보다 적게 했다고 뒤로 간 게 아니라는 거.”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치료사가 신발을 벗기는 동안 오른쪽 발을 내려다봤다.“조금.”“조금?”“알기는 아는데. 기분까
다음 날에도 다섯 번째 걸음은 없었다.치료사가 재활실에 들어오자마자 전날 기록을 펼쳤다.신규 보행화 4일 차.기립 4회.4보 1회. 추가 보행 없음.우측 발목 지지 및 감각 안정. 4보 후 이상 반응 없음.밤사이 통증과 저림은 없었다. 붓기도 없었다. 다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른쪽 종아리가 조금 당겼다가 움직이고 나니 풀렸다. 치료사는 그 사실까지 기록한 뒤 발목과 종아리를 눌러보고, 발가락 감각과 무릎 움직임을 차례로 확인했다. 새 신발을 신긴 뒤에도 곧바로 걷게 하지는 않았다.“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아가 먼저 눈을 크게 떴다.“어제 네 걸음 했는데요?”“그래서 오늘은 세 걸음입니다.”리시안도 치료사를 바라봤다.“상태는 괜찮은데도요?”“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제 네 걸음을 한 번 걸었다는 것과 네 걸음이 이제 안정적인 훈련량이 되었다는 건 다릅니다.”치료사는 기록지를 리시안 쪽으로 조금 돌렸다.“한 번 가능했던 것을 곧바로 다음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리시안의 시선이 어제 기록에 머물렀다. 분명 네 걸음을 걸었다. 걸은 뒤에도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네 걸음은 당연히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어쩌면 다섯 번째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그럼 다섯 걸음은요?”“네 걸음이 반복해서 안정적이라는 걸 확인한 다음입니다.”기립은 다섯 번이었다. 네 번째에 오른쪽 무릎이 아주 조금 안쪽으로 기울었지만 스스로 바로잡았고, 다섯 번째에는 일어난 상태에서 열을 셀 동안 자세를 유지했다.그다음 걷기.첫 번째.두 번째.세 번째.리시안은 세 번째 발을 완전히 디딘 뒤 멈췄다. 어제 네 번째 걸음을 내디뎠던 자리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 발만 더 옮기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발목이 아픈 것도 아니었고 무릎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그래도 가지 않았다.“끝.”치료사가 말하기 전에 먼저 말했다.“네. 돌아가겠습니다.”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벗긴 뒤에도 발목과 감각에는 이상이 없
제3호 협의에 필요한 추가 자료는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다.목교 회의를 마친 다음 날 오전이었다. 리시안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재활실로 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가 책상 오른쪽에 놓인 두꺼운 봉투를 발견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그 아래에는 자신이 붙여둔 표찰이 있었다.자료 확인 중.봉투 위에는 황실 재산관리국의 추가 표시가 하나 붙어 있었다.요청 자료 1차 취합 완료.리아가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벌써 왔어?”“그러게.”“읽고 재활 갈 거야?”리시안은 시계를 봤다. 재활까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손은 이미 봉투 쪽으로 갔다. 봉인 끝에 손가락까지 걸렸다가 멈췄다.삼십 분이면 첫 장 몇 장은 읽을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장을 읽으면 다음 장을 펼칠 것이고, 이상한 숫자가 있으면 이유를 찾을 것이고, 확인할 것이 생기면 관련 자료까지 꺼낼 것이다. 그러다 재활 시간이 가까워지면 중간에서 끊든지, 재활실에 가서도 읽던 내용을 계속 생각하게 될 게 뻔했다.어제 목교 회의를 앞두고 치료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할 수 있는 만큼과 오늘 해도 되는 만큼은 다릅니다.당시에는 다리 이야기였다.리시안은 봉투에서 손을 뗐다.“아니.”리아가 눈을 깜빡였다.“안 읽어?”“재활 끝나고.”“삼십 분이나 있는데.”“읽을 수는 있어.”리시안은 봉투를 다시 책상 가운데에 놓았다.“그런데 끝까지는 못 볼 것 같아.”“조금만 보면 되잖아.”“그러면 나머지가 계속 신경 쓰일걸.”리아가 잠시 오빠를 바라봤다. 리시안은 표찰 아래에 작은 메모를 끼웠다.재활 후 확인.“지금은 재활부터 할래.”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요즘 진짜 잘 멈추네.”“그게 이상해?”“조금.”“너 자꾸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마.”“좋은 뜻이야.”“좋은 뜻으로도 하지 마.”리아가 웃으며 먼저 문을 나섰다.리시안은 책상 위의 봉투를 한 번 더 봤다.읽을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 읽지 않기로 했다.그리고 재활실로 갔다.⸻새 신
다음 날 아침, 리시안은 어젯밤 뜯지 않았던 봉투부터 확인했다.상속권자 직접 협의 요청 제3호.봉투를 열기 전에 시계를 봤다.아침 여덟 시 십 분.식사도 끝냈다.치료사가 새 신발을 확인하기로 한 시간까지는 충분했다.리시안은 어젯밤 자신이 적어둔 내일 오전 확인이라는 메모를 떼어 옆에 놓고 봉인을 잘랐다.제3호 협의는 남동쪽 작업장 인근의 주택과 부속 토지 매입 요청이었다.오래 임차해 살던 가족이 자신들이 거주 중인 주택을 사들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임차 기간은 십일 년. 지붕과 외벽 일부를 거주자가 자기 비용으로 고쳤고, 뒤뜰 우물로 이어지는 통로 일부를 이웃 두 가구가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매각을 검토하려면 감정가뿐 아니라 거주자가 부담한 수선비를 어디까지 인정할지, 공동 통행로와 우물 이용권을 어떻게 남길지, 인접 가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확인해야 했다.리아가 맞은편에서 첫 장을 읽었다.“이것도 복잡하네.”“응.”“이것도 회의할 거야?”리시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먼저 마지막 장을 봤다.긴급성: 없음.현재 임대 계약은 일곱 달 남아 있었다.거주자 역시 즉시 매입을 요구하지 않았다.희망 사항: 계약 갱신 시점 전까지 매입 가능 여부를 알고 싶음.리시안은 펜을 들었다.이번에는 사람 이름부터 적지 않았다.첫 장 오른쪽 위에 썼다.긴급 집행 없음.그 아래.현 임대 조건 유지.그리고 별도의 요청란에 적었다.감정가 산정 근거.거주자 자비 수선 내역 및 증빙.공동 통행로·우물 이용 현황.인접 두 가구 의견.매각 시 통행권 유지 가능 방식.리아가 물었다.“그럼 이것도 자료부터?”“응.”“직접 회의는?”“자료 보고.”리시안은 제3호 협의를 새 받침에 넣었다.표찰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잠시 생각하다 적었다.자료 확인 중.리아가 그걸 보다가 웃었다.“두 번째랑 다르네.”“다른 일이잖아.”“어제는 사람부터 불렀는데.”“어제 건은 서류에 적힌 말의 뜻을 모르겠어서 불렀고.
사흘 뒤, 신발이 도착했다.아침 식사를 마치기도 전이었다. 리아가 창밖으로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먼저 발견했다.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의자에서 반쯤 일어나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왔다.”리시안은 빵을 자르던 손을 멈췄다.“뭐가.”“신발.”“어떻게 알아?”“상자 들고 내리잖아.”“신발 상자가 다 똑같아 보여?”“저 사람 신발점에서 봤어.”리아의 말대로였다. 잠시 뒤 시종이 식당으로 들어와 베른의 신발점에서 주문품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다만 상자는 곧바로 리시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치료사가 먼저 확인해야 했다.리시안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빵을 잘랐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안 보러 가?”“치료사가 먼저 본대.”“궁금하지 않아?”“궁금하지.”“그런데 밥을 먹어?”리시안이 잘라놓은 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신발 안 도망가잖아.”리아가 한동안 오빠를 바라봤다.“정말 많이 이상해졌어.”“그 말 이제 그만해.”“예전 같았으면 상자부터 열었을 것 같은데.”“예전의 내가 신발 하나 받는다고 좋아할 상태였어?”리아가 입을 다물었다.리시안도 자기 말이 조금 무거웠다는 걸 깨달았는지 포크 끝으로 접시를 한 번 건드렸다. 그러다 먼저 말했다.“지금은 궁금해.”리아가 다시 웃었다.“그럼 빨리 먹어.”“네가 내 치료사야?”“아니. 신발 구경하고 싶은 동생.”“결국 네가 보고 싶은 거잖아.”“응.”너무 당당해서 리시안이 헛웃음을 흘렸다.⸻상자는 재활실에서 열었다.검은색 신발이었다.장식은 없었다. 가문의 문장도 없었다. 겉만 보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했다. 하지만 안쪽에는 리시안이 골랐던 짙은 녹색 안감이 들어가 있었고, 오른쪽 신발은 왼쪽보다 발목을 조금 더 안정적으로 받치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붓기가 달라질 때 폭을 조절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리아가 신발을 들여다보다 말했다.“밖은 진짜 아무것도 없네.”“그래서 골랐어.”“안쪽은 예쁘다.”리시안의 시선이 짙은 녹색 안감에 머물렀다.“응.”치료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