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해시 정각, 운금골목 강가에 자리한 다향각 안이었다.
찻집 안에는 향 연기가 가느다랗게 피어오르고 거문고 소리가 부드럽게 흘렀다. 바깥의 한기는 이곳까지 스며들지 못했다.
창가 자단목 탁자 곁에는 맞선 상대가 앉아 있었다.
달빛처럼 흰 비단 도포를 입은 젊은 선비였다. 가느다란 테의 유리 안경을 쓴 모습에서 온화하고 단아한 기품이 풍겼다.
"박 공자님이시지요? 죄송합니다. 관아에서 갑자기 상무 점검을 나오는 바람에 늦어져서 오래 기다리시게 했네요."
윤서린이 단정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윤 낭자, 어서 앉으십시오."
박 공자가 서둘러 일어나, 신사답게 의자 팔걸이를 살짝 잡아 주는 시늉을 했다.
"쉴 틈 없이 바쁘셨으니 분명 시장하시겠다 싶어서, 제멋대로 따뜻한 유자차와 약과를 몇 가지 먼저 시켜 두었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원이 찻상을 내왔다. 달콤한 향이 먹음직스럽게 퍼졌다.
그는 곧이어 차림표를 건넸다.
"더 보시고 드시고 싶은 게 있으면 편하게 고르세요."
윤서린은 차림표를 받아 들고 평소 즐겨 먹는 부드러운 떡 두 가지를 골랐다.
그윽하고 달큰한 유자차를 홀짝이자 따뜻한 기운이 목을 타고 위로 내려앉았다. 그녀는 속으로 이 배려 깊고 예의 바른 공자에게 점수를 슬쩍 더 얹어 주었다.
두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서린은 박 공자가 인물이 반듯할 뿐 아니라, 말씨와 학식도 꽤 쓸 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융통성 없는 선비 티가 전혀 없었다.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던 바로 그때, 압도적인 기세를 품은 그림자가 불쑥 탁자 전체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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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서늘한 사내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렸다.
"윤 행수."
숟가락을 쥔 윤서린의 손이 뚝 굳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 서 사또."
가슴이 철렁했다. 온몸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굳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곳에?!
서이현은 맞은편 선비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느긋하게 짙은 금빛으로 단을 두른 먹빛 관복 소맷자락만 매만질 뿐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목뼈에는 서늘한 빛이 도는 묵옥 장식 매듭이 선명하게 묶여 있었다.
몇 해 전, 그녀가 이혼을 입에 올리기 전에 반년을 꼬박 자수를 놓아 모은 돈으로 직접 선물한 생일 선물이었다.
그런데 그때 서이현은 한 번도 그녀 앞에서 그것을 착용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솜씨가 거칠고 재료가 싸구려라서 싫어하는 줄로만 알았다.
"관아에 오늘 밤 급한 일이 생겼다. 나를 따라와라."
그의 어조는 담담했지만, 거역을 허락하지 않는 강압이 서려 있었다.
"사또, 지금은 이미 근무 시간이 지났으니 소녀의 사적인 여가 시간입니다."
윤서린이 화를 억누르며 일깨웠다.
"본 현 상규 제3조."
그가 마침내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깊은 검은 눈동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이 차가웠다.
"본 현에서 통상하는 대상인은 관아가 야간 심문으로 소환하면 즉시 응해야 한다. 본관이 이 자리에서 조정 율령을 한 번 외워 줘야겠나?"
윤서린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이 하얗게 질릴 만큼.
그녀는 몸을 돌려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맞은편 박 선비를 보았다.
"박 공자님,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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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핑그르르 뒤집혔다!
그에게 쌀자루처럼 단단한 어깨 위로 번쩍 들려 버린 것이다!
묵직한 관복의 뻣뻣한 가죽이 갈비뼈를 아프게 짓눌렀다.
"서이현! 뭐 하는 짓이야! 내려놔!"
윤서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두 다리가 허공에서 다급하게 버둥거렸다.
맞은편의 박 선비는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굳어 버렸다. 그러다 그 이름을 똑똑히 알아듣고서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이현.
얼마 전 관외의 반란을 평정하고, 중병을 손에 쥔 채 지금의 성상께 각별한 총애를 받는 진국장군. 스스로 좌천을 청해 내려와 이 고을에서 권세를 휘두르는 냉면 현령!
윤서린은 내내 발버둥을 쳤다. 머리의 정교한 비녀가 흔들려 빠질 뻔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어깨에 멘 채, 다향각 뒤편 인적 없는 강변 누대까지 곧장 걸어갔다.
"얌전히 있어라."
낮은 경고가 바로 귓가에 붙어 들려왔다.
두툼하고 큰 손이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께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한 번 찰싹 때렸다. 그러고서야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땅 위에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
윤서린은 화가 나 터질 지경이었다. 시야를 가리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홱 걷어 내고, 눈을 부릅뜬 채 그에게 낮게 으르렁거렸다.
"서이현,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일부러 이러는 거지?!"
서이현은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 동요도 없었다.
"본관은 너를 구해 준 것이다. 방금 그 허약한 선비는 네게 맞지 않는다."
"맞든 안 맞든 서 사또가 무슨 상관이죠? 당신은 그저 이 고을의 관장일 뿐이에요. 소녀의 사사로운 일까지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그는 극도로 오만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본관 눈에 거슬리면, 너는 시집 못 간다."
서이현은 참을 수 없었다. 이혼한 지 겨우 삼 년, 이 강남 소읍에 돌아온 그녀가 벌써 다른 남자 앞에서 저토록 환하고 편안하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 먼저 이혼서를 내던지며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매몰차게 말하고 그를 경성에 홀로 내팽개친 건 분명 그녀였다.
그런데 그가 왜 그녀가 이토록 잘 지내는 꼴을 봐야 한단 말인가?
윤서린은 속으로 이를 갈며 욕했다. 자기는 경성에서 승승장구하며 높은 가문의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게 놓아두면서, 왜 남들은 평생 그림자 같은 기억을 붙들고 당신을 위해 수절해야 하느냐고!
"서 사또, 소녀는 피곤합니다. 오늘 밤은 따를 수 없습니다. 사또께서 속이 풀리지 않으시면, 내일 당장 소녀의 비단 가게 장사 허가패를 거두십시오!"
그녀는 모질게 그 말을 뱉어 내고, 있는 힘을 다해 눈앞의 큰 사내를 밀쳐 냈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밤빛 속으로 사라졌다.
이 질문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날아왔다.윤서린은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강 총관은 연봉이 천 냥인 데다 인물도 훤칠한데, 어떤 여자가 안 좋아하겠어요?"농담처럼 들렸지만, 도발의 기색은 분명했다.서이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본관이 꼼꼼히 비교해 봤다."그가 몹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그자는 본관보다 키도 작고, 인물도 못하고, 권세는 더더욱 못하다."윤서린: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물론 당신처럼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요.얼굴에는 오히려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그야 당연하지요. 서 사또는 지금 강남에서 권세가 으뜸인 명문 귀공자시니, 강 총관이 어찌 감히 견줄 수 있겠어요."더없이 가식적인 아첨이었다.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 수행원, 눈을 본관 쪽으로 돌려 보는 게 어떠냐."윤서린은 멈칫하더니 이내 실소했다."사또도 참, 소녀가 어찌 감히요.""해 보지도 않고 감히 못 하는지 어찌 아느냐?"서이현이 몸을 일으켜 한
서 사또가 왜 또 내려왔지?설마 천하의 관리란 관리는 다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취미인가?"예, 서 사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소소가가 황급히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다방으로 달려갔다.서이현이 의미심장하게 윤서린을 훑어보았다.윤서린은 영문도 모른 채 마주 노려보았다.뭘 봐?또 시비 걸 거리를 찾는 거야?"본관이 듣기로, 이달 말에 상인회가 나들이를 간다던데?"서이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예, 서 사또."윤서린이 사실대로 대답했다."본관도 간다."세 시녀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현령 나리가 직접 상인회 나들이에 간다고?그러면 누가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는가. 다들 메추라기처럼 잔뜩 움츠러들 텐데.서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본관의 명을 전해라. 급한 공무가 없는 한, 누구도 휴가를 낼 수 없다."말을 마친 그의 입꼬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는 걸음을 옮겨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뒤, 소소가가 우려낸 차를 들고 서재에 들어갔다.서이현은 찻잔을 받아 들고도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까요!"이수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근데 우리 상인회 제일가는 미남 자리도 주인이 바뀌었어. 다들 입을 모아 서 사또를 뽑았거든. 강 총관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등으로 밀려났지."강사는 한때 상인회에서 이름난 고고한 꽃이었고, 지금은 상인회 제이사를 맡아 연봉이 천 냥에 이르렀다. 수많은 여자 관졸들이 몰래 흠모하는 상대였다.외모가 수려하고 일 처리도 수완이 좋았다.그가 눈여겨본 계약은 성사시키지 못한 적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점심엔 우리 식당 위층에 가서 먹자. 우리 강 총관이 요즘 더 잘생겨졌는지 구경도 하고."이수연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상인회 식당은 삼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일 층은 관원과 각 부서 책임자가 쓰고, 이 층은 일반 관리, 삼 층은 평범한 일꾼들이 식사했다.근접 수행원인 그녀들은 원래 일 층에 갈 수 있었지만, 평소에는 마음 편한 이 층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했다."나도 찬성."진열도 옆에서 웃으며 맞장구쳤다."밥은 못 먹어도 멀리서 두어 번 보면 눈요기는 되니까."여기까지 말하던 이수연
이튿날.현아 뒤뜰, 서재 안.서이현은 조각이 새겨진 큰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잘생긴 얼굴을 굳힌 채 온몸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를 뿜고 있었다.곁에서 시중을 들던 관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자칫 사또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그 자신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툭하면 말대꾸를 하던 그 작은 독초가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다. 서재가 고요해지자 오히려 온몸이 불편했다.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그 여자가 어젯밤 그렇게 취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좀 깨어났는지도 모르겠다.시중드는 몸종 소소가가 문서 책자를 받쳐 들고 조마조마하게 오늘 상인회 일정을 보고했다."진시 말, 과영 상단의 성 행수가 수로 계약 건으로 찾아오십니다…….""오시 이각, 상인회 쪽은……."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서이현이 불쑥 눈을 들어 차갑게 말을 끊었다."며칠 전 상인회 사무처 회랑에 놓여 있던 그 값비싼 꽃들은 누가 보낸 것이냐?"소소가는 멈칫했다.사또가 갑자기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서둘러 대답했다."그건 윤 수행원을 쫓아다니는 상욱 도련님이 보내신 겁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소인의 정인이
동부 명원.하주는 마차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저택의 여집사를 불렀다. 두 사람은 힘을 있는 대로 써서 만취해 곤죽이 된 윤서린을 겨우 집 안으로 부축해 들였다.어렵사리 객방 푹신한 침상에 눕히고 나니, 하주는 허리를 짚고 지칠 대로 지쳐 길게 숨을 내쉬었다.침상 위의 사람이 불쑥 몸을 뒤척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욕을 했다."서이현……. 이 나쁜 놈…….""나는……우리 서우를……당신한테 안 줄 거야…….""그때……왜 나를 배신했어……."하주는 곁에 서서 한숨만 나왔다.취한 윤서린은 그야말로 닫히지 않는 취중 진담 기계였다. 아까 죽을힘을 다해 막지 않았다면, 서이현이 이 사람을 데려갔을 것이다.그랬다면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꿀물 한 사발을 떠 왔다.그런데 사발을 들고 돌아와 보니, 침상 위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하주는 가슴이 철렁해 병풍 뒤로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이 마침내 조용해졌다.서이현이 목욕을 마치고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허리에는 깨끗한 수건 한 장만 느슨하게 둘렀고, 흠뻑 젖은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물방울은 날렵한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살짝 벌어진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사내는 곁방 문 앞으로 가서 손을 들어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역시 잠겨 있었다.그는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문틀 위쪽을 쓱 훑어보더니, 손을 뻗어 대들보 위 비밀 칸에서 여분 열쇠를 더듬어 꺼냈다."딸깍."자물쇠가 순순히 열렸다.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갔다.창밖에서 스며드는 달빛 아래, 침상 위에 크고 작은 두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윤서린이 서우를 끌어안은 채, 모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서이현은 침상 곁에 오래도록 서 있다가, 결국 몸을 숙여 잠든 윤서린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그녀는 말도 안 되게 가벼웠다.그는 그녀를 안고 안방으로 돌아와, 큰 침상 위에 살며시 눕혔다.달빛이 그녀의 평온한 잠든 얼굴에 내려앉았다. 눈매는 부드럽고 입술은 살짝 다물려 있어, 낮에 이를 세우고 덤비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서이현의 눈빛이 조금씩 가라앉았다.그는 홀린 듯 몸을 숙여, 그녀의 뺨에 아주 가볍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