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당당하기 짝이 없는 전남친의 뻔뻔함과 그의 등 뒤로 숨어버리는 지연의 비겁하고 나약한 태도.
인생에 잠시 좋은 날이 있으려 하면 기어이 폭우를 쏟아붓는 모진 운명 앞에 다영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
바로 그때,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던 정하가 다영의 앞을 커다란 등으로 온전히 가로막으며 나섰다.
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전남친 하정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쪽이 말로만 듣던 하정하 씨군요.”
정하의 입가에는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다영을 등지고 선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얼음이 짙게 끼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정하입니다.”
남자가 웃는 얼굴로 내 민 손은 뜨거웠고, 억셌다.
운동 한 번 해보지 않은 것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손이었다.
"우리 다영이하고는.."
정하가 습관을 버리치 못하고, 말 실수를 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다영이하고는 지금 무슨 사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리고 정하가 다시 물었을때, 남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가 좋아해서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입니다."
뻔뻔한 그의 태도에 정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차갑게 굳었다.
"요즘 세상에 그러시는거 범죄라는 소리 못들어보셨나요?"
답지 않게 그의 목에 붉은 핏줄이 섰다.
그 순간, 고요하던 갤러리 주변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오빠, 하지마.."
옆에서 지연이 그에게 눈치를 주자 그제서야 잠시 높아졌던 언성이 차분해졌다.
둘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보고만 있던 다영이 눈 앞에 있는 지연처럼 그에게 덥썩 팔짱을 꼈다.
"범죄 아니야. 나도 좋아서 만나고 있는거니까."
그녀의 말보다.
다른 남자의 어깨에 친근하게 감긴 다영의 텅 빈 손가락을 바라보는 정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렇게 됐네요. 정하씨."
자연스럽게 팔짱을 풀고 다영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명함을 그에게 내밀었다.
남자의 시선이 정하의 손에 들린 명함으로 향했다.
'하명그룹 사장..'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어렸을때부터 하명그룹 손자와 이름이 똑같다는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그였지만, 막상 그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외 행사나 파티에서도 단 한 번도 얼굴을 보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는 소문만 무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필 나하고 이름이 같은 그가, 오랜기간 함께 했던 전여자친구를 만난다는 건 그야말로 확률적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잠시 얘기 좀 해."
정하가 다영의 손 목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요즘 세상에 이러는거 범죄일텐데."
정하가 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순식간에 정하에게 붙잡혔던 손목은 남자의 두꺼운 손바닥 안으로 들어와있었다.
"남의 일에 훈수두지 마세요."
다시 한 번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가려 하자, 순식간에 눈빛이 돌변한 남자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제 내 여자일인데, 어떻게 남의 일이야."
그의 악력에 정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 보니, 왜 그 쪽 정하말고, 나를 선택했는지 알것 같네요."
잡아두었던 손을 내팽겨친채, 옷무새를 정리했다.
"전 애인의 절친과 붙어먹은 베짱 하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대단하다고 할 만한게 그거 하나 밖에 없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대화의 내용에, 구경꾼들이 하나 둘 늘어나자, 남자는 굳어버린 다영의 어깨를 감싸, 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지연이 그녀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영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주차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뒤에서 찌질한 구두 소리와 함께 전남친 정하가 쿵쿵거리며 쫓아왔다.
“강다영! 너 어디 가! 내 말 안 들려? 얘기 좀 하자니까-!”
그는 다영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다짜고짜 다영의 나머지 팔목을 거칠게 잡아채 끌고 가려 했다.
다영이 인상을 쓰며 팔을 빼내려 했지만, 무식하게 들어가는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남자의 서늘하고 차가운 손길이 전남친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강하게 짓눌렀다.
“윽!”
전남친이 비명을 지르며 잡았던 손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다영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등 뒤로 옮긴 뒤, 전남친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여자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다짜고짜 힘으로 끌고 가려는 그 폭력적이고 저급한 태도, 진짜 참기 힘들 정도로 추하네요.”
남자의 목소리가 지하 주차장 사방으로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대화라는 걸 해본 적은 있습니까?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손목부터 잡아채면 본인 뜻대로 될 거라 믿는 그 무식함과 무례함은 어디서 배운 겁니까? 어린애처럼 떼쓰는 꼴이 아주 볼만하군요.”
“뭐, 뭐라고? 당신이 뭔데 우리사이에...”
“우리사이?”
남자가 피식 웃으며 전남친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상대방을 그저 힘으로 제압하고 소유하려는 건 그냥 저급한 행패입니다. 요즘 세상에 여자한테 거칠게 대하는건 못배운 사람들만 하는 짓이죠..”
그렇게 팩트폭격에 할 말을 잃은 그를 뒤로하고 정하는 익숙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 다영을 태웠다.차 문이 닫히고, 그에게 이제 어디로 가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은채 남자가 핸들을 돌리는 대로 목적지가 결정될 뿐이었다.계속되는 정적 속, 남자가 라디오를 틀었다.[이제 다시 사랑 안해..말하는 난 너와 같은 사람]하필 이 타이밍에 백지영의 사랑안해가 나올게 뭐람.남자가 적막함을 깨기 위해 튼 라디오를 다영이 거칠게 off 버튼을 눌렀다.그리고 그녀는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배신감과 수치심, 그리고 알 수 없는 혼란이 뒤섞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왜 그랬어요?""뭐가.""당신이 무슨 나를 쫓아다녀, 그런 말을 왜 해요?"빨간색 대기 신호에 차가 멈춰섰다.그제서야, 정하는 운전대에서 손을 땐 뒤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돌렸다."..내가 틀린 말 했나."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영씨한테 3번만 만나달라고 매달린거 맞잖아."황당하다는 얼굴도 없이 왜 도와줬는데 화를 내냐고 따지지도 않는 그를 보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정하씨가 뭔데, 왜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어!"다영이 분노에 가득찬 목소리로 그를 향해 쏘아붙였다. 하명그룹 사장이라는 거대한 배경 앞에서도, 지금의 다영에겐 그저 제 속을 뒤집어놓은 남자일 뿐이었다. "왜 날 더 비참하게 만들어..!"하명그룹 사장인 남자는 쏟아지는 다영의 분노를 가만히 받아내며,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고요한 시선이 다영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아니, 처음부터 왜 하정하라고 말해서..!"사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다.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이 하고 싶었을 뿐인데, 고맙다는 감정보다 그들에 대한 배신감이 배가 돼서 도저히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를 않았다.쏟아지는 다영의 가쁜 숨소리만이 차 안을 채웠다.이윽고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그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핸들을 잡고 차를
당당하기 짝이 없는 전남친의 뻔뻔함과 그의 등 뒤로 숨어버리는 지연의 비겁하고 나약한 태도.인생에 잠시 좋은 날이 있으려 하면 기어이 폭우를 쏟아붓는 모진 운명 앞에 다영은 그저 할 말을 잃었다.바로 그때,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던 정하가 다영의 앞을 커다란 등으로 온전히 가로막으며 나섰다.그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전남친 하정하를 서늘하게 내려다보았다.“그쪽이 말로만 듣던 하정하 씨군요.”정하의 입가에는 나른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다영을 등지고 선 그의 까만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얼음이 짙게 끼어 있었다.“안녕하세요. 하정하입니다.”남자가 웃는 얼굴로 내 민 손은 뜨거웠고, 억셌다.운동 한 번 해보지 않은 것같은 얼굴과는 다르게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는 손이었다."우리 다영이하고는.."정하가 습관을 버리치 못하고, 말 실수를 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다영이하고는 지금 무슨 사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그리고 정하가 다시 물었을때, 남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제가 좋아해서 일방적으로 쫓아다니는 중입니다."뻔뻔한 그의 태도에 정하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차갑게 굳었다."요즘 세상에 그러시는거 범죄라는 소리 못들어보셨나요?"답지 않게 그의 목에 붉은 핏줄이 섰다.그 순간, 고요하던 갤러리 주변 모두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오빠, 하지마.."옆에서 지연이 그에게 눈치를 주자 그제서야 잠시 높아졌던 언성이 차분해졌다.둘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보고만 있던 다영이 눈 앞에 있는 지연처럼 그에게 덥썩 팔짱을 꼈다."범죄 아니야. 나도 좋아서 만나고 있는거니까."그녀의 말보다.다른 남자의 어깨에 친근하게 감긴 다영의 텅 빈 손가락을 바라보는 정하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그렇게 됐네요. 정하씨."자연스럽게 팔짱을 풀고 다영의 허리를 능숙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명함을 그에게 내밀었다.남자의 시선이 정하의 손에 들린 명함으로 향했다.'하명그룹 사장..'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정하가 비스듬히 괴고 있던 손을 내리며 다영을 가만히 건너다보았다.사실 다영은 자신이 떡진 머리에 우스꽝스러운 점까지 찍고 나온 이 기괴한 몰골에도 정하가 눈 하나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았던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정하 역시 이 선자리가 시급하긴 마찬가지였다. 하명그룹 회장인 그의 할아버지는 날마다 기한을 정해두고 가문을 위해 정략결혼을 성사시키라며 강한 압박을 넣고 있었다.그러나 정하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자신의 재력과 배경을 노리고 완벽한 신붓감인 척 '사랑'을 연기하며 들러붙는 여자들이었다.구질구질한 애정 구걸이나 감정 노동 따위는 정하의 인생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다.그가 필요로 한 것은 오직 하나, 사랑따위 바라지 않는 여자.그런 정하의 눈앞에 나타난 허다영은 그야말로 완벽한 선택지였다."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남편감인것 같은데?"정하의 시선은 마치 이미 걸려든 사냥감을 감상하는 포식자처럼 여유롭고 집요했다."세 번.""말씀하신대로, 세 번 만나보죠. 그쪽이 성격하고 매너가 좋은지는 지금 본 바로는.. 잘모르겠어서."그렇게 그의 제안은 다영의 수락으로 극적타결됐다.그녀의 인생에 다시 한 번 큰 태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세 번.’ 다영이 내밀었던 당돌한 조건을 곱씹으며, 정하는 운전대를 가볍게 두드렸다.오후 6시.다영이 출강하는 평생교육원 앞은 수업을 마친 수강생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 속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걸어 나왔다.첫 만남 때의 기괴한 분장 대신, 옅은 화장에 수수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고된 강의에 지친 듯 뒷목을 주무르는 그녀에게서 그제야 가느다란 목선과 자그마한 체구, 투명한 피부가 온전히 드러났다.‘딱 내 취향이네.’정하는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에 실소를 흘렸다.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그가 문을 열고 내리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모델 뺨치는 훤칠한 키와 탄탄한 체격, 화려한 이목구비에 등 뒤로 주차된 최고급 블랙
남자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살짝 턱을 치켜들었다."컥.." 마시던 물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아직 저희, 제대로 통성명도 안 한 것 같은데요.""제가 저 싫어하는 사람은 기가 막히게 빨리 알아보는 편이라서요. 지금 아니면 못 볼 것 같던데. 아니에요?"기가 막힌 그의 통찰력에 다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이 기괴한 몰골을 보고도 좋다고 들러붙는 멀쩡한, 아니 과하게 잘생긴 남자라니. 여태 결혼을 못한 이유가 설마 이런 하드코어한 특이 취향 때문이었나? 어이가 없으면서도 순수한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말 몇 마디 섞어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 제 꼴이 이런데, 뭘 보시고... 대체 왜요?"남자는 흐트러짐 없는 올곧은 시선으로 다영을 똑바로 응시했다.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무나도 태연하게 대답했다."예뻐서요. 거짓말 같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죄송하지만, 세 번이나 만나기에는 제가 좀 바빠서요."그와의 자리를 피할 구실이기도 했지만, 바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최근 자신의 '서양화' 전공을 살려 평생교육원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남자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올라갔다."전 남자친구랑 이름이 같아서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바쁘신 거라면 유감이네요."그 순간 정곡을 찔린 다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소개팅 상대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건 썩 유쾌하지 않았다."제 전 남자친구 이름은 어떻게 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지금 되게 불쾌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시고 가시죠."그러나 남자는 등받이에 여유롭게 기댄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허다영 씨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됩니까?"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다영의 목덜미로 서늘한 소름이 훅 끼쳤다."이런 선자리만 서른 번 가까이 돌았으면 나 같은 남자 만나기 쉽지 않은 거 잘 알 텐데."입가에 머물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씻은 듯 사라지자, 그의 차가운 이목구비가 더욱 도드라졌다."그건 제가 알아서 판단할...""대체 이 선자리를 뭐
있는 돈 없는 돈 영끌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세팅하고 나갔던 첫 선자리.밤하늘을 떠다니는 반딧불이처럼 기대에 차 있던 다영의 눈동자는 남자를 마주한 순간 곧바로 빛을 잃었다.약속 장소에 나타난 마흔네 살의 의사는 동네 슈퍼에 나온 것처럼 덥수룩한 수염에 축이 다 닳은 슬리퍼를 끌고 나온 꼴이었다.무례하게 다영의 집안 부도를 들먹이더니, 급기야 거친 손으로 다영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채며 귓가에 번들거리는 입술을 대고 소리쳤다.“선섹후결, 몰라요?”천박한 모욕을 피해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지만, 이후 이어진 수십 번의 선자리 역시 다름없었다.가슴 크기가 얼마냐느니, 속궁합이 부부생활의 전부라느니 하는 음흉한 인간들의 희롱이 줄을 이었다.바닥으로 처박힌 가문의 지위는 다영을 그저 맛있는 장난감으로 만들었고,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자리를 엎었다간 다음 선자리마저 끊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다영은 거듭되는 수모 속에서도 억지 미소를 지으며 속을 검게 태워갈 수밖에 없었다.지칠 대로 지쳐 돌아온 집. 현관문 소리에도 식탁 앞에 앉아 가계부만 노려보던 엄마에게 다영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엄마…… 나 진짜 결혼해야 하는 거지? 그런 거지?”펜을 내동댕이친 엄마 호선이 매서운 눈으로 다영을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너 지금 그런 소리 할 때야? 나이 좀 많은 게 뭐 어때서! 내가 너 소개 한번 받게 해달라고 얼마나 힘들게 바닥까지 싹싹 빌었는지 알아?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니?”텅 빈 가슴에 꽂히는 악다구니에 고개를 숙이던 찰나, 호선의 어깨가 불시에 크게 들썩였다.“……미안해. 엄마가 말이 심했어. 오늘 아빠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 폐로 전이됐대.”소리를 삼키며 오열하는 엄마의 모습.과거 가난한 이웃을 돕고 봉사활동을 다니던 다정했던 엄마의 얼굴 위로 깊게 패인 팔자주름과 흰머리가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가난이, 그리고 잔인한 병마가 다영의 다정했던 엄마를 괴물로 변하게 만든 것이었다.다영은 들썩이는 호선의
새하얀 빛이 쏟아져 내리는 고급 호텔 라운지. 떡진 머리에 두꺼운 안경, 커피 자국이 선명한 후드티를 뒤집어쓴 다영은 빗발치는 엄마의 문자들을 무시한 채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오늘 선자리 상대는 하명그룹 외손자이자 사모펀드 수장인 '하정하'.6년 전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고 떠난 전남친과 이름마저 똑같은 남자였다.장소도, 시간도 그날과 같았다. 애써 묻어둔 끔찍한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6년 전 오늘.집안의 연쇄 부도와 부친의 암 투병 속에서도 묵묵히 곁을 지켜준 이정하가 마침내 프러포즈를 할 거라 굳게 믿었다. 얼마 전 그의 핸드폰에서 본 ‘프러포즈 반지’와 ‘웨딩 스냅’ 검색 기록 때문이었다.싫어하는 양고기 스테이크 속에 반지가 숨겨져 있을 거라 착각하며 고기를 헤집던 다영은, 참다못해 웃으며 먼저 패를 던졌다.“나 다 알아. 그니까 빨리 해, 프러포즈.”하지만 고개를 든 남자의 눈에 가득한 건 설렘이 아닌 지독한 피로감이었다.“여기까지 하자, 우리. 헤어지자고.”6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던져진 이별 통보. 미친 사람처럼 매달리는 다영에게 정하는 차가운 비수를 꽂았다.“네 빚 갚아주고 아버님 수술비 대준 거, 처음엔 사랑인 줄 알았어. 근데 이젠 널 보면 숨이 막혀. ""..뭐?""돈 몇 푼에 전전긍긍하는 너한테 우월감이나 느끼면서 불쌍해하는 게 사랑이야? 너 때문에 나까지 말라 죽을 순 없잖아.”기대했던 그의 핸드폰에 있던 결혼 검색 기록마저 결혼하는 친구 때문에 대신 알아본 것에 불과했다.모든 행복한 미래가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다영이 떠나려는 그의 소매자락을 붙잡으며 절규했다.“동정도 사랑이야. 그러니까 가지 마, 제발!”하지만 남자는 잡힌 소매를 차갑게 털어낸 채 미련 없이 라운지를 빠져나갔다.정하는 테이블 위에 신용카드를 미련 없이 올려둔 채 서늘하게 돌아섰다.“그동안 고마웠어. 아버님 병원비는 더 이상 신경 쓰지 마.”6년을 바친 20대의 청춘이 단 한 줄의 인쇄된 영수증과 함께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