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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화 - 성공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8 12:45:06

아슬아슬할 만큼 조용한 그 몇 초가, 발표보다 먼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는 걸 둘 다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지안은 그 정적이 의외로 오래 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클라이언트 앞에 서는 순간부터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PT룸 조명은 차갑고, 스크린은 지나치게 크고, 클라이언트 표정은 늘 읽히는 듯 안 읽히는 듯했지만, 첫 장이 뜨자마자 지안 머릿속은 이상할 만큼 맑아졌다. 어제까지 갈아엎은 문장들이 자기 자리를 찾았고, 재하는 완벽하게 화면을 넘겼고, 태준은 질문이 들어오기 전에 필요한 자료를 이미 옆으로 밀어 놓았다.

"저희가 이번 제안에서 먼저 잡은 건 기능이 아니라, 기능이 바꾸는 하루의 순서였습니다."

말이 떨어지자 화면이 넘어갔다. 생활 장면, 베네핏, 다시 생활 장면. PT룸 안 공기가 서서히 자기들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졌다. 클라이언트 실무자가 메모를 시작했고, 임원 하나는 두 번째 장부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지안은 그 작은 반응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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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5화 - 들킬 뻔 말고, 읽힐 뻔

    "너희 둘, 요즘 패턴 왜 이렇게 똑같아?"서연의 목소리는 작았는데도 지안은 유독 더 크게 들었다. 손에 쥔 두유가 갑자기 너무 티 나는 물건 같았다. 서랍은 아직 열려 있었고, 재하는 멀리서 자료 뭉치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이 타이밍에 변명까지 늦으면 더 수상해진다."같은 TF잖아."대답은 빨랐다. 너무 빨라서 문제일 정도로.서연이 눈썹을 올렸다."그래서 네 서랍에 윤재하 씨가 두유도 넣어 줘?"지안은 바로 서랍을 닫았다."그걸 누가 윤재하 씨가 넣었다고 그래.""아, 그럼 요정이 넣었냐.""박서연.""왜." 서연이 팔짱을 꼈다. "나 지금 진지한데."그 말이 더 무서웠다. 서연이 가볍게 찌를 땐 어떻게든 웃어넘길 수 있다. 진짜로 눈치를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안은 두유 빨대 포장지만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 평소 자기 방식은 간단하다. 공격적으로 되받아치고, 상대가 한 발 물러나게 만들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방식이 오히려 더 티 날 것 같았다."피곤해 보이니까 누가 넣었겠지.""누가.""몰라.""너 지금 말투 되게 구리다."그 순간 다행히 팀장이 회의실 문 쪽에서 불렀다."오대리, 자료 왔어요?"지안은 거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지금 갈게요."서연은 끝까지 아무 말 안 하고 지안을 봤다. 그 시선이 더 길게 남았다.회의실 안에는 태준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엔 수정된 발표 자료가 떠 있었고, 팀장은 시간표부터 다시 훑고 있었다. 재하는 방금 가져온 자료를 태준 옆에 내려놨다.회사 안에서의 재하는 완벽했다. 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한 자리만 차지하고, 지안을 볼 때도 화면과 사람 사이 어딘가쯤을 보는 식으로 적당히 비켜 갔다.다만 그 완벽함을 이제 지안이 너무 잘 읽었다."오대리, 점심은 했어요?"태준이 자료를 넘기다 말고 물었다.지안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아뇨, 그냥...""두유 드셨습니다."재하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회의실 공기가 잠깐 멈췄다. 진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4화 - 십 분 간격

    퇴근은 더 번거로웠다. 둘 다 동시에 일어나면 안 되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도 안 되고, 회사 앞에서 나란히 서는 건 더 안 됐다. 지안은 일부러 서연이랑 같이 내려가 편의점까지 들렀고, 재하는 십 분쯤 뒤에 나가기로 했다. 계획은 좋았다. 다만 그 십 분이 생각보다 길었다."너 오늘 왜 이렇게 자꾸 핸드폰 봐."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서연이 물었다."원래 봤거든.""원래는 안 웃으면서 봤지."지안이 생수병 문구만 뚫어져라 보자 서연이 픽 웃었다."됐다. 말 안 해도 돼. 근데 너 요즘 좀 이상한 건 맞아."그 말이 찔렸는데, 다행히 그 이상은 안 왔다. 서연은 맥주 캔만 집어 들고 먼저 계산대로 갔다. 지안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골목 끝에서 기다릴게요."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은 낮보다 밤이 더 조용했다. 분식집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세탁소 간판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재하는 벽 쪽에 기대 서 있다가 지안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회사 안에서 몇 시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이렇게 밖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이상하게 더 낯설었다."오래 기다렸어요?""아니요.""거짓말.""한 오 분?""그게 오래 기다린 거예요."재하가 웃었다. 회사 안에서 본 웃음이랑 결이 달랐다. 덜 숨기고, 더 편한 웃음. 지안은 그걸 보는 순간 오늘 하루 내내 쌓였던 피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회사 안에서는 계속 참고 있었던 거다. 시선도, 말도, 웃음도."힘들죠?"재하가 먼저 말했다."뭐가?""오늘 내내 모르는 척하는 거."지안은 괜히 가방 끈만 고쳐 잡았다."네가 더 잘했잖아.""잘한 거 아니에요." 재하가 낮게 말했다. "계속 말 걸고 싶었어요."그 말이 너무 바로 와서 지안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켰다. 밤거리라서 다행이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였으면 표정 관리가 안 됐을 거다."밖이니까 말하는 거예요?""네.""규칙 위반은 아니고?""아직 회사 근처 밖은 아니니까 애매하긴 하네요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3화 - 오른쪽 주머니

    그게 둘 사이 첫 약속이 됐다.택시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한 뒤에야 지안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는 분명 평소랑 똑같은 회사 앞 도로였는데, 이제는 창밖 불빛까지 좀 다르게 보였다. 사귀는 게 맞다고 말했고, 회사 안에서는 모르는 척하자고도 정했다. 정리하면 간단한데, 손끝은 아직도 뜨거웠다.신호 대기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도착하면 연락해요."메시지를 읽자마자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지안은 바로 화면을 껐다. 기사 백미러에 비칠까 봐서였다. 그 짓이 좀 우스워서 더 웃음이 났다. 결국 차가 다음 신호에 걸렸을 때, 지안은 못 참고 답장을 보냈다."네. 조심히가요"보내고 나서야 너무 빨랐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답은 더 빨랐다."지금 웃고 있죠?"지안은 창밖을 봤다.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미끄러졌고,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목 뒤가 다시 뜨거워졌다. 회사 밖이라는 말이 그렇게까지 크게 들릴 일인가 싶은데, 오늘은 그랬다.집에 도착해 화장만 겨우 지우고 침대에 기대앉았을 때도 메시지는 끊기지 않았다. 길게 오가는 대화는 아니었다. 씻었어요, 아직이요. 내일 회의 몇 시였죠, 아홉 시 반이요. 잘 들어갔어요, 네. 하나하나 떼어 놓으면 별말 아닌데, 그 사이사이에 자꾸 잠이 달아났다.마지막으로 온 건 짧은 한 줄이었다."잘 자요, 지안 씨."지안은 화면을 한참 내려다봤다. 선배님도 아니고, 오대리도 아니고, 그냥 지안 씨. 사적인 데서 호칭이 벗겨지기 시작한다는 게 이런 식으로 오는 줄은 몰랐다. 일부러 답장을 늦게 보내려다가 실패했다."재하도요."보내고 나서야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 두 글자를 이렇게 쉽게 치게 될 줄은 더 몰랐다.다음 날 출근길은 유독 피곤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것도 맞고, 휴대폰만 보면 자꾸 웃을 뻔한 것도 맞았다. 걸린 건 회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였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자연스럽던 것들이, 회사 바닥을 밟는 순간 전부 금지 항목이 됐다.재하는 이미 와 있었다. 모니터를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2화 - 사귀는 거 맞아요

    식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둘 다 진짜 배가 고프긴 했는지 말보다 젓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계란말이 마지막 한 조각을 두고 지안이 슬쩍 젓가락을 멈추자, 재하가 아무 말 없이 그걸 반으로 잘라 자기 접시에 하나, 지안 접시에 하나 올렸다."이런 건 또 왜 자연스러워."지안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재하가 바로 물었다."뭐가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다. 지안은 자기 접시에 놓인 계란말이를 한참 봤다. 아주 사소한 데서 어쩐지 힘이 풀렸다.식당을 나왔을 땐 밤공기가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지안은 무심코 팔을 문질렀고, 그걸 본 재하가 바로 자기 재킷 지퍼를 조금 더 올렸다."추워요?""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이는데.""윤재하 씨.""네.""자꾸 그렇게 당연하게 굴지 마요."재하가 걸음을 아주 조금 늦췄다."당연하게 안 굴면요.""더 수상해요."그 대답이 나오자 재하가 결국 웃었다. 소리 죽인 웃음이었다. 따라 웃을 뻔해서 바로 입꼬리를 눌렀다. 큰길까지 나와 택시 잡기 좋은 모퉁이에 멈췄을 때, 둘 사이에 다시 조용한 틈이 생겼다. 아까 식당 안의 침묵과는 결이 좀 달랐다. 이번엔 진짜로, 이제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둘 다 아는 정적.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하나는 정리됐어요.""뭔데요.""없던 일로 할 생각 없어요.""네.""분위기 탓도 아니고.""네.""그러니까." 지안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아요."말하고 나서야 손끝이 뜨거워졌다. 결국 자기 입으로 했다.재하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놀란 건 아닌데, 아주 잠깐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그 짧은 틈이 더 민망하게 만들었다."왜요?""아니." 재하가 낮게 웃었다. "좋아서요.""그렇게 바로 웃지 마요.""그럼 울어요?""그건 더 이상해."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섰다. 사람 없는 밤거리라 그런지, 그 짧은 거리도 갑자기 너무 가까워졌다."맞아요." 재하가 이번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1화 - 삼십 분만

    모르는 척은 끝났다.정작은 그다음부터였다.엘리베이터 안 공기는 이상할 만큼 멀쩡했다. 누가 보면 그냥 야근 끝나고 같이 내려가는 선후배처럼 보였을 거다. 지안은 그게 더 이상했다.재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지안은 옆 유리판에 비친 자기 얼굴만 봤다. 그러다가 오히려 재하가 자기 쪽을 보고 있다는 것만 더 선명하게 알아차렸다.일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도 둘은 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로비는 거의 비어 있었고, 경비 데스크 쪽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자동문이 열릴 때 바깥의 서늘한 밤공기가 한 번에 밀려들었다.지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집 안 가요?""가야죠.""그런데 왜 따라 나와요."재하가 아주 잠깐 웃었다."선배님도 같은 방향으로 걷고 계시잖아요."그 말이 맞아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지안은 구두 굽 소리만 조금 더 세게 내며 앞쪽으로 걸었다. 회사 건물을 벗어나 대로 쪽으로 나오자 늦은 시간답게 사람도 드물었다. 가게 간판 불빛은 아직 남아 있었고, 버스 정류장 앞엔 퇴근이 늦어진 직장인 몇 명이 흩어져 서 있었다.재하가 한 걸음 옆으로 붙었다."저녁 안 드셨죠?""먹을 시간이 있었어야죠.""저도요.""그래서?""배고파요."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지금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해요.""같이 먹자고 하려고요."너무 당연한 얼굴이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거절할 말을 찾았다. 집에 가서 씻어야 한다, 피곤하다, 내일 아침 회의가 있다. 다 맞는 말인데 하나도 입에 붙지 않았다.결국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삼십 분만이에요."재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네. 일단은."그 말이 좀 얄미워서 지안은 다시 앞을 봤다. 그런데 발은 이미 재하가 가리킨 골목 쪽으로 꺾이고 있었다.간 곳은 회사 근처 김치찌개 집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두 테이블뿐이었고, 사장은 뉴스 소리를 작게 틀어 놨다. 너무 익숙한 장소인데, 오늘은 어쩐지 데이트처럼 느껴져서 더 민망했다."왜 웃어요?"맞은편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0화 - 속도만 느려져

    "이 장은 사진 바꿔야 해요.""알겠습니다."걸린 건 그런 대화 사이사이에 자꾸 생기는 짧은 침묵이었다. 둘 다 화면을 보고 있는데도, 금요일 비상계단 공기가 아주 얇게 끼어드는 순간들. 마우스를 넘겨받을 때 손등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동시에 컵에 손 뻗었다가 둘 다 멈추는 타이밍, 지안이 문장을 지우기도 전에 재하가 왜 지우는지 이미 안다는 얼굴.못 본 척하려면 이런 것부터 가능해야 했다.그런데 지안은 오후 세 시쯤 이미 포기했다. 적어도 자기 몸은 포기한 상태였다. 재하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볼 때마다 어깨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낮게 "이건 어때요" 묻는 목소리마다 탕비실 냉장고 소리가 덮쳐 왔다. 이쯤이면 일에 집중 못 하는 쪽이 더 문제였다.커피를 새로 뽑아 돌아오는데, 태준이 탕비실 앞에서 마주쳤다. 손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는데, 지안을 보자 하나를 그냥 자기 쪽으로만 옮겼다."오대리.""네.""오후에 잠깐 커피 드시면서 얘기할까 했는데, 안 그러는 게 낫겠네요."지안은 멈칫했다."왜요?"태준이 곧바로 웃었다. 무게 없는 웃음이었다."이번엔 제가 끼면 속도만 느려질 것 같아서요."그 말이 끝났다. 설명도, 떠보는 질문도 없었다. 지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태준은 종이컵을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최종 발표 끝나고 나면 그때 한 번 사 주세요.""팀장님.""부담 주는 말 아니에요." 태준이 먼저 잘랐다. "잘 맞는 파트너가 생기면, 굳이 옆에 안 끼는 것도 일 잘하는 거니까."순간 목이 좀 막혔다. 태준은 끝까지 좋은 사람인 쪽을 택했다. 그래서 더 어정쩡했다. 안전한 사람은 늘 안전하게 물러나는데, 정작 자기 마음은 그쪽으로 한 발도 못 움직이고 있어서."감사합니다."결국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발표나 잡죠."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뒤돌아보지 않는 걸 보면서, 지안은 왠지 더 선명해진 걸 느꼈다. 착각이면 이렇게까지 주변 공기까지 달라질 리 없었다.퇴근 무렵엔 사무실이 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22화 - 택시

    고개를 돌린 순간,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딱 거기서 한 박자 멈췄다. 식당 안 소음은 아직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고, 길가에는 택시 불빛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고, 지안은 가방끈만 괜히 더 세게 쥐었다."왜 나왔어요?"첫마디가 그것부터 나갔다. 돌아가라는 뜻인지, 설명하라는 뜻인지, 본인도 모를 정도로 짧았다.재하는 식당 문을 뒤로 한 번 돌아봤다."2차까진 못 갈 것 같아서요.""아까는 아무 말 없더니.""선배님도 그랬잖아요."그건 맞는 말이었다. 맞으니까 더 할 말이 없었다. 지안은 길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21화 - 그쪽만 있는 게 아니야

    막내들이 먼저 시작했다. 제작팀 대리는 팀장을 골랐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웃기다고. 팀장은 막내를 골랐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제일 시끄럽다고. 다들 별생각 없이 웃었다.탈은 서연 차례였다."나는..." 서연이 턱을 괴고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윤재하 씨."재하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저요?""응. 처음엔 예쁘장하고 싹싹한 신입인 줄 알았는데.""지금도 틀린 말은 아닌데요.""근데 생각보다 훨씬 집요해."테이블이 웃음으로 한번 들썩였다. 지안만 웃지 않았다. 서연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 말을 이었다."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20화 - 맥주 거품

    이 사람이 왜 내 걱정을 하지.메신저 창을 닫고도 이 생각은 한참동안 맴돌았다. 지안은 수요일 오후 내내 같은 파일을 두 번 열고, 같은 메일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별로 급하지도 않은 수정사항을 굳이 체크리스트로 다시 쪼갰다. 일이 많으면 보통 편해지는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자꾸 메신저 하단 이름 쪽으로 시선이 내려갔다.그러다 퇴근 한 시간 전, 팀장이 공지를 올렸다.`오늘 TF 회식 갑시다. 1차만 가볍게. 다들 고생했어요.`서연이 그걸 보자마자 의자를 돌렸다."가볍게는 무슨.""안 가면 안 되나?""너 지금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19화 - 출장 사진

    "선배님, 태준 팀장님이랑 자주 식사하세요?"질문은 평범했는데 톤이 평범하지 않다. 지안은 파일에서 시선을 떼고 재하를 봤다. 저 인간은 꼭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긁는다."오늘이 처음이거든요."재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아."딱 한 음절이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그냥 받아 적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짧은 반응."왜요?" 지안이 물었다. "업무상 참고할 거라도 있어요?""아니요." 재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요.""업무 외 질문이 점점 많네요.""죄송합니다."사과는 빨랐고, 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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