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희 둘, 요즘 패턴 왜 이렇게 똑같아?"서연의 목소리는 작았는데도 지안은 유독 더 크게 들었다. 손에 쥔 두유가 갑자기 너무 티 나는 물건 같았다. 서랍은 아직 열려 있었고, 재하는 멀리서 자료 뭉치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고, 이 타이밍에 변명까지 늦으면 더 수상해진다."같은 TF잖아."대답은 빨랐다. 너무 빨라서 문제일 정도로.서연이 눈썹을 올렸다."그래서 네 서랍에 윤재하 씨가 두유도 넣어 줘?"지안은 바로 서랍을 닫았다."그걸 누가 윤재하 씨가 넣었다고 그래.""아, 그럼 요정이 넣었냐.""박서연.""왜." 서연이 팔짱을 꼈다. "나 지금 진지한데."그 말이 더 무서웠다. 서연이 가볍게 찌를 땐 어떻게든 웃어넘길 수 있다. 진짜로 눈치를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안은 두유 빨대 포장지만 만지작거렸다. 이럴 때 평소 자기 방식은 간단하다. 공격적으로 되받아치고, 상대가 한 발 물러나게 만들면 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방식이 오히려 더 티 날 것 같았다."피곤해 보이니까 누가 넣었겠지.""누가.""몰라.""너 지금 말투 되게 구리다."그 순간 다행히 팀장이 회의실 문 쪽에서 불렀다."오대리, 자료 왔어요?"지안은 거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지금 갈게요."서연은 끝까지 아무 말 안 하고 지안을 봤다. 그 시선이 더 길게 남았다.회의실 안에는 태준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엔 수정된 발표 자료가 떠 있었고, 팀장은 시간표부터 다시 훑고 있었다. 재하는 방금 가져온 자료를 태준 옆에 내려놨다.회사 안에서의 재하는 완벽했다. 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한 자리만 차지하고, 지안을 볼 때도 화면과 사람 사이 어딘가쯤을 보는 식으로 적당히 비켜 갔다.다만 그 완벽함을 이제 지안이 너무 잘 읽었다."오대리, 점심은 했어요?"태준이 자료를 넘기다 말고 물었다.지안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아뇨, 그냥...""두유 드셨습니다."재하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다. 회의실 공기가 잠깐 멈췄다. 진
퇴근은 더 번거로웠다. 둘 다 동시에 일어나면 안 되고,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도 안 되고, 회사 앞에서 나란히 서는 건 더 안 됐다. 지안은 일부러 서연이랑 같이 내려가 편의점까지 들렀고, 재하는 십 분쯤 뒤에 나가기로 했다. 계획은 좋았다. 다만 그 십 분이 생각보다 길었다."너 오늘 왜 이렇게 자꾸 핸드폰 봐."편의점 냉장고 앞에서 서연이 물었다."원래 봤거든.""원래는 안 웃으면서 봤지."지안이 생수병 문구만 뚫어져라 보자 서연이 픽 웃었다."됐다. 말 안 해도 돼. 근데 너 요즘 좀 이상한 건 맞아."그 말이 찔렸는데, 다행히 그 이상은 안 왔다. 서연은 맥주 캔만 집어 들고 먼저 계산대로 갔다. 지안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골목 끝에서 기다릴게요."회사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골목은 낮보다 밤이 더 조용했다. 분식집 불은 이미 꺼져 있었고, 세탁소 간판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재하는 벽 쪽에 기대 서 있다가 지안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회사 안에서 몇 시간 동안 모르는 척하다가, 이렇게 밖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이 이상하게 더 낯설었다."오래 기다렸어요?""아니요.""거짓말.""한 오 분?""그게 오래 기다린 거예요."재하가 웃었다. 회사 안에서 본 웃음이랑 결이 달랐다. 덜 숨기고, 더 편한 웃음. 지안은 그걸 보는 순간 오늘 하루 내내 쌓였던 피곤이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회사 안에서는 계속 참고 있었던 거다. 시선도, 말도, 웃음도."힘들죠?"재하가 먼저 말했다."뭐가?""오늘 내내 모르는 척하는 거."지안은 괜히 가방 끈만 고쳐 잡았다."네가 더 잘했잖아.""잘한 거 아니에요." 재하가 낮게 말했다. "계속 말 걸고 싶었어요."그 말이 너무 바로 와서 지안은 한 박자 늦게 숨을 들이켰다. 밤거리라서 다행이었다. 사무실 형광등 아래였으면 표정 관리가 안 됐을 거다."밖이니까 말하는 거예요?""네.""규칙 위반은 아니고?""아직 회사 근처 밖은 아니니까 애매하긴 하네요
그게 둘 사이 첫 약속이 됐다.택시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한 뒤에야 지안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방금까지는 분명 평소랑 똑같은 회사 앞 도로였는데, 이제는 창밖 불빛까지 좀 다르게 보였다. 사귀는 게 맞다고 말했고, 회사 안에서는 모르는 척하자고도 정했다. 정리하면 간단한데, 손끝은 아직도 뜨거웠다.신호 대기 중에 휴대폰이 울렸다."도착하면 연락해요."메시지를 읽자마자 입꼬리가 먼저 움직였다. 지안은 바로 화면을 껐다. 기사 백미러에 비칠까 봐서였다. 그 짓이 좀 우스워서 더 웃음이 났다. 결국 차가 다음 신호에 걸렸을 때, 지안은 못 참고 답장을 보냈다."네. 조심히가요"보내고 나서야 너무 빨랐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답은 더 빨랐다."지금 웃고 있죠?"지안은 창밖을 봤다. 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미끄러졌고, 그 짧은 문장 하나에 목 뒤가 다시 뜨거워졌다. 회사 밖이라는 말이 그렇게까지 크게 들릴 일인가 싶은데, 오늘은 그랬다.집에 도착해 화장만 겨우 지우고 침대에 기대앉았을 때도 메시지는 끊기지 않았다. 길게 오가는 대화는 아니었다. 씻었어요, 아직이요. 내일 회의 몇 시였죠, 아홉 시 반이요. 잘 들어갔어요, 네. 하나하나 떼어 놓으면 별말 아닌데, 그 사이사이에 자꾸 잠이 달아났다.마지막으로 온 건 짧은 한 줄이었다."잘 자요, 지안 씨."지안은 화면을 한참 내려다봤다. 선배님도 아니고, 오대리도 아니고, 그냥 지안 씨. 사적인 데서 호칭이 벗겨지기 시작한다는 게 이런 식으로 오는 줄은 몰랐다. 일부러 답장을 늦게 보내려다가 실패했다."재하도요."보내고 나서야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이름 두 글자를 이렇게 쉽게 치게 될 줄은 더 몰랐다.다음 날 출근길은 유독 피곤했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것도 맞고, 휴대폰만 보면 자꾸 웃을 뻔한 것도 맞았다. 걸린 건 회사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였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자연스럽던 것들이, 회사 바닥을 밟는 순간 전부 금지 항목이 됐다.재하는 이미 와 있었다. 모니터를
식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둘 다 진짜 배가 고프긴 했는지 말보다 젓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계란말이 마지막 한 조각을 두고 지안이 슬쩍 젓가락을 멈추자, 재하가 아무 말 없이 그걸 반으로 잘라 자기 접시에 하나, 지안 접시에 하나 올렸다."이런 건 또 왜 자연스러워."지안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재하가 바로 물었다."뭐가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었다. 지안은 자기 접시에 놓인 계란말이를 한참 봤다. 아주 사소한 데서 어쩐지 힘이 풀렸다.식당을 나왔을 땐 밤공기가 아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지안은 무심코 팔을 문질렀고, 그걸 본 재하가 바로 자기 재킷 지퍼를 조금 더 올렸다."추워요?""괜찮아요.""안 괜찮아 보이는데.""윤재하 씨.""네.""자꾸 그렇게 당연하게 굴지 마요."재하가 걸음을 아주 조금 늦췄다."당연하게 안 굴면요.""더 수상해요."그 대답이 나오자 재하가 결국 웃었다. 소리 죽인 웃음이었다. 따라 웃을 뻔해서 바로 입꼬리를 눌렀다. 큰길까지 나와 택시 잡기 좋은 모퉁이에 멈췄을 때, 둘 사이에 다시 조용한 틈이 생겼다. 아까 식당 안의 침묵과는 결이 좀 달랐다. 이번엔 진짜로, 이제 말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둘 다 아는 정적.지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 하나는 정리됐어요.""뭔데요.""없던 일로 할 생각 없어요.""네.""분위기 탓도 아니고.""네.""그러니까." 지안은 숨을 한번 고르고 말했다.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아요."말하고 나서야 손끝이 뜨거워졌다. 결국 자기 입으로 했다.재하는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다. 놀란 건 아닌데, 아주 잠깐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그 짧은 틈이 더 민망하게 만들었다."왜요?""아니." 재하가 낮게 웃었다. "좋아서요.""그렇게 바로 웃지 마요.""그럼 울어요?""그건 더 이상해."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섰다. 사람 없는 밤거리라 그런지, 그 짧은 거리도 갑자기 너무 가까워졌다."맞아요." 재하가 이번
모르는 척은 끝났다.정작은 그다음부터였다.엘리베이터 안 공기는 이상할 만큼 멀쩡했다. 누가 보면 그냥 야근 끝나고 같이 내려가는 선후배처럼 보였을 거다. 지안은 그게 더 이상했다.재하는 끝까지 아무 말도 안 했다. 지안은 옆 유리판에 비친 자기 얼굴만 봤다. 그러다가 오히려 재하가 자기 쪽을 보고 있다는 것만 더 선명하게 알아차렸다.일층에 도착해 문이 열렸을 때도 둘은 바로 흩어지지 않았다. 로비는 거의 비어 있었고, 경비 데스크 쪽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만 작게 들렸다. 자동문이 열릴 때 바깥의 서늘한 밤공기가 한 번에 밀려들었다.지안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집 안 가요?""가야죠.""그런데 왜 따라 나와요."재하가 아주 잠깐 웃었다."선배님도 같은 방향으로 걷고 계시잖아요."그 말이 맞아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지안은 구두 굽 소리만 조금 더 세게 내며 앞쪽으로 걸었다. 회사 건물을 벗어나 대로 쪽으로 나오자 늦은 시간답게 사람도 드물었다. 가게 간판 불빛은 아직 남아 있었고, 버스 정류장 앞엔 퇴근이 늦어진 직장인 몇 명이 흩어져 서 있었다.재하가 한 걸음 옆으로 붙었다."저녁 안 드셨죠?""먹을 시간이 있었어야죠.""저도요.""그래서?""배고파요."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지금 그걸 왜 나한테 보고해요.""같이 먹자고 하려고요."너무 당연한 얼굴이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거절할 말을 찾았다. 집에 가서 씻어야 한다, 피곤하다, 내일 아침 회의가 있다. 다 맞는 말인데 하나도 입에 붙지 않았다.결국 나온 건 다른 말이었다."삼십 분만이에요."재하 눈이 아주 조금 커졌다."네. 일단은."그 말이 좀 얄미워서 지안은 다시 앞을 봤다. 그런데 발은 이미 재하가 가리킨 골목 쪽으로 꺾이고 있었다.간 곳은 회사 근처 김치찌개 집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은 두 테이블뿐이었고, 사장은 뉴스 소리를 작게 틀어 놨다. 너무 익숙한 장소인데, 오늘은 어쩐지 데이트처럼 느껴져서 더 민망했다."왜 웃어요?"맞은편
"이 장은 사진 바꿔야 해요.""알겠습니다."걸린 건 그런 대화 사이사이에 자꾸 생기는 짧은 침묵이었다. 둘 다 화면을 보고 있는데도, 금요일 비상계단 공기가 아주 얇게 끼어드는 순간들. 마우스를 넘겨받을 때 손등이 스칠 듯 말 듯한 거리, 동시에 컵에 손 뻗었다가 둘 다 멈추는 타이밍, 지안이 문장을 지우기도 전에 재하가 왜 지우는지 이미 안다는 얼굴.못 본 척하려면 이런 것부터 가능해야 했다.그런데 지안은 오후 세 시쯤 이미 포기했다. 적어도 자기 몸은 포기한 상태였다. 재하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볼 때마다 어깨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낮게 "이건 어때요" 묻는 목소리마다 탕비실 냉장고 소리가 덮쳐 왔다. 이쯤이면 일에 집중 못 하는 쪽이 더 문제였다.커피를 새로 뽑아 돌아오는데, 태준이 탕비실 앞에서 마주쳤다. 손엔 종이컵 두 개가 들려 있었는데, 지안을 보자 하나를 그냥 자기 쪽으로만 옮겼다."오대리.""네.""오후에 잠깐 커피 드시면서 얘기할까 했는데, 안 그러는 게 낫겠네요."지안은 멈칫했다."왜요?"태준이 곧바로 웃었다. 무게 없는 웃음이었다."이번엔 제가 끼면 속도만 느려질 것 같아서요."그 말이 끝났다. 설명도, 떠보는 질문도 없었다. 지안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태준은 종이컵을 한 손으로 고쳐 잡았다."최종 발표 끝나고 나면 그때 한 번 사 주세요.""팀장님.""부담 주는 말 아니에요." 태준이 먼저 잘랐다. "잘 맞는 파트너가 생기면, 굳이 옆에 안 끼는 것도 일 잘하는 거니까."순간 목이 좀 막혔다. 태준은 끝까지 좋은 사람인 쪽을 택했다. 그래서 더 어정쩡했다. 안전한 사람은 늘 안전하게 물러나는데, 정작 자기 마음은 그쪽으로 한 발도 못 움직이고 있어서."감사합니다."결국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발표나 잡죠."태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갔다. 뒤돌아보지 않는 걸 보면서, 지안은 왠지 더 선명해진 걸 느꼈다. 착각이면 이렇게까지 주변 공기까지 달라질 리 없었다.퇴근 무렵엔 사무실이 서
고개를 돌린 순간, 재하와 눈이 마주쳤다.딱 거기서 한 박자 멈췄다. 식당 안 소음은 아직 문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고, 길가에는 택시 불빛이 드문드문 지나가고 있었고, 지안은 가방끈만 괜히 더 세게 쥐었다."왜 나왔어요?"첫마디가 그것부터 나갔다. 돌아가라는 뜻인지, 설명하라는 뜻인지, 본인도 모를 정도로 짧았다.재하는 식당 문을 뒤로 한 번 돌아봤다."2차까진 못 갈 것 같아서요.""아까는 아무 말 없더니.""선배님도 그랬잖아요."그건 맞는 말이었다. 맞으니까 더 할 말이 없었다. 지안은 길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
막내들이 먼저 시작했다. 제작팀 대리는 팀장을 골랐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웃기다고. 팀장은 막내를 골랐다. 조용한 줄 알았는데 제일 시끄럽다고. 다들 별생각 없이 웃었다.탈은 서연 차례였다."나는..." 서연이 턱을 괴고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윤재하 씨."재하가 눈썹을 살짝 올렸다."저요?""응. 처음엔 예쁘장하고 싹싹한 신입인 줄 알았는데.""지금도 틀린 말은 아닌데요.""근데 생각보다 훨씬 집요해."테이블이 웃음으로 한번 들썩였다. 지안만 웃지 않았다. 서연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 말을 이었다."한
이 사람이 왜 내 걱정을 하지.메신저 창을 닫고도 이 생각은 한참동안 맴돌았다. 지안은 수요일 오후 내내 같은 파일을 두 번 열고, 같은 메일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별로 급하지도 않은 수정사항을 굳이 체크리스트로 다시 쪼갰다. 일이 많으면 보통 편해지는데, 오늘은 그 반대였다. 자꾸 메신저 하단 이름 쪽으로 시선이 내려갔다.그러다 퇴근 한 시간 전, 팀장이 공지를 올렸다.`오늘 TF 회식 갑시다. 1차만 가볍게. 다들 고생했어요.`서연이 그걸 보자마자 의자를 돌렸다."가볍게는 무슨.""안 가면 안 되나?""너 지금
"선배님, 태준 팀장님이랑 자주 식사하세요?"질문은 평범했는데 톤이 평범하지 않다. 지안은 파일에서 시선을 떼고 재하를 봤다. 저 인간은 꼭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을 긁는다."오늘이 처음이거든요."재하 눈이 아주 잠깐 멈췄다."아."딱 한 음절이었다. 안도인지, 실망인지, 그냥 받아 적는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짧은 반응."왜요?" 지안이 물었다. "업무상 참고할 거라도 있어요?""아니요." 재하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요.""업무 외 질문이 점점 많네요.""죄송합니다."사과는 빨랐고, 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