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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화 - 연기 수업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14 22:24:53

회사 밖은 끝났다. 너무 정확하게.

팀장 메시지를 읽은 뒤에도 지안은 한동안 노트북 화면만 봤다. 침대는 아직 따뜻했고, 옆에서 재하가 이불을 허리까지 끌어올린 채 메신저 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젯밤엔 분명 회사랑 상관없는 금요일이었는데,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수정본과 일정표와 팀 단체방이었다.

"열 시 전이면."

지안이 휴대폰 시계를 보고 중얼거렸다.

"지금부터 씻고 나가도 빠듯해."

"제가 먼저 갈게요."

재하가 바로 말했다.

"몇 분 뒤?"

"십오 분."

"왜 이렇게 애매해."

"십 분은 어제 썼잖아요."

그 대답이 웃겨서 지안은 헛웃음을 냈다.

"우리 연애하는 거 맞지?"

"아마도요."

"아마도 아니고."

지안은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가 어젯밤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걸 발끝으로 대충 치우면서도 머리는 벌써 오늘 동선을 계산하고 있는 게 좀 웃겼다.

"오늘부터 규칙 다시 짜."

"또요?"

"또가 아니라 제대로."

재하가 베개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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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3화 - 대외 빼고

    사진 속 자기 얼굴을 한참 보고 나서야 지안은 노트북을 덮었다.잠은 깊게 못 잤다. 새벽에 두 번 깼고, 한 번은 저도 모르게 운영사무국 메일을 다시 열 뻔했다. 지안은 끝내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확인하고 나면 마음이 좀 정리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더 어색해졌다. 재하를 미워하는 쪽도, 덜 미워하는 쪽도 아닌 상태. 둘 다 아닌데 계속 같은 사무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태.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지안은 그 어색함이 자기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재하는 자리에 없었다.평소보다 십 분쯤 늦은 시간인데도 노트북이 닫혀 있었고, 의자도 반듯하게 들어가 있었다. 늦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는 이상할 게 없었다.그런데 유독 오늘은 그 빈자리가 눈에 밟혔다. 어제까진 그냥 시야 끝에 걸리던 자리였는데, 오늘은 비어 있는 방식까지 읽히는 기분이었다."윤재하 씨 아직 안 왔어?"지안이 별생각 없는 척 묻자 소율이 고개를 들었다."아까 잠깐 왔다가 다시 내려간 거 같던데요? 통화하는 것 같았어요.""그래."답은 짧게 했는데, 시선은 다시 빈자리로 갔다. 통화. 별거 아닌 말인데 공연히 걸렸다. 그 인간이 요즘 바깥 전화 받는 얼굴이 평소 같지 않다는 건 이미 몇 번 봤다.오전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야 재하가 들어왔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넥타이 없는 셔츠 깃이 평소보다 조금 더 눌려 있었다.재하는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을 켰고, 팀장이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오늘 외부 공유본은 오 대리랑 서연 씨가 먼저 정리해요."팀장이 말하자 지안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재하 씨는 내부 수정본 쪽 더 잡아주세요. 대외 쪽은 잠깐만 빼고."말투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업무 조정처럼. 이유도 길게 붙이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티가 났다. 원래 이번 공유본은 재하가 시안 설명까지 같이 붙기로 돼 있었다.사무국 확인 메일이 외부로 돌기 시작한 뒤부터 분위기가 달라진 거였다. 지금 와서 대외 쪽만 잠깐 빼는 건, 굳이 말하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2화 - 확인

    폴더가 열리자 발표본이 버전별로 쭉 떴다.파일명부터 한숨이 나왔다. 최종본이 세 개였다.전부 급하니까 '최종'이라고 붙였던 흔적. 졸업 직전이었고, 발표만 끝나면 다 끝날 줄 알았으니까. 지금 보니 전부 도망치듯 저장한 흔적 같았다.지안은 제일 마지막 버전을 열었다.슬라이드가 천천히 넘어갔다. 첫 장 카피, 서브 문안, 발표 구조, 결론 페이지. 하나씩 보는데 딱히 새롭진 않았다.자기가 만든 거니까 당연했다. 운영사무국 메일 한쪽에 적혀 있던 제출 항목이 자꾸 시야 구석에서 걸렸다.발표 자료 원본. 작업 파일 이력. 팀 메일. 현장 사진. 재하가 낸 순서까지 떠오르는 게 짜증 났다."진짜 순서도 똑같네."지안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다음 폴더를 열었다.작업 파일 이력 캡처는 예전 노트북에서 뽑아 둔 이미지들이었다. 생성 날짜, 수정 시각, 파일 경로.평소 같으면 숫자만 봐도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그게 덜했다. 그런 차가운 정보가 나았다. 감정이 끼어들 틈이 적어서.첫 캡처와 발표본 수정 시각을 맞춰 봤다.두 번째 캡처와 메일 발신 시간을 대조했다.세 번째 캡처에서 문안 수정된 흔적을 보고 다시 발표본 페이지를 열었다.한 번, 두 번, 세 번.같은 슬라이드를 계속 오가다 보니 처음엔 안 보이던 게 보였다. 카피가 바뀐 지점, 순서가 밀린 페이지, 최종 발표본에만 남아 있는 문장.그리고 그 흐름이 메일 시간과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누가 먼저 정리했고, 누가 그걸 받아 취합했고, 누가 발표했는지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읽히는 구조.지안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시계를 보니 폴더를 연 지 벌써 한 시간이 넘어 있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고, 건너편 아파트 불빛이 줄줄이 켜져 있었다.여기까진 솔직히 예상 못 한 건 아니지만, 예상과 확인은 다르다.머릿속으로 아는 거랑, 자기 손으로 클릭해서 같은 시간과 같은 문장을 대조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이다.지안은 팀 메일 캡처 폴더를 열었다.제목에 자기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1화 - 거리

    운영사무국 메일 본문 다시 확인.2018 발표본 원본 대조.정환 선배 메일 흐름 재검토.지안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 둔 세 줄을 다시 읽었다.딱 필요한 말만 남겨 둔 목록인데, 그것만으로도 숨이 좀 막혔다.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걸리는 건 그걸 시작하는 순간 진짜로 확인이 시작된다는 거였다.지금까진 마음속에서만 굴리던 의심이 파일명과 날짜와 메일 제목으로 바뀌는 순간.외장하드를 노트북에 꽂고 첫 폴더까지 열었다가, 지안은 손을 멈췄다.밤이 너무 조용했다. 화면이 밝아서 더 그랬다. 발표본 하나를 열면 아마 끝까지 보게 될 거고, 그러면 오늘은 잠이 안 올 것 같았다.아니, 잠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 회사에서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았다.지안은 결국 파일을 닫았다.대신 운영사무국 메일만 다시 열었다.윤재하 님. 보충자료. 최근 외부 공개자료 변동. 문장은 그대로였다.조금 전 사무실에선 충격부터 왔는데, 지금 혼자 보니까 다른 게 먼저 들어왔다.재하는 정말로 자기 이름을 넣었고, 회사 이름도 숨기지 않았고, 굳이 최근 캡처까지 붙여서 지금 문제로 만들었다.미워하기엔 너무 번거로운 방식이었다."진짜 귀찮게 하네."혼잣말이 작게 새어 나왔다.메일 창을 닫고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 오늘은 여기까지.확인은 내일 밤에 하자고, 아주 형편없는 타협을 자기한테 했다.확인부터 하겠다고 나와 놓고 하루도 못 버티는 게 웃겼지만, 지금은 그게 맞았다.내일은 출근해야 했고, 재하를 다시 봐야 했다.그 상태로 밤새 파일까지 들여다봤다간 아침부터 얼굴에 다 써 있을 게 뻔했다.다만, 그렇게 접어도 머리는 안 접혔다.윤재하.이름 석 자가 밤새 자꾸 떠올랐다.원래 알던 이름인데, 어제까진 후배 이름이었고, 오늘부터는 운영사무국 메일 안에 찍힌 이름이었다.같은 이름인데 결이 달랐다. 알고 나니 더 낯설었다.***다음 날 사무실은 너무 평소 같았다.지안은 그게 싫었다.다들 똑같이 움직이는데 자기만 다른 속도로 들어온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0화 - 외장하드

    서연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 번 두드렸다."이번엔 네가 네 손으로 봐."그 말이 의외로 차분하게 들렸다. 화를 더 키우지도 않았고, 반대로 진정시키지도 않았다. 그냥 방향만 줬다.듣는 사람 말로 결론 내리지 말고, 네가 직접 확인하라고.지안은 맞은편 자리를 다시 봤다. 재하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작업 중이었다.딱 한 번, 마우스를 멈추고 화면을 바라보는 옆선이 눈에 들어왔다.무슨 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도, 그냥 자기 몫을 버티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그래서 더 판단이 안 섰다."쟤는 왜 아무 말 안 하지."거의 혼잣말처럼 흘렀다.서연이 바로 받았다."아무 말 안 하는 게 지금 제일 덜 비겁하다고 생각하나 보지."그럴 수도 있었다.재하답다고 하면 재하답기도 했다.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숨기다가, 결정적인 순간엔 오히려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밀어붙이는 인간.그게 지금 와서 낭만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냥 더 복잡했다.회의실 밖에서 팀장이 누구를 찾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사무실은 여전히 굴러가고 있었고,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수정안도 남아 있었다. 지금 당장 감정부터 정리할 시간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닫아."지안이 말했다."뭘?""메일."서연이 바로 창을 닫았다. 화면에서 운영사무국 글씨가 사라지자 되레 더 선명하게 남았다.윤재하 님.그 이름 하나가 오늘 하루 내내 머릿속에서 안 빠질 것 같았다.***오후 내내 지안은 재하를 일부러 안 봤다.필요한 말만 했고, 그마저도 모니터만 보고 했다. 재하도 똑같았다. 먼저 설명하지 않았고, 일부러 살피지도 않았다.세 시쯤 지안은 탕비실에서 물을 따르다가 선반 위 커피 스틱 통에 시선이 걸렸다.설탕 반 스푼. 그 조합이 머릿속에 뜨는 데 일 초도 안 걸렸고, 그게 누구 취향인지 깨닫는 데는 찰나면 충분했다.종이컵을 물로 채우고 한 모금 마셨다. 당연하지만 물맛이었다.창 너머로 건너편 건물 옥상 환풍기가 느리게 돌고 있었다.저 건물에도 사무실이 있고, 저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9화 - 접수 건

    메일 제목은 여전히 화면 맨 위에서 안 내려갔다.지안은 결국 마우스를 움직였다. 화면이 넘어가는 몇 초 사이 자기 자리로 천천히 걸어 돌아왔다.클릭 소리는 별거 아닌데 유난히 크게 들렸다.알림창이 사라지고 메일 본문이 열리는 몇 초가 길었다.누가 이걸 여기까지 끌고 왔냐고 방금 전까지 물었는데, 막상 그 답이 문장으로 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손끝부터 먼저 떨렸다.메일은 생각보다 정중했다. 행사 운영사무국 특유의 딱딱한 문장, 확인 요청, 자료 검토, 관련 사실관계.필요한 말만 있어 그만큼 읽기 쉬웠고, 피할 구석이 없었다.안녕하세요. 귀사 소속 윤재하 님이 제출한 문의 및 보충자료와 관련하여, 당시 발표 자료 및 참여 인력 확인을 요청드립니다.지안은 그 줄에서 눈이 멈췄다.윤재하.이름 석 자가 너무 평범한 글씨체로 떠 있어서 현실감이 없었다.누가 건드렸냐고 물었는데 답이 이렇게 바로, 이렇게 건조하게 들어올 줄은 몰랐다.운영사무국은 감정이 없었다. 설명도 없고, 맥락도 없고, 그저 누가 제출했는지만 적혀 있었다."보지 마."서연이 낮게 말했다."이미 봤잖아."지안 목소리가 생각보다 멀쩡하게 나왔다. 멀쩡한 게 더 이상했다.메일 본문 아래엔 보충자료 목록이 짧게 정리돼 있었다.발표 자료 원본, 작업 파일 이력, 팀 메일, 현장 사진. 그리고 원 발표자 확인란에 지안 이름이 들어 있었다.재하가 보낸 자료에 지안 쪽 서명이 필요해서, 지난주 메일로 본인 확인 회신을 요청받았던 게 이거였다.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확인 버튼만 눌렀다. 거기다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최근 외부 공개자료 변동 및 출처 이슈 관련 참고 캡처 포함.지안은 그 문장까지 읽고 나서야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최근 외부 공개자료 변동. 출처 이슈.그러니까 윤재하는 단순히 예전 파일만 꺼낸 게 아니었다.지금 바깥에서 움직이는 것까지 붙여서, 이걸 현재형 문제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진짜였네."서연이 말했다.지안은 화면에서 눈을 못 뗀 채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8화 - 운영사무국

    "짜증 난다.""뭐가.""이제 와서 내가 생각하는 게 상처가 아니라 리스크라는 거."서연의 표정이 잠깐 풀려지는게 보였다."너 원래 그런 인간이잖아.""위로 진짜 드럽게 한다.""위로 아니고 확인이야."짧은 농담이었는데,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확인. 맞다.지금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라 확인이었다.지안은 회의실 유리 너머 사무실을 한번 봤다. 다들 평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그 평소가 더 불안했다. 평소 같은 얼굴로 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질문이 날아오는 게 회사니까."서연아.""왜.""혹시 벌써 회사 쪽으로 들어온 거 있냐?""확실한 건 아직."서연이 말끝을 줄였다."근데 그건 시간문제일 수도 있어."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장이 오늘 처음으로 현실적으로 들렸다.시간문제. 사고처럼 터지는 게 아니라, 일정표에 언젠가 올라올 항목처럼.***점심을 건너뛰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정문 옆 화단 턱에 걸터앉아 캔커피 하나를 땄다.바람이 좀 불었다. 사무실 안에선 못 느꼈는데 밖은 벌써 여름 냄새가 났다.아스팔트 위에서 올라오는 열기, 가로수 잎이 뒤집히는 소리, 점심 끝난 사람들이 천천히 건물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지안은 캔을 입에 대고 한 모금 마시면서 아까 서연이 말한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포폴 비공개, 출처 질문, 행사 라인. 전부 밖에서 돌아다니는 정보인데 정작 자기는 건물 안에 앉아서 맞은편 자리만 신경 쓰고 있었다.그게 갑자기 한심해졌다.커피는 금방 미지근해졌다. 지안은 반쯤 남은 캔을 쓰레기통에 넣고 일어났다.로비로 들어가기 전에 한 번만 더 하늘을 봤다. 파란 건 파랗고, 더운 건 더웠다. 어처구니없이 평범한 하루였다.오후는 유난히 바빴다. 클라이언트 수정안 뒤집혔고, 재하는 오전보다 더 말을 아꼈다.뭘 물으면 바로 답했지만, 거기서 한마디도 더 안 붙였다. 그게 편한지 불편한지도 이제 잘 모르겠었다.수정안을 넘기고 잠깐 숨 돌리는 사이에 태준이 자리 옆으로 왔다.수정안 관련인 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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