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숨이 먼저 바닥났다.
운설은 늙은 소나무 아래 멈추어 서서, 제 숨이 흰 짐승처럼 어둠 속으로 풀려나가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뒤돌아보면 성읍의 불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 덮인 능선만이 달빛을 받아 길게 누워 있었다.
바람이 잦아들자 들판은 소리를 모두 거두어들였다. 눈 위에 선 것은 그녀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켜진 것은 달 하나였다. 열여덟 해를 산 성읍이 하룻밤 사이에 지도에서 지워진 듯했다.
발이 시렸다. 신 안으로 들어온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어는 모양이었다. 운설은 그 감각을 붙들었다. 시린 발, 마른 목, 뛰느라 흐트러진 옷섶. 몸의 일들은 정직해서, 하나씩 짚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가라, 설아.
그 목소리는 그러나 몸보다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운설은 소매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지러진 달이 새겨진 쇠 패가 손끝에 닿았다. 한나절 품에서 데워졌던 쇠붙이는 어느새 밤의 온도로 식어 있었다. 패 곁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침통이 하나. 은침 여남은 대와 가위, 마른 지혈초 한 줌. 열여덟 해의 삶에서 그녀가 챙겨 나온 전부가 소매 한 짝에 다 들어 있었다.
의녀의 소매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일러 보았다. 언제든 불려 나가고, 언제든 떠나는 자리. 그러나 불려 나간 밤에는 돌아갈 문이 있었다. 문 안에는 화로가 있었고, 화로 위에는 약탕관이 있었다. 지금쯤 그 약은 다 졸아붙어 빈 그릇 바닥이 타고 있을 것이었다. 내일 아침 약을 받으러 올 노인의 기침 소리도, 이제 그녀와 상관없는 세상의 일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등이 자꾸 눈앞에 어렸다. 흰 무복들 한가운데 홀로 섰던 산맥. 그 산맥이 지금 어찌 되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검이 우는 소리를 등 뒤로 들으며 담을 넘은 딸에게, 그것을 알아볼 방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설아, 라고 그는 불렀다. 운설도 아니고 아가도 아닌, 처음 듣는 것처럼 낯설고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 익숙한 이름. 눈[雪]의 아이. 그 이름이 어디에서 왔는지, 노인이 죽으며 남긴 삭월이라는 말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녀는 아직 절반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가슴 안쪽 어딘가에, 그 밤 노인이 두고 간 무언가가 깊은 물밑의 돌처럼 가만히 가라앉아 있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것은 아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운설은 걷기 시작했다.
북. 낯선 사내가 일러 준 방향 하나가 이 밤의 유일한 길이었다. 어찌하여 쫓는 자가 쫓기는 자에게 길을 일러 주었는가. 어찌하여 무림맹의 검이 골목 한쪽으로 조용히 비켜섰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물음이 눈처럼 밟혔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그곳에 있소 — 낮고 서늘한 목소리는 창칼보다 오래 남는다더니, 과연 귓가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눈발 탓이라 하기에는 이상한 서늘함이어서, 운설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채 옷깃만 여몄다.
들판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낮은 구릉 사이로 접어들었다. 눈은 정강이까지 차올랐고, 한 걸음마다 몸이 조금씩 무거워졌다. 의원 문간에서 언 손을 녹이던 환자들이 생각났다. 손이 이 지경이 되도록 어찌 두셨습니까, 하고 타박하던 제 목소리도. 이제 그 문간은 없고, 타박해 줄 사람도 없이, 그녀의 손이 그 손들처럼 얼어 가고 있었다. 운설은 언 손을 입가에 대고 숨을 불어넣었다. 남의 손에는 수없이 해 준 일을 제 손에 하기는 처음이었다.
이상한 일은, 이만한 추위 속에서도 몸의 심지까지는 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한겨울 우물가에서 언 빨래를 하고 들어와도 그녀의 볼만은 트지 않았고, 살결은 붉어지는 법 없이 희기만 했다. 눈 속에 두고 봐도 눈에 안 진다고, 성읍 아낙들은 웃으며 별난 아이라 했다. 별나다는 말이 어느 밤부터 재앙이라는 말로 바뀌었을 뿐, 몸은 그대로였다. 이 몸이 어느 땅의 것인지 — 그 답도 북쪽에 있을 것이었다.
구릉 위에 올라선 운설은 저도 모르게 한 번, 남쪽을 돌아보았다.
능선 너머 어둠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불빛들이 점점이 돋아나고 있었다. 줄을 이루어, 눈 덮인 들을 가로질러, 이쪽으로.
바람결에 개 짖는 소리가 실려 왔다. 하나가 짖자 여럿이 따라 짖었다. 소리는 곧게, 눈이 미처 다 삼키지 못한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오고 있었다.
왕좌는 장터로 옮겨졌다.혈비가 앉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우물 유족과 성문 사람, 군사와 길 식솔이 둘러보도록 붉은 방석을 걷어 낸 채 놓았다.“오늘부터 이 자리에 한 사람을 앉히지 않겠다.”대신들이 울부짖었다. 황실군이 문앞에 있는데 왕위를 비우면 삭월은 그날로 끝난다고 했다.“내가 앉아 사람을 넘겨야만 이어지는 삭월이라면 이미 끝난 것이다.”“누가 군사를 막습니까?”“막을 사람을 함께 정한다.”혈비는 성문과 곡식, 약방, 군사의 일을 나눴다. 각 자리에는 우물 유족 한 사람과 기존 관리 한 사람, 장터에서 뽑힌 사람 하나가 함께 수결해야 했다. 급할 때는 먼저 움직이되 해 지기 전 까닭을 공개하게 했다.누가 평의 사람을 고를지를 두고도 다툼이 났다. 혈비가 고르면 왕의 신하가 이름만 바꾸는 셈이었다. 사람들은 성문마다 손바닥만 한 돌을 하나씩 나눠 갖고, 맡기고 싶은 사람 발치에 놓았다. 돌이 많다고 바로 앉히지 않았다. 당사자가 맡을 수 있는지 묻고, 반대하는 사람 까닭도 함께 들었다.빨래꾼 노파는 가장 많은 돌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글을 읽지 못해 장부를 맡기 어렵다고 했다. 묵할멈이 손짓으로 자신도 글을 못 읽지만 증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둘은 글 읽는 궁녀와 함께 우물 기록 자리에 앉았다.소맥의 아비는 군사를 맡지 않겠다고 했다. 분노한 자신이 황실 포로를 굶길 수 있다는 까닭이었다. 대신 우물 기록을 맡았다. 성문을 연 젊은 궁녀는 곡식 분배에 이름을 올렸다. 왕가 대신 하나도 남았지만 혼자 도장을 찍을 수 없었다.사백은 활을 평의 앞에 놓았다.“빌려주시겠습니까?”장터 사람들은 그가 먼저 황실 불화살을 쳐 낸 것을 보았다. 우물 유족은 과거 그 활에 죽은 이름도 들었다. 긴 말다툼 끝에 성문 방어에만 쓰고, 성 밖으로 화살을 보내려면 세 사람 동의를 받기로 했다.사백이 활을 다시 찼다. 이번에는 혈비 허락만으로 들 수 없는 무기였다.혈비는 왕관을 왕좌 위에 놓았다. 깨진 왕인과 어머니 밀지는 장터 여러 손을 거쳐 따로
불은 마른 약초부터 먹었다.월계단 아래 연기가 차오르자 운설은 하진 들것부터 밖으로 밀었다. 야란이 명부를 향해 돌아서자 운설이 팔을 잡았다.“몸부터 나가요.”“저 이름이 또 타면 묵할멈과 저만 기억합니다.”“사본이 있어요.”“사본에 없는 몸이 아래 있어요.”야란은 지하 약방 북쪽 벽을 가리켰다. 하진이 나온 우물 말고도 아이들이 옮겨진 배수로가 있었다.묵할멈이 젖은 천을 머리에 쓰고 불 속으로 들어갔다. 야란도 뒤따랐다. 운설은 막는 대신 두 사람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선우현과 사백이 밖에서 줄을 잡았다.혈비도 줄을 잡겠다고 했다. 야란이 허락할 때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안에서 밧줄이 한 번 울리자 운설이 물었다.“세 번째 자리에 언니 손을 보태도 됩니까?”두 번 당기는 답이 왔다. 혈비는 선우현 뒤에서 줄을 잡았다. 예전처럼 맨 앞을 차지하지 않고도 사람을 끌어낼 힘을 보탰다.“세 번 당기면 나옵니다.” 운설이 말했다.야란이 고개를 저었다.“세 번은 더 들어오라는 뜻으로 하죠. 나올 때는 제가 이름을 부르겠습니다.”이번에는 구조받는 사람이 신호를 정했다.지하 약방 안에서 묵할멈은 왕가 명부를 물통에 던졌다. 종이는 젖었지만 불길은 피했다. 야란은 북쪽 벽에 매달린 아홉 쇠패를 떼었다. 각 패 뒤에 약이 끝난 뒤 몸을 옮긴 곳이 새겨져 있었다.연기 속에서 늙은 사내가 나타났다. 우물 간수 복장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불붙은 횃불이 들려 있었다.묵할멈이 그를 알아봤다. 왕가가 무너진 뒤에도 겨울 궁 지하를 떠나지 않은 간수 마도였다. 하진의 쇠사슬을 당겨 맥을 확인한 사람도 그였다.야란이 물었다.“왜 살려 두었습니까?”“문을 열 명이 돌아올까 봐.”“왜 직접 열지 않았지요?”“나는 명이 있어야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마도는 횃불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황실 장수의 명을 받고 원본을 태우러 왔다. 평생 반대되는 명을 기다리며 자기 손을 남의 것으로 살았다.“지금은 누가 명했습니까?”“황실이.”“따를 겁니까?”마도
황실 북이 세 번 울렸으나 성문은 닫히지 않았다.겨울 궁 사람들은 칼 대신 장부 사본을 들고 네 문 밖으로 나갔다. 우물 이름 아홉, 황실 그릇 이름 열여덟, 달무리 부인의 밀지가 서로 다른 손에서 펼쳐졌다.황실 장수는 그들을 반란군이라 부르려 했다. 첫 줄에 선 이는 소맥의 아비였고, 다음은 작은 옷을 빨던 노파였다. 무기를 든 사람은 뒤로 물러나 있었다.“반란군 지휘자는 누구냐?”“없소.” 소맥의 아비가 답했다.“누구 명으로 나왔지?”“내 발로.”장수는 명령할 목이 없으면 협박할 목도 찾기 어려웠다. 혈비가 왕좌를 지키며 사람들을 내보냈다고 쓰려 했지만, 혈비는 왕관을 벗은 채 성문 안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다.황실 군사 하나가 사본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 지휘관이 창대로 손등을 쳤다.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자 바람이 장을 넘겼다. 군사는 열여덟 이름 가운데 자기 누이 이름을 보았다.“저건 거짓이다!” 지휘관이 외쳤다.“그럼 네 누이 살아 있는지 물어라.” 고윤이 포승줄 사이에서 말했다.군사의 창끝이 그에게 향했다. 고윤은 피하지 않고 누이를 옮긴 날짜와 약고 위치를 불렀다. 군사는 창을 놓지 못한 채 울기 시작했다.성 동쪽에서는 수레꾼들이 소금을 팔았다. 황실군의 은도 받았고 삭월 사람의 동전도 받았다. 군량을 나눠 군을 돕는다는 구실을 주지 않으려 값과 이름을 모두 적었다.황실 지휘관이 소금 수레 바퀴를 부수라고 했다. 수레꾼들은 자루를 등에 나눠 지고 걸었다. 말을 빼앗기면 작은 손수레로, 손수레도 막히면 앞치마와 소매에 한 줌씩 담았다. 길을 끊을 때마다 길의 주인이 더 잘게 나뉘었다.하란주는 흑마장 말의 편자를 벗겼다. 군마로 오해받지 않게 맨발로 성 안을 걷게 했다. 말발굽이 피가 나자 황실군 안 마부들이 몰래 짚을 내주었다. 적과 아군 사이보다 말을 아는 손 사이에서 먼저 길이 열렸다.연도하는 어느 수레에도 명을 내리지 않았다. 황실 기병이 수레 하나를 빼앗자 주인들이 저마다 다른 길로 흩어졌다. 미리 정해 둔 사람
네 성문이 열린 뒤에도 혈비는 빈 문서 앞에 앉아 있었다.황실이 내민 종이에는 왕명을 찍을 자리만 남았다. 그녀는 붓을 들어 맨 위의 삭월왕 세 글자를 지웠다.대신들이 숨을 삼켰다.“무엇을 쓰시려는 겁니까?”“내가 한 일.”혈비는 첫 줄에 효월을 썼다. 왕호도 성도 없는 어린 이름이었다. 여덟 살에 야란을 고르고 하진을 두고 온 일, 기억을 잃었다는 말로 월계단을 열지 않은 일, 왕이 된 뒤 묵할멈 침묵을 충성으로 받은 일을 차례로 적었다.사백은 여덟 살 선택까지 죄로 적지 말라고 했다. 소맥의 아비는 반대로 아이였다는 말을 함께 쓰면 변명이 된다고 했다. 혈비는 둘의 말을 한 줄씩 여백에 붙였다.“어느 쪽이 맞는지 제가 정해야 합니까?” 성문을 연 궁녀가 물었다.“아니다. 내가 한 일과 그대들이 본 것을 함께 남겨라.”혈비의 고백은 깨끗한 한 문장으로 끝나지 않았다. 죄라 부르는 사람과 강요받은 선택이라 부르는 사람의 글이 같은 종이 가장자리에서 부딪쳤다.“전하, 이 문서는 황실이 가져갑니다.”“그러니 더 적어야지.”“개인의 허물과 나라의 죄를 섞으시면 안 됩니다.”혈비가 붓을 멈췄다.“그 말로 왕들은 언제나 자기 손을 나라 뒤에 숨겼다.”그녀는 삭월왕이 된 뒤 우물 기록을 찾지 않은 일을 더했다. 무너진 나라를 세우느라 몰랐다는 까닭도 함께 적되 변명으로 앞세우지 않았다. 자기 선택과 알 수 없던 일을 다른 줄에 놓았다.하진은 두 걸음 밖에서 그 글을 지켜봤다. 야란 손바닥에 내 이름을 왕의 죄 아래에 쓰지 말라고 썼다. 혈비는 하진 이름을 지우고 빈칸을 남겼다. 당한 사람이 원할 때 자기 줄을 붙일 자리였다.황실 사자가 재촉했다.“수결 시각이 지났소. 왕인을 찍지 않으면 제안은 거둔다.”“거둬라.”혈비가 왕인을 집었다. 대신들이 막아서자 사백이 길을 열었다. 활 없이 두 팔만 벌리고 왕과 신하 사이에 섰다.“저분은 왕좌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이 외쳤다. “나라를 버리려는 것이다!”혈비는 망치를 들었다.“
성문 안쪽 빗장을 뽑은 것은 수레꾼들이었다.밤새 서쪽 길을 달려온 공동 소금길 수레가 문 앞에 늘어서 있었다. 설로상단 깃발은 없었다. 흑마장, 약재 창고, 길 식솔 모임의 작은 표식들이 수레마다 따로 걸렸다.연도하가 맨 앞 수레에서 내렸다. 왼손에는 장부, 불편한 오른손에는 고삐 한 줄만 들려 있었다. 하란주가 검은 말 위에서 그를 내려다봤다.“저 사람에게 지휘를 맡긴 적 없습니다.”문지기가 물었다.“그럼 누가 수레를 움직입니까?”“각 수레 주인이요.”연도하는 겨울 궁까지 오는 길과 황실군 빈틈을 설명했을 뿐, 어느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하지 않았다. 수레꾼들은 네 성문 앞에서 스스로 멈췄다.황실 장수가 성 밖에서 소리쳤다.“군량을 들이면 반역에 가담한 것으로 친다!”첫 수레의 늙은 마부가 소금자루를 열었다.“팔러 왔소.”“누구 허락으로?”“내 물건 파는 데 누구 허락이 필요하오?”수레에는 군량만 있지 않았다. 왕가 명부 사본과 황실 열여덟 이름이 소금자루 사이에 들어 있었다. 한 대를 붙잡으면 다른 문으로 세 대가 움직였다.혈비가 연도하를 왕좌 앞으로 부르려 했다. 그는 가지 않았다.“길 식솔들과 계산부터 끝내야 하오.”“왕명이면?”“그 말로 부르면 문밖에 있겠소.”혈비는 왕명을 거두고 장터 빈 상으로 내려왔다. 왕과 전 상단주가 사람들 사이에서 같은 장부를 들여다봤다.연도하는 성 안 창고 열쇠를 요구하지 않았다. 수레 주인들이 어느 집에 얼마를 내릴지 정하게 했다. 황실군에 가족이 징집된 사람에게도 곡식을 팔았다. 적군 가족이라는 까닭으로 굶기면 열린 성의 뜻이 첫날부터 거짓이 될 터였다.운설은 장터에서 그를 만났다. 연도하의 얼굴은 사흘 잠을 못 잔 사람처럼 거칠었다.“왔네요.”“내 길이 여기까지 닿았소.”“당신 길이요?”“벌써 틀렸군. 내가 함께 낸 길.”그가 웃었다. 오래전이면 운설이 웃어 준 한 번을 마음의 빚으로 적었을 사람이었다. 이제는 웃음이 지나가도록 두었다.“그대에게 남겨 달라던 한 치를 기
닫힌 문 너머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밤새 갈라졌다.운설은 그 문밖에서 돌아섰다.문 안에서는 대신들과 우물 유족이 밤새 다투고 있었다. 자신이 들어가 어느 한쪽 손을 잡으면 혈비가 그 온기를 답으로 삼을 것 같았다.선우현은 빈 겨울 처소에서 창문을 막고 있었다. 찬바람이 종이를 들썩일 때마다 못 대신 부러진 화살대를 끼웠다.“언니한테 안 갔어요.”“보았다.”“잘한 건지 모르겠어요.”“나도 모른다.”운설은 그의 등 뒤로 다가가 허리를 안았다. 선우현의 손이 창틀에서 멎었다.“도망가고 싶어요.”“나도 그렇다.”“같이 갈까요?”선우현은 뒤돌아 그녀 얼굴을 보았다.“지금 나가면 새벽 전에 산길에 닿을 수 있어.”운설은 그가 말뿐인 위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원하면 함께 갈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오래 망설였다.“단이 있는 집까지?”“그보다 멀리도.”“그리고 언니 소식은 평생 묻지 않고?”“네가 할 수 있다면.”운설이 이마를 그의 가슴에 댔다.“못 해요.”“나도 네가 못 할 줄 알았다.”“그런데 왜 끝까지 물어봐요?”“네가 남는 일이 내 명령이 되지 않게.”“당신이 가자고 했으면 잠깐은 원망했을 거예요.”“평생은?”“아마 따라가 놓고 매년 겨울마다 언니 탓을 했겠죠.”“그러면 나는 그 탓까지 들었을 거다.”“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마요.”“아무렇지 않지 않아.”선우현은 운설의 손을 자기 목에 댔다. 긴장할 때마다 굳는 맥이 손가락 아래에서 뛰었다. 그 역시 도망치자는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운설은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내일 성문이 닫히거나 황실 화살이 날아들 수 있었다. 마지막 밤처럼 굴지 않기로 했지만, 살아 있는 지금을 아껴 두고 싶지도 않았다.“오늘도 물어봐요.”“나와 함께 있겠느냐.”“오늘은 끝까지.”운설이 입맞춤으로 답했다. 선우현은 한 번 받아들인 뒤 그녀 뒷목을 감싸 더 깊이 끌어당겼다. 추위에 굳은 입술이 금세 뜨거워졌다.“하아…….”숨을 빼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