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운설은 곽주의 문서를 받지 않았다.“당신 계약이면 당신이 읽으세요.”곽주는 목을 가다듬고 첫 줄부터 읽었다. 소금 다섯 자루, 이자 두 자루, 겨울을 넘길 때마다 한 자루. 마지막 줄에 이르자 목소리가 작아졌다.마당에는 세 문에서 온 증인들이 앉아 있었다. 백지장의 류단은 종이를, 흑마장의 마부는 초란을 태운 길을, 구휼창 서기는 소금과 털천 값을 기록했다.곽주의 하인들은 선우현을 알아보고 병기에서 손을 뗐다. 선우현은 검도 위세도 빌리지 않았다. 문 안으로 들어오려면 칼집을 마당 끝에 놓으라고만 했다.“내 문서인데 왜 저들이 듣소?”곽주가 물었다.“당신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까지 계약에 불렀어요.”운설이 답했다.“그러니 그 사람을 지킬 증인도 들어야죠.”초란은 붉은 실을 손에 감고 앉았다. 기침이 올 때마다 묘선이 물을 건넸다. 누구도 그녀 대신 답하지 않았다.“채무자의 첫 자식을 노동 담보로—”“채무자가 누구죠?”“죽은 남편.”“첫 자식은 수결했나요?”곽주가 인상을 썼다.“아이가 어떻게 수결하오.”“못 하는 계약을 왜 했어요?”“아비에게 자식 권리가 있소.”초란의 손에 감긴 붉은 실이 떨렸다.한겸이 보낸 대리인은 죽은 자의 수결 날짜부터 짚었다. 장례를 치른 사흘 뒤 새 빚문서가 만들어졌으니 원계약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곽주는 원문서가 젖어 다시 썼을 뿐이라고 했다.유경이 종이를 등잔에 비추었다. 먹은 새것이었으나 종이 아래에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여종 한 명.원래 담보 칸에는 여종 한 명이 적혀 있었다. 곽주는 임신한 몸을 데려가다 죽일까 두려워 더 오래 쓸 수 있는 아이로 글자를 바꿨다.류단은 종이 아래 눌린 획을 숯가루로 떠냈다. 초란의 몸을 담보로 삼은 첫 문장과 아이를 삼은 둘째 문장이 한 장에 겹쳐 나타났다.“어느 쪽이면 괜찮았습니까?”현승이 물었다.곽주는 채무를 갚는 관습이라고 답했다.“관습은 누가 정했죠?”초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끊기지 않았다.“내 어머니도 빚으로 갔고, 나도
초란은 자기 이름을 소리 내 말하지 못했다.기침이 목을 막아서만은 아니었다. 누가 이름을 물으면 먼저 뒤를 돌아보는 버릇이 있었다.“초란이 맞아요?”아련이 묻자 여자는 붉은 실을 한 번 당겼다. 맞다는 표시였다.운설은 여덟째 문 안쪽 방에서 진맥했다. 초란의 맥은 지쳤으나 배 속 아이의 자리는 안정되어 보였다. 화로 연기를 피한 뒤 기침도 절반으로 줄었다.초란은 진료대에 눕지 않고 벽을 등지고 앉았다. 누우면 문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운설은 진료대를 돌리려 했으나 무거웠다.선우현이 들어와 말없이 방향을 바꿨다. 초란이 그의 흉터와 큰 몸을 보고 굳자 곧 문밖으로 물러났다.“저 사람은 누구예요?”“제 남편이에요.”“관청 사람 아니고요?”“예전에는 법의 이름으로 사람을 벤 적이 있어요. 지금은 문을 옮기고요.”운설은 좋은 부분만 말하지 않았다. 초란은 닫힌 문보다 반쯤 열린 문을 골랐다.진맥 뒤 운설은 초란에게 아이를 낳고 싶은지, 자기 몸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초란은 기침보다 잠이라고 했다.“꿈에서 누가 배에 값을 써요. 깨면 글자가 남았는지 먼저 봅니다.”운설은 약보다 먼저 밤번을 정했다. 누가 데리러 와도 초란을 깨우기 전에 묘선과 선우현을 거치게 했다.“피는 누구 것이었어요?”“같이 있던 아이 코피요.”“그 아이는요?”“흑마장에 남았어요. 저는 먼저 보내졌고.”초란은 자기가 왜 쫓기는지 한참 뒤에야 말했다.남편이 눈사태로 죽기 전 소금 다섯 자루 값을 빌렸다. 채권자는 빚문서 끝에 초란의 태중 아이를 담보로 넣었다. 아들이면 열다섯 해 일하고 딸이면 열두 살에 집안일로 들어간다는 조항이었다.초란은 그 빚을 갚으려 지난겨울 털천 열두 필을 짰다. 손가락 끝이 갈라져 피가 나면 검은 털을 골라 흔적을 감췄다. 곽주 창고는 천을 받으면서 원금이 남았다고 했다.“왜 도망쳤어요?”“아이가 딸이면 열두 살에 데리러 온다는 말을 들었어요.”“아들일 수도 있잖아요.”“그러면 열다섯 해라 했습니다.”
다음 날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운설은 진료 중에도 손을 배 위에 올렸고, 죽을 먹다가도 숟가락을 멈췄다. 기다리는 것을 들키기 싫어 손을 떼면 선우현이 그 자리를 보았다.“어제는 잘못 느낀 걸까요?”“방산파에게 물어보겠소.”“그분은 때가 되면 다시 온다고 할 거예요.”방산파는 실제로 같은 말을 했다.“처음에는 창호지 뒤 그림자 같아. 보았나 하면 없고, 잊으면 또 지나가지.”“아이는 괜찮고요?”“맥은 좋다. 네가 하루 종일 배를 누르는 것만 그만두면 더 좋겠어.”“누르면 아이가 싫어하나요?”“네 손이 먼저 아프지.”“그럼 어떻게 기다려요?”“손 말고 하루를 움직여.”방산파는 약방 문을 열어 환자 셋을 들여보냈다. 운설은 아이 움직임을 기다리던 손으로 상처를 씻고 맥을 짚었다. 다른 사람의 몸에 집중한 동안에는 배 안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잊었다.마지막 환자가 돌아갈 때 선우현은 방산파를 마당 끝까지 따라갔다.“정말 괜찮은 겁니까?”“아까 네 아내 앞에서 물어.”“운설이 더 걱정하오.”“네가 몰래 물으면 걱정이 없어져?”선우현은 대답하지 못했다.방산파는 그의 손바닥을 펴 배에 닿을 때 힘을 얼마나 빼야 하는지 알려 주었다. 고양이 새끼 등을 만지는 것보다 가볍게, 그러나 손이 도망가지 않을 만큼은 온전히 대라고 했다.“아이가 움직이지 않아도 실패한 게 아니야. 거기 있는 사람을 만지는 거지, 재주를 보라고 두드리는 게 아니니까.”그날 밤 선우현은 배에 손을 대기 전마다 운설에게 물었다. 운설은 두 번 허락했고 세 번째에는 졸리니 그냥 안고 자라고 했다.운설은 손을 등 뒤로 모았다.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다시 배 위로 돌아왔다.선우현은 묻지 않았다. 대신 밤마다 운설이 잠든 뒤에도 배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느끼고 싶은 마음보다 자기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운 눈이었다.사흘째 저녁, 두 사람은 아련과 빈 장부를 정리했다.연도하가 보낸 약길 보고에는 북관 세 가문이 토벌 청원을 거둔 일이 적혀 있었다
선우현은 끌려온 뒤에도 바로 입을 맞추지 않았다.운설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만 조금 더했다. 눈으로 다시 물었다.“후회하지 않아요.”“아직 아무것도 안 했소.”“그래서 먼저 말하는 거예요.”운설이 그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그제야 선우현의 숨이 무너졌다. 한 달 넘게 참은 입맞춤이 천천히 깊어졌다. 서두르지 않으려는 사람과 더는 기다리지 않으려는 사람이 서로의 호흡을 빼앗았다.운설은 그의 뒷목을 감았다. 선우현의 입술이 턱 아래로 내려오자 짧은 숨이 새었다.“하아… 현.”그가 곧 멈췄다.“아프오?”“아니요. 이름 부른 거예요.”“한 번 더.”“계속하면요.”“계속하려고 묻는 것이오.”운설은 웃다가 그의 입술을 다시 끌어당겼다.선우현의 손은 등 가운데에서 오래 머물렀다. 출혈이 있던 날 피 묻은 천을 보았던 손이었다. 그 기억과 지금의 온기가 한 손바닥 안에서 싸우는 듯했다.운설은 그 손등을 덮어 아래로 이끌었다.“지금은 괜찮아요.”“조금이라도 달라지면.”“먼저 말할게요.”“내가 못 들으면.”“당신은 제 숨 하나도 놓치지 않잖아요.”그 말이 선우현의 마지막 망설임을 누그러뜨렸다. 그는 운설을 눕히기 전에 베개 높이를 고치고, 물그릇을 손 닿는 곳으로 옮기고, 창을 반쯤 열었다.“지금도 환자 돌봐요?”“내 아내를 돌보는 중이오.”“그럼 의원 말 잘 들어요.”“오늘의 의원은 믿기 어렵군.”“왜요?”“자꾸 나를 부추기고 있소.”운설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끌어내렸다.옷고름은 운설이 먼저 풀었다. 선우현이 손을 보태려 하자 손등을 가볍게 쳤다.“오늘은 제가 제 몸을 알아요.”“모르는 것이 생기면.”“말할게요.”“참지 말고.”“당신도요.”등잔불 아래 두 사람의 흉터가 오래된 글씨처럼 드러났다. 선우현은 운설의 배 가까이에서는 손끝까지 느려졌다. 아직 작은 둥근 기색만 생긴 곳을 지나치지도, 아이의 자리로만 대하지도 않았다.그 손이 허리로 돌아오자 운설이 먼저 가까워졌다.“저 여기 있어요.”“보고
선우현은 그날도 이불을 한 채 더 폈다.같은 방 안이었으나 침상과 바닥 사이에는 팔 하나가 닿지 않는 거리가 생겼다. 출혈이 있던 날부터 그는 운설이 잠들면 아래로 내려갔다.“방산파 말 못 들었어요?”“들었소.”“그런데 왜 거기 누워요?”“바닥이 시원하오.”한여름 밤이었다. 침상보다 바닥이 시원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선우현은 더운 날에도 운설의 등에 팔을 두르고 자던 사람이었다.운설은 베개를 들고 내려갔다.“그럼 저도 여기서 잘게요.”선우현이 바로 일어났다.“허리에 좋지 않소.”“당신 허리는요?”“나는 괜찮소.”“또 그 말.”선우현은 출혈 뒤 운설에게 닿은 횟수를 장부에 적고 있었다. 계단에서 팔을 잡은 두 번, 잠든 이마를 짚은 한 번, 진료 뒤 부은 발을 주무른 한 번. 필요한 접촉만 남겨 두면 잘못이 생기지 않을 것처럼 셌다.운설은 그 장부를 펼쳤다.“입맞춤은 하나도 없네요.”“필요한 일 목록이오.”“저한테는 필요했는데.”선우현의 눈이 움직였다.“왜 말하지 않았소.”“당신이 겁내는데 어떻게 말해요.”“그대가 겁낼 때는 말하라 했지.”“당신 겁은 제가 모른 척해야 해요?”두 사람은 같은 장부로 서로를 지키려다 서로의 말을 기다리지 않은 것을 알았다.운설은 그의 가슴에 베개를 밀어 넣었다. 힘은 세지 않았으나 선우현이 한 걸음 물러났다.“제가 아프면 말하라고 장부에 썼죠.”“그렇소.”“당신은 무서우면요?”선우현이 대답하지 않았다.“문밖에서 기다리기만 할 거예요?”“그날 피를 보았소.”“저도 봤어요.”“내 손이 닿았다가 또—”그의 말이 거기서 끊겼다.운설은 선우현의 손을 잡아 제 손목에 놓았다. 맥을 짚는 자리는 정확했다. 무자각으로 하던 버릇이 이번에는 일부러 가까워지는 일이 되었다.“무엇이 들려요?”“빠른 맥.”“당신 것과 비교해 봐요.”운설이 그의 손을 자기 가슴 아래로 옮겼다. 옷감 너머에서 심장이 뛰었다. 선우현의 호흡이 얕아졌다.“운설.”“제 이름 부르면 겁이 없어져요?”
운설은 직접 갈 수 없다고 썼다.그 한 줄을 세 번 지우고 네 번째에 남겼다.나는 지금 먼 길을 갈 수 없습니다. 대신 당신 말을 끝까지 듣겠습니다.환자가 약을 거부할까 두려워 의원이라는 이름 뒤에 몸을 숨기고 싶었다. 가야 할 곳에 가는 사람이 좋은 의원이라 믿어 왔다. 이제는 가지 못하는 몸으로도 사람에게 닿는 법을 배워야 했다.편지를 받은 초란의 첫 답은 약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얼굴도 보지 않고 어떻게 압니까.운설은 화를 내지 않았다. 자기도 제 맥을 열두 번 보고서야 방산파에게 손목을 내밀었다.모릅니다. 그래서 다섯 가지를 묻습니다. 답을 듣고도 모르면 모른다고 다시 쓰겠습니다.두 번째 답에는 붉은 실이 한 번 묶여 왔다. 대답하겠다는 표시였다.방산파가 질문표를 살폈다.“말이 너무 많아. 열 오른 사람은 이것 다 못 읽어.”아련이 절반을 지웠다.숨 길이, 피의 빛, 배의 통증, 먹은 것, 마지막으로 편히 잔 때. 다섯 가지가 남았다.선우현은 약방 벽을 뜯지 않고 낮은 선반을 만들었다. 운설이 앉은 자리에서 약재를 고르고 편지를 쓸 수 있는 높이였다.“이건 저를 이 의자에 붙들어 두는 선반인가요?”“그대가 일어날 때마다 내가 따라 일어나는 꼴을 그만 보려는 것이오.”“당신 다리가 아파서요?”“내 마음이 먼저 아프오.”운설은 못마땅한 얼굴로도 선반을 썼다.연도하는 약갑을 싣고 떠났다. 각 칸 뚜껑에는 색실이 달렸다. 흰 실은 지금 먹을 약, 붉은 실은 피가 늘 때, 검은 실은 바로 다음 문으로 옮길 때 쓰는 약이었다.“다섯 날 뒤 답을 보내겠소.”“사흘이요.”“말이 쓰러지오.”“그럼 당신이 뛰어요.”“임신한 의원은 더 잔인해지는군.”선우현이 끼어들었다.“나흘로 합의하지.”“누구 편이에요?”“말 편이오.”연도하가 떠난 뒤 운설은 백로진 의원 셋을 불렀다. 색실 장부가 완전한 진맥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것부터 가르쳤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않고, 위험한 징후가 보이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움직이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