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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4화 — 검을 기억하는 몸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31 19:44:36

경례는 칼보다 빨랐다.

선우현이 궁 마구간을 지날 때 늙은 북방 병사 하나가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붙였다. 검신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쓰던 예였다. 옆 병사가 따라 했고, 말에 안장을 얹던 소년까지 어설프게 손을 올렸다.

선우현은 받지 않았다.

“나는 그대들의 장수가 아니오.”

늙은 병사가 주먹을 내리지 않았다.

“제 동생은 대협 명령을 받고 남쪽 협곡에서 죽었습니다.”

“내가 내린 명령이오?”

“대협의 인수가 찍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보았소?”

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을 못 본 사람에게도 원한은 남았고, 원한을 받을 진짜 얼굴은 눈앞에 있었다.

마구간 밖에서 깃발이 펄럭였다. 선우현의 옛 검 문양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오른발이 반 치 뒤로 밀리고, 빈손 엄지가 허리의 칼코등이를 밀려 했다. 없는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가슴이 차갑게 꺼졌다.

그의 손에는 지팡이뿐이었다.

선우현은 발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으나 종아리 근육이 한동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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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길에는 말이 백이십 필, 둘째 길에는 수레 서른 대, 셋째 길에는 선우현 한 사람이 있었다.혈비의 기병은 왕궁 북문을 열고 관도로 나갔다. 붉은 달 깃발을 숨기지 않았다. 가짜 선우현 군세가 북방을 침범했다면 왕실이 정면으로 맞선다는 표시였다. 사백은 기병을 열 줄로 나누되 앞줄마다 다른 뿔나팔을 쥐여 주었다. 멀리서 들으면 천 명이 움직이는 듯 울릴 터였다.연도하의 수레는 서쪽으로 향했다. 앞 열 대에는 약재를 싣고 뒤 스무 대는 비워 두었다. 적이 약을 태우려 달려들면 빈 수레가 흩어지고, 진짜 약수레는 얼어붙은 개울 위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하란주는 바퀴마다 천을 감아 소리를 죽였다.선우현의 소수대는 동쪽 산길로 들었다. 운설, 한겸, 남궁완과 북방 길잡이 모수까지 다섯이었다. 선우현이 더 적은 사람을 원했고, 혈비가 그보다 적게는 허락하지 않았다.세 길의 목적도 달랐다. 혈비는 침범한 군세를 꺾으려 했고, 연도하는 빼앗긴 길과 사람을 되찾으려 했다. 선우현은 자기 이름으로 내려진 다음 명령이 어디서 생기는지 찾아야 했다. 운설은 어느 목적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다친 사람이 나오는 곳으로 갈 뿐이라고 했다.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첫 신호가 왔다. 서쪽 하늘에 푸른 연기 두 줄. 연도하의 수레가 첫 검문소를 지나갔다는 뜻이었다. 곧 관도에서는 혈비의 뿔나팔이 세 번 울렸다. 적과 접촉했으나 전투는 시작하지 않았다는 신호였다.동쪽 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남궁완은 출발 전 받은 작은 동경으로 햇빛을 튕겼다. 서쪽 수레가 답하면 한 번, 관도 기병이 답하면 두 번이었다. 세 차례 신호를 보냈지만 산허리 어디에서도 빛이 돌아오지 않았다. 길이 갈라진 지 반나절 만에 서로의 생사를 알 수 없게 됐다.운설은 그 침묵을 메우려 사람들 숨소리를 들었다. 한겸은 오르막마다 왼발을 끌었고, 남궁완은 부채를 쥔 손을 옷소매 안에서 쉬었다. 모수는 갈림길이 나타나기도 전에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선우현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걷다가 남들이 보지 않을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325화 — 훔친 남편

    빈 침상 아래 젖은 장화 자국이 창문까지 이어졌다.선우현은 창으로 나갔고, 창틀 아래에는 지팡이 끝이 긁은 흠이 남아 있었다. 혼자 간 사람이 지팡이까지 들고 담을 넘었다. 운설은 화를 삼키지 않았다. 약낭을 메고 곧장 동쪽 문으로 갔다.경비는 연도하의 목패를 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언제 받았어요?”“상단주께서 해 질 무렵 두고 가셨습니다.”선우현이 떠나기도 전이었다. 연도하는 그가 무엇을 할지 알았고, 막지 않은 채 말과 문을 준비했다.운설은 눈길의 말발굽 자국을 따라갔다. 한 시진쯤 지나 폐쇄된 봉수대에서 검신 깃발이 불에 그을리고 있었다. 선우현은 불 옆에 앉아 천을 결대로 뜯었다.“잘 타요?”그가 고개를 들었다. 운설은 가까이 가서 그의 뺨을 때리지 않았다. 손등으로 이마부터 짚었다. 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깃발을 빼앗아 눈 위에 던졌다.“혼자 죽으면 편해요?”“죽으러 온 게 아니오.”“나한테 말하지 않고 담을 넘은 사람이 늘 그렇게 말했어.”“안에 옛 부대의 접는 법이 있었소. 누가 쓰는지 확인해야 했네.”“그래서 확인했어요?”선우현은 봉수대 벽을 가리켰다. 불에 데운 먹으로 그린 북쪽 진지가 있었다. 병력 이동 시간과 보급 횟수가 적혀 있었고, 한쪽에는 사람 키만 한 빈 윤곽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 깃발을 걸어 놓고 선우현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연습한 자리였다.“여기에 한 시진 먼저 사람이 있었소.”“그 사람을 쫓았고?”“놓쳤소.”봉수대 밖에는 말 한 필이 매여 있었지만 안장에 탄 흔적은 없었다. 선우현은 말을 미끼로 두고 끝까지 걸어서 올라왔다. 운설이 지팡이 촉의 얼음을 털자 새 쇠 가장자리가 반쯤 갈려 있었다.“얼마나 따라갔어요?”“삼 리.”“거짓말.”“오 리.”“당신은 내 앞에서 숫자 줄이는 버릇부터 고쳐.”“그대는 화나면 상처보다 거짓말을 먼저 찾는 버릇이 있소.”“상처는 도망가지 않아. 거짓말은 다음 거짓말을 낳고.”운설은 부은 무릎에 차가운 천을 대고 양옆을 나무판으로 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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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례는 칼보다 빨랐다.선우현이 궁 마구간을 지날 때 늙은 북방 병사 하나가 오른 주먹을 왼 가슴에 붙였다. 검신 휘하에 있던 사람들이 쓰던 예였다. 옆 병사가 따라 했고, 말에 안장을 얹던 소년까지 어설프게 손을 올렸다.선우현은 받지 않았다.“나는 그대들의 장수가 아니오.”늙은 병사가 주먹을 내리지 않았다.“제 동생은 대협 명령을 받고 남쪽 협곡에서 죽었습니다.”“내가 내린 명령이오?”“대협의 인수가 찍혀 있었습니다.”“얼굴을 보았소?”병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을 못 본 사람에게도 원한은 남았고, 원한을 받을 진짜 얼굴은 눈앞에 있었다.마구간 밖에서 깃발이 펄럭였다. 선우현의 옛 검 문양이었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오른발이 반 치 뒤로 밀리고, 빈손 엄지가 허리의 칼코등이를 밀려 했다. 없는 내공을 끌어올리려던 가슴이 차갑게 꺼졌다.그의 손에는 지팡이뿐이었다.선우현은 발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려 했으나 종아리 근육이 한동안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몸은 수백 번 되풀이한 살인의 순서를 기억했고, 머리는 그다음에 올 통증을 알고 있었다. 억지로 힘을 주자 옆구리의 오래된 상처가 당겼다.운설이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지만 다가오지 않았다. 도와 달라는 눈길을 보내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팔을 내밀면 선우현은 아무렇지 않은 척 더 오래 서 있을 터였다. 대신 마구간 소년에게 지팡이 끝의 쇠를 갈아 달라고 했다. 빙판에서 덜 미끄러지는 넓은 촉이었다.소년이 새 촉을 내밀자 선우현은 값을 치르려 했다.“경례값으로 받았습니다.”“나는 받지 않았는데.”“저희가 한 겁니다.”그는 끝내 지팡이를 받았다. 검을 들던 손으로 지팡이 무게를 재는 동안 마구간 병사들은 다시 경례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오래 따라왔다.병사의 눈길이 그 손으로 떨어졌다. 연민도 조롱도 없었다. 믿었던 형상이 어긋났을 때 생기는 빈자리만 있었다.“대협이 아니라면 누가 제 동생을 보낸 겁니까.”“찾아내겠소.”“찾은 뒤에는요?”선우현이 대답하려는 순간 혈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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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제322화 — 두 자매의 전쟁

    “저 글씨는 내가 썼다.”혈비는 깃발을 태우지 않았다. 겨울 궁 대전 바닥에 펼쳐 놓고, 자기 서명이 찍힌 마지막 획을 손톱으로 긁었다.반년 전 북방 장수들의 충성 맹세문에 써 준 글씨였다. 원문에는 설원 침입자를 적으로 선포한다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비단을 풀어 가운데 넉 자만 갈아 끼웠다. 실밥까지 왕실 침방 솜씨였다.“침방 궁인 스물셋을 가두어.”혈비의 명에 운설이 고개를 들었다.“바느질한 손과 시킨 입이 다를 수 있어.”“그러니 죽이지 않고 가두는 거다.”“스물셋을 한 방에 넣으면 진짜 수결자가 먼저 증인을 죽여.”대전의 장수들이 숨을 죽였다. 두 사람이 어릴 적 싸울 때와 달라진 점은, 이제 어느 쪽 말이 이겨도 누군가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었다.혈비는 궁인들을 셋씩 나누어 각기 다른 일을 시켰다. 찢어진 군복을 꿰매게 하고, 실 색을 고르게 하고, 같은 문양을 다시 뜨게 했다. 운설은 손가락의 굳은살과 손목 떨림을 보았다. 일곱째 조의 늙은 궁인이 검은 실만 닿으면 숨을 짧게 삼켰다.궁인의 소매에서 승검회 통행패가 나왔다.“손녀가 관도 남쪽에 있습니다.”그녀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깃발 하나를 만들면 데려다준다고 했습니다. 만들었습니다. 아직 못 봤습니다.”혈비는 통행패를 부러뜨렸다. 궁인을 가둘 대신 손녀가 붙잡힌 역참 위치를 물었다. 운설은 언니의 턱이 굳는 것을 보고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궁인의 손녀를 찾을 정찰조를 짜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방식은 부딪쳤다. 혈비는 역참을 포위해 한 사람씩 끌어내자고 했고, 운설은 약수레를 먼저 보내 안의 숫자와 상태를 보자고 했다. 포위가 들키면 인질이 죽고, 수레가 덫이면 의원이 죽었다.“이번에도 네가 들어가겠다고 하겠지.”“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적으니까.”“그래서 늘 네 목을 가장 값싼 패처럼 올려놓는다.”“언니는 다른 사람 목부터 올려놓고.”혈비가 탁자 모서리를 칼집으로 내리쳤다. 명단 위 먹물이 튀었다. 사백이 장수들을 물렸으나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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